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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살전 5:16-18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라는 책은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정책 연구소와 국제 여론조사 기관인 ‘입소스’가 발표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28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 느끼는 갈등 강도와 수준은 무려 12개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빈부, 이념, 정당, 종교, 성별, 세대, 학력 등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사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만족도, 또는 행복도가 낮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감사보다는 또 어떤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는 불안, 누군가 내게 다가와 해코지하지 않을까 하는 불신, 누군가를 향한 불평과 원망, 그리고 증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감사하며 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특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감사에 대해서는 행복하기 원하는 것에 비하면 인색합니다. 알고 보면 행복은 감사에서 오는 것인데 말입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행복지수도 높아집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많이 행복하고 싶다면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행복하기 싫은가요? 감사와 담을 쌓고 살면 됩니다. 불행하게 살고 싶은가요? 매사에 불평하며 살면 됩니다. 모든 일에 잔뜩 불만을 갖고 살면 됩니다. 그럼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에게도 불행이 상속될 것입니다.
오늘은 감사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감사주일을 연 두 차례 지킵니다. 7월엔 맥추감사주일로 11월엔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맥추감사주일은 7월 첫주일로 고정해서 지키지만, 추수감사주일은 교회에 따라서 우리 교회처럼 11월 셋째주에 지키기도 하고, 첫째주, 또는 둘째주에 지키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추석에 지키는 교회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언제 지키느냐는 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감사주일을 지키느냐가 중요합니다. 감사주일을 지키는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감사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감사주일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감사가 얼마나 회복되느냐가 중요합니다. 감사 없는 감사주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감사, 준비없는 감사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봉투만 바꿔서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하긴 ‘맨 입 감사’도 있을 수 있는데 그보다는 낫습니다.
어느 분이 ‘추수나 맥추감사헌금 액수는 얼마가 적당할까요?’라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십일조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정한 추수감사주일 헌금 기준은, 연봉을 12개월로 나눠서 십일조를 하는 거였습니다. 처음엔 그것도 부담스러운 액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정도는 드려야 할 것 같아, 몇 년 동안 그렇게 드려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는 ‘내가 목사인데 그래도 십일조의 두배는 해야지’ 하고 두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헌금하는 것이 기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어떤 분이, 추수감사주일 헌금을 365,000원한 것을 봤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퍼뜩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는데, ‘아, 이분은 하루에 천원씩 계산했구나. 참 대단한 분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자기도 하루에 천원씩 해서 추수감사주일에 365,000원을 했답니다. 그런데 특별히 감사할 일이 있는 날은, 1천원이 아닌 5천원을 모을 때도 있고, 또 1만원을 모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모아진 돈이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생활비 받을 때가 되면, 통장 잔고가 0 또는 거의 바닥인 생활에서, 단번에 절기헌금을 드리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 년간 잔금 저금통에 모아서 드리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했고, 앞으로도 쭉 이어갈 생각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은행에 통장을 따로 개설하여, 자기 나름 추수감사절 통장이라고 이름 붙이고, 수입에 따라 월 몇 만원 씩 자동이체를 한 후, 그걸 드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찾아서 하는 것보다는, 모아서 하는 것이 더 좋을 거 같긴 합니다.
추수감사주일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중 구약 성서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민족적 경험과 감사의 축제 전통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3대 명절은 모두 감사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민족 해방에 대한 감사절로 기념하였고, 봄의 초실절은 첫 열매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이었습니다. 가을에는 추수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나뭇가지로 집을 지으며, 그 안에서 7일동안 지내는 수장절, 곧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을에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에 대한 감사제 의미의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한자어로, 직접 말로 풀이하면, 풀로 장막(집)을 지으며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의 다른 명칭은 수장절, 추수절 등이 있는데, 수장절은 곡식을 거두어 저장한다는 의미이고, 추수절은 가을에 곡식 추수함을 기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모두 다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곧,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께 가을 추수에 대해, 감사제를 드리는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지금도 이 초막절을 중요한 명절로, 구약 율법에 따라 기념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의 역사적 유래는 청교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영국의 전통이었던 추수행사에서 유래했습니다. 1609년 영국의 국왕 제임스는, 국교회를 반대하는 청교도들을 심하게 박해하고, 심지어 감옥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만족할만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가기로 결정한 후, 그 준비를 위해 3년의 기간을 보냈습니다. 타고 갈 배를 구하기 위해,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의 사원들이 되어, 7년 동안 일해서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1620년 9월 16일, 180톤의 크지 않은 배에 102명이 타고 65일간 항해한 끝에, 미국의 북동쪽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도착하였고, 풍랑과 식량난으로 죽을 고생을 했음에도, 하나님께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곳의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어, 교회부터 짓고, 이어서 학교를 세우며, 맨 마지막으로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순서입니다. 교회, 학교, 자기 집 순이었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요즘은 순서가 정반대로 바뀐 양상입니다. 자기 집이 1번이고, 그 다음이 학교이고, 교회는 맨 마지막으로 밀립니다. 청교도들은 1년 동안 약 반수인 44명이 죽었는데, 장례식도 제대로 못 치렀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에게 사람 수가 적어지는 것이 알려지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후 그들은 인디언들과 화친을 맺었고, 추장 사모세트의 도움으로 농사에 필요한 재배 기술과 가축 사육 방법을 배워, 황무지를 개간하고 가축들을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추수한 햇곡식과 채소 등의 귀한 열매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자신들에게 경작법을 가르쳐준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해서 첫 추수를 하여 감사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의 감사는 생명을 건 감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어떤가요? 주일을 성수하고,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뭘 걸었습니까? 지금은 예수 믿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아직도 북한이나 극단적 이슬람 국가는 여전히 생명을 걸어야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거창하게 생명까지는 걸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도 혹 밥줄을 걸어야 할 수는 있습니다. 주일성수를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터에서 약간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생명까지는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까? 신앙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가치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길 때, 예배에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감사절이 되면, 더 절실하게 와 닿는 찬양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166번 ‘주님께 감사’입니다. 이번 감사절에는 감사 찬양의 가사를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절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신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감사에 있어서도 순서가 중요합니다. 감사에도 앞뒤 순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감사가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게 모든 감사의 기본이고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롬 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다면 다른 뭘 아끼겠느냐는 의미입니다. 또한 자기 아들까지 줬으면 다 준 것인데, 그 이상 뭘 더 줄 게 있겠느냐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구원을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실제로 우리가 한 일은 없지만, 대신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였으니, 그 이상 더 큰 게 있겠습니까? 구원에 대한 감사는, 곧 모든 것 주심 감사인 것입니다.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지난 추억이라고 하니까, 맹인가수 이용복이 불렀던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한 해를 여는 새해예배 후부터 오늘까지로 생각하면 됩니다. 나한테도 지난 열 달을 돌아보면, 아픔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지난 추억 인해 감사’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지난 추억 인해 감사’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때 주님이 곁에 계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고, 불편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슬그머니 곁에서 떠나갑니다. 만약 이 시간 감사할 사람이 떠오른다면, ‘지난 추억 인해 감사’입니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대체적으로 봄은 향기롭습니다. 새해를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정도 살아 있습니다. 기도 시간도 지켜지고, 성경 읽기도 잘 됩니다. 가정도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나가는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러다 가을을 맞게 됩니다. 가을은 풍요로운데,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외로움 중의 최고의 외로움은, 사람이 떠가갈 때의 외로움입니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 또는 내가 마음을 써줬던 사람들이, 어느 날 떠나갈 때, 그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쓸쓸한 외로움입니다. 그때 가족이 힘이 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버텨주는 남편이 있습니다. 별 내색하지 않고 응원해주는 아내가 있습니다. 말없이 제 자리를 지켜주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힘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순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아닙니까? “아득한 나의 갈 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입니다. 먼 길을 가는 데, 친구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득한 길이라도, 친구와 함께 가면 갈만 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순례 길을 동행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외로운 가을날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잎이 다 저버린 나뭇가지를 봐도 쓸쓸하지 않습니다. 외로움의 눈물은 사라지고, 감사의 눈물이 흐릅니다. 영혼은 평안하기만 합니다.
2절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평범한 사람은 응답하신 기도에 감사합니다. 비범한 사람은 거절하신 것에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기도한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건 내 생각일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한대로 되면,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근시안적입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라도, 불과 몇 시간 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급하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지금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걸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떼쓴다고 금식한다고 다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주 위험하지 않다면, 교육상 줘볼 수도 있습니다. 애 키우다보면 애가 뜨거운 것을 만지려고 합니다. 그럼 부모는 기겁을 하며 말립니다. 저는 화상을 입을 정도가 아니라면, 한 번 만져보게 합니다. 그래서 뜨거움을 맛보게 합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앗 뜨거’ 하면, 손을 끌어가서 만지라고 해도 안 만집니다. 뜨거운 맛을 봤으니까요. 작정 기도하고 금식해서, 하나님께 빼앗듯이 응답받은 것을, 기도의 승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교육상 줬을 수도 있습니다. 거절이 응답인데도, 억지로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교육 목적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절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병이 있어 3번 기도했습니다. 그 지병이 선교와 목회에 치명적인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건 기도를 세 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무슨 응답을 받았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이 응답이지, 사실상 거절이다 다름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 알았습니다” 하고 수긍했습니다. 그는 평생 거절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지병을 안고도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헤쳐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수준 높은 감사를 말합니다. 우리의 감사 수준을 한 차원 높였으면 합니다. 우리가 잘 돼야 하고, 또 실제로 잘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잘 될 때만 하는 감사는 평범한 감사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그런 감사로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사람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왕 해야 하는 감사라면, 하나님은 물론이고 사람까지도 감동시키는, 감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감사 그릇에다, 모든 것을 채우십니다. 작은 것에 넘치는 감사를 할 때,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아픔도 감사, 기쁨도 감사, 이는 말이 쉽지 정말 아픔에 감사하기 힘듭니다. 아픔 당시에 죽을 것 같은데,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아픔 당시는 힘들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픔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 지금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혹시 압니까? 오프라 윈프리처럼 아픔 속에 사명이 있을지. 힘들겠지만 아픔에 믿음으로 감사해보세요. 그럼 머잖아 아픔이 감사거리로 바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은, 우리가 절망하는 것입니다. 절망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위로하여 주십니다. 성령님이 친히 위로해 주시기도 하고, 위로의 사람을 붙여주시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얻게 됩니다. 그 때의 감사는 측량 못할 은혜의 감사이고, 크신 사랑의 감사입니다.
3절 ‘길가의 장미 꽃 감사, 장미 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사랑의) 가정, 희망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길가의 장미 꽃 감사, 장미 꽃 가시 감사”
꽃 중에서도 장미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입니다. 장미는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1978년, 백순진 작사 작곡, 사월과 오월 노래)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장미가 특별한 점은, 돋아난 가시 때문일 것입니다. 장미가 장미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몸에 난 가시 때문입니다. 가시가 장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장미를 가시를 빼고, 꽃과 향기에만 감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주위를 보면 가시 같은 사람이 한 명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항상 찌르기만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가 나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나에게 장미입니다. 그 사람 들으라고 그 사람 앞에서 이 노래를 자주 부르면 어떨까요?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장미꽃 감사를 해보세요. 가시 같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장미꽃 가시 감사를 해보세요.
“따스한 따스한(사랑의) 가정 희망주신 것 감사”
가정에 감사해야 합니다. 요즘 살기 힘든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전라북도에서 가정이 멀쩡한 것만도 감사할 일입니다. “이런 집구석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감사의 눈으로 다시 보세요. 오늘 가족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씩 건네보세요. 그러면 사랑의 온도가 1도는 올라가 ‘따스한 사랑의 가정’이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가정치고 불행한 가정 없고, 불평하는 가정치고 행복한 가정 없습니다. 특히 밥 굶지 않고 살아간다면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밥 굶지 않고 산다는 게 어딥니까? 지금도 이 땅에는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꼭 아프리카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밥술을 뜨면서 진심을 담아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건강이 있다면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게 더 중요합니다.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과거나 현재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기쁨도 잠시이고 슬픔도 잠시입니다. ‘아이고, 저런 일 당하고 어떻게 살아가나’ 싶은데, ‘살다보니 살아지더라구요’ 합니다. 기쁨과 슬픔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 평안입니다. 기쁨이 커도 하늘 평안이 없으면 별 유익이 없고, 슬픔이 커도 하늘 평안이 있으면 그게 진짜입니다. 우리 안에 하늘 평안이 있습니까? 그럼 된 것입니다. 잠시의 기쁨과 슬픔에 요동하지 말고, 믿음의 중심을 잘 잡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겐 내일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의 소망’ 그건, 우리가 평생 감사할 제목입니다. 내일의 소망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유했으니, 영원토록 감사하며 사는 게 당연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곧 믿는 자의 삶의 고백이 감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감사는 ‘은혜 입은 것이나 기쁨이나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이,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가족들이나 사람들을 향해서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감사가 습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반댓말 중 하나인 불평은, 거의 100% 인간의 습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불평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성도의 본성은 그 반대인 감사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은 감사를 습관으로 만들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사를 여러분의 인격이 되게 하십시오. 감사는 성도의 인격이 되고, 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감사가 이루는 놀라운 기적들을 여러분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일단 감사하고 보세요. 감사부터 하고 나서 생각해 보세요. 감사주일을 계기로, 감사가 회복되고 확장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저희가 억지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감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명령하심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받은 저희들이, 당연히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원망과 불평에 붙잡혀 살때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얻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실망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제 혹시라도 저희안에 감사 대신 불평과 원망이 생긴다면, 빨리 깨닫고 감사를 회복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 시간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또한 내게 꼭 필요한 것도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닌, 하나님이 가장 적당한 때에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무때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과 인내를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시고,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관계없이, 범사에 감사하는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께 이시간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미 주신 큰 은혜를 이웃과 나눔을 통해서, 더 큰 감사와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