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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묵상글 들. (주님 수난 성금요일 )
십자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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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이영근 신부님 강론. - 양주 올리베따노
요한 18, 1-19, 42(성 금요일); 십자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셨는가?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아침, 예수님께서는 최고의회에서 사형이 결의되고,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심문과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군사들과 군중의 숫한 조롱을 받으면서 낮 열두 시 쯤에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어 오후 세 시쯤에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아리마태아의 요셉에 의해 골고타 정원에 묻힙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적대자들의 무리는 네 부류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다른 동기로 예수님을 적대했습니다.
<첫째 집단>은 돈과 권력과 성전관리권을 지니고 로마인들과 협잡한 예루살렘의 고위층으로서 백성들에게도 평판이 나빴던 한나스 일가와 연결된 수석사제들과 사두가이 계열의 최고의회원들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지위와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둘째 집단>은 유식하고 진지한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로 형식주의와 자기네 위상에 대한 자만에 빠져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덕적 우월감, 외적 격식에 대한 집착, 서민들에 대한 멸시 등을 지탄하였기 때문에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집단>은 본시오 빌라도와 그의 병정들인데, 그들은 유다인들에 대한 강경 일변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유다인 의용대원들(열성당원, 성전혁명당원)과 격전을 벌려왔고, 예수님을 유다 해방운동가의 우두머리로 보고 있었습니다.
<넷째 집단>은 바로 해방운동가들이었는데, 그들이 원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어서 예수님을 줄곧 거절했고 바라빠와 같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추종했다.
이 네 집단에 있어서, 예수님은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의기투합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인 <성 금요일>은 그들의 선동과 증오, 비정함과 잔악함, 경악과 비참과 고통이 뒤엉긴 깊은 어둠이 빌라도 총독 관저와 골고타 골짜기를 메웁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암흑의 시간이 한편으로는 오히려 어둠이 쫓겨나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빛>의 표시는 예수님을 적대했던 <첫째 집단>에 속한 예루살렘의 부유한 고위층의 한 사람인 아리마태아 요셉의 결단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시신은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는 것이 통례였는데도, 그는 총독에게 청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십니다.
<두 번째 빛>은 예수님을 적대하던 <둘째 집단>에 속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니코데모로부터 비쳐옵니다. 그는 전례상 부정 탄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과 침향을 섞어 바르고 유다인들의 장례관습에 따라 향로와 함께 아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습니다.
<세 번째 빛>은 예수님을 적대하던 <셋째 그룹> 중의 한 명인 로마 백인대장을 비춥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고 고백합니다.
<네 번째 빛>은 역시 예수님을 적대하던 <넷째 그룹>에 속했던 예수님의 옆의 십자가에 박혀 있던 정치적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폭력을 쓰다 붙잡힌 ‘강도’에게서 빛납니다. 그는 “선생님, 당신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믿음을 고백하고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처럼, <성 금요일>은 어둠에 뒤덮여 있지만, 암담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암흑에 갇혀지지 않고, 새로운 빛을 비춥니다. 사실, 어둠이 빛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적대자들의 증오와 악의, 세상의 권세와 어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을 쳐 이겼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빛의 승리로 드러냅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의 가상칠언, 곧 십자가에서의 일곱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먼저 용서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배척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이웃들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러나 단지 그들을 용서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용서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음을 몸소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이는 결단코 절망이 아닙니다. 기도는 절망이 아니라 의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기시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십니다. 우리더러 섬기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에서는 이처럼, 섬기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너희 어머니이시다.”(요한 19,27)
그리고 우리에게 목말라하십니다. 섬기는 일에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말씀하십니다.
“목마르다.”(요한 19,28)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에서 용서와 화해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구원을 이루십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며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ki asá).”(요한 19,30)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로 시작되는 <시편> 22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전 생애를 통한 아버지를 향한 의탁은 십자가에서 승리로 마무리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성 금요일은 어둠의 날이 아니라 빛의 날인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과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예수님의 일곱 말씀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미 앞에서 대사제 가야파과 빌라도 총독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의 인정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요 왕’인 당신본연의 신원과 직무가 이제는 빌라도의 명에 의해 십자가에 새겨지고 백인대장의 입을 통해 고백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에서는 또 하나의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하느님의 어린 양”이심을 말해줍니다.
<탈출기>(12,46)에 따르면, 이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파스카 전날, 파스카 희생 제물로 바칠 양을 도살할 때, 뼈가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함께 처형된 다른 죄인들의 다리는 부러뜨려지지만, 예수님의 다리는 부러뜨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다리가 보전되었음은 예수님께서 파스카의 ‘어린 양’이심을 말해줍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 곧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경악할만한 ‘신비’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기쁨이요, 패배가 승리요, 어둠이 빛이요,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됩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심는 장소인 동시에 사랑을 선사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가 당신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임과 동시에 하느님 사랑의 표현방식이요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시는 방식입니다.
곧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요, 동시에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요, 완성된 사랑의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오늘 우리는 저 침묵, 깊은 신비 속에 완성되어 있는 십자가의 함성을 듣습니다.
그 사랑 깊은, 십자가의 신비스런 권능을 예배합니다. 또한 내 가슴에 고개를 묻고 상처 난 채, 깊은 고통으로 피 흘리시는 당신을 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동굴을 파고 가시관을 쓰신 채, 숨 가쁘게 부르는 호소를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가 아픔으로 몸살을 할 때, 내 가슴이 심하게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은수자 히에라르쿠스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밤새도록 끔직한 아픔과 유혹에 시달리다 못해, 주님께 가냘픈 목소리로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그러자 내면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미 네 안에 들어와 있다. 지금 나는 네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느니라.” 그는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하오나 만일 주님께서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계신다면, 제 가슴이 여전히 이토록 아려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잊고 있구나. 내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어져 있느니라.”(앤드류 마리아,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
그렇습니다. 내 가슴이 이토록 아려오는 것은 당신께서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채 말입니다.
공동체가 몸살에 떨고 있을 때, 당신께서 우리 안에 동굴을 파고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상처에서 젖을 먹이시느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가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수어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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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주님 수난 성금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오늘의 묵상
1884년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친구인 헨리 힐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때 우리는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깊은 슬픔에 익숙하다고 털어놓으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의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우리는 깜짝 놀라고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그분 부활의 신비가 희망과 함께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시련에
더 친밀함과 일치를 느낍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우리 믿음의 불씨를 지피며
사랑으로 마음을 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절인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찬 전례 없이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그리고 영성체 예식만 거행하면서,
날마다 보던 십자가도 가려져 있고, 제대보도 치워져 있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셨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결국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자신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주님 수난과 죽음에서 그분과 더욱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구대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말없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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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새벽을 열며. 주님 수난 성금요일. 빠다킹신부님
집착에 빠진 사람을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착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더군요.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누군가를 힘들게 만들고, 돈에 대한 집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지나친 명예욕으로 그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집착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면 열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집착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유럽 성지순례를 가서 르네상스 시대의 빛나는 예술 작품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등…. 이 작가들의 천재적 능력도 있었겠지만, 엄청난 집착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집착이라고 말하지 않고, 열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쁜 방향이 아닌, 바르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집착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쁜 집착이 아니라 좋은 집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 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주님의 기준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날이지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로 짊어지십니다. 고뇌와 고통으로 얼룩진 수난, 폭력적인 죽음은 인간적인 삶의 부정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고문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육체적 수난만이 주님을 아프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것, 그렇게 많은 사랑을 주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를 치는 군중의 은혜를 저버린 행동, 종교지도자들의 악의적인 모습 등은 정신적 수난도 절대로 적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십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십니다.
오로지 아버지 뜻에 따르려는 주님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인간을 위해서, 철저히 인간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아버지 뜻에 열정을 가지고 따르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 뜻보다는 내 뜻을, 즉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는 집착만을 내세워서 열정 없이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에 열정을 가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순간적인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십자가에 대한 열정만이 구원의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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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은 자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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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민중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노해 시인 ‘겨울 사랑’이라는 시입니다. ‘겨울’을 암울한 시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보이는 겨울, 고난과 시련의 겨울, 그러나 포옹하고 향기를 내고 그래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겨울입니다.
오늘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주님 죽음이 진정한 희망의 겨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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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우리는 오늘 주님의 수난 속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나다"(요한 18,5).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자 그분께서 대답하십니다. 이 응답은 두 차례 반복되지요. 그 의미는 좁게 보면 단순히 "너희가 찾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나다"라는 뜻이 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모세에게 밝히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홀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에 성자께서도 당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은 옳습니다.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요한 18,6.8).
서슬 시퍼렇게 기세등등해서 찾던 이가 스스로 자기 신분을 밝히시는데 오히려 그들이 두려워합니다. "나다"라는 말씀 안에서 신비적 위엄과 장엄함이 풍겨나오기 때문일 겁니다. 다가올 험한 시간에 대해 체념이 아니라 직면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고통과 죽음을 당당히 직면하는 이에게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습니다.
"나는 아니오"(요한 18,17.25).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의연하고 진실된 예수님의 답변과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기 신원을 부정합니다. 예수님과 달리 베드로는 고통과 죽음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운명과 추종자들의 몫에 대해 아직 깨닫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요한 18,28)
유다인들의 두려움입니다. 율법의 문자에 묶인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보다 율법이 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중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고수하느라 새 계약의 빵이신 분께 사형선고를 내리지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새 빵과 포도주를 맛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유다인들이 주장하는 예수님의 죄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성모독, 불경죄나 독성죄에 해당할 겁니다. 그런데 이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밝히신 까닭에 죽음을 겪으셔야 합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요한 19,23)
모욕과 조롱과 고난을 겪으신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십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고통이 연장되는 이 잔혹한 십자가형의 이유를 제1독서의 예언자는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5)고 전합니다. 제2독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경외심"(히브 5,7)과 "순종"(히브 5,8)이라는 단어로 이 과정을 요약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요한 19,25)
다행히 예수님 곁에는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기라성같은 제자들은 대부분 떠나고, 사랑하시는 제자와 여인들이 곁을 지킵니다.
성경 저자가 기록한 이름들 뒤로 저의 이름을 덧붙여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두려움과 송구스러움이 없지 않지만, 저 역시 그들 틈에서 사랑하는 분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분이 겪고 계신 고통의 이유가 저라는 걸 알기에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지만 그래도 머무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걷습니다. 성당에 갈 수 없어도, 혹 자가격리 중이어도, 심지어 병중에 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참여가 어려운 현실이지만,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지닌 개인적 실존에 맞게 우리를 당신 십자가 곁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경외심과 순종으로 따릅시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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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주님 수난 성금요일>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4-5)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8-9)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오늘은 교회 전례 안에서 미사가 없는, 곧 성찬전례가 없는 유일한 날입니다.
오늘 수난예식은 말씀전례와 십자가 경배예식과 영성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하루의 삶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밤에 잡히셨고, 금요일인 오늘 새벽 6시경에 사형선고 받으시고,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경에 돌아가시고, 오후 6시경에 무덤에 묻히셨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는 예수님의 이 마지막 하루의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기도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끝으로 숨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십자가 죽음임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표지, 부활의 표지, 생명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삶으로 십자가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배해야 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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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금요일
미국은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배울 수 없느냐고 했습니다. 빠른 검사와 신속한 대처능력을 배우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방역 시스템과 의료 시스템이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을 칭찬하는 뉴스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반 왓슨이라는 CNN 기자는 한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 방법을 체험하였고, 소개하였습니다. 일명 ‘드라이브스루(Drive through)’ 방식입니다.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은 차 안에 있으면서 의료진들에 의해 차례대로 검사를 받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이와 같은 검사방식은 안전하고, 신속하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의 검사방식을 도입한다고 합니다. 역시 한국을 칭찬하는 뉴스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각국의 의료진과 기자들이 인천공항의 방역 시스템을 보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출국하는 사람에 대한 검사와 입국하는 사람에 대한 검사가 철저했고, 안전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국경을 봉쇄하고, 입국을 제한하는 것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정보의 공유가 필요합니다. 철저한 출입국 관리가 이루어지면 굳이 문을 닫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을 닫으면서 발생하는 경제적인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으면서 인류의 지성과 문화도 닫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입과 감염에 대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고, 준수했습니다.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습니다. 감염병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직’입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보균자에 의해서 전파되기 때문에 감염자의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어렵습니다. 한국은 매일 바이러스의 확진과 경로를 공개하였습니다. 바이러스 전파를 차단하는 두 번째 방법은 신속한 검사입니다. 한국은 검사를 위한 진단 시약을 개발하였고, 검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신속하게 검사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확진자가 늘어났지만 더 많은 확진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검사를 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시민들이 자발적인 협조입니다. 강압적인 봉쇄와 격리를 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자가 격리를 하였고,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물건을 사재기 하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는 단순합니다. 결코 극복하지 못할 두려운 대상도 아닙니다. 가벼운 증상의 환자는 시설에 머물며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중중의 환자는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시민들의 협조가 없으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표징을 보여 주었고,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고, 앉은뱅이는 일어났고, 소경은 눈을 떴고, 귀머거리는 들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치유되었고, 중풍병자도 치유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었고,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였습니다.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는 곧 올 것이고, 복음은 세상 끝까지 전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졌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대사제입니다. 이들은 변화와 개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율법과 계명으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백성들의 소요를 원하지 않았던 빌라도 총독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로마의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여러 사람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해 대사제의 예언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득권에 편승한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자 중에 한명은 이미 은전 스무 닢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3번 피 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아직까지 자고 있던 제자들을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가야 할 길을 가셨습니다. 대사제 가야파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어두운 감옥에 홀로 갇혀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무서워서 도망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지만 백성들의 소요를 우려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야유를 보냈고, 조롱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성모님을 만났고,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십자가 아래에는 사랑하는 제자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오후 3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완벽한 승리로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책임을 모면하려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다락방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너머로 새로운 빛이 오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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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 -관상, 공부, 추종-
오늘 성삼일 두 번째 날 성금요일 우리는 주님 수난 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들에게 성삼일 동안 십자가를 관상하면서 복음을 읽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인 십자가안에서 용기와 힘, 그리고 희망을 지닐 것을 격려하셨고 결국은 하느님의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 바로 오늘 수난 성금요일은 물론 강론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우리 각자의 십자가도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수난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천국의 열쇠 역시 각자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듯이 십자가의 수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다’라는 아주 예전에 써놓은 시를 나눕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
세월속에 묻혀 뿌리로 사는거야
꽃사랑으로 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살이 고달플 때 꽃사랑 추억으로 갈증 축이며
하늘 사랑 꽃으로 피어날 그날 그리며
뿌리로 사는거야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1999.1.2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이임사 두 번째 말씀, “저는 십자가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에 대한 해명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떠날 수도 없고 떠나서도 안됩니다. 이어지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기이하게도 저의 사임 선언이 제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사임이 일종의 도피나 어떤 실제적인 압박으로부터의 피신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확신합니다. 거기에 실제적인 압박도 없었으며, 십자가로 향하게 하는 신앙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은 침묵의 고요 속에서 온 교회를 위해 기도에 집중하면서, 고통을 겪으시는 주님과 결합하여 머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임은 도피가 아니라 저의 봉사직에 충실히 머무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피해 갈 곳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어디에 가도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바라 보고 계시며 나와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런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을 ‘위대한 교황’이라 칭하며 하신 찬사의 말씀이 아름다워 인용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지성의 능력과 통찰력 때문에 위대했고, 신학에 대한 지대한 공헌 때문에 위대했으며, 교회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대했고, 자신의 성덕과 신앙심 때문에 위대했습니다. 그분의 정신은 세세대대로 항상 더 위대하고 더 강력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참으로 항구히, 묵묵히, 충실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위대한 두 교황을 지닌 우리 가톨릭 교회는 축복받은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주님의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십자가는 ‘하느님의 옥좌(the chair of God)’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할수록 각자의 내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가시는 십자가의 주님께서 끊임없이 힘을 북돋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인성녀들이 가신 하늘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첫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관상입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언제나 바라볼 관상의 대상은 십자가의 주님뿐입니다. 우리가 늘 향해야 할 눈길과 눈빛은 십자가의 주님뿐입니다. 이런 영원한 바라볼 관상의 대상인 십자가의 주님을 모신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종을 바라볼 것을 권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가신, 우리의 고통과 죄악을 짊어지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십자가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 지리라.”
참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볼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안정과 평화가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십자가 경배 예식시의 사제의 권고와 우리의 응답과 고백은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지요.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의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님의 십자가 경배하오며, 주님의 거룩하신 부활을 경축하오니, 십자나무 통해 온 세상에 구원이 왔나이다.”-
하여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늘 바라보며 경배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성전 제대 뒷면 중앙벽에 높이 달린 십자가의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힘차게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참으로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관상에 항구히 충실할 때 은총의 어좌로 나아갈 수 있고 필요할 때 주님의 자비와 은총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의 주님을 배우는 공부입니다.
사랑의 관상에 이어 사랑의 공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배우는 공부입니다. 어디서 배웁니까? 바로 십자가의 주님 아래에서입니다. 언제 어디나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자리는 십자가의 주님 아래입니다. 주님은 오늘 요한 수난 복음 후반부에 서 바로 우리의 자리를 알려 주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는 우리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는 바로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러니 우리가 우선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역시 평생 사랑을 보고 배워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셋째,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는 추종입니다.
사랑의 추종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랑의 추종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이뤄집니다. 평생 주님은 진리를 추종했고 진리에 순종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진리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충실히 따를 때 우리 또한 주님의 진리가 됩니다. 수난복음중 주님은 이를 명백히 밝히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요?”란 엉겁결의 물음이 우리에게는 평생화두가 됩니다. 우리는 확신을 지니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바로 진리다.”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서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하여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감격의 응답이 복음 환호송, 필리비서의 그리스도의 찬가입니다. 그대로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의 진리를 따라 ‘순종의 여정’에 항구했을 때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십자가의 주님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감사와 감동, 감격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니,
1.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관상합시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2.십자가의 주님을 배우며 공부합시다. 사랑의 공부입니다.
3.십자가의 주님을 따라 추종합시다. 사랑의 추종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제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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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주님 수난 성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십자가는 패배요, 절망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차마 피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쳤고 의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 양업 신부님은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하고 콜로사이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상에서 오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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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주님 수난 성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십자가 ♣
1)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배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십자가 수난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큰 사랑’을 드러낸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십자가 경배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겠다고 서약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서약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십자가 경배를 하고 돌아가서, 사랑 없는 이기적인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서약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2) 성금요일의 수난 예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사실 십자가는 고통, 희생, 죽음만을 상징하지 않고,
사랑, 구원, 부활, 생명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셨음을 경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만일에 부활 신앙 없이 예수님께 현세적인 복만 청한다면,
그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또 신앙의 기초는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과
‘나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합해진 신앙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생각하기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삶은 부활을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 박해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들과 고난들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인내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눈앞의 고통들과 고난들은 지나가는 일일 뿐이며,
그 끝에는 부활과 승리와 생명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를 통해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날마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부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3) 십자가 경배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드리는 일이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능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당신을 위해서 울어 주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 때문에’, 죄 많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경배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십자가 경배를 한다면,
십자가 경배 후에도 계속해서 죄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내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 1,6).”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1요한 1,10).”
오늘날에도 옛날의 바리사이들처럼
“나는 죄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주시는 속죄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 자신들이 받을 필요가 없다고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정말로, 원죄 말고는 죄가 없다면?
베들레헴의 아기 순교자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수도 있을 텐데,
원죄 말고는 정말로 죄가 없는지 아닌지는 자기 자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죄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위선자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서도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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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보며 꿋꿋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요한 복음 사가는 18장~19장을 통해 예수님의 체포에서부터 시작해 장례에 이르기까지
‘예수 수난 사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기 30년 4월 6일, 유다인 달력으로 니산달 13일 목요일 밤에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전 대사제이자 현직 대 사제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에게 끌려가셔서 예비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1차 심문을 끝낸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뒤, 현직 대사제인 카야파에게로 넘겨집니다.
심문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가야파는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므로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 최고 의회는 사형 언도나 집행의 권한이 없었으므로, 4월 7일 금요일 새벽, 실권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지중해에 접한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에 상주했지만,
가끔씩 예루살렘으로 와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오면 예루살렘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던 헤로데 궁전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이 가장 쾌적하고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4월 7일 금요일 새벽,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총독 관저로 압송당합니다.
예수님을 끌고온 유다인들은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이방인과 접촉하게 되면, 몸이 더러워져 파스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관저 안에 계신 예수님과 관저 밖에 몰려든 군중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심문도 하고, 유다인들과 대화를 이어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은 별 의미없는 대화로 여기고 일일이 응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메시아라는 자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계셨지만, 정치적인 차원이 아닌
신앙적 차원에서의 메시아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묵묵부답인 예수님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던 빌라도는 관저 밖에 모여든 유다인들에게 다가가서 ‘예수는 죄가 없으니 과절월 기념 특별 사면을 베풀겠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일제히 바라빠를 방면해달라고 외칩니다.
군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빌라도는 관저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께 채찍질을 하게 하고, 그분 머리 위에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유다인들은 채찍질을 할 때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 최대 39대만 때렸지만, 로마인들은 그런 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짐승 뼈나 쇠붙이를 박은 가죽 끈으로 인정사정없이 수백 수천대의 채찍질을 계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심문에 응하지 않자 빌라도는 은근히 자신의 직분을 뻐기면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나는 당신을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네가 위로부터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 답변의 요지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살리고 죽일 권한을 지닌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따라 에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연유로 빌라도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윽고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희생시키기로 작정하고 언도 공판을 시작합니다.
빌라도는 헤로데 궁전 앞 리토스트로토스하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가로 하는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돌 포장이 잘 된 광장’입니다.
거기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사형 언도를 내립니다.
요한 복음 사가에 따르면 그 날은 과월절 준비일, 니산달 14일 낮 열두시 쯤이었습니다.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열두시 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과월절 어린 양들이 도살 당하는 시간에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처형되신 것입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나스에게서 가야파로,
가야파에게서 빌라도에게로, 빌라도에게서 사형 집행인들의 손으로 넘겨지고 또 넘겨지셨습니다.
있을 수 없는 반역이며 악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느님만 바라보며, 우리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보며
꿋꿋이 당신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성 금요일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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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 만찬 성금요일]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진리란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하느님 자녀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더는 진리가 무엇인지 찾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우리나라 정식 첫 세례자는 1784년 북경 사신으로 갔다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1777년부터 시작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이끌던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주교와 사제직을 맡아가며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 보고 배우고 온 것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해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의 신앙을 전파했던 한국 초대교회 창설자들은 몇몇 유생의 고발로 사형에 처하게 되고 어떤 분들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북경 주교의 명령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대놓고 제사를 거부하여 1791년
그들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이 돼서야 겨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여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집을 옮겨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는데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발각되면
그를 모시던 회장들이 사제복장을 하고 관아에 끌려가 대신 순교를 함으로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3명의 회장이 순교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강완숙 골롬바가 6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주 신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강완숙 골롬바까지 잡혀가 문초를 당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만 없어지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혀가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이 생명을 부지하여 천주교가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날 밤, 주 신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양 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와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내가 주문모 신부요!’하고 자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때가 1801년 4월 19일이니 주문모 신부는 약 6년간 조선교회를 위해 일하셨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순교자가 됩니다.
그 후 33년 동안 사제가 없는 암흑의 신앙생활을 하고 모진 박해가 있었음에도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조: 김길수 강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주문모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 결혼도 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의 행복도 알고 허무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에서 편하게(?) 사목 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제’라는 정체성, 신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사제다.’라는 정체성을 목숨으로 지켜내신 것입니다.
요한의 수난기에서는 두 인물이 대비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임을 포기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이 두 인물을 대비하며 하느님 자녀로서의 신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 자녀는 십자가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라도에게 말씀해 주시려던 진리입니다.
유다인 입으로 이 진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하느님의 자녀로 자처하려면 죽어야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피 흘림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위대한 성인으로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訶川要産)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사 직전에 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구출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1909년 성탄절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고독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 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신조는 이것이라 합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피 흘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처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줍니다.
그러면 우리 살과 피가 이웃을 정화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페 1, 7)
사랑을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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