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용담공 신도비와 기옹공 어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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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0. 13:24조회 0
용담공 신도비와 기옹공 어필비각
고령군 운수면 유리 소재
용담공 신도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 증조할아버지는 박한하(朴漢何)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박식(朴埴)이며, 아버지는 승지를 지낸 복재(復齋) 박양좌(朴良佐)이다. 어머니는 성산배씨(星山裵氏) 별좌(別坐) 배은(裵垠)의 딸이다. 둘째 아들로, 형은 남계(藍溪) 박이문(朴而文)이다. 부인은 충주박씨 참판 박응복(朴應福)의 딸이다. 선대는 한양에서 살다가 6대조인 개성판윤 박가권(朴可權)이 새 왕조 조선에서 내린 벼슬을 거부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고조할아버지 사맹공(司猛公) 박예손(朴禮孫)이 성주에서 지금의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로 이주하였다.
[활동사항]
박이장(朴而章)[1547~1622]은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내고 1591년(선조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10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지제교(知製敎),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이듬해 이조좌랑에 이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직하였다.
1595년(선조 28) 이조정랑,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1599년(선조 32)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있을 때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1601년(선조 34)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집의, 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弘文館直提學兼侍講院輔德), 승정원동부승지, 경연참찬관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영경(柳永慶) 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1603년(선조 36)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지춘추관사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p>
[학문과 사상]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였고, 23세에 덕산(德山)에 있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1572년(선조 5) 향시(鄕試)에, 이듬해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28세인 1574년(선조 7)에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때 소재로부터 정학(正學)을 취하여 존양성찰(存養省察)을 으뜸가는 공부로 삼았으며, 『내암집(來庵集)』의 「문인록」과 「부음정중수계안(孚飮亭重修契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명, 소재, 내암을 사사(師事)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44세 때인 2월에 정구(鄭逑), 문위(文緯)와 더불어 마암(馬巖)에서 심경(心經)을 공부하였다.
[저술 및 작품]
15세에 맏형 박이문을 따라 산당(山堂)[박양좌의 별업(別業)]에서 독서하면서 「침명금명(枕銘衾銘)」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28세 때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중양회서(重陽會序)」를 지었다. 30세 때에는 『관혼촬요(冠婚撮要)』, 34세 때 봄에 『정서절요(程書節要)』, 36세 때 겨울에 『육경여해(六經蠡海)』를 저술하였다. 52세 때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원지(水原志)』를 지었고, 59세 때 『영해지(寧海志)』를 완성하였다.
61세 때 현재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이르러 한훤당 김굉필의 묘(墓)를 배알하고 「선세묘지(先世墓誌)」를 지었다. 70세 때 봄에 순천박씨 족보의 연원인 『승평세고(昇平世稿)』를 편집하였고, 황고(皇考) 복재공(復齋公)의 행장을 지었으며, 주서(朱書)를 읽고 「자경시(自警詩)」를 지었다. 73세 때에는 『심경요의』, 75세 때 봄에는 『상재만록』을 지었다. 시문집으로는 『용담집(龍潭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25년(인조 3) 문간공(文簡公) 조경(趙絅)이 행장을 지었으며, 1678년(숙종 4) 사림들은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을 모신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종향하였는데, 이는 그가 옛날 성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자손들이 지금의 산청군 단계리로 이거하여 부조묘로 받들고 그 마을 앞에 정사를 건립하여 이름을 용담(龍潭)이라고 하였다. 용담은 본래 박이장이 거처하던 고령의 마을 이름이었으나, 「용담정사기(龍潭精舍記)」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 거주하기도 하고 우거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678년(숙종 16) 합천의 회산사(檜山祠)가 만들어지고, 1726년(영조 2)에 신도비명이 세워졌다.
신도비 전면
신도비 후면
효종 사부 기옹공 어필비각
[정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유리 에 있는 박이장과 박공구 부자의 조선시대 신도비와 묘비 및 비각. | | |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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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경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순천박씨 신도비와 묘비 및 비각은 순천인(順天人)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1547~1622]과 그의 둘째 아들인 기옹(畸翁) 박공구(朴羾衢)[1587~1658]와 관련 있다. 비각은 원래 운수면 유리 고승골마을 뒷산에 위치한 박공구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1973년 4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재실인 모덕와(慕德窩)는 1970년대 후반경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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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유리 고승골 내에 위치한다. 운수면사무소가 있는 봉평리에서 법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유리가 나온다. 이 어필비각 및 신도비, 재실 등은 도로변 좌측의 새마을회관 옆에 위치해 있다.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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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비각은 사방 1칸 규모로 주위에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는데, ‘ 어필비각(御筆碑閣)’이라는 현판과 함께 비각 내부에는 ‘조산대부 행대군사부 박공지묘 영인 영천이씨 합부(朝山大夫行大君師傅朴公之墓令人永川李氏合祔)’라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명은 박공구가 죽자 효종대왕이 친히 하사한 어필 비문이라고 한다.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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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옆에는 박이장의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1726년에 세워졌다고 하나, 현재의 것은 선생 역책후 삼백사십구년후 신해(先生易簀後三百四十九年後辛亥)라고 하여 1971년에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각 앞에는 기단으로 받쳐놓은 바위 면에 ‘성사동(聖賜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조그마한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하마비는 원래 유리 마을 앞의 정미소 옆에 있었으나 파손되어 없어졌는데, 비각을 지으면서 함께 세웠다. |
효종이 내린 어필비
비각 앞의 성사동 표석과 하마비
비각 뒤 재실인 모덕와
모덕와 정문인 율수문
고령군 운수면 유리110-1
재실 모덕와
모덕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