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원은 가수 겸 작곡가, 그리고 음반 기획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멀티 플레이어 뮤지션이다. 가수보다는 작곡가로 능력을 공증 받았던 그는 데뷔 이후 음악에 대한 열정과 절절함을 통해 자기 성찰과 음악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각고의 시간을 보냈다.
1970년대 중반 순수 아마추어 노래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동인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해 포크 록밴드 '따로 또 같이'를 거친 그의 음악적 뿌리는 포크다. 하지만 발라드, 퓨전 재즈, 뉴 에이지, 드라마,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그의 음악 스펙트럼은 주류와 언더를 넘나들었던 활동 반경만큼이나 다채로웠다. 탁월한 감성의 히트곡들을 통해 1980~90년대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던 그는 최근 이치헌, 권인화와 함께 프로젝트 남성트리오 '더 칼라스'를 결성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데뷔 초기 순수한 포크 질감의 음악을 지향했던 그는 작가 성향의 포크 뮤지션이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인기가수 즉 폭넓은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했던 이례적인 뮤지션이다. 1985년 솔로로 독립한 그는 1집의 성공을 통해 주류 음악계에 발라드 포크 계열 싱어송라이터의 존재가치를 각인시켰다. 언더그라운드 가수출신인 그의 성공 사례는 이후 남성 싱어송라이터들의 개체수 증가에 긍정적 토양을 제공했지만 자신에 대한 음악적 평가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한 부작용도 함께 불러왔다. 탁월한 창작 능력을 담보한 뮤지션인 그가 왕년의 인기가수로 여겨지며 정당한 음악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음악보다 주류 무대에서 성공한 작곡가나 기획자로의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강인원은 여성적 취향의 감성적 노랫말과 탁월한 멜로디를 담아낸 일련의 히트곡들을 통해 1980~90년대의 히트 메이커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민해경의 '그대 모습은 장미',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존댓말을 써야 할 지 반말을 해야 될 지', '성숙', '사랑은 세상의 반', 그리고 이상은의 '해피 버스데이', '사랑해 사랑해' 등은 모두 그가 작곡한 빅히트 곡들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수많은 그의 히트곡 중 지금도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작은 당연히 '비오는 날의 수채화'다. 1990년대의 명곡으로 각인된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려면 그가 제작에 참여한 이상은 1집 제작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솔로 가수로 성공적으로 데뷔한 그는 민혜경의 전속 작곡가로 명성이 높았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차트 정상에 등극하는 주가를 날렸던 그때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경쾌한 댄스곡 '담다디'로 대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이상은의 1집 제작을 제안 받았다. 대중음악계에 발이 넓지 못했던 지인과 함께 제작과 외부 활동 파트를 나눠
수익을 나누기로 구두 약속을 하고 제작에 들어갔다. 이미 작곡가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을 찾아가 흔쾌히 1000만원 제작비를 손쉽게 받아냈다.
강인원은 "특이한 아이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상은은 선 머슴애 같은 느낌이고 발랄한 댄스 가수인지라 내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만나보니 착하고 맑은 심성을 가지고 있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이상은 1집을 통해 탄생한 그의 창작곡들은 여성적 느낌이 강한 애틋한 발라드 곡인 '사랑해 사랑해', '해피 버스데이' 등이었다. 재기발랄한 이상은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강인원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그녀의 여성성을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음악적 실험을 시도를 했던 것.
그렇게 1989년 초에 세상에 나온 이상은의 첫 독집은 1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뜨리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수익 배분을 약속한 지인이 약속한 음반 수익 배분을 외면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음반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강인원에게 돌아온 대가는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고사하고 친구까지 잃는 마음이 상처가 전부였다고 한다. 동업을 한 친구의 배신에 좌절한 그는 잠시 세상과 단절하며 두문불출했었다. 그때 곽재용 감독이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주제가 제작을 제안해 왔다.
지인의 배신으로 극도의 허무감에 시달렸던 강인원은 영화주제가 제작 제안이 들어왔지만 선뜻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재택 작업이 가능한 영화OST인지라 영화사와 지구 레코드에서 제작비를 받아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다양한 색채를 담아낸 노래 전부를 자신이 부를 수는 없었기에 김현식, 권인하, 신형원을 참여시켜 완성도를 높였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1989년 발표한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 OST 앨범은 세상과 잠시 단절했던 그에게 음악 인생을 만개시키는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의붓 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영화는 흥행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강인원은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거뒀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1990년 제 2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주제가상, 제 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음악상,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 KBS 가요대상 작사상, 한국 노랫말 대상 등 무려 7개의 각종 가요 상을 휩쓰는 선풍적 반응을 이끌어 냈다.
주문 제작된 이 명곡의 탄생 비화는 흥미롭다. 사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타이틀곡도 아니었고 연주인들이 녹음실에 왔을 때까지 곡을 완성하지 못해 즉흥적으로 녹음을 마친 사연 많은 노래다. 앨범의 타이틀곡은 권인하가 부른 ‘오래 전에’였고, 서브 타이틀은 김현식이 노래한 ‘그 거리 그 벤치’였다.
강인원과 고 김현식, 권인하가 트리오로 부른 이 노래 또한 원래는 김현식과 권인하의 듀엣 곡으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녹음 날 김현식은 ‘소주 한 병을 먹어야 녹음하겠다’고 버텨 소주 반 병을 마신 후에야 녹음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노래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 진한 탁성의 보컬이 매력적인 노래꾼 김현식은 고역의 샤우팅 부분은 기막히게 소화했지만 ‘빛 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서 서서…’로 시작되는 맑은 감성이 요구되는 도입 부분은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그 부분을 미성의 보컬을 지닌 강인원이 맡으면서 예정에 없는 트리오 버전이 됐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곡 마디 수, 코드까지 녹음실에서 즉흥적으로 정해 일종의 가이드 송으로 부른 급조한 곡이었다. 당연 영화 속 어느 장면에 삽입할지 여부조차 마땅치 않아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다. 관계자들 모두 신통치 않게 여겼기에 음반에는 B면 첫 곡으로 간신히 수록되었다. 영화의 중요 장면은 권인하가 부른 ‘오래 전에’가 메인 배경 음악으로 깔렸다.
푸대접을 받았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영화 개봉 이후 예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을 불러왔다. 영화의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끝부분에 간신히 삽입된 이 노래를 끝까지 듣기 위해 관객들은 자막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노래의 빅히트에는 대중가요계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일조했다. 영화OST 앨범이 나왔을 당시, 대중가요계는 PD뇌물사건으로 뒤숭숭했다. 의혹을 받았던 각 방송국의 PD들이 행적을 감추면서 ‘대중가요는 돈이 오가는 검은 거래를 통해야만 방송을 탄다'는 부정적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 때 가창력이 공증된 김현식, 강인원, 권인하 3명의 가수가 모여 부른 영화 주제가는 명분 있는 노래로 여겨지며 방송 출연과 마케팅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수하게 방송을 탔다. 이에 강인원은 단숨에 주류 가요계의 메이저급 프로듀서 및 작사 작곡자로 각인되었고 그의 곡을 받으려는 가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강인원은 “공연을 다녔을 때 김현식의 건강이 악화되어 부려 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스러웠다”고 털어놓는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은 ‘김기덕의 2시 데이트’ 방송에서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대학생들이 뽑은 인기가요’ 7주 연속 1위로 선정되자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 활동을 접는 결심을 했다.
이 곡은 지인의 배신으로 극도의 허무감을 경험했기에 창작이 가능했던 곡이다. 마지막까지 곡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아 발표 당시엔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이 곡이 무수한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각인된 것은 순백의 진정성을 담아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