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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라인홀트 메스너가 자기 생애에 대해 글을 쓴 것을 알았다. 그 책의 표제가 바로 <ÜBER LEBEN>, 영어로 말하면 ‘ON LIFE’이니 <나의 생애에 대해서>다. 나는 이 새로 나온 책을 펴들자 메스너의 마지막 책이라는 생각부터 앞섰다.
메스너는 1944년생이니 그가 칠순을 맞으며 이 책을 펴낸 셈인데, 지금까지 많은 책을 썼지만 그중 가장 돋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지난날의 책들은 거의 산행기였는데, 이번 것은 그런 산행기와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수상록이나 수필도 아니다. 메스너는 산행을 끝내면 으레 책을 쓰고 강연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마치 그의 강연을 듣는 기분이었다. 강연에는 그때마다 주제가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 나오는 70개 항에 걸친 작은 제목들 하나하나가 바로 강연 제목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메스너만큼 극한 세계에서 싸우고 살아온 사람도 없어
메스너는 알피니스트로 뛰어났을 정도가 아니라 세계 산악계에서도 보기 드문 존재다. 거기에는 남다른 글 솜씨도 한몫 한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글과 생각은 공학도가 아니라 철학도 같은 느낌을 준다. 등산은 원래 산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지지만, 메스너는 일반 등산가와 달리 자연과 인간관계를 보고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그의 인생론인 셈이다.
나는 긴 세월 등산세계에서 살아오며 역사적 인물과 그들의 책을 읽었으며, 메스너 책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겼다. 그러면서 나 자신 그에게 많은 것을 얻었다.
메스너의 인간성은 특이하다. 그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흔치 않다. 메스너의 산행기는 그런 인간이 살아온 이야기며 그것이 이번에 나온 책에 잘 나와 있다. 그는 ‘자기 결정’, ‘자기 책임’…… 식으로 ‘자기’를 강조한다. 남달리 한계 도전으로 일관했던 메스너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죽음의 지대에서 혼자 싸울 때 믿고 의지할 것은 ‘자기’뿐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메스너만큼 그런 극한 세계에서 싸우고 살아온 사람도 없다. 극한 등반에 나오는 ‘한계상황’이나 ‘죽음의 지대’라는 말은 메스너의 조어(造語)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등반 난이도 체계에서 제6급이라는 상한선을 없앤 것이 바로 메스너였다. 그의 책 <제7급>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은 산악계에 ‘익스트림 클라이밍’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메스너는 혼자 그 길을 갔다.
이번에 메스너가 쓴 책은 그 표제부터 이색적이다. ‘ÜBER LEBEN’ 자체는 흔한 표현이지만, 그 말이 ‘ÜBERLEBEN’(생존)이라는 낱말에서 왔다는 것이 흥미롭다. 독일어에는 언어의 희롱이 적지 않은데 그의 인생론 표제도 이런 말재주에서 왔다. 다시 말해서 ‘ÜBERLEBEN’이라는 낱말을 뗐다 붙였다 하며 그때 그때 전용하는 솜씨가 남다르다. 그리하여 메스너는 인생론을 낱말 하나를 ‘ÜB ERLEBEN’, ‘ÜBERLEBEN’, ‘ÜBER LEBEN’ 셋으로 전개했다.
메스너는 일찍이 히말라야 자이언트 14개봉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완등하고 그 체험기를 <ÜBERLEBD>(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 김성진 역)로 내놓았다. 말 그대로 한계 상황인 죽음의 지대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는 1970년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참가하면서부터 극한세계에 뛰어들었다. 그 뒤 히말라야 고산군을 비롯해서 남극과 북극 등 극지 탐험에 몽골 고비사막까지 뚫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성취해 알피니즘 역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으며 이어서 낭가파르바트(8,125m)를 알파인 스타일로 6일 만에 등정했다. 이로써 ‘한 인간과 8,000미터’라는 참신한 등산 개념과 과제를 세계 등반계에 내놓았다. 그의 인생론은 그렇게 살아온 밑에 깔린 그의 감정이며 의식인 셈이다.
나는 인생을 지식과 체험의 누적 과정으로 보며, 산악인은 등산세계에서 바로 그 과정을 밟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핀치가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했지만, 그 이상 가는 말을 나는 등산에서 찾지 못한다. 나도 등산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말을 전용해서 “산악인은 생활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등산은 여가 선용이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며, 생활의 연장이고 생활 자체라는 이야기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경우는 어떤가. 그에게 등산은 바로 인생이었으며, 등산을 빼면 인생이 없었다. 그는 평생 직업이 없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의 긴 생애에서 잠깐 색다른 시기가 있었다면 유럽의회의 국회의원이었다는 것이나, 그는 그 임기가 끝나자 바로 몽골 고비사막으로 가버렸다. 또한 고향에서 산악농부 생활을 했지만 그것이 그의 직업은 아니었다.
역사상 뛰어났던 등산가는 보통 단명(短命)했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토록 거칠고 험한 길에서 살아나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메스너가 자기 생애를 써나가며 그 주제를 ‘생존’으로 한 뜻도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이 책을 메스너의 마지막 책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 있다. 물론 그는 앞으로도 글을 쓰겠지만 그것은 필경 수상이나 수필일 것이며, 그의 인생론은 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메스너가 칠순을 맞으며 70개 항에 걸쳐 내놓은 이번 책은 결코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 형식논리가 아니며, 더구나 교육적이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그의 주제 전개가 산만하지 않고 난잡하지도 않은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 체험의 소산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 그 속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셔브룸1봉 도전 때 이야기며, 히말라야 고봉 무산소 도전, 리카르도 카신을 대장으로 했던 이탈리아 로체 남벽 시등 등은 그 자체가 축소된 등반기면서 독특한 뉘앙스를 안겨 준다. 그것은 메스너의 남다른 인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산에 가는 사람은 많아도 자기 체험기를 남기는 사람은 적다. 그리고 등산가로 인생론을 쓴 사람은 거의 없다. 메스너는 명실 공히 세계 최강의 알피니스트다. 그런데 그는 주변에 적지 않은 적을 가지고 있다.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의 질투와 불만에서 온 것이겠으나 메스너 자신은 그들과 정면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이 메스너의 명성을 헐뜯어도 그가 이룩한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철인도 끝내 자신의 감정은 넘어서지 못해
메스너는 자기만을 믿다 보니 신(神)을 믿지 않았으며, 자기 일을 운명에 맡기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전했지만 끝내 감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생 귄터를 잃었을 때의 고난과 시련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그처럼 절박했던 당시의 이야기가 짧게 압축된 글로 이 책 ‘죽음’에 나온다. 카오스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길을 뚫고 나갈 때 으레 뒤에서 오리라고 믿었던 동생 귄터가 보이지 않아 그는 오던 길을 돌아갔다. 그때 그를 엄습한 회의와 공포와 절망은 제3자는 결코 모른다. 당시 메스너는 산악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을뿐더러 히말라야 고봉과 처음 부딪친 처지였다. 그러나 그때를 기점으로 오늘의 메스너가 만들어졌다.
과거는 누구에게나 조용한 회상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메스너에게는 그것과 다르며 끝까지 자기를 괴롭혀 왔다. 그가 살아오며 넘은 숱한 산과 고개에서 1970년의 낭가파르바트만큼 힘든 길은 없었다. 그러나 강철 같은 철인 등산가도 어려서 형제들과 겨울 산행하던 때를 잊지 못하고 있다. 얼어붙은 물을 찾아내서 산장에서 그 물로 따끈한 커피를 끓이고 굳은 빵조각으로 얼고 지친 몸을 녹이던 이야기를 칠순의 노등산가가 그의 인생론 한구석에 남기고 있다.
* 김영도 1924년생. 1976~1980년 제7대 대한산악연맹 회장,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 1978년 한국북극탐험대장, 한국등산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을 썼고, <검은 고독 흰 고독>, <제7급>, <8000미터의 위와 아래>, <죽음의 지대>, <내 생애의 산들>을 번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