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길 양편의 플라타너스에는 5월의 신록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다닐 때에는 없었던 나무들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모교의 교문통을 접어들었다. 졸업하고 꼭 35년 만에 처음 갖는 동기 동창회다. 이 모임은 지금 그 학교의 육성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주선한 것이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쌓였던 이야기나 나누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흩어진 동창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고 몹시 애를 쓴 모양이었다. 학교 앞이 바로 간이 버스 정류장이다. 내가 내렸을 때에는 대여섯이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뒤이어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얼굴들(사실은 오래된 얼굴들이지만)이 나타날 때마다 서로 부둥켜 안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끼리는 그동안 얼굴들을 잊어서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주름살이 늘어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동안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뒤늦게서야 부둥켜안는 정경들이 가끔 벌어졌다.
“야! 이거 배차뿌링이 아녀?”
“아! 너 외총쟁이구나”19
어릴 때의 별명이 마구 튀어나왔다. 말투도 마찬가지였다.
배차뿌링이(배추뿌리)는 속이 잘 썩는다. 우리가 일제 건강진단을 받은 것은 아마 2학년 때이었을 것이다. 그때 읍에서 나온 교의校醫 선생님은 유달리 한 아이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여러번 들이댔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였다. ‘배차뿌링이’는 그때에 업은 달갑지 않은 별명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배차뿌링이’는 이제 재래종 무처럼 토실토실 살이 쪘다. 모 회사의 좋은 자리에 있다는 이 얘기를 전전해서 들은 일이 있다. ‘외총쟁이’는 한 쪽 눈이 좀 시원치 않아서 항상 찡그리고 다녔다. 포수를 하면 매력이 더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치과 쪽으로 성공한 편이다. 예정시간이 한 시간이나 넘어서야 겨우 여남은 명이 모였다. 외총쟁이, 배차뿌링이를 비롯하여 말코, 샹깔놈, 종이딱지, 보릿자루, 게까도리(싸움닭) 마치 대가리…. 이제는 별명도 희미한 친구들.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던 친구들이 이만큼 모이기도 사실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욕심으로는 시쁜 생각이 들어 서로 위로를 하면서 서운한 마음들을 달랬다.
우리는 교문통을 지나서 두 개의 문설주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있는 교문을 들어섰다. 옛날 ‘정안공립보통학교正安公立普通學校’라는 큰 나무현판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지금 철판에 아담하게 ‘정안국민학교’라고 새겨져 있다. 실내보다도 차라리 운동장 가의 나무 그늘이 더 시원할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모임인데 버젓하게 격식을 차려야 한다고 몇 사람이 우겨서 회의장소는 예정대로 교무실로 정했다. 오랜만에 들어가 보는 교무실이다. 어릴 때에는 선생님이 계시던 이 방은 황송스럽기만 한 방이었다. 어쩌다가 불려서 들어갈 때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었다. 나이가 어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선생님들이 항상 엄숙하고 두렵게만 생각되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뒤에도 눈이 있다.”고 하시면 그 말을 꼭 믿고 다들 꼼짝도 못했다. 사실 판서를 하시면서도 용하게 선생님은 장난꾸러기들을 잘도 골라내셨다. 뒤에 눈이 없으시다면 그렇게까지 잘 아실 수가 없다고 아이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장난꾸러기는 대개 일어서서 팔을 뻗치거나 아니면 종아리를 맞았다. 이러한 처벌들은 가끔 아이들의 마음을 야속스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 뒷날까지 마음 속에 담아두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이 결코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되는 것이다. 실상 그때의 선생님들은 지긋지긋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사상’을 지니셨던 분들이 적지 않으셨을 것 같다. 매를 때리시면서도 선생님들은 아마 ‘어서 커서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속으로 울부짖고 계셨는지도 모른
다. 이렇게 선생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속으로 속으로 정이 흐르고 있었다고 다들 믿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 발짝 물러서서라도 스승님의 그림자는 밟지 않으려고 조심을 했던 것이다.
인정이 각박한 탓일까? 이제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뒤에 달린 눈은 고사하고 앞에 달린 눈도 안 믿을 만큼 약삭빠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와서 스승의 그림자를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확실히 학생들이 지나치게 약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수룩한데 없이 있는 대로 다 까놓고 사는 것처럼 멋없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식자識者들 사이에는 “좀더 우직하게 살자! 좀더 바보가 되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예나 다름없는 이 교무실에 발을 들여놓으며 나는 잠시 어떤 감상感想에 사로잡혀 있었다. 교무실에는 미리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교장선생님을 비롯해서 몇 분 선생님들이 나와서 우리의 모임에 경의를 표해 주었다. 교장, 교감 두 분을 빼놓고는 대개가 제자들이었다. 사범학교 아니면 교육대학 출신의 ‘제자 선생님’들이었다. 옛날의 어린 학생은 이제 반백이 다 되어서 여기 졸업생 겸 내빈으로 참석해 있고, 제자들은 옛날의 황송스러운 선생님의 위치를 대신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세월 앞에는 다 허무한 것이다. 아니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분하고 억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고 쓰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조촐한 모임답게 회의도 원만하게 진행이 되었다. 임원선출, 회칙통과, 주소록 작성, 다음 모임의 날짜, 기념품 증정, 사진촬영 등 격식을 갖춘 하례가 대충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얘기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고 보니 화제는 너무도 풍성했다. 다들 걸어가는 길들은 달랐지마는 나름대로 출세하고 성공한 친구들도 있다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화제는 되도록 그런 언저리에는 머무르지 않았다. 실상 누가 출세를 했으면 얼마나 하고 성공을 했으면 얼마나 했을 것인가? 그보다는 얼마나 진지하게 살았으며 얼마나 부끄럼없이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일일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안목에서 본다면 성공이나 출세도 다 도토리 키 겨루는 격으로 오십 보 백 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은 정말 어줍은 일이다. 이런 자리의 화젯거리로는 더구나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갑자기 30년이나 40년쯤은 젊어진 기분이 들어서 이야기는 그저 즐겁고 반갑기만 했다. 다들 어떻게 그동안 그 많은 사연들을 간직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씨름판에 뒹굴던 일, 학교 앞 시냇물에서 피라미 잡던 일, 실습실의 오이나 토마토 따먹던 일, 책상 속의 누룽지 뒤져먹던 일, 쉬는 시간에 공 한 개 내주면 수십 명 학생이 와! 와! 소리치며 쫓아다니던 일, 냉상冷床속에 싹 튀우려고 묻어둔 고구마 캐먹던 일…. 그때 선생님들은 고구마의 싹이 적게 튼 것을 아마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선생님이 아셨더라면 종아리를 맞았을 일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누구나 다 거리낌없이 터놓고 지껄였다. 이미 시효는 다 지난 일이니까. 별스런 것도 없는 일들도 지나고 보면 다 즐겁고 재미있는 회상속에 묻히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에 얽힌 일들이 가장 많이 화제에 올랐다.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도망치던 일이며 쪽지를 써서 책상 속에 넣던 일, 그리고 개구리를 잡아서 빈 도시락 속에 넣어두던 일이며.
사실 그때 나이먹은 학생들은 처음으로 순정에 눈이 트던 때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각하면 정말 순진한 놈들이었다. 이야기의 열도가 어지간히 식었을 때 우리는 일단 장소를 옮기기로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점심은 처음부터 점찍고 있던 대로 역시 ‘배차뿌링이’가 자진해서 맡고 나섰다. 우리는 교무실을 나와서 냇가의 보리밭 시앗길로 걸었다. 장마당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어느새 어린아이들처럼 손들을 꼭 잡고 있었다. 주름진 손들을 서로 위로하듯이 언제까지나 놓을 줄을 모르고 걸었다.
보리밭 위에는 향기로운 바람이 끊임없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흰구름은 우리의 마음처럼 둥둥 떠가고 있었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저의 유년시절 농촌 고향의 풍경이 아른아른~다가 갔습니다
아침마다 동네 나이 또래끼리 모여서 학교 가던생각, 가는길에 보리밭길도 있었고~~ 모두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