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 고인돌 있다고 부산광역시청에서는 여태 공표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앞서나가 미안하다. 16톤의 거석 고인돌로서!
크기 길이27m 넓이23m 높이21m 무게를 16톤으로 추정한다. 산의 경사도 25도 정도 해발고 300m 사진처럼 괴임돌의 고인돌로 추정함. 바위전체를 고임돌이 떠받이고 있으나, 상석돌 확인이 쉽지않다. 공통점은 바로 정착 농경이다. 사방을 돌아다니는 수렵인들과 달리 농경인은 농사에 유리한 땅을 점유하고 대를 이어 산다. 한정된 땅에서 살아가려면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공동 기념물을 만들어 단결할 필요가 있었다. 벼농사처럼 물을 함께 관리해야 하는 경우 공동체 협동은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함께 모이는 의례 공간을 만들어, 조상을 기리고 풍년을 빌며 이웃 마을과의 유대를 확인하는 공간이 바로 고인돌이다. <강인욱 박사 논증에 따라>
한반도의 지리 환경도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한반도의 3분의 2는 산지다. 백두대간의 끝 장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능선이 뻗어 있고, 춘천 우동 석대 송정천의 발원지가 장산에서 시작된다. 수십t의 돌을 채석할 수 있는 암석군, 너덜겅이 널려 있으며, 물길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그 돌을 나를 수 있었다. 세계 곳곳의 고인돌이 하천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길과 경사를 읽는 지혜, 그리고 주민사이의 신뢰. 그 세 가지 조건이 한반도에서 가장 잘 갖춰져 있었기에 거대한 고인돌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350톤의 김해 구산동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로, 이미 경남 해안가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고인돌이 사라지는 시기였다. 같은 시기 호남 지역에서는 고인돌 대신 고조선 지역에서 남하한 다뉴세문경(잔줄무늬거울)과 화려한 청동거울을 사용한 샤먼들의 무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기후 환경 변화로 벼농사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많은 사람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고인돌 대신 고조선 지역의 새로운 청동기와 제사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이 고인돌들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기원전2세기 장산국은 장산과 하천 그리고 300여명의 부족민?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거대한 고인돌을 세우며 협력하는 길을 택했을수도 있다. 한반도 각지의 선택은 다소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고인돌과 청동거울의 시대를 거친 한반도는 빠르게 삼국의 태동기로 나아갔다. 삼국시대에도 돌을 사용해 거대한 무덤을 쌓는 전통이 이어졌고, 고인돌을 만들며 축적된 건축 기술은 면면히 계승될 수 있었다. 이 고인돌을 중심으로 주변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장산국의 역사가 들추어질 것이다.
사진지점으로 부터 동편 500m에 아래사진 자연신숭배 제단 있다.<장산고대 자연신 숭배한 역사의 제사터 2022.1.7 글 옮김.>
이곳은 옛 장산국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원드렸던 제사터로 보여진다. 북편으로 250m거리에 평활한 잔솔밭은 6.25동란 때 영국군 부대가 주둔했던 훈련지다. 이곳을 5년전부터 장산백년대계의 핵심 보호지역 하나로 관리하자고 건의 했는데 관할 행정청 구립공원계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남쪽으로의 너덜겅지대는 또다른 지질공원의 역사인데도.......
"서기 79년경 거도장군이 장토야에서 이곳 까지 말달려 장산국을 멸했다."고 삼국사기 제44권은 전한다. 그리고 설화는 고선옥이 선인을 만나 세운 부족국가라 하니 300년은 영속되어 온 것 같고 그들의 생활 흔적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하간 자연숭배사상의 흔적 보이는 역사의 제사터이기로 보존의 필요성 역력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는 것이다.
첫댓글 고인돌 발굴조사와 더불어 장산국의 역사도 다시 빛나길 바랍니다.
구곡산과 물망골의 돌들 서로 성질이 비슷하다. 화강암계열이 대부분으로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이곳 선사인들은 거석에 의한 문화를 숭상한
토테이즘 사상이 강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