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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사랑안에 머물며
형제애로 피조물인
서로에게 기쁨과 감사함이 되어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01. 모임 일시 및 장소
ㅇ일시 : 2023년 10월 28일 (토) 오전 9시
ㅇ장소 :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안)
02. 코스 :
혜화역 ○---○ 창경궁 ○---○ 창덕궁 ○---○ 인정문 ○---○
화정당 ○---○ 대조대○---○ 연경당 ○---○ 옥류천
※ 상황에 따라서 코스가 조정. 단축될수도 있습니다.
※ 구간 거리 ; 약 3km
※ 소요시간 ; 약 2~3 시간
03.준비물
- (경)등산화. 식수. 기부금 1,000원
04.난이도 : " 하 "
05.진행자 : 이재전프란치스코
010~4224~1965
06.참가댓글
○ 참가번호/성명,세례명/하고 싶은 말씀
예) 참가1/ㅇㅇㅇ 세례명 ○○ ○ / 자연의 찬미와 함께~~
창경궁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도 불렸으며
종묘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다른
동향 배치로 왕실의 별궁으로 쓰였습니다.
2. 역사
태종(조선)이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에 여기로 거처를 옮겼고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하였습니다.
단종도 수양대군에게 양위 후 여기로 옮겼다가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쫓겨났습니다
성종 15년(1484)에 마침내 할머니 자성왕대비 윤씨,
어머니 인수대비 한씨, 숙모[4] 인혜대비 한씨를 모시려
확장해 붙인 이름이 바로 창경궁입니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 된다고 해요.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구요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해 이듬해 11월 마무리됐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었습니다.
창경궁은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 왕조가 기울고 순종(조선) 즉위 후 급속히 변형돼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구요.
1909년 일제가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전각들을 헐고, 일본식 건물을 세워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등
유원지로 조성하였어요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어요.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습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습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어요.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습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습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해 건설이 미뤄져 순종 사망 후인 1932년에 도로가 났다. 해당 도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9년 종묘 복원 계획을 세우고 박원순 시장이 이어받아 2022년 완공을 봤다. 이것이 바로 율곡터널입니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고.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시켜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해 건설이 미뤄져 순종 사망 후인 1932년에 도로가 났다. 해당 도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9년 종묘 복원 계획을 세우고 박원순 시장이 이어받아 2022년 완공을 봤다. 이것이 바로 율곡터널입니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고.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시켜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습니다
※ 조선 시대
1418년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이라고 해요
이후 세조 대에는 단종의 영월 유배 후 비어있었으나,
세조는 죽기 며칠 전 수강궁으로 이동해 며칠 후 사망하였고,
예종도 수강궁에서 즉위했다.
성종 10년(1479) 수렴청정 중단 후 자성왕대비가
스스로 인수대비와 함께 수강궁으로 이어했는데,
성종이 세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자성왕대비, 생모이자 대비인 인수대비, 제8대 예종의 계비인 숙모 인혜대비를 모시기 위해 1483년~14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해,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으로 이름을 고쳐지었다.
다만 자성왕대비는 온양행궁에서 중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창경궁의 완성은 보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설,
선조의 몽진 후 한양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민중들에 의해
방화된 것 아닌가 하는 설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군 종군승의 일기 기록에 왕궁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이는 선조가 대피한 후 왜군이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반면 종묘의 경우 왜군에 의해 불에 탄것이 확실하며,
민중이 불태웠다는 기록은 풍문이 그렇다더라 정도이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전해져요
광해군 7년 때 중건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 비해 쓰임새가 대폭 커져 여러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어요.
국민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 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난리통에도 명정전, 문정전, 여휘당, 환취정 등 일부 전각이 살아남았기에 인조 11년 인정전 하나만 남아있던 창덕궁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제19대 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제21대 영조 때는 휘령전(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쌀담는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만에 요절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제22대 정조가 1800년 6월 영춘헌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창덕궁
창덕궁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는,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왕자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합니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창덕궁은 1411년(태종 11)에 조성한 진선문(進善門)과 금천교, 1412년에 건립한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 이어 여러 전각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세조(世祖)는 즉위하면서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궐의 각 전각 명칭을 새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덕궁 역시 다른 궁과 더불어
잿더미로 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궁궐의 재건은 엄두도 못내다가 1605년(선조 38)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1609년(광해군 원년) 10월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다.
인정전 야경
인정문
보물. 인정문은 1405년(태종5)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는데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이 문에서 조선 후기 여러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전
국보.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중층으로 세워진 건물로 내부는 위 · 아래층이 통칸으로 트여 있다. '인정'은 '어진 정치'를 펼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낙선재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그 동쪽에는 낙선재와 건립 시기가 비슷한 석복헌(錫福軒, 1848년 8월 11일 중수)이 있으며,
다시 그 동쪽으로 182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강재(壽康齋, 1848년 8월 11일 중수)가 있는데,
이 건물들이 위치한 영역을 합하여 일반적으로 낙선재라고 부릅니다.
낙선재는 왕이, 석복헌은 왕비가, 수강재는 대비가 거처하던 곳입니다. 낙선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침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의 평면 형식에서 벗어나, 온돌과 마루를 생활 방식과 기능에 맞게 구성한 점에서 돋보인다.
1836년 건립된 낙선재는 해방 후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여생을 보낸 곳이고, 영친왕과
그의 비 이방자 여사가 이곳에서 생활하다 타계하였다.
이외에도 낙선재는 다양한 외관과 창호 형식,
그리고 후원의 계단식 화단이 빼어납니다
선정전
선정전은 평소 임금이 신하와 국가의 일상 업무를 논하던 편전이다. 선정전은 인정전 동쪽에 인정전과 평행하게 남향하고 있는데, 이는 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이 정전인 근정전의 북쪽에 배치된 예와는 다른 형식이다. 선정전은 인조반정 때 불에 탄 후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이건하여 지은 건물이다. 지붕은 푸른색 유리기와를 덮었는데, 유일하게 궁궐에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이다.
보물. 지붕에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올린 집으로 유명한 선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던 편전이다.
선정전의 동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맨 앞에 희정당이 있고, 그 뒤로 대조전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景薰閣)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대조전 뒤쪽에는 장대석을 사용하여 경사지를 몇 개의 단으로 꾸민 화계(花階)가 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
희정당
희정당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17년에 내전이 소실되어,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복구한 것이다.
『동궐도(東闕圖)』에 보이는 희정당은 정면 5칸 규모의
건물이 높은 돌기둥 위에 서 있고, 기단 서쪽 한 곳에는
아궁이가 보이며, 건물 동쪽에는 연못이 있습니다..
대조전
보물. 왕비의 침전으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습니다.
'대조'란 '크게 만든다'는 뜻을 가졌는데, 왕업을 계승할 왕자가 이곳에서 탄생해야 하였기에 붙인 이름입니다
대조전 후원
대조전 후원은 경사진 언덕을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화계를 조성한 뒤, 그 사이에 계단을 설치하고 굴뚝을 쌓았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1847년(헌종 13)에 낙선당 옛터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6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李芳子) 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하였다.
주합루 일곽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주합루 일곽의 모습은 가장 두드러진다. 이곳에 서면 모든 건물은 정원의 일부이고, 정원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을 느낀다.
창덕궁에서 후원의 입구인 소양문(小陽門, 지금은 없어짐)을 지나 숲으로 싸인 언덕길을 넘으면 앞이 트인 분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부터 구체적으로 후원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그 속의 정자나 건물들의 조성 면에서 우리나라 건축의 특성을 알 수 있는 배치 기법과 자연을 이용하는 법식(法式)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용지(芙蓉池)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부용지(芙蓉池) 일곽의 모습은
가장 두드러집니다. 부용지 일곽에 있는 모든 건물은 정원의 일부이고, 정원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이다. 건물과 정원과 자연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체되어 있다. 부용지 서쪽으로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있고, 남쪽으로는 부용정(芙蓉亭)이 물 위에 반쯤 떠 있다. 부용정 건너 북쪽 산등성이 마루턱 넓은 터에는 다락집인 주합루가 남쪽을 향해 우뚝 서 있고, 그 앞 경사지는 꽃을 심은 여러 단의 화계로 조성되었다. 이곳으로 오르는 첫 단에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이 있는데, 이 문을 지나 사방으로 난간을 두른 주합루에 서면 부용정과 연못은 물론, 주위 경관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정조(正祖)는 실학(實學)으로 팽배한 유능한 신하들을 위하여 주합루 아래층을 규장각이라 하여 수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주합루는 우주의 모든 이치를 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게 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합루 남쪽 아래에 있는, 사방이 네모난 못인 부용지 속에는 둥글게 생긴 작은 섬 위로 잘생긴 늙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을 나타낸다.
연경당
당시의 사대부집 형식으로 지었다는 연경당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가묘가 없고, 안채에 부엌을 두지 않은 점이 일반 사대부집과 다르다.
연경당 서쪽에서 발원하여 앞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인 명당수를 건너, 솟을대문인 장락문을 통해 행랑 마당으로 들어간다. 마당 북쪽에 동·서쪽으로 두 개의 중문이 있는데, 동쪽의 장양문(長陽門)은 사랑채로, 서쪽의 수인문(脩仁門)은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사랑마당과 안마당은 사이에 담을 두르고 구분되어 있으나, 그 뒤의 사랑채와 안채 건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사랑채 동쪽으로 서고인 선향재(善香齋)가 있고, 선향재 동북쪽 높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농수정(濃繡亭)이라 하였다. 안채에는 서쪽으로도 행랑이 이어지고 부엌을 안채 건물에 붙이지 않고 안채 북쪽에 독립된 건물로 짓고 담으로 구획하여, 일반적인 사대부 주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옥류천
옥류천은 창덕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다.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취한정,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등 5개의 정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창의정
청의정은 바닥이 사각형, 천장 구조는 팔각형, 지붕은 원형으로 구성되었는데 사각형은 땅을, 원형은 하늘을 상징한다.
후원의 많은 정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인조 때이다. 인조는 1636년에 지금의 소요정인 탄서정, 태극정인 운영정, 청의정 등을 세우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받아 바위에 새겨놓았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전통 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축과 원림으로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는 인정전, 돈화문, 인정문,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구선원전(舊璿源殿) 등이 있고,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경궁. 창덕궁 홈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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