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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금처럼 하나님 채굴하기>의 줄거리:
벽골(碧骨)은 삼국시대 백제 때까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의 본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남북국시대에 와서 신라의 지배 하에서 이름이 지금의 김제(金堤)로 바뀌었습니다. 벽골이란 '벼의 고을'이란 뜻의 '볏골'의 한자 표기입니다. 김제평야가 있으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사금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금(金)자가 들어간 김제로 이름이 바뀐 겁니다. 이 사실에 비유컨대, 십자가 생활화는 우리의 삶을 벽골(碧骨)에서 김제(金堤)의 삶으로 바꾸어 사는 거지요.
사금처럼 하나님 채굴하기
(시편 136:1~26)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금(砂金)처럼 하나님 채굴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금(砂金)처럼 하나님 채굴하기’
세계적인 사금 산지로 유명한 곳은 미국 알래스카의 유콘 강이나 캘리포니아 또는 호주의 빅토리아 지역입니다. 우리나라의 사금 주요 산지는 직산과 김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금 산지로 유명한 김제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호남평야에 위치한 곳입니다. 혹은 이곳을 따로 구분해서 김제평야로 부르기도 합니다. 김제는 쇠 금(金)자에 뚝 제(堤)자를 쓰는데 본래의 이름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백제 때에는 ‘벽골’이라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벽골은 ‘벼의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볏골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벽골로 정착된 것입니다. 왜 벼의 고을이라 불렀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1/40을 김제가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의 역사를 추적하다보면 백제가 신라에 망하면서 북쪽으로 발해가 들어서고 남쪽으로는 통일 신라가 있는 남북국 시대에 들어서 벽골이 김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벽골에서 사금이 채굴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1년에 500kg 정도의 사금이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 상당한 생산량이었습니다. 쌀이 많이 나긴했지만 금이 많이 나는 고을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여 김제가 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북적대는 동네였는데, 1980년대 말에 들어와서 사금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지금은 채굴이 중단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금의 순도가 굉장히 높은 85~93%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벽골이 김제로 바뀐 것을 비유 삼아 말씀을 이해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벽골의 삶에서 김제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즉 밥을 최고로 생각하는 인생에서 금을 채굴하며 사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사람들은 함포고복(含哺鼓腹)하기를 바랍니다. 실컷 먹고 불쑥 나온 배를 두드리는 것처럼 형통과 성공을 누리기 위해 인생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밥 잘 먹고 형통하기 위해서 살던 벽골의 삶이 금을 채굴하는 김제의 삶 즉 하나님을 채굴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잘 살아보고 싶고, 형통하고 싶고, 승진하고 싶고, 엘리트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에 이러한 삶의 판도가 바뀝니다. 냇가에서 흙을 떠서 모래는 흘려보내고 가라앉은 금을 찾아내는 것처럼 하나님을 채굴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채굴하는 삶에는 항상 기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복지가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본질적인 의도이고 목표입니다.
벽골의 삶은 이 세상에서 배부르고 형통하고 성공하기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김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삶을 바꾸어 살도록 선포되었고, 십자가 생활화를 위해서 우리가 날마다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본 시는 서두나 말미에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제2할렐시 혹은 대 할렐시’라고 불리는 시입니다. ‘할렐 시’란 말 그대로 처음과 끝이 찬양을 뜻하는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찬양 시입니다. 제1할렐 시는 우리가 살펴본 113편에서 118편까지입니다. 그리고 146편에서 150편에 걸쳐 제3할렐 시가 나옵니다. 제2할렐시 혹은 대 할렐시는 136편 한 편뿐입니다.
이스라엘에는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가 있었습니다. 오늘 시는 이러한 예배 때에 사용되었던 시로 보입니다. 특이한 점은 총 26절로 되어 있는데 매절 끝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구가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면서 교창 형식으로 예배 때에 불렸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예를 들어 23절을 보면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레위인 성가대가 선창을 하면 회중들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후창을 하여 교창 하는 형태로 불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만들어진 의도를 생각해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26번 반복합니다. 이 형식을 미루어 볼 때에 포로시대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교창 형식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할 때에도 불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는 보다 특이하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구절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데 여기에는 교육적인 의도가 있었습니다. 반복하게 함으로써 자녀들이 말씀을 쉽게 생활화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자녀들의 입에 억지로라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붙이려는 의도였습니다.
본문의 1~3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였고 2절에서는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고 3절에서는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감사의 핵심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후렴으로 반복되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에서 인자하심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단어인데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말합니다.
1~3절을 통해 이 사랑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뜻하는 바를 생각하게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창세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선민의 언약적 관계에서 사용됩니다. 쉽게 말하면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창세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신께서 나 같이 미물에 불과한 한 인간을 인격적 상대로 인정하고 만나주시기 위해 다가오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이름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내 마음의 공백을 채워서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분에 대한 감사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라시고 또한 내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즉 이방인들이 믿는 많은 죽은 신들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살아계신 신으로써 인정하는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나를 만나시고 나에게 당신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신들 중에 뛰어나시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앞서 말한 하나님께서 곧 내 삶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1~3절을 합해보면 ‘스스로 계신 신께서 나를 만나러 오셨고, 내 마음을 채워주셨고, 내 삶을 이끌어주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에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고백을 계속해나가는 것입니다.
4절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반복학습 시키기 위해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감사를 언급합니다. 먼저 창조에 대한 감사 즉 해와 달과 바다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선민에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나옵니다. 즉 출애굽의 역사, 광야의 역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먹고 입고 사는 일상적 은혜에 대해 감사하게 합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반복되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중단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감사하는 상황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기까지 했고 선민다움의 생활이 없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족속들을 통해 치셨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영원하시다’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이 아닌, 단 한 번도 선민에 대한 사랑이 중단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26절까지의 내용은 교육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녀들에게 감사의 본질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해와 달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먹을 것과 입을 것까지 주시니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감사는 선민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는 것을 입에 붙여줌으로써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일들을 들어서 감사를 이야기했지만 본 시의 의도대로라면 이 시는 26절로 끝날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27절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 씩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면서 스스로 시를 써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감사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을 반복함을 통해 내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도 그 사랑이 중단됨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함을 통해서, 삶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역풍을 만나든 순풍을 만나든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는 벽골이 김제로 바뀌는 삶이기를 바라는 의도로 쓰였습니다. 즉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계기로 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다가오시고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감사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냇가에서 사금을 채취하듯이 이 세상 삶의 모든 계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삶의 순풍을 만나더라도 그 상황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건져낼 것이며, 역풍을 만났을지라도 불평불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해 낼 것을 자녀들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내용은 26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계속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의도대로 삶에서 27절 28절로 계속해서 감사의 고백을 써내려갔다면 어떤 내용이 이어졌을까요? 예를 들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내용도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바벨론으로부터 포로귀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벨론의 포로생활 중에서도 채굴해 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먹고 살게 해주시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아주 부수적인 일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과 땅의 격차를 제거하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고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적 내용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내 앞에 와계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인정해드리고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채굴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근거로 이 시편을 계속 써내려 간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나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나를 돌에 맞아 죽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인들은 ‘핍박받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을 것이고, 사도 바울은 ‘내 몸에 사탄의 가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금을 채굴하듯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내 마음 안으로 모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삶에서 사건을 만나고 그에 따른 반응을 하게 됩니다. TV에서 뉴스를 보다가도 반응하고, 가족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에도 반응합니다. 호불호를 판단하고 그에 따른 감정이 생깁니다. 마치 사금이 강바닥에서 모래들과 섞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접시로 떠서 흐르는 물속에서 계속 흔들면 가벼운 모래는 물살에 떠내려가고 무거운 금은 가라앉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사건을 만날 때에 좋은 사건 나쁜 사건으로 판단하면서 감정이 생깁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할 수도 있고 시기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대책을 세우려고 결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의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돌에 맞아 순교하는 상황에서도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사금을 채취하듯이 감정과 판단은 물에 흘려보내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남겼습니다. 그랬기에 순교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에 그 상황 자체를 돈이 있는 상황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벽골의 삶입니다. 아직도 벼가 많이 나는 고을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상황에서 배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사금을 채굴하는 김제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하는 것은 곧 그 사랑을 마음에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해서 갖게 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격자체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면 걱정거리가 없고, 어떤 걱정도 나를 압도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이 안 좋을 때에 벽골의 삶을 사는 자들은 건강을 회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애쓰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선’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사를 만나든 약을 먹게 하시든 필요한 대로 치료를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몸이 아프다는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하는 것입니다. 사금을 걸러내듯이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서 이 사건에 얽혀버린 내 감정과 판단들을 흘려보내야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라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 죽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서 접시에 뜬 모래를 계속해서 흔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사건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감정과 판단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라는 고백을 하면서 기도하고 바라보면 십자가가 명확해지고 내 마음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채굴되게 해주십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소유되어 주십니다. 이때에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과 기쁨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삶은 금을 캐는 김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벼가 많이 나는 벽골의 삶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금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선민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에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채굴해서 실감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해서 많이 갖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하고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가질 때에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맡아서 해결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형통과 성공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벽골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금을 캐내는 김제의 삶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불행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사건이 있을지라도 배후에는 반드시 금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컴퓨터를 통해서 가상화폐를 캐내는 많은 사람들이 허탕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실패가 많지만 하나님 사랑 찾기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뒤섞여버린 나의 감정과 판단을 주님의 보혈로 씻어버리면 반드시 금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채굴하는 김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면서 이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 사건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건과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형통과 성공을 꾀하는 벽골의 삶을 중단하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채굴하는 김제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