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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열전(17) 광종
황원갑 <한국사인물연구회 회장>
왕권확립으로 고려왕조 기틀 다진 개혁군주
광종(光宗)은 고려조 제4대 황제로서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라고 했다. 925년(태조 8년)에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유씨(劉氏)이다. 949년(정종 4년)에 동복형 정종(定宗)의 선위로 제위에 오르니 그때 나이 25세였다. 이후 광종은 975년까지 26년 2개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광종은 과감한 개혁가였다. 그는 태조 이후 혜종(惠宗)과 정종을 거치는 동안 급격히 약화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국공신과 호족들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또한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했으며,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통합도 추진했다.
광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이러한 개혁은 재위 말년에 이르러서는 정도가 지나쳐 유혈숙청의 공포정치로 변모했지만, 이는 두 형인 혜종과 정종의 치세가 개국공신과 호족 등의 권력투쟁 속에서 단명으로 끝난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그런 전철을 밟지 않고, 고려조의 왕권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로였던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른바 정사(正史)라고 일컫는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도 오류가 많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증명되었거나 지금도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자칭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를 보라. 책이름부터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위주로 한 까닭에 <삼국사기>가 아닌가. 이런 편협한 역사관에 따라 고조선․삼한․부여․가야․발해 같은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가 제외되다시피 했고, 그나마 신라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형편없이 무시당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고려조를 뒤엎고 조선조를 세운 이후에 편찬된 <고려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고려는 태조 왕건의 건국 첫해부터 건원칭제(建元稱帝)하여 신민들은 황제를 폐하라고 부르고, 황제는 자신을 짐이라고 부른 당당한 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들을 대부분 깎아 없애버리는 사대주의적 역사 기술을 택했으며, 이는 황후를 왕후로, 태자를 왕자로 서술한 점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왕건이 장수들의 추대로 우두머리가 되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창업한 것은 918년 6월이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창업할 당시 그에게는 정주 출신인 유씨(柳氏)와 나주 출신인 오씨(吳氏) 등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고려사> ‘후비열전’은 이 두 명의 부인을 비롯해 황제가 된 이후에 호족연합을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한 29명의 후비를 모두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첫째 부인 신혜황후(神惠皇后)는 정주의 호족인 삼중대광 유천궁(柳天弓)의 딸이다. 유천궁은 정주에서 가장 큰 부자여서 그 고을 사람들이 ‘유장자(柳長者)’라고 불렀다. 왕건이 궁예의 부하 장수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서 말을 멈추고 잠시 쉬고 있는데 마침 유씨가 가까운 시냇가에 서 있었다. 처녀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왕건이 가까이 다가가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다. 처녀는 이 고을 유장자의 딸이라고 대답했다. 왕건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집으로 가서 머물렀는데, 워낙 큰 부자여서 왕건의 군사 모두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처녀로 하여금 왕건을 모시게 했다.
그 뒤 유씨는 전쟁으로 바쁜 왕건과 소식이 끊겼으므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불러 정식으로 부인으로 삼았다. 신혜황후 유씨는 비록 자식은 낳지 못했지만 영웅의 아내답게 대담하고 매서운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첫 사내를 위해 머리를 깎고 수절했으며, 뒷날 왕건이 장수들의 거듭되는 강권에도 거사를 망설이자 갑옷을 꺼내 남편에게 입혀주며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부추긴 것이 아니겠는가. 신혜황후는 죽은 뒤 태조 왕건의 현릉(顯陵)에 합장되었다.
둘째 부인 장화황후(莊和皇后) 오씨는 나주 사람으로 대대로 목포에 살던 다련군(多憐君)의 딸이다. ‘후비열전’에 따르면 일찍이 오씨의 꿈에 포구에서 용이 와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놀라서 깨어 부모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보모도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오씨와 왕건의 만남도 극적이다.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나주를 지키고 있을 때에 배를 목포에 정박시키고 시냇물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다. 가서 보니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처녀를 불러 정사를 가졌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했기 때문에 임신을 피하기 위해 정액을 자리에 배설했다. 오씨가 얼른 그것을 주워 자신의 몸속으로 집어넣었으므로 마침내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태자 무, 뒷날의 혜종이다.
<고려사>는 혜종이 912년에 태어났다고 했으니 당시 왕건이 910년에 백제에게 빼앗긴 나주를 공략하여 재탈환하고, 913년 궁예의 소환령에 따라 철원으로 돌아왔다는 기록과 부합된다. 따라서 왕건이 장화황후와 혼인한 것은 910년이나 911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왕건은 38세였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탓인지 혜종은 얼굴에 자리무늬가 있었다고 하며, 그래서 사람들이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비열전’은 혜종이 늘 잠자리에 물을 부어두었으며, 또 큰 병에 물을 담아두고 팔을 씻으며 놀기 좋아했다고 하여 ‘참으로 용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용의 아들’이라는 말도 황제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니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고, ‘주름살 임금’이라는 표현도 뒷날 제2대 황제로 즉위하여 하루도 얼굴에서 주름살이 펴지는 날이 없이 2년을 보내다가 죽었으니, 이 또한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하겠다.
장화황후는 언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기록이 없다. 또한 그녀는 제2대 황제의 모후였지만 태후 칭호도 못 받았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여러 차례 그녀의 가문이 한미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친정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이 철수한 뒤 후백제의 공격을 받아 몰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한미한 가문 출신을 강조한 이유는 혜종을 제거하고 제위를 차지한 정종과 광종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며, 태후로 추존되지 못한 까닭도 혜종의 제거에 따라 삭제된 것으로 추측된다.
광종의 어머니 신명순성황후 유씨는 태조의 셋째 부인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에게는 29명의 후비가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첫째 부인 신혜황후 유씨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부인 장화황후 오씨는 맏아들 무(武)를 낳았으니 태자 무가 나중에 제2대 황제에 오른 혜종이다. 그러나 태조의 29명에 이르는 부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여인은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황후 유씨였다.
유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가 태자 태(泰)요, 둘째 아들 요(堯)가 제3대 황제 정종이요, 셋째 아들 소가 제4대 황제 광종이다. 또 맏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는 신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김부(金傅: 敬順王)에게 시집갔으니 이만하면 매우 성공한 일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 ‘후비열전’을 보면 제1황후 유씨와 제2황후 오씨는 물론, 서열이 아래인 넷째 부인 신정황후(神靜皇后) 황보씨(皇甫氏)와 다섯째 부인 신성황후(神成皇后) 김씨(金氏)에 비해 신명순성황후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간략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 충주 사람이니 증태사내사령(贈太師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태자 왕태(王泰)․정종(定宗)․광종(光宗)․문원대왕 정(文元大王貞)․증통국사(證通國師)와 낙랑(樂浪)․흥방(興芳) 두 공주를 낳았다. 죽으니 시호를 신명순성왕태후라고 하였다. -
여기에서 황태후를 왕태후라고 기록한 것은 조선 초기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당당한 제국 고려에서 사용하던 칭호인 황제는 왕으로, 황후는 왕후로, 태자는 왕자로 하는 등 사대주의에 따라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 깎아내린 탓이다.
또한 <고려사> ‘종실열전’에 이르기를, 태조 왕건에게 아들 25명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맏아들이 제2대 혜종으로 둘째 부인 장화황후 오씨 소생이요, 그 다음 신명순성황후 유씨의 맏아들 태자 왕태는 ‘후손이 없었다’는 단 한마디뿐이다. 그는 흥덕원부인(興德院夫人) 홍씨(洪氏)의 소생인 공주(이복동생)를 아내로 맞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정종․광종에 이어 넷째 아들인 문원대왕 왕정은 태조의 여섯째 부인인 정덕왕후(貞德皇后) 유씨(柳氏) 소생인 문혜왕후(文惠王后)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그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 광종의 딸 아지군(阿志君)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으며, 역사기록에 그 이름들이 모두 모두 누락되었다’고 했다.
또한 ‘공주열전’에 따르면 맏딸 낙랑공주는 본래 칭호가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였으나 ‘신라왕 김부가 고려조에 투항했으므로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낙랑공주라고 불렀으며, 또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불렀다’고 했다.
이어서 둘째 딸 흥방공주는 ‘원장태자(元莊太子)에게 시집갔다’고 했다. 원장태자는 태조의 여섯째 부인인 정덕황후 유씨 소생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흥방공주와 혼인하여 흥방궁대군을 낳았다고만 전했다.
한편, 제2대 혜종은 의화황후(義和皇后) 임씨(林氏)와의 사이에서 흥화궁군(興化宮君)과 경화궁부인(慶華宮夫人)․정헌공주(貞憲公主) 등 1남 2녀를, 궁녀 애이주(哀伊主)와의 사이에서 태자 왕제(王濟)와 명혜부인(明惠夫人) 등 1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후손이 없다고 전하고 있다.
경화궁부인은 ‘혜종 2년(945년)에 왕규(王規)가 왕의 아우 왕요와 왕소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왕에게 참소했더니 혜종이 자기 딸을 왕소의 처로 주어 그의 세력을 강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왕소에게는 태조의 넷째부인 신정황후 황보씨의 소생으로서 자신에게는 이복동생이기도 한 대목황후 황보씨가 본부인으로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뒷날의 제5대 황제 경종(景宗)이다.
그런데 혜종의 자식들에게 후손이 없었다고 한 까닭은 제8대 현종(顯宗) 때에 거란의 침범으로 전대의 실록(實錄)과 사초(史草)가 모두 불타버린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그보다도 정종의 성공한 쿠데타와 광종의 10여 년에 걸친 숙청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정권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대부분이 희생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혜종은 태조 왕건의 맏아들로서 당연히 다음 제위를 이을 정윤(正胤)의 자격이 있었지만 태조 4년(921년)에 이루어진 그의 정윤 책봉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태조는 궁예왕(弓裔王)의 태봉국(泰封國)을 뒤엎고 고려를 개국한 이후에도 각 지방 호족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정략결혼을 통해 29명의 부인을 두고 그 사이에서 25남 9녀라는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 이를 통해 본래의 목적은 이루었으나 이는 또한 뒷날 권력투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첫째 부인 신혜황후 유씨한테서는 소생이 없었고, 맏아들 무는 둘째 부인인 장화황후 오씨의 소생이었다. 태조는 당연히 맏아들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여 황위를 계승토록 하고 싶었지만 장화황후 오씨가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자연히 다른 호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둘째 아들 태를 낳은 셋째 부인 신명순성황후 유씨의 가문이 가장 신경 쓰였을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태조는 아무래도 맏아들 무를 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고 여겨 낡은 상자에 자황포(柘黃袍), 즉 자신이 입던 황제의 의복을 넣어 장화황후에게 보냈다. 이는 비록 지금 당장은 마음대로 무를 태자로 세우지는 못 하지만 자신의 본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뜻을 전해 장화황후 오씨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자황포를 받은 오씨는 대광 박술희(朴述希)를 은밀히 불러 자황포를 보이며 태조의 속뜻을 일러주었다. 박술희는 본래 궁예왕의 시위무사였으나 나중에 왕건의 심복이 된 천성이 우직한 무골(武骨)이었다. 태조의 본심을 알게 된 박술희는 어전회의에서 적장자인 태자 무의 정윤 책봉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청했다. 박술희의 주청에 따라 태조는 마침내 태자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고, 박술희를 따로 불러 그를 보호해주도록 당부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충주의 호족 유씨 가문은 불만을 품었고, 유씨 가문 출신으로서 태자 무와 경쟁자 관계였던 둘째 아들 태자 태의 어머니인 신명순성황후의 반발은 더욱 컸을 것이다. 아마도 장화황후 오씨와 신명순성황후 유씨의 갈등은 그때부터 본격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명순성황후 유씨가 태조 왕건에게 시집간 시기는 언제였을까. 그녀의 두 아들 정종과 광종의 나이를 기준삼아 역산해보면 아마도 태조 즉위 초의 일로 추정된다. 즉, 둘째 아들 정종 왕요는 태조 6년(923년)에 태어났고, 셋째 아들 광종 왕소는 2년 뒤인 태조 8년(925년)에 태어났다. 정종은 이복형 혜종보다 열한 살 아래요, 동복아우 광종보다는 두 살 위였다. 정종 위로는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이는 동복형 태자 왕태와 누나 낙랑공주가 있었다. 조심성 많은 왕건이 무서운 황제 궁예의 의심을 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력한 호족의 가문과 혼인을 했다는 것도 정황상 사리에 맞지 않는다.
태조가 즉위한 것은 918년 6월 15일이며,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맏딸 낙랑공주를 신라왕 김부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가 나라를 들어 항복한 태조 18년(935년)이니 그때 낙랑공주의 나이는 15~ 16세쯤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공교로운 사실은 태조의 맏이와 둘째 두 아들의 이름 무(武)와 태(泰)를 합치면 궁예왕이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면서 제정한 연호 무태와 꼭 같다는 점이다. 무슨 뜻이 있는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기에 참고로 덧붙이는 것이다.
태조가 태자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한 것은 태조 4년(921년)의 일이니 아마도 즉위 직후 청주의 호족 유씨 가문과 연대를 더욱 굳게 다지려고 신명순성황후를 셋째 부인으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태조가 황제의 권위로도 뜻대로 정당한 후계자인 태자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지 못하고 박술희의 힘을 빌린 이유도 신명순성황후의 친정인 청주 유씨 가문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주 유씨는 청주 일대의 가장 강력한 호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평산의 호족 박수경 가문과도 가까웠고, 궁예왕을 쫓아내고 고려를 개국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다가 새로 맞아들인 신명순성황후가 둘째 아들 태자 태를 낳았으므로 마음대로 정윤 책봉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명순성황후가 태조의 셋째 부인이 된 것은 태조 원년에서 늦어도 태조 4년 이전이었을 것이다.
이 정윤 책봉을 둘러싸고 제2황후 오씨와 제3황후 유씨 사이에는 살벌한 긴장관계가 조성되었을 것이고, 그 갈등은 태조의 붕어와 혜종의 즉위를 지나 혜종 말년의 피비린내 나는 정변까지 이어지게 된다. 신명순성황후가 낳은 맏아들로서 정윤 책봉 다툼에서 밀린 태자 태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신명순성황후는 더욱 태조의 총애를 얻기 위해 피눈물 나게 애썼을 것이다. 이는 그녀가 5남 2녀를 낳음으로써 태조의 후비 29명 가운데 4남 3녀를 낳은 여섯째 부인 정덕황후 유씨와 더불어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사실만 보더라도 잘 알 수가 있다.
태조에게 공식적으로 29명의 후비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힌 바이지만, 이 가운데 등극 전의 부인은 두 명에 불과하고,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황후 유씨를 비롯하여 27명은 모두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각 지방 호족과의 연합을 강화하여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이들 후비는 모두 정1품 벼슬에 해당한다.
그러면 광종이 태어날 무렵 고려의 형편을 살펴보자.
광종이 태어난 925년은 왕건이 고려 태조로 등극한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그 해는 또 신라 경애왕 2년, 후백제의 견훤왕 34년, 북쪽에서는 발해 애왕 25년으로 망하기 1년 전이었다. 발해는 만주에서 19년 전에 일어난 거란족의 요나라의 압박으로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 발해에서 국난을 피해 왕족과 대신과 장군 등이 백성 수천 명을 이끌고 동족의 나라 고려에 귀순해왔다. <고려사>는 태조 8년 조에서 발해에 관해 이렇게 해설했다.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족이었다. 당나라 무후(武后) 때에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요동지방을 점유했던 바, 그 뒤 당나라 예종이 그를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대조영은 자기 나라를 발해국으로 자칭하고 부여․숙신 등 10여 국을 병합했다. 발해국에는 문자․예악․관청 등 제도가 있었으며, 5경 15부 62주의 영토에 넓이는 사방 5천여 리요,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국경과 인접해 있으며 거란과는 대대로 원수를 맺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거란 임금이 그 신들에게 “대대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 어찌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발해국의 대인선(大諲譔)을 공격하여 그 수도인 홀한성을 포위하니 국왕 대인선이패배를 당하여 항복하기를 청했다. 거란은 결국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발해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 귀순하는 사람들이 계속 그치지 않았다. -
북쪽에서는 발해가 망해 유민들이 귀순하고, 남쪽에서는 망해가는 신라 사람들의 귀순이 줄을 이었다. 태조는 이런 기세를 타고 후백제에 대한 군사적 공세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태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성에서 견훤과 맞선 것도 그 해였는데, 그 싸움은 결국 양국이 인질을 교환하고 화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에는 광종의 즉위 과정을 되돌아본다.
고려제국을 창업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일세의 영걸 태조 왕건이 붕어한 것은 943년 5월. 제위에 오른 지 26년째요, 향수는 67세였다.
태조가 세상을 뜨자 장화황후 오씨 소생인 맏아들 무가 즉위하니 혜종이다. 당시 32세였던 혜종의 자는 승건(承乾). 912년에 나주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10세 때인 태조 4년(921년)에 황위 계승자인 정윤에 책봉되었다. 혜종은 태자 시절 선제 왕건을 따라 여러 차례 백제정벌전에 나섰으며 그때마다 군사들의 앞장에서 용감하게 싸워 전공을 세웠으므로 개국 후 제1등공신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태자 시절에는 용감했던 그가 무슨 까닭에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갑자기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토록 어렵게 황위계승권을 확보하여 제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혜종은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2년 4개월 동안 힘겨운 황제 노릇을 하다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병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고려사> ‘세가’ 혜종 편 을사 2년(945년) 조 마지막 부분은 혜종의 최후를 이렇게 전한다.
- 대광 왕규(王規)가 왕의 아우 요와 소를 참소하였으나 왕은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 더욱더 그들을 은혜롭게 대우하였다.
왕규는 또 그 일당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와 난을 꾸미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왕은 침실을 옮겨 피하였을 뿐, 그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위독하게 되었으나 여러 신하가 들어가 볼 수가 없고 아첨하는 소인들만 늘 곁에 모시고 있었다. 무신일에 왕이 중광전(重光殿)에서 죽었다. 재위 연수는 2년이요, 향수는 34세였다.
왕은 도량이 넓고 지혜와 용기가 탁월하였다. 그러나 왕규의 역모사건 이후에는 의심과 꺼림이 많아져서 늘 무장한 군사들로 자신을 보위하면서 기뻐함과 노여워함이 대중없었다. 그리하여 소인배가 일시에 득세를 하고, 장병들에게 주는 상은 절도가 없게 되니 안팎에서 한탄과 원망이 자자하였다. -
그렇게 하여 혜종의 이복동생이며 신명순성황후의 둘째아들인 당시 22세의 태자 왕요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정종이다. 정종은 즉위 원년(950년)에 연호를 광덕(光德)이라고 공포했다. 신명순성황후가 정윤책봉사건 이후 20년이 넘도록 장화황후 오씨의 그늘에 가려 때로는 숨죽이며 때로는 이를 갈며 기다려온 보람이 있어서 마침내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는 혜종이 죽기 전에 왕요에게 제위를 물려준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종이 즉위 후 가장 먼저 처리한 일은 왕규를 역모죄로 잡아 죽인 것이었다. 왕규의 혐의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장차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고 꾀했다는 것이었다. 광주원군은 왕규의 딸이며 태조의 제16황후인 소광주원부인의 소생이다. 왕규는 강화도로 유배당했다가 곧 정종이 보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혜종의 죽음과 정종의 즉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나 많다. <고려사> ‘세가’가 전하는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설득력이 없고 따라서 신빙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첫째, 왕규가 과연 역모를 꾀했느냐 하는 점이다. 왕규가 비록 태조와혜종 부자에게 모두 딸을 바쳐 겹사돈이 되고, 경기도 광주의 호족 출신으로 대신이 되어 조정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적장자도 아닌 자신의 외손을 제위에 올리려 했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믿기 어렵다. 정말로 혜종이 병이 깊어 후사가 걱정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황실에는 혜종의 적장자인 흥화궁군도 있었고, 혜종의 장성한 아우들인 왕요와 왕소도 있었으며, 또 다른적자가 6명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력을 장악하지 못한 왕규가 서열이 한참 떨어지는 태조의 제16황후가 낳은 어린 광주원군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다.
둘째, 왕규가 왕요․왕소 형제의 역모를 혜종에게 고변했으나 혜종은 오히려 그의 말이 참소라는 사실을 알고 아우들을 더욱 믿고 아꼈다고 한 점이다. 황제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을 죽이거나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려는 역모를 보고받았으면 당연히 사실을 정확히 조사하여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나면 역모를 꾸민 자들이 이복동생이 아니라 친동생이라도 처형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또한 참으로 무고로 드러났다면 참소한 왕규의 목을 베거나 귀양을 보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혜종은 이쪽도 저쪽도 다 놓아둔 채 전전긍긍하기만 했으니 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셋째, 참소가 통하지 않자 왕규가 부하들을 시켜 황제의 침전에 구멍을 뚫고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참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왕규는 본래 함씨(咸氏)였지만 태조의 신임을 받아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박술희․염상․박수문 등과 더불어 태조로부터 혜종의 보필을 부탁받은 고명대신이었다.
태조의 유명을 어긴다는 것은 곧 태조를 따라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누벼온 이 범 같은 장수들과 등을 돌리고 화를 자초하는 행위가 된다. 혜종만 잘 보필하면 태후요 사돈인 장화황후와 협력하여 궁중에서 누구보다도 강력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왕규가 무엇이 모자라서 황제의 침전에 자객을 보내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겠는가.
넷째, 이른바 왕규의 역모가 실패로 돌아가 정종이 즉위 즉시 왕규 일당의 처형부터 단행했는데, 묘하게도 왕규가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광주원군이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은 빠져 있다. 아무리 허수아비 임금이라도 반역자들이 내세운 다음 황제 후보를 그대로 살려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왕요․왕소 형제가 선수를 쳐서 벌인 황위쟁탈전의 성격이 짙다고 보는 것이다. 사건 전개를 전후한 정황을 여러 모로 검토할 때, 혜종․장화황후․박술희․왕규가 한편이었고, 신명순성황후․왕요․왕소가 반대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두 진영의 균형을 단숨에 깨뜨리고 왕요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왕식렴(王式廉)이었다. 왕식렴은 태조 왕건의 사촌아우 왕평달(王平達)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태조의 명령에 따라 서경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거느린 서경군은 황성을 방어하는 개경군에 못지않은 고려의 막강한 주력군이었다.
왕식렴이 서경군을 이끌고 내려와 황도인 개경으로 진주했을 때에 혜종은 괴질로 급사했는지, 아니면 왕요 형제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이미 죽은 뒤였고, 장화황후 오씨와 왕규는 더 힘을 쓰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왕요 일파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박술희를 죽이고, 이 사실을 왕규의 짓이라고 뒤집어씌웠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역할 뜻을 품고 있기에 왕규가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했는데, 아마도 왕요 일파가 혜종의 무력적 기반이며 왕규보다도 더 무서운 강적인 노장 박술희를 먼저 제거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로지 충성밖에 모르던 우직한 박술희가 태조의 유명을 배신하고 혜종을 보호하기는커녕 반역을 꾀했다는 말은 전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왕규와 박술희가 역적으로 기록된 것은 이처럼 ‘성공한 쿠데타’ 끝에 제위에 오른 정종과 광종 측의 역사 왜곡이라는 심증이 짙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실록이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였다. 현종 2년(1011년) 거란의 40만 대군이 침범해 개경이 점령당하고 황궁이 소실될 때에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에 걸친 귀중한 사초가 모두 불타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현종이 1013년 9월에 이부상서 최항(崔沆), 예부상서 김심언(金審言), 예부시랑 주저(周佇), 내사사인 윤징고(尹徵古), 시어사 황주량(黃周亮), 우습유 최충(崔冲) 등을 수찬관으로 임명하고 사료를 복원하여 ‘칠대실록(七代實錄)’ 을 편찬토록 했다. 이들은 사초가 없어져 전대의 역사를 알 수 없었으므로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료를 채록하여 그것을 토대로 실록을 편찬했다. 따라서 혜종․정종․광종대의 기록이 정확할 수가 없었고, 신빙성도 그만큼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혜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정종은 왕규를 비롯하여 300명에 이르는 조정 대신을 처형했으니 도성과 황궁 안에서 피비린내가 사라지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일이 흘러야 했을 것이다.
기록에는 이같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황실의 권력투쟁에서 왕요와 왕소 형제의 어머니인 신명순성황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전해주는 내용이 전혀 없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둘째아들 정종과 셋째아들 광종의 재위 사이에 죽었으리라는 사실만 전해줄 뿐이다.
정종 요는 앞서 말한 대로 혜종이 죽은 뒤 ‘신하들의 추대로’ 황위에 올랐는데 이 기록 또한 그가 이복형인 혜종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제위를 차지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기며 제위에 올랐건만 정종의 치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정종은 재위 4년째인 949년 3월에 병세가 위중해지자 친동생 왕소를 불러 제위를 물려주고 황궁 안의 제석원(帝釋院)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정종이 혜종에 잇따라 이름도 모를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는 어쩌면 황위쟁탈전 때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데에 따른 부작용으로 혹시 정신적인 질환에 걸린 것은 아닌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일세를 울린 태조 왕건의 셋째 부인으로 두 아들이 황제에 오르고, 신라의 마지막 황제를 사위로 맞았던 성공한 여인 신명순성황후는 광종 2년(951년)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광종 2년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성 남쪽에 창건하여 태조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하고, 또 불일사(佛日寺)를 개경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죽은 모후 신명순성황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광종은 재위 5년(954년) 봄에도 숭선사(崇善寺)를 창건하여 이미 극락으로 간 모후의 명복을 빌었다고 했다.
따라서 신명순성황태후는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두 아들이 황위에 오르는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태조에게 시집갔을 때의 나이가 20세 안팎이었다면 죽을 때의 나이는 아마 60세가 좀 모자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어렵사리 제위에 오른 광종은 연호를 광덕(光德)이라고 선포하고, 대광 박수경(朴守卿) 등에게 명해 왕실과 자신의 즉위에 공로가 큰 사람들을 포상함으로써 왕권 강화의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재위 2년(951년)에 후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주는 중국 5대 최후의 왕조로서 951년부터 960년까지 유지했던 하루살이 제국이다. 재위 7년(956년)에 후주에서 쌍기(雙冀)가 왔다. 쌍기는 대리평사란 벼슬을 하던 자였는데, 사신인 장작감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와 왔다. 설문우와 쌍기는 고려 조정에 대해 의관을 중국식으로 바꾸도록 권유했고, 광종은 후주와의 유대 강화를 통해 수시로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여진과 거란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를 따랐다.
또 한편 재위 9년(958년)에는 중국식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한림학사 쌍기로 하여금 과거를 주관토록 했다. 쌍기는 병으로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했는데, 광종은 그의 재주에 반해 그에게 한림학사란 벼슬을 주고 측근에 두고 있었다.
광종은 이에 앞서 956년에는 쌍기를 시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토록 했다. 노비검안법이란 본래 노비가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하여 양민의 신분으로 되돌려준 것을 가리킨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의 시행은 고려사회에 태풍과 같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조치로 개국 초부터 기득권을 누리던 호족들 대부분이 철퇴를 맞은 격이었던 것이다.
먼저 그들의 경제적․무력적 기반이 되었던 노비제도가 이 검안법에 따라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비가 하루아침에 양인으로 지위를 회복함에 따라 노비제도는 유명무실하다시피 되어버렸으니, ;은 참으로 일종의 노예해방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제도도 호족들에게 타격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거제도를 통해 젊고 재주 있는 신진 관료의 등장에 따라 그 동안 공신이란 명목 하나로 차고앉았던 벼슬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당연히 호족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7년 동안이나 치밀하게 개혁을 준비해온 광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부인인 대목황후 황보씨까지 나서서 노비안검ㄴ법을 페지할 것을 간절히 호소했지만 광종은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공신과 호족들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설상가상 격으로 과거제까지 시행하여 신진 관료들로 조정이 채워지자 호족들의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재위 11년인 960년. 중국에서는 5대의 마지막 나라인 후주가 망하고 송나라 섰다. 그해 봄에 광종은 백관의 의복을 제정하여 관리들이 관직과 직급에 따라 각각 다른 색갈의 옷을 입게 했다. 이 또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도성인 개경을 황도(皇都)로, 서경은 서도(西都)로 개칭하여 북쪽 변경의 국방과 치안을 강화했다. 그리고 망해 없어진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준풍(峻豊)이란 연호를 선포했다. 고려가 당당한 제국이요, 자신은 황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내외에 천명하여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광종의 이와 같은 강력한 개혁조치에 호족들도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해 960년 3월에 평농서사 권신(權信)이 참소하기를, 대상 준홍(俊弘)과 좌승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했다. 그러지 않아도 공신 호족들의 반격이 언젠가는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던 광종이었다.
광종은 이를 기화로 수많은 호족들에 대해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준홍과 왕승 등은 쫓겨나는대 그쳤지만 여기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혜종의 아들인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까지 처형시켰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며 태자인 주(伷), 뒷날의 경종까지 의심하여 죽이려고 했다. 이 정도면 가히 역모 노이로제에 걸렸다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집권 후반기의 광종은 왕건 강화를 위한 숙청으로 날을 보내다시피 했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최대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황제에 대해 불만이 고조될 대로 고조된 형편이었다. 이처럼 원성이 높아지자 광종도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만 했다. 그는 지방의 주․현에서 건장한 자들을 선발해 자신의 시위군을 강화하기도 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로 대표되는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치는 결과적으로 개국공신과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진 관료를 대거 발탁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여 그 뒤 500년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개국 초부터 통치이념이던 불교사상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새로운 문물을 접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또한 광종은 국방력 강화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군제를 개편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동북과 서북 방면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넓히는 한편, 호시탐탐 노략질의 기회를 엿보는 여진족과 거란족을 견제했다.
광종은 또 불교의 개혁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기도 했다. 부황 태조와 마찬가지로 광종 도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다. 당시 불교계는 이론 중심의 교종(敎宗)과 참선을 통한 실천 중심의 선종(禪宗)으로 나뉘어 있었다. 광종은 균여(均如)를 앞세워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광종은 재위 13년(962년)에 개경에 세운 귀법사 주지로 균여를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후삼국 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양분됐던 화엄종을 통합했다. 그리고 흥화사․유암사․삼귀사 등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수시로 팔관회 같은 불교 행사를 벌였다.
하지만 광종은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분열된 선종의 통합에는 실패했다. 당시 선종은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었기에 아무리 강력한 왕권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광종은 태조 이후 공신과 호족들에 의해 약화된 왕권 확립을 위해 피의 숙청을 동반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 부작용도 컸다. 역모에 대한 지나친 경계로 신하들을 마구 죽였으니 공포분위기가 조정을 지배했다.
또 쌍기 등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들과 과거를 통해 등장한 신진 관료들을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여 수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무슨 일이든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안정을 해치기 마련이다. 광종이 어느 정도로 귀화인들을 우대했는가 하면 이들에게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주고, 심지어는 여자들을 골라 주기도 했으니 선대부터 충성을 바치던 노신들이 좋아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개혁제왕 광종은 재위 26년(975년) 5월에 갑자기 병들어 죽엇다. 당시 51세. 광종은 재위 19년(968년)에 혜거(惠居)를 국사(國師)로, 탄문(坦文)을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974년에 혜거가 죽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고승대덕을 국사나 왕사로 삼는 제도는 광종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광종이 죽자 시호는 대성(大成)으로, 묘호는 광종으로 했으며, 능은 헌릉(憲陵)으로 소악산 북쪽에 장사지냈다. <고려사> ‘광종세가’ 26년 조에 이런 평이 붙어 있다.
- 왕이 즉위 초에는 신하들을 예절로 대하고 정사처리에 밝으며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비를 중하게 여기며 밤낮으로 근면하여 정치가 잘될 듯도 하더니, 중년 이후에는 참소를 듣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으며 불법을 혹심하게 믿었고 사치에 제한이 없었다. -
광종의 뒤는 그의 유일한 아들 주가 이으니 곧 경종이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광종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아 나갔다. 대사령을 내려 귀양간 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자들은 풀어주었으며, 전과를 없애 관작과 작위를 회복시켜주니 결국 공신과 호족들만 다시 살판을 만난 셈이 되었다. 그런 가닭에 광종의 개혁정치를 실패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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