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을 것에 집착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이놈이 하는 짓을 보면 하루 종일 먹을 것을 탐색하는 일이 전부다. 코로 뭔가를 킁킁거리고 앞발로 파헤치고 아가리로 뭔가를 씹어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사람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욕심 중에서도 제일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식탐일 것이다. 지금은 돈버는 일에 너무 바빠서 ‘먹는다’는 본질적인 행동이 소홀히 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뱃구레가 넉넉할 때의 이야기고 당장 한 끼라도 굶으면 ‘먹는다’는 것에 우리 인생이 걸려 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한 번은 우연한 일로 2주 정도 단식을 해 본 적이 있다. 아니 포도즙을 마시면서 했던 포도 단식이라 엄밀한 의미에서는 절식이라고 해야겠다. 그 때 느낀 건데 사람은 참으로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는다는 행위가 우리 삶의 중심에 놓여 있었었다. 내가 굶주린 까닭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보면 정말 끊임없이 먹어대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특히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는 하다못해 과일이나 삶은 계란이라도 반드시 먹을 것이 놓여졌다. 겨우 길어야 열 두세 시간 활동하는 중에 하루 세끼 먹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호사요 낭비다. 그것뿐이겠는가. 그걸 마련하고 준비하고 치우는데 또 얼마만한 시간이 허비되겠는가. 거기에다 간식이다 주전부리다 쉴새없이 입을 놀리니 내 하루는 가히 강아지가 하는 일과 크게 다름이 없어 보인다.
나 역시 먹기를 즐긴다. 부모님 덕분에 좋은 이와 위장을 가지고 태어나 먹는 것에 부담을 느껴본 적이 없다. 다만 아내의 ‘나이 들면 음식을 사양하는 미덕도 좀 배워라’ 하는 충고와 돌격형 뱃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절식하고 있을 뿐이다. 크게 내로라하는 미식가는 아니지만 아무거나 잘 먹고 즐길 줄은 안다. 인간이 먹는 것은 거의 다 먹어보려고 노력하고 그 모든 음식들에 한결같이 독특한 맛이 있다는 것에 감탄한다. 음식은 또한 단순한 미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음식마다 풍기는 독특한 향취가 있고 독특한 질감이 있고 독특한 색깔이 있다. 그리고 음식은 놓여지는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그 맛도 달라진다. 같은 음식이라도 그 재료와 만드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서 그리고 먹는 사람의 식욕과 기분에 따라서 그 맛이 얼마나 천차만별로 달라지는가. 사람 주변에는 항상 음식이 있었고 또한 음식 주변엔 항상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음식 이야기는 자연스레 사람 이야기로 이어진다.
세상엔 고급 음식도 많고 진기한 음식도 많다. 그러나 제일 맛있는 음식은 역시 편하게 먹는 음식이다. 정다운 사람끼리 먹는 음식, 적절한 때에 먹는 음식,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이 맛이 있다. 음식에는 항상 인정이 섞여 있고 그 음식하면 꼭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마는 음식 또한 잊혀져 가거나 없어지는 것이 많다. 있다 하더라도 제 맛을 잃은 것들도 많다. 시대가 변하니 음식도 변하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내 삶에 맛과 향과 색을 내고 거기에 추억까지 더 하는 그 음식들의 기억까지 변할 수가 있으랴!
아무리 어린애들이라도 대개는 끼리끼리 논다. 잘 사는 집 애들은 잘 사는 집 애들끼리, 못 사는 집 애들은 못 사는 집 애들끼리 서로 어울린다. 국민학교 이 학년 때 나는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시절에는 아무리 친했더래두 대개 학년이 바뀌고 반이 갈리면 서로를 잊어먹고 만다. 더구나 그 친구는 굉장히 가난한 집 아이라서 나와의 사귐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도 못했고 코도 좀 들리고 그리고 말하는게 촌스러웠다. 처음에 나는 그 친구가 그저 그런 편이었지만 그 친구는 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노골적으로 내 옆에 붙어 다녔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때로는 좀 성가셔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의 관심사는 반에서 누가 제일 쎄냐 하는 것이었다. 공부 시간에 손가락으로 순위를 꼽아 보기도 하고 내가 몇 번째인지 곰곰이 가늠해 보기도 했다. 아주 싸움꾼으로 이름 난 놈들도 있었고 계집애처럼 순해 빠진 놈들도 있어서 상위와 하위는 쉽게 결정이 났다. 그러나 나처럼 어중때기들의 순위 매기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실제 싸워볼 수도 없고 이것저것 관찰해서 속내로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저 놈은 눈매가 감때 사나워 아무래도 나보다는 한 수 윌 것 같아. 저 놈은 허세만 부리는 부잣집 아들놈이라 아마 내가 눈을 크게 뜨면 겁을 집어먹고 말걸.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실제 싸우는 상상도 하게 되고 흥분해서 혼자 주먹도 쥐어 보고 무서워서 다리를 달달달 떨기도 한다. 그 때 계산으로는 그 친구는 나보다 한참 아래였다. 내가 뭐래도 그냥 웃고 따라다니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조회를 하기 위해서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북적대고 있을 때였다. 옆 반 앤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까불이 촐랭인데 화도 잘 냈다. 까불이들은 대개 겁쟁인데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가 먼저 장난을 걸다가도 상대방이 함께 장난을 치면 화를 내고 싸우려 들었다. 한마디로 천방지축인 녀석이었다. 제일 싫고 위험한 녀석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서 넌지시 물었다. 너 저 애 이길 수 있어? 친구는 뜻밖에도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응. 그러더니 갑자기 그 녀석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야, 너 나 이길 수 있어?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친구를 바라 봤다. 그러더니 금방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리고 친구에게 바로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두 말도 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우하고 함성이 터지고 거의 전교생의 절반 정도가 큰 원을 만들어서 본격적인 싸움판을 벌려 주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친구가 녀석을 쓰러뜨리고 몇 방을 날리자 녀석은 더 이상 저항을 못하고 항복해버렸다. 친구는 벌떡 일어나 옷을 툭툭 털더니 나를 보고 자랑스레 웃음을 보냈다.
그 날 나는 그 친구와 같이 하교를 했었다. 평소 같으면 동네 친구들과 노는 일에 바빠서 나는 그 친구는 거들떠도 안 보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그 친구가 끄는 대로 그의 집을 향했다. 그는 짐작대로 이상한 동네의 이상한 집에서 살고 있었었다. 도시인데도 시골집 같은 느낌이 나는 집이었다. 시골집처럼 낮은 부엌에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그의 어머니만 있었다. 집은 컴컴했고 그의 어머니는 말 수가 별로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둥근 소반에 점심이 담겨 나왔다. 많이 먹으라느니, 반찬이 없어도 맛있게 먹으라느니 어머니들이 보통 하는 의례적인 말도 없었다. 어른들이 쓰는 사기 밥그릇에는 흰 쌀밥 두 그릇이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큰 사발에 김치가 수북히 담겨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어머니는 수건을 둘러쓰고 나에게 오래 놀다 가라고 말하고 친구에게는 다 먹고 나서 밥상을 그냥 부뚜막에 두라고 이르고는 어딘가에 일을 나가버렸다. 우리 둘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을 먹었다. 밥은 아침에 해두었는지 약간 식어 있었다. 집에서 김치 한 가지에 밥을 주었더라면 아마 나는 투정을 부렸던지 아니면 몇 숟갈 뜨다가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코에 땀방울까지 맺으면서 단숨에 밥 한 그릇을 비워버렸다. 우리 둘이는 마치 일을 마치고 온 농부들처럼, 싸움을 끝내고 온 전사들처럼 열심히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그 그릇에 찬물을 부어 마셨다. 그릇 바닥에 복 복자인지 쌍 희자인지가 물에 흔들려 보였다.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은 것이다. 쌀밥에 진실로 매료된 것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와 멀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배가 고프기만 하면 나는 그 친구 집에서 먹었던 그 쌀밥과 김치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 어두컴컴한 집의 하얀 쌀밥은 내 친구의 불가사의한 만용과 함께 세계의 어느 진귀한 음식보다도, 어느 부잣집의 산해진미보다도 당당하게 내 기억에 자리잡고 있다.
2. 짜장면과 해삼
어린 시절에 최고 별미는 짜장면이었다. 지금도 짜장면을 좋아하지만 주로 배달 위주여서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북경요리라든가 사천요리라든가를 전문으로 하는 거대 호화 중국집의 짜장면 맛도 별로다. 물론 다른 기름진 음식맛에 질린 탓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그 허름한 중국집에서 먹었던 짜장면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짜장면을 좋아했던지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틈틈이 모아 혼자서 짜장면을 사먹으러 간 적도 있었다. 짜장면을 시키자 의자에서 게으르게 졸고 있던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남루한 커튼 너머로 그가 면발을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반죽을 길게 말더니 그것을 거의 천정에까지 닿도록 두세 번 흔들고는 땅하고 바닥에 내리쳤다. 그리고 그걸 접어서 밀가루를 뿌리고 다시 늘려서 흔들었다 내리쳤다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 양 끝을 칼로 따고 손으로 이리저리 풀어 헤치니까 신기하게도 뭉툭한 밀가루 반죽이 섬세하고 가지런한 면발로 쫙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내 눈에는 어떤 세계적인 마술사의 현란한 솜씨도 흉내낼 수 없는 박진감 있고 현실감 있는 마술처럼 보였다. 그는 그 면발을 채에 담은 채로 뜨거운 물에 넣어서 금방 삶아내었다. 그것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짜장을 끼얹어 단무지 한 접시와 함께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생생한 면발에서는 뜨끈뜨끈한 김이 솟아나고 있었고 짜장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혹적인 냄새가 풍겼다.
어린 시절의 음식 맛을 잊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래도 성(性)이 본격적으로 계발되기 이전에는 모든 감각이 미각에 치중되는 까닭인 듯 싶다. 그 당시 학교 담 주변에는 하교하는 아이들의 입맛을 꼬드기는 음식 장사들이 많았다. 칡도 팔았고 단팥죽도 팔았고 띠기라고 하는 약간 사행성이 있는 설탕을 녹여 만든 과자도 팔았다. 그러나 그 모든 군것질거리를 제치고 단연 나를 매료시킨 것은 해삼 좌판이었다. 크고 작은 해삼들이 가격에 맞춰 좍 배열되어 있었다. 가까이 가면 시큼한 초장 냄새가 벌써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어린애 새끼 손가락만한 해삼에서부터 큼직한 오이만한 해삼까지 크기도 갖가지였고 굵기도 갖가지였다. 큰 해삼들은 우리들의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것들은 돈 많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검고 우둘투둘한 돌기가 우람했던 그 큰 해삼들은 다분히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전시용이었다. (‘언젠가는 돈 많이 벌어서 저 해삼을 사먹고 말리라’던 욕망이 내 무의식의 어딘가 잠재해 있다가 지금도 마트에만 가면 돌출해 나온다.) 5원짜리는 두 토막을 냈고 10원짜리는 다섯 토막을 냈다. 1원짜리 해삼은 5원짜리나 10원짜리를 아주 가늘게 썰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한 입 꺼리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좌판 앞에서 항상 망설이게 되었다. 궁색한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오늘 한 번 큰일을 벌려 버려.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도 주머니의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언제나 1원짜리나 5원짜리로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 가느다란 해삼을 핀으로 찍어 먹는데 문제는 얼마나 요령있게 초장을 많이 찍어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초장은 집에서 만든 초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주 묽은 초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시큼하고 더 달고 더 시원한 맛이 났다. 어떤 녀석은 1원짜리를 먹으면서 그냥 찍어 먹는 것이 아니라 초장 그릇에 코를 박고 둘러 마셔서 주인아저씨한테 꿀밤을 먹는 것도 보았다. 5원짜리를 먹든 10원짜리를 먹든 언제나 아쉬웠다. 그래서 다 먹고 나서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그 큰 해삼들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아쉬움은 언제나 치명적인 것이다. 그 아쉬움 때문에 나는 한동안 해삼에 중독되어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아무리 해삼을 많이 먹어도 어렸을 때의 그 아쉬움은 풀리지 않았다.
3. 할머니의 조청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먹을 것이 궁했다. 버스길도 없는 시골이라 당연히 구멍가게 하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시골 먹거리들이 다 별미지만 어렸을 때는 단 것만 찾을 때라 항상 입이 궁금했다. 겨울에는 방구석에 큰 대우리가 있었고 그 안에 고구마를 보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작 감자는 하지 감자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감자라는 말이 더 귀에 익다. 감자는 사투리가 아니라 일종의 한자어다. 사투리인줄 알았던 말 중에서 나중에 보면 한자어인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굴도 석화(石花)라고 불렀다. 변소도 칫간(厠間)이라고 불렀다. 아마 유배지였던 탓인 것 같다.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몇 몇 양반들이 쓰시던 말을 이 지역 사람들이 고대로 답습한 것이다. 좌우간 그 감자를 겨우내 깎아 먹는 것이 유일한 군것질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명절 전후해서 할머니가 인절미를 해줬던 기억이 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쌀을 절구에 넣고 쿵쿵 찧었다. 이윽고 쫄깃쫄깃한 떡살이 되었는데 한 때기 뚝 떼서 콩고물에 굴리면 그대로 인절미가 되었다. 할머니 혼자 찧은 떡이라 먹다 보면 아직도 밥알이 씹혔다. 떡도 떡이지만 그 떡에 발라먹는 조청 맛이 기가 막혔다. 어린 속이지만 그 맛이 하두 기가 막혀 ‘할머니, 이 조청 뭘로 만들었어요?’ 라고 물었더니 ‘옥쪼시(옥수수)로 만들재’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맛은 그 이후에 먹어 봤던 어떤 꿀이나 물엿보다도 맛있었다. 끈적이지도 않고 술술 넘어갔고 먹고 나면 입 안에 감칠맛이 돌았다. 그 맛에 가장 근사한 것은 강천산 밑의 한봉이었는데 조청 맛에 비하면 그 맛은 너무 강렬하고 너무 달았다. 할머니는 그 조청을 한 되들이 소주병에 담아서 선반에 올려놓았는데 나는 그것을 몰래 훔쳐 먹곤 했다. 조청은 보시기에 조금씩 따라 떡을 찍어 먹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어쩐지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시는 건 몰래 해야 할 짓 같았다. 찍어먹는 맛과 둘러 마시는 맛은 또 달랐다. 그 맛은 거칠고 너무 달았다. 미약처럼 귀 끝이 홧홧했다. 그 이후로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조청 맛을 찾았다. 그 맛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한데 그 맛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 조청을 만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재취셨다. 그러니까 사실은 친할머니는 아닌 셈이다. 할아버지가 육이오 때 돌아가시고 지금 생각해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셨다. 처녀로 시집오셨는데 순박하신 분이었고 자기주장은 전혀 없는 분이었다. 항상 표정이나 행동이 여일(如一)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가끔은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형제들도 다 한 번씩은 목격한 바가 있었다. 겨울이면 불을 부엌이 붙은 안방에만 땠다. 그래서 한 식구가 모두 한 방에 모여서 잤다. 다람쥐 눈만한 초꼬지불도 석유를 아끼느라 금방 꺼버렸다. 그래서 시골의 겨울밤은 길고 길었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한 밤중에 눈이 뜨였다. 방이 환했다. 빛 때문에 잠이 깨었을까? 천장 더그매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윗목에서 구시렁구시렁 사람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듯한 낯선 소리였다.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인하여 잠이 깬 기척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고개만 빼어 그 쪽을 바라봤다. 끄먹거리는 초꼬지불 앞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치고. 혼자서 뭐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불 같기고 하고 누구에겐가 하소연하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형제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그 때의 할머니는 평상시와 너무나 다른 무슨 마녀나 귀신처럼 보였다고 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궁금했다. 무슨 까닭일까?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면 봉창이 훤하게 밝아 있었고 구구구 하는 할머니의 닭 모이 주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다시 말끔한 비녀 머리를 하고 계셨다. 내가 꿈을 꾸었거나 아니면 할머니가 밤중에 머리를 감고 나서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셨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나중에 부모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두운 표정을 지으시고 다른 말씀은 없었다. 그 할머니가 만든 조청 맛은 할머니의 그 비밀스런 의식과 함께 나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4. 첫키스
음식 맛의 으뜸은 누가 뭐래도 재료의 신선함에 있다. 피가 뚝뚝 듣는 꼬막은 삶은 자리에서 밥 없이도 한 사발 정도는 거뜬히 까먹을 수 있다. 한 마을에서 하룻밤 까먹는 꼬막만으로도 한 무더기의 패총 정도는 너끈히 쌓아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재료가 신선한 음식은 그 특징이 별 양념이 없어도 각별한 맛이 난다는 것이다. 한 여름 모깃불 옆에서 끓여 먹는 반지락국은 소금 한 술 정도로 훌륭한 맛이 났다. 고아 먹는 국물과는 또 다른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맛이었다. 갯가에서 조심스럽게 돌로 찧어 윗 껍질로 파먹는 석화는 아무 양념 없이도 후루룩 마시면 바다의 짭조름한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한 번은 군대 있을 때 소대장을 따라 해안 초소를 도는데 우연히 주막에 들렀다가 문조리(망둥어) 한 접시를 대접받은 적이 있다. 못 생긴데다 흔해 빠진 고기라 밥상에 올리기도 꺼려하는 천덕꾸러기다. 낚시로 막 잡아온 그걸 도마에서 숭덩숭덩 썰어 이빠진 접시에 담아 내왔다. 초장에 식초 원료를 사용했는지 온 주막 전체가 독한 식초 냄새로 진동을 했다. 몇 점을 씹을 때까지 식초 맛 때문에 입안이 얼얼했다. 그러나 문조리의 싱싱한 맛은 결국 그 독한 식초 맛을 이기고 뇌리 깊숙이까지 전해졌다.
불은 인간에게 보다 풍요롭고 다채로운 맛을 선사했다. 모든 동물 중에서 불을 다룰 줄 아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화식(火食)을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채화 이후에 마치 연금술사들처럼 인간은 모든 음식을 불 위에서 다루어 본다. 지지고 볶고 삶고 튀기고 찌고 덖어 본다. 불을 강하게도 해보고 약하게도 해본다. 장작불도 써보고 숯불도 써보고 석탄과 가스도 사용해 본다. 그때마다 맛들은 희한하게 변한다. 인간의 음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인간의 입은 점점 사치스러워진다. 불은 인간을 점점 인위적인 맛에 길들어지게 하고 자연의 맛에서는 멀어지게 한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직접 부딪히는 그 생동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순환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자연이 주는 그 싱싱한 맛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싱싱함이 맛에 미치는 영향은 비단 해산물에만 국한 되는건 아니다. 과일이야말로 싱싱함이 생명이다. 과일은 꽃과 마찬가지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한다. 과일의 참맛을 보려면 반드시 제 철에, 제 때에 맞춰, 제 산지에서 먹어야 한다. 사과는 제 맛으로 먹기 힘든 과일 중의 하나다. 자칫하면 너무 시거나 너무 무르거나 너무 퍽퍽하다. 일광이 알맞게 스며들었을 때, 너무 설익지도 너무 농익지도 않은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따야한다. 가지가 너무 당겨지거나 너무 맥없이 떨어지지 않고 적당히 버팅기면서 똑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따야 한다. 푸르고도 청신한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깊숙한 곳에서부터 농염함이 스며나오는 바로 그 순간. 아침의 서리를 오후의 일광이 녹이는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뚝 따서 바지춤에 두어 번 문지르고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보라. 베어 무는 그 순간 사과 주변에 작은 오로라가 생기면서 오색의 향취가 번져 나간다. 사과의 신맛이 목젖을 쏘고 이윽고 단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그 풍부하고 향기로운 즙이 목으로 코로 혀로 이로 폐부로 스며드는걸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맛을 무엇에다 비유하랴. 굳이 지상에서 그 맛에 합당한 비유를 찾자면 그건 첫 키스의 맛이다. 첫 키스의 향기이다.
그러나 냉큼 다가온 국외자에게 사과는 결코 그 깊은 맛을 전하지 않는다. 봄부터 가꾸고 기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염려했던 농부에게만 그 깊은 맛을 전한다. 나의 첫 키스도 그런 오랜 기다림이었다. 봄 아지랑이 같은 마음 저림에서부터 여름날의 폭풍 같은 격정을 이기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듯한 쓸쓸한 가을날 나의 첫 키스는 찾아왔다. 마치 사과의 신맛처럼 강렬하게, 단맛처럼 달콤하고도 애처롭게, 오랜 기다림의 보답처럼 그렇게 깊숙이 찾아왔다.
5. 어머니의 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숙수를 꼽으라면 대개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나에게도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셨다. 음식을 만드시는 솜씨가 빠르고 거침이 없으셨다. 앉은 채로 이야기하시면서도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 내셨다. 봄동이나 솔지(부추김치) 같은 금방 무쳐내는 음식에서 특히 손맛이 느껴졌다. 재고 다듬고 따르고 모양내는 게 없으셨다. 큰 양푼에 채소와 함께 고춧가루, 깨, 참기름 등을 들들들 들이 붓고는 손으로 썩썩 문지르면 맛갈나는 음식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거침없는 솜씨로 그 많은 식솔들을 거둬내시고 그 많은 손님들을 치러내셨다. 집에 몇 개의 식칼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주로 나무 손잡이가 달린 남원 식칼을 사용하셨다. 무수한 칼집이 나다 못해 가운데가 움푹 패인 도마 위에서 어머니는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셨다. 김치 같은 경우에는 무엇으로 자르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미묘하게 변했다. 막 담은 새 김치는 어머니의 손가락으로 쭉 찢어줘야 제 맛이 났다. 묵은지는 바로 그 도마 위에서 남원 식칼로 썰어야 묵은지 특유의 군둥내와 함께 싸르르한 칼맛이 섞여 비로소 제 맛이 났다. 지금의 식가위로 접시 위에서 써는 김치는 다만 김치의 흉내일 뿐이다. 그 묵은지로 끓여내는 김치 찌게는 단연 우리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손꼽는 어머니 최고의 음식이었다. 자배기 뚜겅이 들썩거리도록 센 불에 막 끓여낸 김치찌개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신김치와 돼지고기와 콩나물의 조화는 그 찌게 위에서 젓가락 숟가락들이 쟁탈전을 벌릴 만큼 우리의 왕성한 식욕을 자극했었다.
지금도 어머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시던 그 활발한 모습이다. 지금도 산낙지나 닭발 따위를 다질 때 나던 그 땅땅하던 도마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그 함박웃음이 눈에 선하다. 어디 우리 어머니뿐이랴. 우리 친구들의 어머니도 모두 뛰어난 요리사셨다. 누구네 집은 젓갈이 맛있었고 누구네 집은 열무 국수가 맛있었다. 그 분들은 모두 우리들을 소중한 손님인양 끼니 때만 되면 밥을 해 먹이셨다. 본인들은 식은 밥을 먹으실 망정 우리에겐 항상 따뜻한 밥을 해 먹이셨다. 냉장고가 나오기 이전에는 여름철이면 쉬이 밥이 쉬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대나무 광주리에 밥을 담아서 시원한 툇마루 기둥에 매달아 두셨다. 그래도 밥이 쉬면 우물에서 찬물로 밥을 씻어 내셨다. 그래서 쉰 맛이 좀 가시면 그걸 다시 물에 말아 마시듯이 드셨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항상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애쓰셨던 분들이다. 이제 그분들은 거의 돌아가셨거나 병드셨거나 너무 늙어버리셨다.
다시는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음식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오랜 병석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는 의식이 거의 없으신 상태에서도 지금도 나를 보면 그 앙상한 손을 내미신다. 이 땅의 모든 음식들을 주무르시던 그 손. 우리에게 그 음식들을 거둬 먹이시던 손. 그 손을 만지면 아직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모든 물기가 빠져나가고 뼈만 남은 그 손이 지금도 뭔가를 먹일 양인 양 내 입술을 더듬는다.
주제넘지만... 이번 음식 관련 글들 읽으면서 형님의 주종목이 '산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글들을 묶는 것은 반대입니다. 글들이 하나하나 완결된 구조와 거기에서 나오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는데, 묶어버리니 글의 시작과 끝이 다 죽어버린 느낌입니다. 각자가 다 독자적인 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충고 감사드립니다. 글을 원래대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내 아내가 내 ID와 패스워드로 수시로 내 글을 감시하는데 이번에 딱 걸렸습니다. 도대체 첫키스의 주역이 누구냐는 추궁이었습니다. 음식 이야기에 뒤이어 여자 이야기도 써보려고 하는데 심히 망서려집니다. 그냥 맛있었다는 감회 뿐인데 왜 이런 추궁을 받아야 하는지... 주종목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했던 문젭니다. 시는 나의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입니다. 그렇게 외면을 당하면서도 시를 쓰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시가 나의 근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건필하십시오.
저는 형님의 집필 계획에서 보다 실질적인 문제가 우려되는군요. 형님의 그 여자 이야기... 너무 방대한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요? 간추리고 간추린다 해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그 이야기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 집필 도중에도 계속 이어지는 그 스토리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계획이신지.. 이런 걸 일컬어 'Never ending story'라고 하는 것 아닌가요? (형수님 필독 要^^)
음식 이야기 뒤 끝에 왜 여자 이야기가 쓰고 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죽을려고 삽질을 할 모양입니다. 근데 사실은 소재도 빈곤하고 너무 쪽팔리고 지저분한 이야기 뿐입니다. 그리고 설혹 내딴에는 아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임을 피력해도 여러분에게는 '전인권과 이은주'의 이야기처럼 들리기가 십상일겁니다. 그래서 쓴다면 아주 즉물적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입에 군침이 돌도록...^^
첫댓글 별로 쓸만한 글도 아니면서 너무 산만해져버렸습니다. 글을 조금 다듬어서 모아 봤습니다. 애정을 갖고 다시 한 번 읽어주시고 거침없는 충고 말씀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주제넘지만... 이번 음식 관련 글들 읽으면서 형님의 주종목이 '산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글들을 묶는 것은 반대입니다. 글들이 하나하나 완결된 구조와 거기에서 나오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는데, 묶어버리니 글의 시작과 끝이 다 죽어버린 느낌입니다. 각자가 다 독자적인 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충고 감사드립니다. 글을 원래대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내 아내가 내 ID와 패스워드로 수시로 내 글을 감시하는데 이번에 딱 걸렸습니다. 도대체 첫키스의 주역이 누구냐는 추궁이었습니다. 음식 이야기에 뒤이어 여자 이야기도 써보려고 하는데 심히 망서려집니다. 그냥 맛있었다는 감회 뿐인데 왜 이런 추궁을 받아야 하는지... 주종목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했던 문젭니다. 시는 나의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입니다. 그렇게 외면을 당하면서도 시를 쓰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시가 나의 근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건필하십시오.
딴지 죄송한데요... <흰 쌀밥> 세번째 문단의 '크게 내노라하는 미식가는 아니지만'에서 '내노라'는 '내로라'가 맞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심쩍어 '내노라'를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왜 '내노라'가 사전에 없을까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음운 현상 때문에 '내로라'라고 쓸까요? 맞춤법과 띄어쓰기 때문에 애를 많이 먹습니다. 성욱의 글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형님의 집필 계획에서 보다 실질적인 문제가 우려되는군요. 형님의 그 여자 이야기... 너무 방대한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요? 간추리고 간추린다 해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그 이야기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 집필 도중에도 계속 이어지는 그 스토리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계획이신지.. 이런 걸 일컬어 'Never ending story'라고 하는 것 아닌가요? (형수님 필독 要^^)
음식 이야기 뒤 끝에 왜 여자 이야기가 쓰고 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죽을려고 삽질을 할 모양입니다. 근데 사실은 소재도 빈곤하고 너무 쪽팔리고 지저분한 이야기 뿐입니다. 그리고 설혹 내딴에는 아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임을 피력해도 여러분에게는 '전인권과 이은주'의 이야기처럼 들리기가 십상일겁니다. 그래서 쓴다면 아주 즉물적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입에 군침이 돌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