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뉴스타임지 인문학 산책) 2023.08.16.
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4) --역사와 시(詩)의 함수
이민숙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A)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B)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원제:<용정의 노래>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1933년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 한다. 시인 윤동주가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 필자가 줄그어 표시한 부분은 작사를 했던 윤해영의 노래 구절이 아니라 용정에 발 디뎌 본 적 없었던 작곡자 조두남이 임의로 개사를 했다고 한다. 원래의 표현은 ‘눈물 젖은 보따리’(A)와 ‘흘러 흘러온 신세’(B)라고 한다. 어쨌든 그 시절의 용정과 만주, 우리 민족의 산천은 일제의 침탈에 먹을 것 입을 것 다 빼앗겨 눈물 젖은 보따리의 신세였던 것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그늘져있는데, 이 굴곡진 심리적 박탈감이 2023년 8월, 이 날 이 시각까지 이르렀다는 게 통탄할 뿐이다. 저 거친 꿈의 선구자들은 무덤에서조차 벌떡 일어나 구천을 헤맬 것만 같다. 가슴 깊이 사죄하는 아침이다.
여기에서, 시 읽기의 한 지혜는 역사의 사실과 원저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며 읽어나갈 것, 그리하여 창작의 진실성을 확보한 후의 시어 선택의 적절한 과정을 습작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적 상상력이 완성의 과정에서 중요하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에 있어서의 상상은 좀 더 비판적인 시각을 담보해야 하며 그 비판에 쓰이는 언어선택의 적절성도 사실이 담보된 후에라야 적확한 표현의 미를 구사할 수 있을 터!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윤동주/
엄연한 시절, 청춘의 시절, 윤동주의 시는 어둠 속 별이다. 사위는 깜깜 밤이나 시어가 가리키는 절실함이야말로 시에서의 가장 빛나는 절절함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는 용기와 함께 언어를 뱉는 순간에도 무서웠고 부끄러웠다. 그것은 ‘ 몸 둘 하늘’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더럽혀진 조국의 하늘 아래 찢겨진 민족의 영혼 곁에서 늘 시를 썼으나, 한 마디 결연하고 빛나는 시어를 직조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했다. 모든 시가 너무 쉽게 써져-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부끄럽다 하였다. 그의 부끄러움은 시 ‘서시’에 더욱 명징하게 표현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어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윤동주의 마지막 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온갖 생체실험의 혹독한 고통으로 시달리다가 29세 된 1945년 사망하고 말았던 윤동주, 역사의 오류요 인류 잔혹한 전쟁 놀음의 오류로 희생된 윤동주, 그의 영혼이 빚은 시들은 그러나 맑고 아름답다 아니 처절하다. 또한 결연하며 치열하다. 우리의 시정신이 탁류에 휩쓸릴 때, 헹궈야 할 때, 윤동주의 혼이 담긴 시야말로 읽고 또 사랑할 그런 시의 원류가 될 것이다. 시창작이란, 역사의 오류를 톺아가는 작업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질펀한 그 오류의 시기, 지금도 시의 본령은 우리 민족이 살았던 땅과 저 먼 바다를 관통하고 있다. 역사와 역사의 인물을 통해 시 창작을 실현할 작금의 과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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