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體觀을 밝힘
(A) 욕계의 구품
觀을 체득함을 밝힌다는 것은 만약 생멸문이라면 우선 析智[분석적이며 논리적인 지혜]를 써서 견혹을 단멸하고, 나중에 또한 석지로써 사려를 무겁게 하여 사혹을 단절하는 것이다. 생멸이 없는 문은 처음에는 견혹을 체달함으로써 공관에 들고, 나중에는 또한 사혹을 체달함으로써 사려를 깊게 하는 것이다. 별도로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지금 탐욕의 假를 체달하여 공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欲惑의 九品에서 하나하나의 품마다 일어나는 것에 바로 三假가 있는데, 여자에 여섯 가지 욕, 이른바 色欲, 形貌欲, 威儀姿態欲, 言語音聲欲, 細滑欲[피부가 부드럽고 매끄러울 것을 바라는 욕망], 人相欲을 지니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분별하여서 언급한다면 이 여섯 가지 욕망은 만일에 수행인이 접촉하면 능히 모든 根[감각기관]을 오염할 수가 있어서, 내적으로는 혈맥을 움직이고 탐하는 相[생각 및 모습]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초과보살도 아직 단멸하지 못한 바이니 어찌 하물며 범부랴. 「나다」[난다, 석존의 조카로 석존 성도후 귀성 사흘에 난다의 결혼식이었는데, 출가시킴. 난다는 자주 약혼녀에 대한 애욕으로 번민이 심하였음. 난다가 약혼녀 집을 나올 때 “일찍 돌아오세요”라는 인사말이 가슴을 꿰뚫어서 잊지 못하고 수행을 하지 않았던 것을 석존께서 신통력으로 원숭이와 天女를 나타내어 난다에게 보이고는 설유하시어 난다가 아라한과를 얻게 하셨음. 사람들은 난다가 여자를 미끼로 하여 化生되어진 것이라고 평하였으나, 부처님께서는 금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생에 당나귀였는데 상인에게 여자를 미끼로 하여 끌려왔던 것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임]의 나머지 習氣는 중생들 속에서 여자를 보면 우선 함께 言談을 하고 욕망의 남은 습기를 동하는 것이었으니 하물며 正使[번뇌의 餘習 또는 殘習에 대한 반대말로서 번뇌의 주체를 이름]이랴. 「법화경」에서 말하였다.
“여인의 몸에서는 능히 욕망의 상념을 일으킬 수가 있는 상을 취하여서 설법을 하지 않는다.”
만일 이 相을 취하여 먼지가 意根을 동하여[이때 먼지란 法塵인 것임] 욕심을 일으킨다면 바로 이것이 因成假이고, 상념이 일어남이 상속되어 단절하지 않고서 드디어 行事를 치룬다면 바로 相續假인 것이며, 욕망이 있는 마음의 상은 욕망이 없는 마음과 다른 것이니 바로 相待假인 것이다. 假나 虛는 진실이 아닌 것이니 결국 이것을 헤아려서 道理라고 하여서는 안된다.
이 욕심을 관하는 데서 그것이 根으로부터 생긴 것인가, 먼지로부터 생긴 것인가, 공동의 것이라 할 것인가, 따로 떨어져[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음] 생긴 것이라 할 것인가? 만일 근으로부터 생겼다고 하면 아직도 먼지에 대하지 않았을 때에도 마음은 응당 스스로 일어났을 것이며, 만일 먼지로부터 생겼다고 한다면 먼지는 이미 他[자기가 아닌 것]인 것이니 나에게는 무슨 관여가 있겠는가? 만일 두 가지가 함께 한 것이라면 응당 두 마음이 일어났어야 할 것이며 만일에 因이 없이[즉 두 가지가 다 떨어져서 관계하지 않고서], 생겼다면 이 因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四句에 欲(이 올 因이 있는지)을 추구하여 보아도[여기에서 四句라는 것은 욕심이 생길 因의 四句라는 말로서 根과 먼지를 각각 單으로 하고 共을 俱, 離를 非로 하여 單, 單, 俱, 非의 四句로 하여 따져 보았다는 말임] 욕이 올 곳[도리, 인]이 없었다. 이미 올 것이 없었다면 또 역시 갈 곳도 없는 것이니, 욕이 없고 句도 없고, 옴도 없고, 감도 없으니 결국은 空寂한 것이다.
利根의 사람은 이와 같이 관할 때 假觀을 생각하는 하나의 品이 사라지고 일부분의 진리가 밝게 나타난다. 가령 아직도 相應[결부되는 일]하지 않더라도 四悉壇을 써서 信과 法을 회전[활용]하면 훌륭히 지관을 조화하여 바로 상응을 얻게 되니, 하나의 품의 생각을 끊고서 일부분의 진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만일 둔근의 사람이라도 因成假에 의지하여 관하여도 처음의 품이 아직 사라지지 않으면[三界 九地의 번뇌에 각각 九品이 있는데, 욕계의 九品 사혹이 여기에서의 논의 대상임. 욕계의 구품 사혹은 七生을 윤택하는데 상, 중의 두 품을 단절하면 一來果인 第二果를 증득하며, 하품을 단멸하면 第三果인 不還果를 증득한다고 함. 그 구품과 七生과의 관계는 가장 큰 번뇌인 上上은 二生에 상응하고, 上中과 上下는 각각 一生, 中上이 一生, 中中과 中下는 함께 一生, 下上은 半生, 下中과 下下는 함께 반생에 상응함] 다시 相續假에 의지하여 관하여야 한다. (즉) 앞의 상념이 멸하고서 생긴다고 할 것인가, 멸하지 않고 생긴다고 할 것인가, 멸도 아니면서 동시에 멸하지 않고 생긴다고 할 것인가, 멸도 아니면서 또 동시에 불멸도 아니면서 생긴다고 할 것인가? 만일 멸하고 생긴다면 멸은 능히 생할 수가 없는 것이며, 만일 멸하지 않고 생긴다면 멸하지 않으면 바로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만일에 멸이면서도 불멸이고 생긴다면 성품이 서로 어긋나는 까닭이고, 만일에 離이면서[멸도 불멸도 다 상관없이] 생긴다면 이것은 바로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四句는 欲이 없으며 또한 四句에 의함도 없다. 이와 같이 관할 때 바로 응당 (공관에) 들어가서 生과 法의 두 空을 이룸을 얻을 것이다. 만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四悉壇을 교묘히 수행하여야 하는데 그 수행으로도 또 들어가지 못한다면 더 相待假에 의지하여 관을 이루어야 한다. 앞에서 예를 든 것이니 깨칠 수 있으리라. 初品이 이미 그러하니 후八品도 역시 그러하고, 탐욕의 九品을 파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고, 진에, 우치, 아만의 九品을 파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앞의) 보기로서 스스로 가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다시 더 자세히는 적지 않겠다. 구품의 진실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理不生[이법의 불생불생]이며, 구품의 미혹이 다 없어짐이 바로 因不生이고, 욕계의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果不生이다. 불생인 까닭에 불멸이니 바로 이것이 無生法忍인 것이다. [이상]
물음; 욕계의 번뇌는 구품으로 정하여져 있는가?
대답; 만일 「성실론」이라면 無礙道[四道, 즉 加行道, 無間道, 解脫道, 勝進道 중 무간도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소승에서는 번뇌가 자기에게 작용하여 오는 힘을 단절하는 위계를 말하고, 유식학에서는 똑바로 직접 번뇌를 단멸하라고 하는 위계임]에도 항복시키고 解脫道[무간도에서 번뇌를 단절하고 난 후에 생겨나는 無漏의 경지를 담은 위계]에서 단멸하라고 다만 九品을 논할 뿐이지만, 「아비담론」에서는 方便道와 勝進道의 두 道의 위계에서 항복시키고 無礙道에서 단멸하며 解脫道에서 증득하여 無惑의 도리[處]를 증득한다고 한 것이 있다. 여러 경전에서 많이 쓰고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도 잠시 이것에 의지한 것이다.
만일 견혹의 假로부터 觀에 들어간다면 無漏에 대한 마음이 급하여 단멸을 관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여 품질(品秩; 秩은 차례 질로서 차례로 이어지는 물건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 좋음. 여기에서의 논의 대상이 九品에 대한 것이고, 구품 이외에 또 더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임)을 논하지 못한다. 도 닦는 데는 容與[安存할 용, 도울 여 또는 따를 여로 새김. “천천히 유연하게”의 뜻임]하여야 방편이 있을 수가 있다. 훌륭하고도 교묘히 修習하여서 信, 法을 활용하여 더욱 勝進品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주주 승진하면 마땅히 알아야 하되 品秩이 또한 많은 것이니, 어찌 다만 九品만 있다고 할 것인가. 아홉이라는 것은 크게 분류하여 말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