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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의인
제목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성경 : 갈 2:16
찬송 : 305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0062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저는 같은 본문으로 2015년 1월에 말씀을 강론한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누가 가짜인가?”였습니다. 오늘도 같은 본문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 이보순권사님께서 밭에 가셔서 풀을 뽑다가 그만 새끼손가락 인대가 끊어져서 전주 수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보통 힘줄이라고 하는 인대는 끊어지면 큰 장애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면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권사님도 손바닥을 많이 절개하고 수술을 하여 이제 손가락은 움직이는데 아직도 완벽하게 치료 되지 않아서 자녀들 집에 가서 계십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인대 하나만 끊어져도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관계가 어긋날 때입니다. 담임선생님과 관계가 어그러진 학생에게 학교는 지옥이 됩니다. 아내와 갈등이 있는 남편에게 집은 지옥이 됩니다. 선임병과 관계가 껄끄러운 신참병에게는 내무반은 지옥이 됩니다. 직장 상사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부하 직원에게는 일터가 지옥이 됩니다. 얼마 전에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의 갑질 때문에 견디다 못해 음성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 유서를 들어보니까 웬만한 사람은 버티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근무했던 경비실이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근무하다가 식사를 하려고 하면 그때 구속된 입주민이 찾아와서 폭행을 하고 위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관계가 어그러져도 삶이 지옥 같아지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삶은 지옥 같은 것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가 됩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부재(否在)가 지옥의 가장 정확한 정의입니다.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고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곳입니다. 제가 전에 부목사로 시무하던 교회가 전국교회에 유명한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엄청난 큰 분쟁에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아주 좋은 교회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을 세 번째로 모셔서 시무하고 계시는데 시무투표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둘로 나뉘어 서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교인들인데 이제 원수처럼 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적이 있습니까? 그때 느끼는 그 고통을 영원히 느끼는 곳이 지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지옥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 부담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 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왜 깨졌을까요?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성경의 용어로 “의(義)”라고 말합니다. 의(義)는 영생, 구원, 죄의 용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 등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개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핵심요소(核心要素)
복음의 핵심요소가 에베소서 2:1-10절에 다섯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의 다섯 가지 핵심 요소는 다섯 가지입니다.
➀죄 ➁하나님 ➂그리스도 ➃믿음 ➄구원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핵심 단어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복음의 핵심 요소입니다. 어떤 단어로 시작하든 이 다섯 단어를 이으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드러납니다.
지금 누군가 지옥에 살고 있는데, 기껏해야 “괜찮아, 살다보면 좋아질거야!”라고 말해준다면, 그 위로는 아무 도움도 못 되는 헛 언사에 불과합니다. 그냥 좋아지는 일은 없습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섯 가지를 다섯 손가락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1)의(구원)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일은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중대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는 단순히 부모가 사랑을 해서 생긴 부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머니의 태속에 신비로운 생명이 잉태되게 하심으로써 우리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욥 31:15 나를 태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맨 처음 인간을 지으신 그분이 여러분도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원리를 정한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만 바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우리가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혼돈스럽고 공허해집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벗어난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만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그것이 바로 ‘의(義)’입니다.
2)죄(罪)
그런데 왜 우리는 의(義)를 잃어버렸을까요? 그것을 설명하는 복음의 두 번째 개념이 바로 ‘죄(罪)’입니다. 죄는 한문으로 풀이해보면 넉 사(四) 밑에 아닐 비(非) 자가 합성된 것입니다. 네 가지가 아닌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네 가지가 파괴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이 바로 죄(罪)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므로 타인과, 자신과, 피조물과의 관계도 모두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DNA를 타고 태어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즉 죽음의 상태 있었습니다. 꽃이 뿌리에서 분리되면 이미 죽은 것과 같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여기에서 사망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3)하나님
하나님께 타협할 수 없는 두 가지 절대 속성이 있습니다. 이 둘은 절대 만나지 않습니다. 하나는 절대 공의(公義)로, 죄는 반드시 벌하셔야 하는 절대적인 의로움이고, 또 다른 속성은 절대 자비(慈悲)입니다. 하나님은 그 절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벌주실 수 없습니다.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그 형상의 흔적이 여러분과 제 안에도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할 때 가만히 내버려주자니 아이가 망가지겠고, 혼을 내자니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그런 딜레마가 하나님이 처하신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은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요?
4)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그 딜레마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인간을 디자인하신 바로 그 창조주이십니다. 그런 창조주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심으로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처녀 몸에 태어나신 이유는 인간의 원죄와 죄의 속성이 유전자를 통해 그분께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모든 형벌을 예수님께 쏟아 붓고 그 아들의 완벽하고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덧씌우셨습니다.
한문에 보면 ‘의(義)’가 아주 성경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의(義)’자는 양 양(羊)자 밑에 나 아(我)로 되어 있습니다. 의는 양 아래 나를 두는 것입니다. 나 아자는(我)는 (손 수) 손과 (창 과) 창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뒹굴다 죄 가운데 죽어서 죄 때문에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될 나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대신, 그 창으로 양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에 찔리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례 요한이 외쳤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의 중요한 질문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제사를 드리러 갈 때 아들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에 쓸 나무와 불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구약의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세례요한이 외친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5)믿음
마지막 단어는 믿음입니다. 이 단어를 절대로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이루어진 관계 정상화의 축복이 오늘 나의 의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 오늘 나의 주관적 사건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오직 믿음만이 그 사건을 나와 연결시키는 고리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통로로 예수님의 의(義)가 우리에게 흐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다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을 믿어야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답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 됩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고 나의 양심이 고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주십니다. 오직 믿는 마음으로만 나는 이 선물을 받습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이 그의 군대들 앞에서 거칠고 사나운 말고삐를 놓치고 말을 탄 채 큰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대열에서 뛰어나와 말고삐를 잡아 말을 제어하여 나폴레옹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병사에게 감사를 하면서 "고맙다. 대위"라고 말했습니다. 그 병사는 "그러나 폐하, 저는 대위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대위다. 내가 너를 대위로 임명했다"고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자기 대열로 가지 않고 장교들의 대열로 가서 서게 되었습니다. 장교들은 "야 병사, 자기 자리로 가!"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나는 대위다!" "누가 너를 대위로 임명했는가?" "저기 계신 나폴레옹 각하가 나를 대위로 임명했다." 모든 장교들은 입을 다물게 되었습니다. 일개 병사가 황제의 선포가 있었기에 그는 대위가 된 것입니다.의인으로 칭함은 이와 같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일개 병사를 대위로 임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내가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내 죄를 그분의 아들이 지은 것처럼 여기시고, 내가 의롭게 산 적이 없는데 그 아들이 한 것은 내가 한 것처럼 간주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를 의인으로 인정하고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신 사신 것을 믿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의인의식’(義人意識)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몇 퍼센트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요즘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니 한 85%쯤 쳐 줄까요? 말도 안 듣고 속도 썩이니 65%로 깎을까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내 아이는 말을 듣던 안 듣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아무 상관없이 100% 내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똑 같이 생각하십니다.
남자들이 예비군복을 입으면 ‘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비군복을 벗고 새 양복을 입으면 그렇게 행동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라는 자의식이 있는 사람은 죄 짓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습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의인이다’라는 의인의식이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을 의인으로 확신하는 사람만 의인다운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의인 의식으로만 우리는 죄의 집요한 유혹과 강력한 압력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신 의인이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날마다 하나님의 의를 내 삶으로 살아내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