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왜로설(倭驢說) 일본 당나귀 이야기
하생(河生)의 이름은 징(澄)으로 대구 사람이다. 그의 이웃 집에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모양새가 몽땅하고 왜소하여 타고 다니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내어다 팔려고 하였으나 다리까지 절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이에 하생이 300전의 돈을 지불하고 시험삼아 길러보기로 하였다.
해를 넘기자 절던 다리도 나았고 재주도 예사롭지 않은 점이 있었다. 그 말을 타고 서울을 가는데 700리 길을 겨우 4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릇 객주(客主)에라도 들게 되면 함께 쉬어 가거나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던 나그네들이 모두들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신기한 구경거리로 여겼다. 어떤 이들은 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당나귀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노새와 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생에게 진지하게 물어왔으므로 하생은 짐짓 농담으로 이것은 '왜당나귀'(倭驢)인데 왜관(倭館)에서 구입하였노라고 대답해 주니, 모두들 놀라워 하는 기색이었다. 값을 얼마나 치루어었느냐고 물으면 하생은 일부러 가격을 부풀려서 얼마를 주었노라고 대답해주니 모두들 그러하냐고 수긍하였다. 팔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짐짓 잡아빼면서 아깝다는 내색을 보이니, 모두들 창연히 돌아가곤 하였다.
서울에 이르자 장안의 사대부들과 날로 더불어 상종하였는데, 그들이 묻는 말도 한결같이 객주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질문과 같았으며, 하생 역시 그와 같이 대답해 주었다. 이에 이르자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사겠다며 줄지어 늘어서서 수십 일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것을 진짜 '왜당나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을 헤아리고는, 사실을 사실대로 모두 설명해 주니 모두들 실망스럽다는 듯 속은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는 하루 종일 마굿간 앞에 버티고 서있더라도 다시는 어느 누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쳐 갔다. 하생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이름만을 좋아하여 쉽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 마치 이와 같다고 하겠다. 말이라고 하면 귀한 줄을 모르고 하찮게 여기다가 당나귀라고 하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토산(土産)이라고 하면 이상할 것 없이 평범하게 여기다가도 왜(倭)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하자 그것을 신기한 것으로 여기는구나. 몽땅하고 왜소하여 못 생긴 이 말에게 '왜당나귀라'는 이름을 붙여주자 사람들이 빈번하게 붙좇아 들었던 것은 오직 내가 그들에게 이것을 팔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만약 그 때에 내가 오직 이익만을 챙기는 천장부(賤丈夫)처럼 처신하여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순순히 그것을 팔아버렸다면 아무도 모르게 속임을 당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동계거사(東谿居士)가 이 말을 듣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유독 견양(汧陽)의 돼지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옛날 소자첨(蘇子瞻)이 형양 지방의 돼지고기 맛이 지극히 좋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사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심부름을 갔던 자가 술을 마시고 취하여 돼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심부름꾼은 할 수 없이 다른 돼지로 바치게 되었는데, 함께 고기를 먹게 된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어느 고기도 비할 수 없는 지극한 맛이라며 크게 으쓱거렸다고 하지 않던가. 소문만을 듣고 음식을 구하는 그러한 습관은 아마도 옛날부터 그래 왔다. 그런데 하물며 통통하고 왜소하였으니 '왜당나귀'라는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겉모습이 믿을만 했고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릴 수 있어 그 재주도 또한 실재로 믿을만 하였으니, 이름(名)만을 믿을 수 있었던 형양의 돼지와는 비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그건 그렇고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그것을 먹어 보고 실제로 맛이 좋으면 먹으면 되는 것이지 하필이면 형양의 돼지이어야만 하겠으며, 타보고 실제로 잘 달린다면 타는 것이지 왜 하필이면 '왜당나귀'어야만 하겠는가. 저들 가운데, 하루에 수백 리를 가는 실재의 재주를 귀하게 여기면서 반드시 왜당나귀라는 이름을 가진 물건을 사려는 자도 실로 잘못이 지났치다고 하겠으나, 왜당나귀가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고 해서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릴 수 있는 실재의 능력마저도 아울러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야 말로 더욱 옹졸함을 알 수 있다. 또 대저 이 말이 실로 천 리를 달릴 수 있으면 오추(烏騅), 적토(赤土馬)와 같은 준마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이고, 삼만 리를 달릴 수 있다면 녹이(騄駬), 황도(黃駼)와 같은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경우에도 유독 '왜당나귀'라고 칭해야만 하겠는가. 진실로 실재(實在)에 있어 부끄러운 점이 없다면 명색(名色)이야 혹 빌려오거나 빗대어 견주더라도 혐의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오추, 적토, 녹이, 황도라고 하는 것은 대개 상고 시대의 훌륭한 말의 이름에서 대부분 취하여 썼으며,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가령 조(趙)나라의 마부가 저 유명한 왕량(王良)이라는 마부의 칭호를 모칭하고, 노(盧) 나라의 의사(醫師)가 저 유명한 편작(扁鵲)의 명성을 빌렸으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름을 모칭하고 명성을 빌렸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을 속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를 통해 본다면 그대가 애초 세상을 속인 것이 아니며 세상도 역시 애당초 자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속임수의 실체라는 것은, 가령 시장에서 값싼 채찍을 화려하게 치자(梔子)로 물들이고 밀납(蜜蠟)으로 광을 내어 비싼 값으로 팔아먹고, 그것을 사 간 자는 결국 제대로 한번 써보기도 전에 색이 바래고 망가지는 그러한 경우에나 가당한 것이다."
하였다.
하징이 요새 소설(小說)로 지어 전해달라고 부탁해 왔기에 이와같이 써서 보여주었다. 하징이라는 자는 다방면에 걸친 재주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조구명(趙龜命)1693년(숙종 19)∼1737년(영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석여(錫汝)‧보여(寶汝), 호는 건천자(乾川子)‧동계(東谿).
조부는 우의정(右議政) 조상우(趙相愚)이고, 아버지는 첨정(僉正) 조태수(趙泰壽)이다.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 심권(沈權)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13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여 수천 언(言)의 대책(對策)을 지었다. 1711년(숙종 37)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증광문과(丁未增廣文科) 회시(會試)에 참여하였으나 주고관(主考官) 정형익(鄭亨益)이 문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빼버리니 이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가문은 소론(少論)의 명문이었지만 다른 종형제인 조현명(趙顯命), 조문명(趙文命) 등과 달리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또 자주 병고에 시달리면서 성리학(性理學)에서 벗어나 노장(老莊)과 불교(佛敎)에 심취하고 문장가(文章家)로 자처하여 소식(蘇軾)의 의기(意氣)를 사모하였기 때문에 당시 문단(文壇)에서 이단시된 경향마저 있었다.
1735년(영조 11)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송인명(宋寅明)이 조구명을 문학(文學)이 있는 선비로 천거하여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에 오르고,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태인현감(泰仁縣監)과 개령현감(開寧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36년(영조 12)에 익위(翊衛)가 되었으며, 《예기(禮記)》의 〈문왕세자(文王世子)〉 등의 글을 병풍으로 써서 세자궁에 올렸다. 1737년(영조 13) 9월 영조가 그에게 외읍(外邑)에 시험해 보도록 명했으나 27일에 사망했다. 광주(廣州) 청계산(淸溪山)에서 장사지냈다.
그의 문집인 《동계집(東谿集)》은 그의 종조형(從祖兄)인 조현명(趙顯命)이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문집의 분량은 모두 12권 6책인데, 문집을 간행할 때 일족(一族) 중 문재(文才)를 지니고서 요절한 조계명(趙啓命)의 《남곡유고(南谷遺稿)》와 조구진(趙九鎭)의 《청량헌고(聽凉軒稿)》를 부집(附集)하여 함께 간행하였다. 특히 그 문집에 〈독노자(讀老子)〉에서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장자는 논심(論心)에 묘(妙)하고, 노자는 관물(觀物)에 깊은데 노자의 학이 더 우수하다고 평하였다.
1773년에는 영조가 문집의 서문을 써서 내렸는데, 이는 그가 비록 벼슬로는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세제(世弟) 입학 시에 장명생(將命生)을 맡았으며, 또 탕평책을 주장한 점과 이천보(李天輔) 등과 친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문을 써서 내린 것이다. 그 후 일부 간본(刊本)에서는 영조의 어제 서문을 추각(追刻)하여 합철(合綴)하였다.
東谿集卷之五 豐壤趙龜命鐋汝甫著
說
倭驢說 庚子
河生澄。大丘人也。其隣有馬。而形厖且矮。不中騎。欲賣則又蹇不售者。生歸三百錢。試取養之。逾年蹇旣已。而其材顧有異也。騎而之京師。踔七百里。財四日至焉。凡入逆旅。客之同休秣者。皆旋視。以爲異觀。或曰馬也。或曰驢若騾也。齗齗焉質之生。生則故戱之曰。是名倭驢。買諸倭。舘者。皆竦然。問其價則故翔騰之曰幾緡。皆曰唯。請買則又故靳之。爲甚惜也者。皆悵然而去。及至京。京之士大夫。日相從。其問一如逆旅人。生之答之。亦如之。於是。爭買者相屬。累十日不止。旣而。生度諸人之眞相信不疑也。乃以實告。皆憮然媿其見欺。自是。立之廐終日。客不復顧而去矣。河生曰。世之好名而易欺也如是夫。謂之馬也不之貴。而謂之驢也則貴之。土之産也不之異。而倭之産也則異之。是厖而矮者而冒之以倭驢之名。靡然者。唯恐其不我賣也。向使我如賤丈夫之惟利之視。厭然從其求而賣之。有不永受欺者乎。東谿居士聞之而笑曰。子獨不聞夫汧陽猪之說乎。昔蘇子瞻聞汧陽猪肉至美。遣人買焉。使者醉失之。以它猪進。與之食者。皆不知也。大詑以爲非它産所及。以耳食之患。盖自古而然矣。况厖而矮焉而其形信。日馳數百里而其才信。不唯止於汧陽之名之可信而已乎。雖然。余則以爲食之而實美則斯食之。奚必汧之猪哉。騎之而實駿則斯騎之。奚必倭之驢哉。彼不但貴日馳數百里之實。而必以倭驢之名而買之者。固過矣。而其懲於失倭驢之名。而並與日馳數百里之實而棄之者。尤見其陋也。且夫是馬也。誠有千里之能。斯可名烏騅,赤兎矣。有三萬里之能。斯可名綠駬,黃駼矣。豈特倭驢之稱乎哉。實之苟無所媿。名或借儗而無嫌。故所謂烏騅,赤兎,綠駬,黃駼者。盖多取諸上古良駟之名。而在於人也。趙御冒王良之號。盧醫假扁鵲之聲。當世顧不以假冒而謂之欺也。由是觀之。子未始欺乎世。而世亦未始受欺乎子也。欺之實。惟市之梔蠟其鞭。五萬售而一擊折者。當之矣。河生間屬余作小說傳之。故書此以示。河生。方以旁技。有盛名云。
小傳[趙顯命]
君姓趙。名龜命。字錫汝。又字寶汝。號東谿。豐壤人。高麗侍中孟之後。右議政孝憲公相愚孫。司䆃寺僉正泰壽子也。君以癸酉十二月二十九日生。生七歲。自通文義。十三。赴禮圍。對大策。下筆立就數千言。觀者堵立嘖舌。稱之以瑞物也。辛卯。中生員。壬寅。當宁以世弟入太學。士林咸推君爲將命生。極選也。是年。除永禧殿參奉。不就。乙卯。以童蒙敎官。用大臣薦。陞司畜署別提。遷工曹佐郞。除泰仁縣監。不赴。其後大臣又言於上。除開寧縣監。亦不赴。而前後三入翊衛司。爲侍直翊衛。或就或不就。盖君以親意。始雖爲公車業。然非其志也。君有貞疾。平居多杜門。不接人事。日夜究心。爲古文辭。浸淫涵蓄。盖三十餘年。而其文益大肆。妙悟玄解。務發己見。不規規於古人繩墨之內。君自言得之南華經者爲多。而以蘇長公爲歸云。君始有意性理之學。旣而歎曰。亦知作聖有術。顧文字癖好難忘也。旣又汎濫於老佛二家之說。於一切世故泊然。若無所累其心。然其言議平正溫厚。必根於倫理。居家篤於孝友。事丘嫂如母。終身不異居曰。吾幼而養於親。壯而養於嫂。老則養於姪。可也。晩而就仕。盖亦爲嫂屈也。君爲人淸瑩如氷玉。長益瀟灑幽靚。類不食煙火者。卽之體不勝衣。溫溫若不能言。然叩其中。則浩浩有不可窮者。嘗自著畵像贊曰。友而德重。七八分知我也。兄而稚晦。五六分知我也。老子曰。知我者希。則我貴也。稚晦者。其從祖兄顯命也。顯命待之以師友。嘗言吾雖擧世非之。得錫汝一言之可足矣。君無子而顯命則有六子。君諷之曰。乾卦六陽。變三爲履可乎。未幾。君將死。顯命許以其第三子子之。而名之曰載履。字子三。用君乾卦之說也。君以丁巳九月二十七日終。葬廣州淸溪山癸坐之原。有側出一男三女云。
再從兄輸忠竭誠奮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觀象監事,豐原府院君顯命。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