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四三三 "
" 四三三 " 이 세개의 숫자는 평생 뇌리에 박혀있다. 흰 종이가 담벼락에 가로로 길게 붙여져 있다. 그 앞으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발돋움을 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질퍽거리는 진눈개비가 발목을 잡지만 눈을 부비면서 다시 뚫어져라 응시한다. 기대에 찬 눈망울은 순간 초점을 잃고 고개를 떨구며 돌아선다. " 어~엄 ~마 ~ 아 , 저기~ 저기에 붙었어 ! " 기쁨의 탄성을 더뜨리며 서로가 부둥켜 안기도 한다. " 엄마 , 나도 저기 붙었어 " 걱정으로 어둡던 내 오마니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바뀐다. " 그래, 수고했다. 어서 빨리 아버지한데 가자꾸나 , 많이 기다릴게다 " 평소에 별로 말이 없으신 내 어머니가 장남인 아들 손을 잡아 당기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그토록 엄하시기만한 내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니 믿기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관심과 끊없는 사랑이 그지없다는 것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사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듯도 하다. 1963년도에 그 유명한(?) 동북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유명은 무슨 그 당시는 3류나 4류에 속한다고 자칭 타칭 불리던 고등학교이다. 그래도 공부 좀 한다는 자존심이랄까. 세 녀석들이 S대학교를 반드시 가자는 약속에 약속을 한다. 그것도 졸업 후에 처음 접하는 중식당에서 고량주를 나누면서 말이다. 불을 보듯 모두 낙방의 쓴 맛만이 입맛을 다시게 한 것이다. 재수를 하곤 두 녀석은 Y대학교로 방향을 틀자고 한다. " 사내가 한번 뺀 칼을 썩은 호박이라도 베어야 할 것 아니냐? 엉 ! 너희들이나 가거라 " 무슨 오기인지 자존심인지 철없이 겁없는 노릇을 한 바보가 아닌가. 두 녀석은 Y 대학에 모두 합격에 기쁨을 만끽하지만 나는 역시나 쓰디 쓴 고배를 또 다시 마셔야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엉뚱한 생각도 가져본다. 2차 대학인 성대약대도 네가 원하던 한국의 최고라는 S 대학교 공대만큼은 아니라도 좋은 대학이라는 누님의 종용이다. 기억으로는 1964년 1월 하순이 아닐까. 마지 못해 원서를 접수하곤 12 :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에 또 다시 악몽이 엄습하는 게 아닌가. " 四三三 " 초조한 마음으로 수험번호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60명의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입학시험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모습이 바로 엊그제의 추억으로 다가온다. 1900년대 초에 이북에서 태여나신 어머니이다. 열여섯에 네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시집을 온 것이다. 그 당시의 결혼 풍습으로 얼굴도 보지 못 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 부모님들의 약속만으로 거역할 수도 없는 관습으로 불문율이었을 것이다. 학교라는 문턱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시집살이의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고정틀에 얽매인 시대상이다. 시어머니에게는 가타부타는 언감생심으로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 볼 수 없는 생활이다. 자식들만 줄줄이 아홉명이나 낳았으니 어머니 당신의 삶은 어떠했을까. 광(창고)에는 추수해 놓은 곡식이 가득하다. 자물통으로 잠꿨으니 매 끼니의 식량의 양도 주는 시어머니의 손끝에 달려있다. 자식에게 주고나면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밥은 언제나 모자란다. 솥 밑바닥에 늘어붙은 솥올치로 겨우 주린 배를 달래야 한다. 도끼로 광의 열쇠를 때려 부숴야만 하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서슬퍼린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더 이상 참지를 못한 것이다. 재 너머 사레 긴 밭을 어린 자녀를 등에 업고 농사만을 지울 수밖에 방법이 없는 나날인 것이다. 밥상 위에 어머니의 밥그릇은 보이지를 않는다. 멀건 솔올치(누렁지) 그릇이 밥상 아래에 있을뿐이다.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도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불평 한 마디 입 뻥끗도 못하신 어머니이다. 오직 자식만을 위한 희생만이 내 오마니의 삶의 전부이리라. 항상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병원은 생각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잔소리 한번 나무람 한 마디 듣지를 못하고 자랐다. 이런 오마니가 맏 아들의 대학입시 발표날에도 입학식에도 참석 하셨단다. 최근에야 추석에 어머니가 계신 성묘하는 날에 큰 누님에게 듣는다. 전혀 기억도 없으며 생각도 못한 멍청한 장남이란 녀석의 무관심이다. 그저 죄송스럽고 미안한 마음만이 전부이다. 오늘 이 자리 성대약대 12회 동기들의 정기월례회를 진행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열다섯 명의 동기들이 즐겁게 떠들며 웃는 모습이 새롭기까지 하다. 재시험을 보곤 교수님 자택도 찾아가서 애원아닌 구걸도 마다 하지 않았다고 자랑삼아 토해내기도 한다. 무슨 과목을 어떤 내용을 배우며 실험을 하면서 졸업을 했는지도 모르겠단다. 약용식물학 생약학 무기약공 기기분석 약제학 약물학 유기화학 또 무엇이더라. 과목 이름도 교수님 성함도 제대로 읊지 못하는 게 아닌가. 나도 여기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고 예외도 아니다. 1학년 때 자연과학개론(당시 3학점)을 과락으로 3학년 때에야 학점을 다시 취득한다. 4학년 말 약사국가고시 준비에 정신이 없는 때에 교무과에 호출을 받는다. 미취득한 3학점이던 과목이 2학점으로 바뀌었으니 졸업학점에서 1학점이 미달이라는 설명이다. 학점 미달로 졸업이 불가하단다.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이란 말인가. 모든 과목의 학점을 모두 취득했는 데 말이다. 덧붙여 하는 말이 수강 신청을 하지는 않았는데 시험을 봐서 1 학점짜리 과목이 있단다. 담당 교수 자택으로 달려간다. 다음 날 아침에 교수님과 교무과로 찾아간다. 시험지는 그 당시는 교무과에 있으니 수강신청으로 받아들여준 사건이다.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흐르고 캄캄하던 머리속이 환하게 밝아오는 순간이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건강하게 생존이라도 하고 계신지 안부도 알지 못한다. 교수님께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 한 못 난 제자가 아닌가. 졸업을 못했으면 오늘 이 자리 입학 동기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있었을까. 꿈을 꾸듯이 대학 4년을 보낸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어쩌면 그 때 S공대를 낙방한 것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전화위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한다. 70대 후반으로 80을 바라보고 있는 노객이건만 아들의 연세한강병원에 약사로 근무약사로서 출퇴근하는 행복한 약사가 아닐까. 혼자만의 자위를 하곤한다. " 四三三 " 입학시험 번호를 확인 하시곤 그토록 환하게 웃으시던 나의 오마니가 오늘따라 무척이나 그립다.
2019년 4월 20일 무 무 최 정 남
★★★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동기들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 본다. 졸업후에 처음 만난 얼굴은 미국에서 날아온 한정숙, 한국에 살고 있으나 1968년 졸업후에 첫 모습을 나타낸 이필재 그리고 미국의 임문혁과 한국의 김양자 김계주 마길군 김병선 임재명 김건일 정낙소 차기봉 임규상 박호현 조홍구 최정남등이다. 며칠전에 자리를 함께 했던 서정식부부와 미국의 오승홍 이주혁 이종환과 김공자부부 최우애 이문웅 금현숙이가 있다. 속절없이 말 한 마디 못하고 훌쩍 떠나버린 유경환 김영환 계충의 친구들도 몸은 하늘을 날고 있지만 마음만은 우리들과 함께 하리라고 믿는다. 오늘은 불참이지만 윤양균 차낙규 이성연 황영희 최헌두 박병구 강주수 이명언 김태호 황영숙 최돈은 함재건 김병욱 신충웅 모두가 한 마음이 아니겠는가.그저 아프지만 마라. 한달에 한번이면 더욱 좋고 아니 두달 뒤에 그것도 아니면 세달 후에라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아프더라도 기어서가 아니면 지팡이라도 의지하여 나오거라. 임규상이도 골프에 넋을 놓고 즐기다가 미끄러짐에 발목에 골절상을 입은 조홍구도 절뚝거리며 목발에 의지하며 참석치 않았는가. 성대약대 12회 동기들은 나에게는 아니 우리들에게는 인생의 첫 사랑과 같은 잊지못 할 연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스스럼없이 언제든 보고싶고 우정의 향기를 가득 담은 한잔 술이 이토록 좋을 줄이야. 저 푸른 동해 바닷가의 거센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온다. 쓸려 나가는 썰물에 나의 발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또 다시 다시 밟아보는 바닷가 모래사장은 역시나 내 발자취를 묻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거칠은 파도소리가 끝없이 그리워지고 듣고픔은 동기들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아닐까.
평생을 약사라는 명찰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어쩌면 삶의 방향도 꿈도 같은 동반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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