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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의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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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캘리, 그림 스크랩 10월묵주기도 성월/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성 레미지오 주교
호산 추천 0 조회 16 15.12.24 14: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성 레미지오 주교

 

http://cafe.daum.net/lcg420/H3MH/4046 

 

 

 

 

Virgin and Child with a Rosary-MURILLO, Bartolome Esteban

1650-55.Oil on canvas, 164 x 110 cm.Museo del Prado, Madrid

 

 

■성모 신심

성모 신심(信心) 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공경과 그 표현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합당하고 올바른 신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신앙 생활을 더욱 알차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바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성모 공경은 근본적으로 신(神)인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일체인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1. 묵주기도 성월의 유래

묵주기도 성월은 개인과 가정성화,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로,

묵주기도로 승리를 거둔 레판토 해전의 날(10월7일)을 기념하여 교황 비오 5세가 이 날을 묵주기도의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후 1883년 발표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수프레미 아포톨라투스』(Supremi Apostslatus)에 의해 10월이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되었다.

 

2. 묵주기도默珠祈禱 rosary 의 유래

묵주기도(로사리오rosario)의 뜻은 ‘장비꽃다발’혹은 ’장미 화관’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매괴’, 혹은 ’매괴 신공’이라고 했습니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교인들은 자기자신을 신(神)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꽃으로 역은 관을 쓰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져 신자들은 기도 대신 장미꽃을 봉헌하곤 했다.

 

특히 박해 당시 신자들은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에 끌려가 사자의 먹이가 될 때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썼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게 자신을 바치는데 합당한 예모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박해를 피한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면서 순교자들이 썼던 장미화관의 장미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가지씩 바쳤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시편 150편을 매일 외웠는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머리에 쓰는 관처럼 둥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며 기도의 횟수를 세었다고 한다.

 

이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편 대신 ‘주님의 기도’를 150번 바치기도 했으며,

수를 셀 때 불편하였기에 열매나 구슬을 150개를 노끈이나 가는줄에 꿰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습들이 묵주기도를 탄생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12세기에 삼종기도가 널리 보급되면서부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어져 주의 기도 대신 성모송을 50번이나 150번씩 외우기도 했는데,

이를 15단으로 나누어 성모 영보, 예수 성탄, 예수 부활, 예수 승천 등과 관련시켜 묵상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3세기부터는 영광송이 삽입되었다.

 

 

또한 이 당시 ‘알비파’이단의 세력이 교회를 위협하자

성모님이 도미니꼬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이단을 없애는 무기로 묵주를 주셨고,

성인은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알비파 이단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묵주기도’라는 정식명칭이 생겼고,(*성 도미니코 축일:8월8일.게시판1308번)

그후 15세기부터는 도미니꼬 수도회에 의해 전 세계로 퍼쳐 성모신심의 기도가 ‘매괴회’가 생길 정도로 공식화 된 기도가 되었다.

 

이 신심의 전파는 1830년 이후 성모님이 발현하여 묵주 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루르드(l858)·파티마(l9l7)·보랭(l932~l933)의 발현에서 묵주 기도를 특별히 권장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에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를 발표하고,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의 해’로 선포하여 특별히 이 기간에 묵주기도를 더욱 자주 바쳐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재위 24주년인 이날 발표한 교서에서 묵주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르면서

묵주기도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관상할 수 있는 탁월한 수단이며 평화와 가정을 위한 강력한 기도라고 강조했습니다.

교황은 특히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묵주기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의 다섯 가지 신비를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추가하고, 빛의 신비를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 사이에 바쳐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빛의 신비:인창동성당게시판1399번,721번 참조.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하며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감사드리고

우리도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비는 기도로서 우리를 예수님과 일치시켜주는 좋은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로 많은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성모님 곁에 앉아 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 사랑스런 말을 속삭이면서

성모님이 보여 주시는 그 신비들의 놀라운 장면들을 응시하며 언제나 새롭고 아름다운 그 정경들을 바라봅니다.

 

 

3. 묵주기도의 내용

묵주기도는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빛의 신비, 영광의 신비가 있다 4가지 신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2) 빛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3) 고통의신비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게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심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4) 영광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각 단의 신비 내용을 진정으로 묵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지향을 생각한다거나 성모송, 주님의 기도 등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향은 묵상 전에 세우고 생각해야지 묵상 중에 하면 역시 일종의 분심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암송하는 것은 이런 간단한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여 외움으로써 잡념을 쫓고 마음을 가라앉혀

기도와 묵상에 전념케 하려는 것이지 그 기도의 내용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묵주기도의 원칙은 15단(20단)을 모두 바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1/3도 ‘묵주기도’라 한다. 그래서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이 따라 온다.

① 묵주기도 15단의 1/3을 바치면 되지만, 5단을 계속 바쳐야 한다.

②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소리 내어 바쳐야 한다.

③ 공동으로 바칠 때는 지역에 따라 인정받는 구원의 신비를 알리는 기도문(구원의 기도)을 외워야 한다.

그러나 사적으로 바칠 때엔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으로 족하다.

 

 

■묵주기도 방법

1. 먼저 묵주의 십자가를 잡고 성호경을 한 다음,

십자가의 발 부분에 친구(입을 맞춤)하고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2. 다음 묵주알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3. 세 개의 알을 넘기며 각각 성모송을 합니다.

이 때 천주 성부의 지극히 거룩하신 딸 마리아, 천주 성자의 평생 동정이신 어머니이신 마리아, 천주 성령의 지극히 정결한 짝이신 마리아를 묵상합니다.

4. 다음 묵주알을 잡고는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구원을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5. 묵상 주제인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순서대로 묵주기도를 해 나갑니다.

6. 5단까지 다 끝나면 "성모 찬송"을 바치고 마침 성호경을 합니다.

 

묵주기도 중에서 7단으로 된 묵주가 있다. 이는 성모님의 칠고칠락을 묵상하면서 바치기 위한 것이다.

5단의 색이 각각인 5색 묵주는 각각 5대륙을 상징하며 세계 평화의 뜻을 나타낸다.

 

 

4. 묵주기도의 영성

묵주기도는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만약 묵주기도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라면,

왜 성모님 상(像) 중에 묵주를 들고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모님 상이 있겠는가?

 

만약기도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라면 성모님이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모습이 있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는 이야기는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깊숙이 묵상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예수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묵주기도는 오히려 성모님을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중심은 예수였고 성모님의 모든 것이 예수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묵주기도의 모든 묵상은 예수님을 향해야 한다.

 

 

5.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약속

① 1872년, “만일 네가 구원을 찾는다면 묵주기도를 전파하라”

② 묵주의 구일 기도 1884년,

“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간청의 뜻으로, 감사의 뜻으로 각각 세 번의 묵주기도를 9일간 할 것이다.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3*9 = 27 일 / 간청, 감사 27*2 = 54일)

③ 파티마의 기도(1917년 7월 13일)

“예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는 구원의 기도를 알려 주셨다.

④ 위대한 약속

1917년 파티마에서 루시아에게 발현하셨을 때 여섯 달 동안 계속하여

첫 토요일에 고해성사, 영성체, 묵주기도를 바치면 죽을 때 필요한 은총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묵주기도를 매일 바쳐야 하나요?

사제와 수도자들이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처럼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묵주기도는 작은 성무일도입니다. 다른 어떤 기도보다 단순한 기도인 묵주기도는 우리가 가는 곳 어디든 가지고 갈 수 있습니?

묵주기도는 우선 시간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의 좋은 점은 많이 있지만, 우선 하느님께 당신의 사랑을 단순하게 바쳐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하느님과 영혼을 일치시켜 줍니다.

 

 

■같은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어떤 이는 묵주기도가 별 의미도 없이 반복되는 기도일 뿐이라며 반대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반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기도문을 외운다고 해도 그 각 기도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묵주기도가 기계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묵주기도에 기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걷는 일은 단순히 기계적인 일이 아닙니다. 걸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탄복합니다.

마찬가지로 묵주기도의 기계적 요소는 신비 안에서 쉬고, 더 단순하게는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갖게 합니다.

처음에 묵주기도는 각 현의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비교적 피상적인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차츰 더 깊은 묵상에 들어가면서 기계적인 것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묵주기도의 현의는 어떻게 묵상해야 하나요?

묵주기도를 할 때 보통 열다섯 신비에 집중합니다.

기도하는 데에는 신비와 관련된 몇 마디 단순한 말이나, 상상 속에 떠오르는 그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묵주기도 한 꿰미는 하나의 화관이라고도 합니다.그러므로 전체 신비를 묵상하려면 세 개의 화관을 봉헌하게 됩니다.

묵주기도를 할 때 반드시 기도문을 외우는데 집중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묵주기도를 할 때 각 현의를 묵상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현의를 묵상하면서 당신이 머물고 싶은 현의의 장면에 자연스럽게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다가오는 장면을 머리에 그리며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가톨릭홈에서 http://www.catholic.or.kr

*바오로수도회에서 http://www.paolo.net

*바오로딸수도회에서 http://www.pauline.or.kr

 

 

 

 

■성모칠고(聖母七苦)의 로사리오

이 묵주 기도는 성모 통고(痛苦)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 한 번과 성모송 7번을 바칩니다.

성모 통고 신심은 6세기부터 동방교회에서 발전되었고,

15세기경에 7개 고통이라는 성모 칠고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The Seven Sorrows of the Virgin-DURER, Albrecht.

c.1496. Oil on panel,Alte Pinakothek,Munchen and Gemaldegalerie, Dresden

 

9월 15일 (게시판1365번)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Feast of Our Lady of Sorrows.

 

7개 성모의 고통

① 시므온의 예언(루가2,35) ② 이집트로의 피난(마태2,13-18) ③ 예수를 성전에서 잃음(루가2,41-50) ④ 예수 십자가를 짊(루가23,26-32)

⑤ 예수 십자가에서 죽음(루가23,44-46) ⑥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루가23,53) ⑦ 예수 무덤에 묻힘(루가23,53)입니다.

 

 

 

 

■The Franciscan crown .칠락묵주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7가지 기쁨을 찬미하기 위하여 1422년에 시작된 7단짜리 묵주기도(rosary).

이 묵주기도는 또한 ’천사적 로사리오’(seraphic rosary)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란치스꼬적 영성 안에서 성모께 대한 신심은 아주 열성적이다.이것은 프란치스꼬 영성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프란치스꼬적 영성이 그리스도 중심주의이기에 그에 따라 이 영성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주의와 성모 마리아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강생 구속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셨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루가 1,38)라는 대답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 대한 프란치스꼬적 영성은 자연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맛을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께 대한 우리 수도회의 기도는 대개가 찬미하는 기도이다. 이 찬미의 기도 중에서도 성모의 칠락은 가장 아름답고 전통적인 기도이다.

성모의 고통에 대한 신심보다 성모의 기쁨은 더 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서 느꼈던 여러 가지 기쁨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공경은 우리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칠락 로사리오 이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칠락 로사리오야말로 완전한 프란치스꼬적 기도이다.  

 

칠락묵주 기도의 기원  

이 칠락의 로사리오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보배로운 선물로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마리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칠락 로사리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성 프란치스꼬 잔 꽃송이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에 관한 사건의 이야기는 유명한 우리 수도회의 역사책에서 볼수 있다. 루까 와딩 (Luca Wadding) 신부가 쓴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연대기 (Annales Ordins minorum) 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신부님은 증명될 만한 고전자료와 전통을 철저히 검사한 후 이야기를 기술했기 때문에

이 칠락 로사리오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성을 지닌 믿을 수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루까 와딩 신부께서 기록한 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겠다.  

 

1442년 어느날 착하고 경건하며 성모 마리아에 대해 유달리 충성된스러운 한 청년이 우리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이 청년은 모범적인 가정에서 생활했고, 어릴 때부터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즉 날마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꽃을 모아서 엮은 화관으로 자기 집에 있는 성모상을 장식하곤 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 청년의 마음에 수도성소를 심어 주셨다.

이윽고 세라핌적 수도회에 입회한 이 청년은 완덕과 신심에 있어서 더욱더 진보하도록 꾸준히 노력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생활을 하는 도중 자신의 기쁨을 방해하는 일이 한 가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다름 아닌 수련소에서는 꽃으로 엮은 화관으로 성모상을 장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이 문제로 인해 고민을 하게 됐고 드디어는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세속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그가 이런 유혹에 빠지도록 가만히 계시지는 않았다.

그 청년이 결심한대로 수도원을 나가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성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였다.

 

이때 홀연히 성모님께서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세속에서 사는 동안 지금까지 실행하여 오던 방법으로 그대의 사랑을 나에게 표시하지 못함을 슬퍼할 것은 없다.

나는 네게 즉시 시들어 버리고 또 항상 구할 수도 없는 꽃보다도

더욱 더 아름다운 나의 칠락을 기억하는 기도와 거룩한 생각들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 새로운 화관을 어떻게 엮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다.

 

"제일 먼저 나의 칠락중에서 첫 기쁨을 기억하고 묵상한 다음에 주의 기도 한번과 성모송 열번을 바치고,

계속해서 칠락 중의 두 번째 기쁨을 기억하고 묵상한 다음에 주의 기도 한번과 성모송 열번을 ……

이렇게 계속해서 칠락의 일곱 번째 기쁨까지 기억하고 묵상한 다음 주의기도 한번과 성모송 열번씩을 바치면 된다" 고 하셨다.

우리가 로사리오 중에 기억해야 할 칠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천주의 모친으로 간선된 것을 대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줄 때 받으신 기쁨  

(2)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천주의 모친으로 인정받았을 때 느끼신 기쁨.  

(3)동정을 잃지 않고, 또 조금의 아픔도 겪지 않고 아들 예수을 낳아 모실 때 맛 본 무상의 행복.  

(4)아기 예수를 예배하기 위해서 세 동방박사가 찾아 왔을 때 느끼신 기쁨.  

(5)삼일간을 애통하게 찾아다니던 사랑하는 아들을 성전에서 찾아 만났을 때 만끽한 성모님의 기쁨.  

(6)죽음에서 부활한 아들을 보았을 때의 기쁨.  

(7)성모님이 충만한 영광중에 하늘에 올림을 받아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면류관을 받으셨을 때의 기쁨.  

 

청년에게 이와 같이 세세히 가르쳐 주신 성모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날마다 나의 칠락을 기억하고 이러한 기도를 바치면서 만든 이 화관은 네가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엮어 만든 화관보다 나를 훨씬 기쁘게 할 것이고,

네 자신을 위해서도 더욱 큰 은혜와 공덕의 바탕이 될 것이니 이 화관은 매일 나에게 바쳐 주기를 바란다."

 

그 착한 수련자는 기쁨에 충만하여 성모님의 가르침과 권고에 따라 그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칠락 로사리오를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그 청년에게 가르쳐 주신 아름다운 이 기도를 그 청년만을 위해서 비밀로 묻어두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도 알도록 허락하셨다.

어느날 수련장이 그 열심한 수련자가 혼자 방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수련자는 너무도 기도에 열중한 나머지 수련장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이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련장의 눈에 그 수련자의 곁에서 장미 꽃 열 송이마다 백합꽃 한 송이씩을 꽂아 꽃다발을 엮고 있는 천사가 보였던 것이다.

또 기도가 끝나자 그 천사는 그 화관으로 그 수련자의 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기적을 본 수련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기도를 끝낸 그 수련자에게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 수련자는 겸손하게 성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일을 이야기하였다.

수련장은 이 일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고 판단했고 이러한 이야기는 곧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졌으며

성모께 칠락 로사리오를 바치는 습관은 급속히 퍼져서 우리 프란치스꼬 1,2,3회에서 특히 좋아하는 신심의 하나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곱 번의 주의 기도와 칠십 번의 성모송만을 칠락을 묵상하면서 외우던 것이

나중에는 마리아께서 이 지상에 72년간 생존하셨다는 전설에 따라 성모송 두 번을 덧붙였고

또 끝으로 주의기도 성모송, 영광송, 한번씩을 교황의 의향을 위하여 바침으로서 칠락 로사리오를 끝내게 된다.

 

이와 같이 칠락 로사리오는 성모 마리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즉시 프란치스꼬 수도회 안에서 습관적인 것이 되었다.

이 기도는 특히 시에나의 성 베르디노와 가삐스뜨라노의 성요한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기도는 정말로 프란치스꼬적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성모 마리아 기쁨의 작은 성무일도라고도 불린다.

우리들도 이 칠락 로사리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날마다 이 기도를 바치는 습관을 지니도록 해야 하겠다.  

 

 

The Franciscan crown .칠락묵주 기도방법

 

시작기도(전송)

자비하신 동정 성모 마리아님.

이 칠락 묵주 기도를 합당하게 바치도록 저희의 입술과 마음을 정결케 하소서.

삼위이시고 한 분이신 하느님께 영광 드리며 교회와 조국과 세상의 평화와

연옥 영혼을 위하여 간구하옵고 예수 성심과 티 없으신 당신 성심의 모든 뜻에 저희 마음을 합치나이다. 아멘.  

 

 

제1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제2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제3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제4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동방박사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제5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되찾으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제6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제7락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중에 하늘에 올라 천상모후의 면류관을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기도.성모송 10번.영광송  

 

성모송 2번.

교황님의 뜻을 위하여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각 1번씩.

 

후송

거룩한 부인이요 여왕이시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동정녀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기뻐하소서.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간택하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협조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은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

 

천주의 궁전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장막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집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의복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여종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하며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감사드리고

우리도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비는 기도로서 우리를 예수님과 일치시켜주는 좋은 기도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묵주기도는 침묵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www.ofmconv.or.kr

 

 

 

 

 

축일:10월1일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St.THERESE of Lisieux

Santa Teresa di Gesu Bambino (di Lisieux) Vergine e dottore della Chiesa

Therese of the Child Jesus, the Little Flower, the Little Flower of Jesus

2 January 1873 at Alcon, Normandy, France

-7pm Thursday 30 September 1897 at Lisieux, France of tuberculosis

Teresa = cacciatrice, dal greco; oppure donna amabile e forte, dal tedesco

Emblema: Giglio, Rosa

roses; Discalced Carmelite nun holding a bunch of roses; nun with roses at her feet

Canonized : 17 May 1925 by Pope Pius XI

 

 

’작은 여왕’, ’소화데레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리우는 데레사 성녀는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과 젤리 궤렝의 딸로 태어났으며

그녀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 테레즈(1873-1897년)였다.

1888년 아직 어린 데레사는 노르망디의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이미 이곳에는 그녀의 두 언니도 수녀로 있었다.

 

9년 동안의 가르멜 생활은 다른 자매들과 견주어 볼 때 독특한 면은 거의 없고, 그저 평범한 생활이었다.

일상적인 기도와 일, 자만심에서 기인한 과오, 극복해야 했던 고집스런 성격 및 내외적인 갖가지 시련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 ’작은 길’을 용감하게 개척하며 전진해갔던 것이다.

 

데레사는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익히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 같은 덕행을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데레사 성녀는 죽기까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선교 지역에서 신앙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녀는 24세의 일기로 많은 고통을 당한 후 선종하였다.

1895년 초,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한 글을 쓰도록 지시를 받았고,

그후에 또 다른 생활 기록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한 영혼의 이야기’는 데레사가 비범한 한 거인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사실은 이 책이 리지외의 데레사 공경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녀는 1925년에 시성되었으며,

봉쇄구역 안에서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쇄신 그리고 선교지역을 위한 놀라운 기도로 지낸 생애를 기리기 위해

교회는 그녀를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모시고 특별한 공경을 드리고 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였으며 꿋꿋하고 위대한 영혼을 지녔다.

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오롯이 바쳤고,

그를 온통 휘감았던 어둠 가운데서도 순명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처음 각혈을 하였을 때,

주님과 만날 때가 다가왔다는 예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믿음과 희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897년 9월 30일 숨을 거두면서 말하였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랑 때문에 그토록 열렬한 선교 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알랑송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하였던 리지외 시절과

15세(1888년)에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기까지 줄곧 따른 "작은 길"은 참된 복을 향한 참으로 힘겨운 발걸음이었다.

겉으로는 맥없어 보일 수 있는 데레사의 삶에서,

우리는 아주 강한, 그러면서도 성령의 활동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타며 하느님 아버지를 발견하고 황홀해하는 한 영혼을 발견한다.

 

 

St.Therese of the child Jesus

and the the Holy Face.

 

 

데레사에게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날개를 펴 깃 뿌리에 어린 새끼들을 태워 데려가는"(신명 32,11) 독수리와 같은 분이시다.

데레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작은 길"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어머니 팔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음을 깨닫고,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자신을 내맡기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웃음짓는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녀의 자서전」에서

(안응렬 역, 1975년, 가톨릭 출판사 pp.229-230)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묵상할 때 이 간절한 원이 순교에 못지 않은 고통이 되어서,

무슨 대답을 찾을 양으로, 성 바울로의 서간집을 폈습니다.

고린토 전서 12장과 13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이가 한꺼번에 사도와 예언자와 학자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없다는 것,

교회는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눈은 동시에 손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답은 분명하였지마는, 제 원이 채워진 것은 아니었고, 평화가 온 것도 못되었습니다.

 

성녀 막달레나가 텅빈 무덤가에 앉아 줄곧 굽어보다가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을 발견 했던 것같이,

저도 제 허무의 깊은 속까지 저를 낮춤으로 몹시도 높이 올라가 제 목적에 다다르게 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실망치 않고 그대로 읽어 나가다가 이 구절에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사도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아무리 완전한 특은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지를 설명하시고,

천주께로 확실히 가기 위해서는 애덕이 가장 훌륭한 길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마침내 저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성교회의 신비체를 살펴보니, 성 바울로께서 설명하신 아무 지체에서도 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지체에서 저를 찾아 내고자 하였습니다.

 

 

“애덕”이 제 “성소”의 열쇠를 주었습니다.

저는 만일 교회가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다면,

모든 기관 중에 제일 필요하고 제일 귀한 것이 그에게는 없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지경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리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말로 말해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너무고 미칠 듯이 기쁜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오 제 사랑이신 예수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자리를 찾아냈습니다.

천주여, 이 자리를 제게 주신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제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모든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합니다.

사랑을 위해서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리지외의 봉쇄 수녀원에서 숨어 살던 갈멜 수녀인 예수 아기의 데레사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숨은 희생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영혼을 회개시켰던 것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성인들 가운데서 이 젊은 수녀보다 더 유명한 사람들은 얼마 안된다.

그녀의 자서전과도 같은 ’한 영혼의 이야기’는 전세계에서 읽혀지며 사랑을 받고 있다.

 

 

데레사 마르탱은 15세에 수녀원에 들어가 24세가 되던 1897년에 세상을 떠났다.

갈멜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평온 무사한 것이었고 주로 모든 집안 일을 하는 것이었다.

데레사는 시간을 구속한다는 거룩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시간은 따분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은밀한 고통 안에서 구원의 고통을 보았으며 그 고통은 참으로 그녀의 사도직이 되었다.

 

데레사는 "영혼을 구하고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하여 갈멜 수녀원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나는 지상에서 선행을 하면서 나의 천국에서 지내고 싶다."고 썼다.

 

 

데레사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소금’이라는 말과 그 이미지에 대하여 많이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위험하리만큼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되었고

성취욕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데레사는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을 하려 했으며 조용한 사랑의 행위로써 자신을 잊으려고 애썼다.

데레사는 우리가 생명을 잃으면 그 생명을 얻고,

땅에 떨어진 씨앗이 살기 위해서는 썩어야 한다는 복음적인 역설을 실지로 살아간 위대한 본보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현대인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동료들과 떼어 놓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리되게 만든다.

현대인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배워야 하며,

자신의 밖으로 자신을 끌어 낸 하느님을 관상하며 자신의 궁극적인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지닌 직관이며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일생 동안 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어렸을 때 데레사는 석 달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그 어려운 고비를 겪고 의식을 잃어 정신이 계속 희미했다.

그 후 그녀는 계속 허약했으나 그래도 수녀원의 식당과 세탁실에서 힘든 일을 했다.

데레사는 심리적으로 신앙의 빛이 모두 꺼진 것처럼 보이는 끝없는 어둠의 시기를 겪었다.

데레사는 그녀의 생명이 다해 가던 마지막 해에는 폐결핵으로 서서히 탈진되었다.

그래도 죽기 얼마 전인 9월 30일 그녀는 "아직도 나는 고통을 덜 받았다."고 중얼거렸다.

 

 

데레사는 참으로 장한 여인이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병과 고통을 하소연하며 운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을 아는 한 위인의 위대한 점이다.

허약함과 병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와 구원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연금술이기도 하다.

 

데레사가 선교의 수호자가 된 것에 대하여 이상한 점이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의 고통을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 이외에 누가 참으로 세상을 회개시키겠는가?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와 같이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의 경탄과 감동을 일으킨 성녀는 드물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공경은 얼마 안 가서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그녀는 불과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사후 단시일에 성인품에 오늘 분도 드물다.

 

그녀는 1873년에 태어나 1897년 9월 30일에 사망했으므로 현대의 성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출생지는 북 프랑스의 알랑송이다.

부모는 다같이 매우 신심이 두터웠으며 아홉 명의 아이를 낳기 전부터 하느님께 바쳤다.

데레사는 아홉명 중에서 막내로 어려서부터 경건했다.

이것은 그녀의 본래 성격 외에 양친의 훌륭한 표양을 본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겸손하고 양순하며 부모를 극진히 사랑했는데, 특히 아버지를 잘 따랐다.

 

 

그녀는 8세에 리지외에 있는 베네딕토회 소속인 학교에 들어가

그 기숙사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동료들 간에 모범이 되었다.

9세에 중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으나 동정 성모 마리아의 전구하심으로 완쾌되었다.

그 병실에는 성모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성상이 자기를 보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데레사는 15세 때에 리지와에 있는 가르멜회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승낙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예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조용한 수도원에서 일생을 주님께 바치고자 했었던 만큼 이러한 거절은 큰 슬픔을 주었다.

데레사는 아버지와 함께 로마에 순례 여행을 갔었는데 그녀는 지금의 나이로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교황께 청원하려고 햇다.

 

 

그러나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순례자 일동이 교황을 알현하고 교황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때였다.

순례자 각자는 교황의 반지에 친구하고 나오는 것이었는데

데레사는 자기 차례가 되자 용기를 내어

간단한 말로 자기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꼭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교황은 그런 일은 소속 교구 주교께 말씀드리라고 했으나 그녀는 되풀이하여 열심히 애원했다.

그러자 교황은 "딸아, 안심하여라. 하느님의 뜻이라면 꼭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하고 위로해 주었다.

귀국하자 데레사는 곧 주교께 편지를 보냈꼬 얼마 후에는 수녀원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수녀원장은 그녀를 시험하려고 다시 3개월 더 기다리라고 하며 돌려보냈다.

데레사에게는 크나큰 희생이었지만 참고 순명했다.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져 그녀가 동경하던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1888년 4월 9일이었다.

그때는 이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이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데레사를 수녀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어린 것을 떼어 놓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으랴!

그는 이미 세 명의 딸을 같은 수녀원에 보냈고 데레사까지 네 명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쓰라림을 잘 참았다.

그의 이 거룩한 희생은 훌륭하게 보답되었으니,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바친 막내딸이 위대한 성녀가 되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성인이 되려면 항상 분투 노력해야 한다.

데레사도 불굴의 노력과 무수한 시련을 겪고서 성역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의 고행과 희생에 대해서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잘 아시는 일이지만 사람의 눈에 뜨인것도 몇 가지 있다.

그러나 데레사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원장이나 동료 수녀들도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그녀의 성덕의 뛰어남을 깨닫게 된 때는 이미 데레사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는 어린이와 같은 완전한 순명의 덕을 배우기 위해 온갖 조력과 희생을 다했다.

어떠한 천한 일이든 이를 즐겨 하고 자기를 완전히 극복하는 그기의 덕을 닦기에 전심했다.

그녀는 본래 체질이 약해서 병에 걸리거나 혹은 불편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고 또 얼마나 분발심을 가지고 살았는가는 오직 하느님께서만이 아실 것이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열애하고 또 다른 사람도 뜨겁게 사랑하여 모든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사제들을 위하여, 특히 먼 지방에 가 있는 선교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오랜 중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한마디 불평 없이 참아 견디며 머나먼 지방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쳤다.

그러므로 이 훌륭한 선교사인 데레사를 교황께서 전 세계 신학교와 선교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정한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데레사는 사후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임종 때 "내가 천국에 가면 지상에 장미의 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였고 장미의 비는 은총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지 그녀는 천국에서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고 또 많은 죄인들을 회개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그녀는 1897년 선종하고, 1923년 시복, 1925년 영광스런 시성식을 받았다.

데레사를 공경하는 신심은 그 사후 즉시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원인은 데레사의 전구로 인해 많은 기적이 있었다는 것뿐 아니라 그녀의 훌륭한 덕망에도 기인한 것이다.

다만 하느님을 열애하는 마음에서 매일 매일의 자기의 본분,

더구나 사소한 일까지 빈틈 없이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이런 큰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Madonna del Rosario-CARAVAGGIO

1607.Oil on canvas, 364,5 x 249,5 cm.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성화는 카라바지오가 1605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시의 대공(大公)의 의뢰를 받고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고한다.

작품의 구도는 피라밋형을 이루고 있는 정형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풍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화면 상부에 배경의 일부로 되고 있는 커튼(빨간색)은 카라바지오 작품 구성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화면 좌측에 서 있는 수도자 좌.우의 손에는 묵주가 들려져 있고 눈동자가 성모님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묵주기도를 하라고 권고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옆에 무릎을 꿇고 수도자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귀풍의 인물은 이 작품의 기증자로 알려져 있다 .

 

성모님을 높은 곳에 자리잡아 중심을 두고 있는 이 장면의 인물들은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원을 형성하는 동세로 되어있다.

여기에 여러 인물들의 표정이 어우러져 극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빛의 신비(the mysteries of light)

교황님께서는 교서에서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의 해”(The Year of the Rosary)로 선포하셨으며,

“빛의 신비”(the mysteries of light)라 불리는 다섯 가지 신비,

곧 예수님의 요르단 강 세례, 가나 혼인 잔치 때 나타나심, 하느님 나라의 선포, 거룩한 변모 그리고 성체성사의 제정을 묵주기도에 추가하시고,

이 “빛의 신비”를 목요일에 묵상하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월요일과 토요일에, 고통의 신비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그리고 영광의 신비는 수요일과 주일에 묵상하도록 제안하신 것입니다.

*주간 묵상의 요일 배분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 순서로 하실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빛의 신비”라고 이름을 붙이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당신을 ‘빛의 신비’로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1단.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합시다.

2단.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때(첫번 표징)당신을 드러내심을 묵상합시다

3단.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4단.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묵상합시다

5단.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을 묵상합시다.

 

*묵주기도 "빛 의신비" 게시판72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축일 : 10월 1일

성 레미지오 주교

St. Remigius of Reims

San Remigio di Reims Vescovo

Apostle of the Franks

Laon (Francia), ca. 440 - Reims (Francia), ca. 533

c.438 - 13 January 533

Remigio = che sta al remo, rematore, dal latino

라옹의 에밀리우스 백작과 성녀 셀리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설교로 명성을 떨치던 459년에 라임스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2세였다. 그때부터 그는 7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프랑크족의 개종을 시도하였다.

496년, 북부 프랑스(골)의  클로비스왕이 그에 의하여 개종하므로써 북부 전역에 그리스도교회가 뿌리내리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레미지오는 열렬한 정통교회 수호자인 뿐만 아니라, 아리아파를 적극 몰아냈으며, 어느 아리아파 주교를 회개시킨 사례도 있다.

그는 프랑스(골) 역사상 가장 힘찬 주교였고, 프랑스인의 사도로 공경받고 있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

 

 

 

프랑스는 많은 성인들을 냈으나, 그 중에도 특별한 존경을 받고 있는 성인은 성 레미지오 주교일 것이다.

그는 최초로 프랑스의 국왕 클로비스를 영세시켜 가톨릭국이 되게 했다.

레미지오는 북 프랑스의 리옹 시의 근교에 사는 에밀리오와 그 부인 셀리나와의 아들이요, 3남 1녀 중의 막내다.

자녀들은 모두 부모의 열심을 본받아 훌륭하게 자라났는데,

그 중에도 레미지오는 이미 부모도 노년에 이르러 얻은 아들이므로 특별히 총애가 깊었고 고등교육까지 받았으며,

재주가 뛰어난 그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였으며, 또 신앙이 두텁고 열심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448년 렘 교구의 주교가 서거하자, 동 교구의 신자, 성직자들은 레미지오를 그 후임 주교로 추대했다.

당시 불과 20세였던 그는 여러 가지 구실로, 특히 연소함을 핑계로 백방으로 사양했으나 결국 부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주교 축성식 때에 그 머리 위로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고 한다.

이렇게 주교가 된 레미지오는 자신에 대하여는 매우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애정이 두터웠으며, 그 탁월한 지혜로써 담당 교구를 잘 다스렸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번 기적을 행하게 하셨는데, 그의 기도로써 맹인의 눈이 뜨이고 대 화제가 즉시 멈추었던 일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클로비스 왕을 개종시킨 것이다.

왕비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끊임없이 그에게 개종을 권했으나 그는 아직까지 개종하지 않았고, 또 그 나라 사람 대부분이 아직 가톨릭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게르만족(族)과 전쟁이 일어나 거의 패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왕은 충심으로 이렇게 기도를 했다.

"나의 아내 크로티르디스의 신이여! 나를 구해주소서. 그러면 당신을 믿겠나이다." 그러자 즉시 기도한 보람이 있어 마침내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3천 명의 신하와 함께 교리를 배워 496년 성탄 축일때에 다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날 온 시가는 극히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한층 화려하게 꾸며진 대성당에서 왕의 세례에 앞서 레미지오 주교는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머리를 숙여서 당신이 태워 버리신 분을 공경하고, 당신이 공경한 분을 태울지어다."

 

그 후 클로비스 왕은 신앙에 있어 매우 열심했으며, 레미지오 주교도 가끔 왕궁에 나가 왕의 신앙을 견고케 했다.

왕의 세례 이후에 교세(敎稅)는 현저한 발전을 보였으며, 그는 교회의 수도원을 다수 건립하고 새로운 교구도 증설했다.

 

그 후 레미지오가 북 유럽 제국의 교황 사절이 되면서부터

그의 활동은 한층 왕성해지고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기적을 행하여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는 96세의 고령에 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교에 노력하며 또한 교회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는 항상 애정이 두터우며 심지어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난을 받은 일조차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것은 분노를 위함이 아니오, 오직 구원을 위해서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시련을 면할 수 없었다. 즉 너무 연로하여 눈병을 앓고 앞을 못보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부자유함을 잘 인내하고 그 병을 하느님의 선물로 달갑게 받아들였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잠시동안 그의 건강은 회복되고 다시 앞을 볼수 있게 되었으나 하느님의 계시로

죽는 날을 알게 된 그는 그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선종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열심한 마음으로 미사 성제를 거행하고 주교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고 난 후

그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하느님의 품안에 맡겼다.

때는 533년 10월 1일이며, 나이는 96세, 주교 봉직 74년이었다.

 

 

프랑스 북서부 피카르디(Picardy) 지방 랑(Laon)의 에밀리우스(Aemilius) 백작과
성녀 칠리니아(Cilinia, 10월 21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레미기우스(또는 레미지오)는
수아송(Soissons)의 주교 성 프린치피우스(Principius, 9월 25일)의 형이다.
랭스에서 교육받은 성 레미기우스는 학식이 뛰어나고 성덕이 높았기 때문에
불과 22세인 459년에 랭스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7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프랑크족의 개종을 시도하였다.
496년 이교도인 북부 프랑스 지방의 왕 클로비스(Clovis)가 그에 의하여 개종함으로써,
북부 전역에 그리스도 교회가 뿌리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 레미기우스는 열렬한 정통교회 수호자일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파(Arianism)를
적극 몰아냈으며, 어느 아리우스파 주교를 회개시킨 사례도 있다.
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힘찬 주교였고, 프랑크족들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레오 9세는 1049년 성인의 유품들을 생 르미(Saint-Remi) 대수도원으로 옮겼다.
그는 레미(Lemi)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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