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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을 꿈꾸며 - 2011. 6 새땅의 사람들
머 리 글 과 공 동 체 이 야 기
2011-06
웃 음 - 웃자웃자, 더 웃어야지!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어떻게 보면 항상 그러했겠지만, 사람들은 지금 막 쪄낸 찐빵들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격랑(激浪)을 불러들여가며 사는, 그러한 살이로 들어서야만 하는, 꾸려가는 꾸러미로의 묶여진 묶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삼천포로 빠졌다가 사천포에서 돌아오는 듯 하는, 횡설수설 떠들어대듯 말을 늘어놓고자 한다. 세태가 좋다는 요즈음에도 아이들에게는 별로 놀을 꺼리들이 없는 듯싶다. 아이들은 놀음판이 아닌 공부판으로 내몰려져서 어거지로 목사리에 끌려가는 개들처럼 공부라는 판 속으로 내어버려지듯,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버려져가듯 던져진 인생들을 살고 있으니, 어쩌면 사람들이라는 군상들이 개 팔자만도 못한 이 세상의 꼴 속에서, 다람쥐가 바퀴를 돌려가자고 또 돌려가자고 하며 지내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그렇다면 네 딸들은 무슨 뾰족한 수를 가지고 가르쳐가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도 별 수가 없어”라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다는 이 현실이 나를 더 아프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테레비의 공익광고가 마음을 훌터대며 지나쳐간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가라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다운 교육의 시작입니다.” 친구 윤(尹)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요즈음 장안에서 잘나간다는, 일찍이 본업인, 사람을 고치는 의사이기보다는, 컴퓨터의 기계에 껴드는 좀벌레 같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서 컴퓨터백신을 개발하는데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러면서 그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의 본업인 의사이기도 그만둔 채, 계속하여 앞으로 앞으로 또 다른 일들을 탐닉하듯 도전해가는 안철수 선생님과, 또 다른 의사이면서, 오래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공부했던 것을 밑천으로,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 분야의 선생 혹은 전문가 격이 된 박경철 선생님, 오늘은 그 박 선생님의 컴퓨터 집에 들어가 봤더니? 다음과 같은 첫 머리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혼자 내딛는 천 걸음 보다, 천 명이 손잡고 나아가는 한 걸음의 가치........” 얼마나 지당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신가? 그런데 나를 누르는 것은, 박 선생님은 나와 같은 나이이고, 안 선생님은 나보다 두 해가 되는 삶을 더 나아가셨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던가? 그러면서 또한 지금에는 무엇을 해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서의 그 바울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왔었노라고.......” 하는, 바로 그 이야기를 감히 입의 밖으로 조금이라도 끄집어 내어놓을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되는가? 아니다. 나 스스로 물어 보건데 어쩌면 그보다는 “[<도(道)>]를 구해야 될 사람이, 그 근무지에서는 태만한 채, 온갖 사욕(私慾)에 눈이 붉어지게 젖어가며 살아오고 있었으며, 그러면서 그 굴레로 부터 이제는 벗어날 탈출구는 그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를 되네어 가며 살아가는 이 어리석은 나. 이제 겨우 찾아보려고 눈을 돌려 본다고 말을 할 수밖에는 없는? 잘 지키고 달려왔다는 이야길 하는 천사와 같은 표를 지닌 바울 선생님도 그 어느 때에는 다음과 같은 회한이 섞인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7:19, 24). 그러면서 내가 정작하고 싶은 말은, 그 친구 윤(尹)의 말로는, 그 두 선생님들이 함께 다니면서 나이어린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래와 같은,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즉 “여러분들보다 기성세대인 우리 들이 겨우 요런 모양의 세상 밖에는 이어줄 수 없게 되었으니, 정말로 죄송합니다”라는 말부터 끄집어내어가며 이야기들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왜 너나나나 별 개성들이 없이 그 성공이라는 글자를 보며, 가도를 줄다름질을 해 가듯 쏟아져 가고 있으니, 아 어쩌면 바로 그 고유한 색깔을 지니지 못하고 쏟아져 나오는 회색의 물결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심하게 표현을 하자면, 자기들의 그 특유한 색을 지니지 않은 채, 불야성의 환락(歡樂)이라는 것에 빠쳐 들어가고 싶어 해가며, 그러면서 그것에 도취 되려고 들 들어서는 사람들의 무리? 나도 그 고리를 미처 끊지 못하고 엉겁결에 같이 맞장구를 쳐대고 있는 형국의 이 통탄의 삶. 물론 개중에는 그것을 역행해 가며 거스러지듯이 살아가려고 부단히 몸부림쳐가는 선구자들은, 지금도 어느 하늘 밑에서 인가에는 분명히 있음을 알고만 있다. 나도 옛 사람들이 하자는 방식대로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낳게 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식의 삶을 살고는 있지는 않은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서울구경을 해보고 싶어 하기를 꿈엔들 잊지 않으려고 하며 살고들 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그 서울로, 서울로 막 가자는 것이 전대미문의 신화와 같은 역사라고 말들을 해대는, 그것은 바로 사십년 혹은 많이 잡아서 오십년 사이에 이 나라의 경제성장이라는 비약적인 모습의 선사품의 덕택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그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된 경제지상주의라는 것의 배후에는, 그것으로 인해서 도로변으로는 쓰레기 뭉텅이들이 쌓여있어서 눈앞에 뻔히 보여 지는, 그러면서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시골의 논밭의 거름더미로도 만들어 갈수 없는, 바로 순환의 둘레를 끊어먹은 애물단지와도 같은 것들을, 난지도에 모아서 난잡하게 방치되다 시피하면서 억지로 눌러 놓더니, 이제는 그럴 자리도 없어 다른 곳을 찾아다니며 전전긍긍, 이 나라의 땅덩어리들을 야금야금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려고 들어서는 그것들, 먼저도 얘기 했지만, 작년에는 잘 걸어 다니 던 그 많은 짐승 떼들을 땅의 구덩이 속으로 생매장을 시키더니, 옆에 나라 일본에서는 여러 달 전에 땅이 뒤뚱거리면서 들썩거리는 바람에, 뒤틀리어 찢어지면서 풍비박산이 일어나니까? 원자력발전소에서는 불타고 있던 그 불가마들이 깨어지고, 그러면서 지금껏 맹렬한 기세로 펄펄 끓어 넘치고 있어서, 그것을 막아낼 방법을 여태껏 찾지를 못하고 있는 이 처절한 아픔을 누가 해결해줄 것인가? 이일을 목격한 류승일 선생님은《쓰나미, 아직 끝나지 않은 경고》에서 “피해 지역으로 통하는 길로 접어드니 바람을 타고 퀴퀴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괴롭혔다. 차 안에서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말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소 도시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군데군데 뒤집혀 있는 차량들, 지붕만 남아 논바닥에 자리를 틀고 앉은 집들이 간간히 보이고, 그나마 형체를 갖춘 건물은 열 채도 안 된다. 한 마디로 살아 있는 지옥이다.” 그러면서 고 선생님께서 토를 다시기를 * “쓰나미. 자연이 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사람이 몰고 오는 쓰나미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몸짓이 한 사람의 재앙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 모든 사람의 공동체마저 쓸어내 버리는, 자연의 쓰나미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입니다. 경고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희망의 쓰나미’가몰려와야 합니다.” 자연 앞에서는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이, 미물 된 사람들의 미력한 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 나라의 큰 기업체라는 곳에서는 문어발식이라고 하더니, 그 도는 또한 마녀사냥꾼 마냥, 작은 점빵들과 다름없는 중소공장들에서 만들어내는 물건들까지 파고들어와 들쑤셔대며, 자기들이 더 좋게 만들어 가지고 이미 있는 드넓은 판매망에 끼워서 함께 팔아야 하겠다며 치고 들어오자는 식이니? 그렇다고 이미 망해버린 공산주의는 더더욱 못 써먹을 노릇이겠고? 자본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그렇구? 그래서 공동체라는 말이 희미한 안개처럼 뿌옇게 연기만을 일으킬 다름이다. 나의 학교 어느 선배님은 이스라엘의 키브츠 공동체를 그리며 가려다가 사그라지고 말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옛 선인의 글 선생님들이 가슴 아파서 읊었던 “오호 통제라(嗚呼 痛哉라)”라는 말이 저절로 뒤범벅이 되어져서 흘러나온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들 곁에서는 그 찌꺼기들로 인한 시행착오와 부작용들이 곳곳에서 도사려가며 툭툭 돌출되어져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들이다. 우리는 이런 일들의 뒷단돌이를 어떻게들 감당해갈 것인가? 어쩌면 역사가 길었음 직한데도 여러 번의 굴절의 과정 속에서 유구하지 못한 채, 급격함의 발전이라는 것이 가져다준 뾰족뾰족한 그 모서리들을 어떻게 하면 되도록 바로 둥글게 둥글게를 만들어 갈 것인가? 한간에서는 이 자체로는 그 자정능력을 잃었다는 목소리들이 푸념 섞여지듯이 이곳 저에서 흘러져 나온다. 작금에는 흥부보다는 놀부가 더 났고, 개미 보다는 배짱이가 더 났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잔챙이들을 개미군단이라는, 수식어까지 집어넣어 비아냥거리듯 하는 말까지, 또 다른 사람들은 휘둘러대듯 사용들을 해댈까? 나는 간 큰 남자가 못된다. 통째로 라는 것을 모른다구나 할까? 나는 이 자리에서만이라도 “같이 있으면서 몸이 조금 불편하게들 계실 다름인, 그래서 그지없는 순박함을 더욱더 지니고 계신 바로 이 분들에게 얼마나, 소위 얘기해서 잘해드리고 있는가?” 크게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을 또 빌려다 나에 앞에 놓아본다.
맨 앞에서 얘기했듯이, 지금의 아이들이, 소위 공부라는 것 말고, 또 다르게 하게 되는 놀아갈 꺼리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컴퓨터하기를 제일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는 테리비보기에 메어달려 있음을 오늘 방송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나도 해가는 일들이 여기에서 별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것 같다. 테리비 방송에서 나오는 아침 마당, 퀴즈 대한민국, 역사스페셜, 학자의 고향, 테레비 특강, 요사이에는 명작 스캔들 등등 시사적인 프로그램 시청하기와 컴퓨터로 재탕하여 가면서 그 테레비를 다시 보아가며 자료 모으기, 눈이 안 좋아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인 듯하지만, 생각해놓았던 어휘나 상황 찾아보기 등등일 것이다. 바로 모방의 대명사격이 되고 말았다.나는 몇 년 전과 그리고 몇 달 전에, 인생을 나보다 더 많이 겪으신 오륙십 대의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성격이 급하다는 말씀을 두 분으로부터 각각들은 적이 있다. 나는 느긋할 때에는 나무늘보처럼 매우 능청스러우나 급하자고 들면 한없이 보채듯 급한 이중적인 느긋함과 급함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허둥대어 가는 듯하다. 어쩌면 장애인으로써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던가? 아니면 하나님이 선사하신 기질인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내로 부터는 재미있는 사람이기 보다는, 별 안겨다주는 것이 없는 살갑지 못한 채, 다정다감하지 못한 무덤덤한 남자로 비쳐지는 것 같다. 그런 내가 요사이 겪어내는 일은, 벌침을 벌 받듯이 과하게 맞은 산통이라서 그러한가? 몸무게가 십 몇 킬로가 빠져서 절름발이로써 무게의 부담은 조금 덜었으나? 그 후속으로 치러대야 하는 치도고니의 일들이 보통이 아니다. 그 일은 몸이 활활 불타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속이 온통 화(火) 기운으로 그 기세가 맹위를 떨친다. 그래서 어느 약을 져주시는 집사님에 의존해서 열을 내려 몸을 차갑게 해가는 약을 두 첩 째 먹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거품을 내뿜어 대며 말을 많이 해가며, 몸속의 화를 발산해 가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찬물을 온통 뒤집어 쓸 때도 있다. 그 한약을 챙겨주시는 집사님의 말씀으로는, 곧 찾아들 무더위를 잘 이겨내야 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걸으며 산들산들 불어대는 바람맞이를 좋아한다. 세찬 바람은 더욱더 좋다. 나는 1999년 7월 중순에 이 신평리에서 살림을 틀고, 그 자구책 중의 하나로, 이 소식지를 그해 11월부터 보내어 가며, 나름대로는 함께 나눈다고 하면서 해오는 그 일을, 말 그대로 일처럼 커다란 짐으로 여겨가며 부담을 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 보건데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맨 처음 보내진 소식지에 다음의 성서 구절을 인용해가면서 살림살이를 이어져 온듯해서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잠언서(箴言書)에서 가져온 말이었는데, 그 소식지의 한 부분을 따오자면, “묵시(黙示)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放恣)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묵시의 상상화(vision)를 그리고 싶었다(잠언 29:18). 결국 나도 그때에는 꿈엔들 그려보자는 말을 끄집어 낼 수밖에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오늘 이 아침에 식구들과 같이 성서를 대하는데,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황량한 광야 길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기(出埃及記)를 보게 되는데, 32장 25절에서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放恣)하니 이는 아론이(모세의 형이라고 말하는)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바로 그렇다. 우리가 제멋대로 살아가며, 이리 저리 휘둘려 다니며, 방만하고, 조금 나아가서는 제길도 모른 채, 어떻게 보면 개구리밥이라고 말을 쉬이 할 수 있는 부평초(浮萍草)처럼, 그러면서 철새들처럼 제철을 찾아가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그러한 살이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드감치를 모르는 바로 줏대를 지키지 못하고, 빈대 붙듯, 미끼를 물려는 고기마냥 달려 들어가는 세상살이, 마음이 무른 나이어서 더더욱 이에 못지않은 듯싶은데, 나는 체면불구하고 하는 제주는 없어서 그 분께 조금은 감사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러나 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다보면, 이 보다 한수 더 떴을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스스로 잘 안다. 우리는 그 터줏대감의 삶을 왜 살지를 못하고, 기생하듯 살아가고 있는가? 저 푸른 하늘의 드넓은 그 창공을 바라보자. 드넓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외로운 저 새를 바라보자. 교회당에서 부르는 노래에서, 나는 그 노래를 마음 죽여 부른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蕩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 할꼬” 40여년 전에 프란시스 쉐이퍼라는 분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세계가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단다. 그것은 “목적이 없는 부(富)의 추종” 또 다른 하나는 “진리가 없는 교육” 넘쳐나는 것 같으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헛바람만 들어간 곳이 이 세상이라는 판세인 듯하다.
그러므로 나는 별다른 답은 찾지 못한 채, 그저 이런 사람이 좋다. 내가 너무도 하지 못해서인데, 할 말이 없는 묵묵부답의 그 사람이 좋다. 다만 조금 표현을 하자면 도톰해진 맑은 낯으로 마음을 한껏 담아 비스듬하게 이빨을 조금내보이며 함께 웃어주는 그 사람이 그저 한없이 좋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선생님의 벽공(碧空)이 먼저 또 생각이 나고, 그 분이 얘기했던 기상이 넘치는 웃음에 관한 유머철학 이야기가 뒤따라서 생각이 또한 난다. 벽공(碧空)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그리고 비스듬하게 웃는 향긋한 모습과 함께 그것과 또 다르게 표현되는 여러 가지의 색채를 띤 왁자지껄한 그 분의 유머 철학이라는 수필 글이 여기에 있다. “인생에 웃음이 없을 수 없고, 웃는 곳에 유머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웃음은 하늘의 별과 같다. 웃음은 별처럼 한 가닥의 광명을 던져주고, 신비로운 암시도 풍겨준다. 웃음은 또한 봄비와도 같다. 이것이 없었던들, 인생은 벌써 사막이 되어 버렸을 것인데, 감미로운 웃음으로 하여 인정의 초록은 무성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웃음은 우리에게 복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웃음에도 여러 가지 색채가 있다. 빙그레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있는가 하면, 깔깔대며 웃는 박장대소(拍掌大笑)가 있다. 깨가 쏟아지는 간간대소(衎衎大笑)가 있고, 허리가 부러질 정도의 포복절도(抱腹絶倒)도 있다. ‘아하하’ 소리를 치는 양천대소(仰天大笑)가 있는 반면에, 혜식디 혜식게 히죽 이죽거리는 김빠진 웃음도 있다.”
웃자 웃자. 견주어대는 비웃음이 아닌, 밝게 타오르는 저 태양을 바라보며, 온통 세상을 끓어 않은, 그 세상과 함께 웃자. 웃고 웃고 또 웃고, 마음껏 웃어대자. 그러면 신통한 답이라도 얻어질는지? 내가 정겨운 그러면서 여전한, 바로 그 고향 교회이면서 드높이 서있어서 높다람 그자체인, 집 앞에서 위쪽으로 하얗게 새롭게 난, 오르막길 꼭대기의 끝에 올라서서 키를 맞추며, 저 멀리서 커다랗게만 서 보이는 신평교회. 지금보다 숫기가 더 없었던 중학생 2∼3 학년이었을 것으로 기억되어지는 때로, 1980년 6월 29일에 세례를 베풀어주신 심창근 목사님께로부터, 신학교를 다닐 때에는 교회행정학을 가르침으로 받게 되었는데, 기억되어지는 것은 강의 시간에 다음의 성서 구절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冊)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工夫)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도서 12:12). 지금은 서울의 노량진역 근처에 자리한 교회를 돌보시고 계시는데, 강을 넘어 저 멀리 중심지에 자리 잡은 연동교회에서 주관하는 “아가피아 트레스 디아스(Agapia Tres Dias)”라는 영성훈련을 하는 모임이 있으니, 참석하면 좋은 수련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 힘입어, 몇 년 전에 그 모임에 참석을 하여서 황홀함을 담고 왔다. 그래서 그 이후로 계속하여 그 트레스 디아스 모임에서 소식을 전하여 주신다. 어제도 그 모임에서 초청장이 찾아왔다. 그 초청의 내용이 좋아서 여기에 옮겨본다. “청사초롱을 밝히면서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설레임과 같이 주님의 사랑어린 3박4일간의 위크엔드 그 감동어린 새로운 설레임이 가득한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청사초롱처럼 불이 밝혀져 있지가 못해서, 그래서 제대로 되지 않은 세상일지라도 (나의 몸의 장애 속에서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대상화(對象化) 시켜버리고 마는, 그래서 어쩌면 나의 착시 속에서 기인 되어져버려서, 그에 따르는 고착화 되다시피 한 착각의 눈동자로 들여다보면서, 그 속의 환상의 눈매에 빠져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만이라도 형형색색의 등불을 만들어 달아가는, 감동어린 설레임의 삶이 필요로 할 것이다. 우스갯소리인 것 같지만 감동이 밥 먹여 주는 세상이 되었다. 내 감동이 격해지면서, 더 단련되어져 들어가며, 세련을 조금씩 띠게 되면, 사람들의 생을 버무리 해주면서 살아가게 될, 큰 원동력이 되는 감복을 안겨다 주게 되리라. 내가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나를 광로(光路) 속으로 밀어 넣어야 될 일이라고 여겨진다. 결국은 나는 되먹지를 못해서, 이 어린 학생들의 헤쳐 나아갈 길의 조그만 답변을 손으로 들어다 주지를 못하고, 그냥 ‘웃자웃자’ 해버리고 말면서 끝을 맺는다. 그러면서 그 친구 윤(尹)의 한마디가 뇌아리에서 또 스쳐간다. “너는 이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이 똑같고 발전이 없더라!”라는 말, 어쩌면 대상화(對象化)의 틀 속에서 맴돌이 현상을 지으며 사는 내 꼴을 들여다 보면서 일침을 가하는 말로 들려진다.
* 지면 관계로, 2011년 6월의 표지 사진을 못 올렸으며, 공동체 소식에서 공동체 가족들은 지난달과 변동이 없이 잘 계시고들 있으시며, 후원의 소식은 다음 달로 미루어짐을 양지하여 주시기를 부탁 올리오며, 한 가지 광고의 말씀은 제천시의 새생명전원교회 손태흥 목사님께서 2011.8.15-17에 새터공동체에서 집회 모임을 인도하여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새 터 공 동 체(041)754-1488. (010)2405-1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