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맛을 잇는 명인의 고집
한국인이라면 순창 하면 고추장을, 고추장 하면 순창을 떠올릴 것이다.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순창은 마한시대 물이 맑은 고장이라 하여 옥천(玉川)이라고 불렸다. 물뿐 아니라 비옥한 전라도 땅에서 자란 재료와 자연환경을 고루 갖춰 맛있는 고추장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문옥례 명인은 300여 년간 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고추장맛을 지키며 순창을 고추장의 고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에게로 이어져온 손맛은 1962년 순창고추장상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화되었다. 그 이후로 전통 고추장 제조기능보유자 인증, 전통식품품질인증마크 등을 획득하고 맛과 품질을 인정받아 2010년에 대한민국 전통식품명인 36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고령의 나이로 현업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하지만 그 뒤를 3남 2녀중 막내아들인 조정현 전수자가 든든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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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옥례 명인과 조종현 전수자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라다 보니 특별한 계기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 길을 걷게 되었어요. 물론 요즘은 어머니가 고추장을 만들던 시대와는 작업환경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생산량이 많아지고 가짓수가 늘면서 현대적인 제조시설을 갖추게 되었죠. 하지만 전통적인 제조방식만큼은 고수하고 있습니다. 고추와 콩, 찹쌀 등은 계약 재배한 순창의 생산품을 사용해요. 믿을 수 있는 재료에 순창이 가진 천혜의 자연조건이 조화를 이루니 그 맛이 한결같지요.”
산 좋고 물 맑은 순창에서 만든 고추장은 검붉은 색깔과 은은한 향기, 먹고 돌아서면 또 생각나는 특유의 감칠맛이 특징이다. 매콤한 맛으로 입맛을 돋워주고, 얼큰한 맛으로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순창 고추장이야말로 우리네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힐링 푸드라 하겠다.
재료와 자연, 시간이 빚는 맛
순창 고추장의 맛은 좋은 재료의 조합에 달려 있다. 햇볕의 기운을 받아 빨갛게 잘 익은 고추와 품질 좋은 쌀, 메줏가루 등은 순창 지역의 생산품을 이용한다. 고춧가루만큼이나 중요한 소금은 전남 신안에서 공수해온 천일염을 쓴다. 문옥례 명인은 곧잘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게 무엇이냐?’ 하고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답은 소금이다. 명인의 지혜대로 소금은 사람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요소이고, 고추장뿐 아니라 장류의 맛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가을에 천일염을 구매해 3~5개월간 간수를 쏙 빼낸 다음 쓰는데, 이는 쓴맛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간수를 뺀 소금은 습기가 없어 고슬고슬하고 짠맛도 덜하다. 특이한 점은 재래간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전해진 방법인지 알 길은 없지만, 문옥례 명인은 반드시 직접 만든 재래간장을 넣어 감칠맛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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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린 찹쌀가루에 침지(우려냄)한 엿기름을 넣어 끓여서 당화액을 만드는 단계로 눌어붙지 않도록 간간이 저어준다.
고추장에서 짭조름한 맛이 난다는 평가는 바로 재래간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까다롭게 골라 준비한 재료는 고춧가루와 물이 23%씩, 찹쌀 21%, 메줏가루와 소금 10%씩, 엿기름 9%, 재래간장 4% 비율로 섞은 다음 최하 6개월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이것이 바로 문옥례 명인의 고추장 만드는 황금비율이라 할 수 있다.
고추장을 담는 과정은 찹쌀죽과 엿기름을 우리고 난 맑은 국물을 끓여 당화액을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당화액은 다른 재료와 버무리기 전에 충분히 식히는데, 그 이유는 고춧가루가 가진 비타민 C를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고추장이 잘 버무려지면 항아리에 담고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웃소금을 얹어 숙성시킨다. 항아리는 숨을 쉬는 소재이므로 바람이 잘 통하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보관해야 고추장이 맛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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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화액에 메줏가루, 고춧가루, 천일염, 재래간장 순으로 넣어 고루 섞이도록 버무린 뒤 6개월 이상 발효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고추장이 완성된다.
“순창만의 독특한 기후조건도 맛있는 고추장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곳은 연 평균온도가 13℃, 안개일수가 77일, 습도가 73%로 일교차가 커요. 즉 미생물의 발효를 돕는 효모가 살기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가진 환경인 거죠.”
순창 고추장은 담그는 시기 역시 타 지역과는 다르다. 음력 10월경에 메주를 쒀 이듬해 봄에 고추장을 담그는 타 지역과 달리, 순창은 음력 7월 처서 전후에 메주를 띄우고 음력 동짓달 중순부터 섣달 중순 사이에 담근다. 추운 날씨에 담가야 발효가 천천히 이루어져 온전한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추장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만큼 고생도 많으셨지요. 이제 제 역할은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입맛과 몸에 맞는 전통적인 고추장을 지켜가면서 당뇨병을 앓는 사람을 위한 보리고추장이나 소화에 도움을 주는 매실고추장 등 재료를 추가한 기능성 제품도 선보이고 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고추장의 참맛을 알게 해주는 게 제 바람입니다. 언제나 누구라도 와서 고추장을 만들어보는 체험공간을 마련해 그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