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재가 신도의 신행
우리는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요소로 교조 교리 교도가 있으며, 그중 교도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4부중을 이야기합니다. 깨달은 이 가우따마 붓다를 교조로 하고 가우따마의 가르침을 교리로 하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교도를 바웃다라고 합니다. 바웃다에는 전문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행자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비구 비구니와 같은 출가 수행자들은 승원에 머물며 승원의 일과에 따라 신행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온전히 유지하기가 아무래도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바새 우바이와 같은 재가의 신행자들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유지하며 신행할 수 있을까요. 교리를 신봉하는 것이지만 이 교리라는 것은 대체로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합니다.
가령 무아 무상 개고(皆苦)의 교리를 신봉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아에 집착하지 않고 바르게 삶을 바라보며 여여(如如)하게 진리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만일 절대적인 존재나 신을 신앙하는 종교인이라면 그 신에게 절대 복종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 신의 뜻은 절대적 가치라고 수용하며 신의 대행자 신부나 목사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상 무아를 신행하는 불교라면 어떨까요. 절대적 신을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절대적 가치는 무상 무아 개고하다는 것일 뿐일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 하는 이들이 절대적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 하는 이들도 절대 종교를 하는 이들 이상으로 종교적인 신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축원이나 기도를 보면 붓다는 절대적인 신의 자리에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붓다는 진리를 깨닫고 다른 이들도 붓다처럼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내해준 도사(導師)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불교도들은 그 붓다를 절대적인 존재로 신앙하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체는 자신의 의지[마음]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믿으면서 절대적인 존재자의 자리에 붓다를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가 길을 안내해준 안내자이지만 그의 안내 혹은 그를 따르면 우리들이 얻으려는 그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를 만나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안내자는 절대자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와 일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의 존재 원리나 붓다의 깨달음이 다르지 않음을 깨쳐서 하나 되는 순간 우리는 인식의 나, 몸에 한정된 나를 벗어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들도 기도를 하고 신행을 하게 됩니다.
다시 재가자의 신행으로 돌아갑시다. 재가자들은 어떻게 신행해야 할까요. 하루의 시작이나 중간이나 끝에 우리의 삶의 기준을 붓다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상하면 붓다에 예경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정 삼매에 계신 붓다에게 나모붓다야 하고 인사하며 청정수를 차로 변하게 하여 올리며 인사드립니다. 대사와 인사법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모붓다야’ 하고 붓다님께 일어났음을 알립니다. 청수를 올리며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라는 다게를 하고 ‘일심정례 삼계도사 석가모니불’하고 첫 절을 올리고, ‘일심정례 사생자부 석가모니불’ 하며 두 번째 절을 올리고, ‘일심정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하며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유원자비 수아정례’ 하며 고두례를 하고 일어납니다.
다음은 경전을 읽거나 정근을 하는데 저는 “옴 고통받는 중생들을 지혜로 안락하게 하고 정토에 들게 하는 저희들의 스승 붓다님께 귀명합니다” 하고 나모붓다야를 십념 이상 하고 “저희 가족 건강하고 저의 학문 이뤄지며 이웃들은 행복하고 외로운 이들은 안락하며 구경에는 불도를 이뤄지이다. 감” 하고 마칩니다.
각자의 우선 시급한 소원이 있을 테니 각자의 형편에 맞는 기도 정근과 축원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예경과 기도를 외울 수 있도록 간략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책을 보고 읽는 것은 경전을 읽을 때에만 하고 간단한 삼정례와 정근 개인기도를 암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야 집중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재가 불교 신도들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붓다의 명호를 칭명하고 오계를 지닐 것을 서원하며 붓다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서원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불자 바웃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짬 날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고 명상이나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볼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앉은뱅이 잇수 몰라 못 가냐”라는 속담처럼 방법을 몰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지 않아서 삶이 변화되거나 진화되지 못할 것입니다. 운명 개척은 가치관의 확립과 정진으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잘 살고 싶으면 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잘 살고자 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실천하는 바웃다를 그립니다. 그려야 그릴 수 있습니다. 꿈꾸지 않고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삶을 그릴 때 그런 삶이 다가올 것입니다.
나모붓다야 칭명해 보십시오. 붓다님께 절할 때나 벗을 만났을 때, 전화가 오면 나모붓다야 하고 전화를 받고 용건을 나누고 문자나 카톡을 할 때 나모붓다야 하고 용건을 쓰는 방법으로라도 기도해 보십시다. 틀림없이 가피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기본은 칭명입니다. 나모붓다야 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 붓다가 함께할 것입니다.
빠라미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