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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구민중행동 모임에서 발표할 글입니다.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제국주의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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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론](1916)이 나온지 100년 이상이 흘렀다. 그간의 세계사적 변화, 특히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성장과 몰락, 그리고 자본주의의 폭주 앞에서 제국주의 내지 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시대착오로 치부되기 쉽다. 물론 레닌이 우리의 당면 문제들을 위해 모든 해답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주의론]은 오늘날의 변혁적 노동운동이 처한 난관들을 이해하고 그 타개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통찰들을 제공한다. 레닌의 논지들과 밀접히 연관된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들을 그의 주장과 대질⋅검토하는 일은 흘러간 옛노래의 김빠진 재탕에 머물기보다 오늘과 내일의 실천을 위해 의미 있는 사고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논의 속으로 한 발 들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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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제국주의를 독점적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고 규정한다. 그는 제국주의의 기본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 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3) 상품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4) 국제적 독점자본가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한다. (5)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전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제국122) 이를 요약하여 레닌은 제국주의를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 트러스트들 간의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라고 정의한다.(제국122)
이러한 정의는 레닌의 자의적 구성물이 아니라 당대의 경제적 정치적 현실을 실증적으로 파악한 결과다. 또 그것은 특히 카우츠키의 제국주의론에 대한 비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레닌에 따르면, (1)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가 아니라 금융자본이 ‘즐겨 사용하는’ ‘정책’이라고 본다.(제국123) (2) 또 그는 제국주의를 ‘고도로 발전된 산업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보고, 그 본질이 ‘농업지역을 지배하거나 병합하려는 산업자본주의 민족의 노력’에 있다고 주장한다.(제국124) (3) 나아가 카우츠키는 국제적인 카르텔 등을 근거로 ‘전세계 제국주의들 간의 투쟁이 아닌 연합의 국면’, 즉 ‘자본주의 하에서 전쟁이 종식’되고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착취’가 일어나는 국면인 ‘초제국주의’의 가능성을 표명한다.(제국127)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단계’가 아니라 ‘정책’이라고 보는 것은, 트러스트와 은행의 정책을 그 경제적 토대와 분리하고 제국주의의 정치를 제국주의의 경제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자본주의 최근단계의 가장 심각한 모순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얼버무리는 것이며, 맑스주의 대신 부르주아 평화주의와 개량주의’를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와의 화해에 대한 보다 교묘하고 보다 위장된(따라서 보다 위험스러운) 옹호에 지나지 않는다.’(제국126) (2) 제국주의의 특징은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이며, ‘경쟁자를 약화시키고 그 헤게모니를 잠식하기 위해’ ‘농업지역뿐만 아니라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까지도 병합’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제국124-125) (3) 초제국주의 개념은 금융자본의 지배가 세계경제에 내재하는 불균등성과 모순을 감소시킨다는 식으로, ‘제국주의 옹호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지극히 잘못된 사상을 조장’한다.(제국128) 금융자본과 트러스트는 세계경제 각 부분 간의 성장률 차이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대시킨다.(제국130)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축적 간의 불균형, 식민지 분할과 금융자본의 세력권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하에서 전쟁 이외에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제국132) 레닌은 카우츠카의 제국주의 비판이 ‘제국주의의 뿌리깊은 모순을 흐려’ 놓음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귀결’된다고 본다.(제국158) 또한 레닌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 전쟁을 ‘조국방위 전쟁’으로 미화하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의 협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민족287)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배외주의와 제3인터내셔널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운동이 격렬하게 충돌하기에 이른 ‘세계사적 현상’에 직면해 레닌은 이러한 현상의 경제적 토대를 제국주의의 특징인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후화’에서 찾는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제국주의단계의 독점자본주의는 예외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이자표’에 의해, 즉 자본수출을 통해 전세계를 약탈한다. 이때의 초과이윤 중 일부로 노동자 지도부와 노동귀족 상층부를 매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선진’국 자본가들은 ‘직접⋅간접으로, 또 공개⋅비공개로 그들을 매수’하고 있다. 이로써 부르주아지화한 노동자층 혹은 ‘노동귀족’층은 ‘매우 속물적인 생활양식, 소득규모,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지주이자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 지주’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운동에 있어서 부르주아지의 실질적인 하수인이자 자본가계급의 노동관리인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 전달자’인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내전에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부르주아지의 편에 가세한다.(제국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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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배외주의 및 카우츠키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오늘의 노동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단계에 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예컨대 자본수출에 해당하는 투자소득수지는 한국의 경우 2018년 기준 약 42억 달러(5조원)인 데에 비해 상품⋅서비스수지는 764억 달러(92조원)이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투자소득수지는 1899억 달러(229조원), 경상수지는 1747억 달러다. 즉 한국의 자본수출 소득은 일본의 45분의 1 정도이다. 일본의 경우 자본수출수지가 경상수지를 능가하고 있다. 단편적 자료만으로 쉽게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지만, 일단 한국의 자본수출이 일본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선진국 진입 여부는 자본수출에 달려 있다”는 투자전문가의 말은 한국 자본주의가 나아가고자 하는 진로를 가리켜 보인다. 실제로 2019년의 경우 해외투자액(619억 달러) 구성에서는, 금융⋅보험(40.5%)과 부동산 분야(11.2%)를 합하면 제조업(27.9%) 분야를 훨씬 앞지르고 있다. 증가율도 금융⋅보험⋅부동산 분야가 전체의 50%를 넘어선다. 한국 자본주의도 해외투자와 관련해서는 산업자본을 능가하는 금융자본의 주도 아래 자본수출의 길로 달리는 경향을 띠고 있는 셈이다. 또 이에 따라 초과이윤이 증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한국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의 흐름 속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동계급 상층부의 매수와 관련해 한국 자본가들도 레닌 시대의 제국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뜻을 품지는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 경우 삼성 X파일이나 지난날 정권 차원에서 당연한 것처럼 자행된 천문학적 뇌물수수와 정경유착 문제를 떠나, 전문직이나 대기업 정규직부터 중소기업 비정규직까지의 극심한 임금 격차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 정규직의 높은 연봉은 무엇보다 오랜 경제투쟁의 성과물이며 OECD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재사망률과 같은 노동자 희생의 반대급부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경우처럼 이를 다시 저임금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다른 한편 극심한 임금격차 구조는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양산 정책에 맞선 노동계의 투쟁 실패, 하청업체들을 상대로 한 대기업들의 착취구조 고착화, 자본집약을 통해 가능해진 대기업들의 생산력 증대 등의 요인들에 기인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베트남⋅인도 등지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통해 대기업들이 거둬들이는 초과이윤도 부분적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임금 격차 구조가 20년 이상 고착되면서, 노동운동이 변혁운동과 멀어지게 된 점이다. 상층부 노동자들은 소시민적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고, 저소득층은 경제적 위계질서의 사다리 한 단계라도 올라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서 자본권력은 불변의 진리처럼 절대화되고 있다.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의 분할지배는 매수 효과를 착실히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과학기술이 여러 분야에서 이미 한국과 중국에 추월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삼성이나 LG 등이 첨단기술로 누리는 특별잉여가치 역시 시한부이며 언제라도 중국만 아니라 베트남이나 인도 등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미국이나 유럽 주요 국가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생산력 발전의 이러한 불균등성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한 무정부성, 예컨대 과잉중복 투자 등과 이윤율의 전반적 저하로 인해 자본축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자본이 그 손실과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은 필연적이다. 전가의 방식은 대량해고와 대중적 빈곤의 양산에 머물 수도 있지만, 무역 전쟁에서 무력충돌로 이어지고 인류문명의 공멸로 치닫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경재앙 역시 무한증식 본성을 버릴 수 없는 자본권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문명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자본권력에 대한 적극적 통제가 불가피하다. 이를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력구조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산출하기 위한 변혁운동의 주체는 자본권력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는 노동계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당위이자 구조적 잠재력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고액 연봉과 품위 있는 사회적 지위 따위로 ‘매수’된 상층 노동자들은 자본권력의 대리인이 되어 보수 정치권을 기웃거리다 기회만 되면 깊숙이 발을 담그기 일쑤 아닌가. 이들이 자랑하는 민주와 애국의 이면에서 ‘삼성 만세’ 소리를 들으면 이는 무의미한 환청이겠는가. 한일 무역전쟁을 계기로 이재용은 면죄부와 함께 국민영웅의 이미지마저 얻으려 들지 않는가. 변혁적 노동운동은 자본권력과 그 대리인들이 부추기는 배외주의⋅탈-노동중심주의⋅계급화해주의⋅자본절대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와 명확히 선을 긋고 자본의 노동적대적 본질을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너머의 새로운 질서를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서 내놓고 대중화할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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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를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라고 보면서도 독점의 궁극적 형태로 구상된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개념을 일차대전의 현실에 근거해 비현실적인 허구라고 비판한다. 레닌은 ‘자유경쟁은 생산의 집적을 낳고 생산의 집적은 그 발전의 일정단계에서 독점에 이른다’는 맑스 논리의 타당성을 강조하지만(제국47), 동시에 독점이 경쟁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한다. “자유경쟁으로부터 성장해 나온 독점체는 자유경쟁을 배제하지 않고 그 위에, 그와 나란히 존재하며, 또 그럼으로써 매우 첨예하고 심각한 수많은 대립과 마찰, 갈등을 낳는다.”(제국121) 카우츠키가 초제국주의의 단초로 상정하는 카르텔과 관련해서도 레닌은 이렇게 주장한다. “카르텔이 공황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본주의를 미화하려고 애쓰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퍼뜨린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몇몇 산업부문에서 생성된 독점은 자본주의적 생산 전체에 고유한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심화시킨다.”(제국56)
카르텔⋅신디케이트⋅트러스트 등의 독점자본 연합체들은 국내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자본수출이 늘어나고 대외적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독점단체들 간의 연합적 협정인 국제카르텔의 형성으로 나아간다.(제국99) 이 경우 국제카르텔을 통한 자본국제화 혹은 다국적 자본의 확대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전쟁을 억제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평화주의적 희망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국제카르텔은 자본주의적 독점체가 현재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자본가단체들이 서로 투쟁하는 목표를 드러내고 있다.”(제국106) 자본국제화 내지 다국적 자본은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그 하위변수인 셈이다. 다국적 자본의 경우에도 비록 영구히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지속성을 지니는 주도적 자본과 이를 정치적⋅군사적으로 비호하는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감안하면 그 자본의 제국주의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국제적 규모의 독점자본 간에도 경쟁과 투쟁이 불가피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근본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제국94)인 발전의 불균등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독점자본 간 경쟁과 투쟁의 본질은 ‘자본과 힘에 비례한 세계분할’이다.(제국107) 앞에서 레닌은 제국주의의 주요 특질 중 하나로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 완료를 제시했지만, 그는 영토분할의 ‘완료’가 투쟁의 종료나 ‘재분할’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명시한다. “오히려 재분할은 가능하며 불가피하다”(제국109). 이때 레닌의 다음 지적을 고려할 필요 있다. 즉 경제적⋅정치적 힘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들에 주목해야지 그 변화가 순전히 경제적이냐 아니면 경제외적 군사적인 것이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다. “자본가단체들 간의 투쟁과 협정의 본질문제를 투쟁과 협정의 형태문제(오늘은 평화, 내일은 전쟁, 모레는 다시 전쟁 하는 식으로)로 대체하는 것은 곧 궤변가의 역할로 빠져드는 것이다.”(제국107) 이런 관점에서는 오늘날 직접적 식민지지배와 영토분할의 형태가 중심을 이루지는 않는다고 해서 제국주의 문제가 소멸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적⋅군사적 강대국들 사이에서 영토분쟁도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그보다 시장확대⋅원료확보⋅노동력 착취⋅영향력 확대를 위한 재분할투쟁은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으며, 재분할을 위한 갈등과 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핵전쟁까지 준비해온 것이 현대 제국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것이다.
제국주의의 시기 문제와 관련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 및 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경계는 제한적이며 가변적이다. 따라서, 예컨대 제국주의가 ‘결정적’으로 확립된 것이 몇 년 혹은 몇 년대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제국123) 모든 경계의 제한적 가변적 측면을 감안할 때, 경계의 가변성은 시기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기본특질 모두를 강하게 띠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또는 약하게 지닐 뿐인가에 따라 제국주의적 성격상 차이가 생길 것이다. 레닌 자신도 영국의 ‘식민지 제국주의’와 구별하여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고리대 제국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제국96) 어떤 명칭을 붙이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국가들의 특징을 명확히 분석하여 그 예상진로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응방안을 찾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예컨대 일본은 해외에서 경상수지를 앞지르는 막대한 투자소득 수지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또 자유로운 군사행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계 6위의 군사대국이며 강력한 핵무장 잠재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한국에 대한 수출제재를 계기로도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일본 산업기술에 대한 한국의 광범한 종속관계(‘기술 제국주의’) 극복 문제는 아직 살아 있다. 한편 일본 내부에서 제국주의에 맞서 노동자 국제주의와 사회주의를 구현하려는 움직임은 빈약하며, 한국 변혁운동과의 연대도 아직 크게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준에서라도 다양한 진보운동조직 간의 연대를 확보해갈 필요는 있다.
중국의 경우 자산 규모상 세계 10대 은행에 포함된 5개 은행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자본집적이 고도화되고 있다. 높은 국내총생산 수준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세계적 영향력의 확장을 추구하는 측면에서는 강력한 제국주의적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국가 차원에서 사회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외적으로 기생적 금융자본 투자를 제한하고 호혜적 산업자본 투자를 장려하고 있지만, 그러한 정치적 상부구조가 토대 차원에서 맹렬히 성장하고 있는 자본증식 본성을 어디까지 제어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다. 또 미국의 단일패권체제에 맞서 다자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유형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민들 내부의 극심한 양극화 해소와 민주주의 심화를 통해 중국 사회를 인류가 지향할 만한 실질적 사회주의 모델로 만들어가는 것이 일대일로나 동북공정 등을 통한 대외적 영향력 확장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한국은 아직 중국이나 일본만큼 강력하지 못하지만, 세계 12위권의 국내총생산, 7위의 군사력, 그리고 독점자본의 막대한 잉여자금이 해외의 금융⋅보험⋅부동산 등에 투자되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미 제국주의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인도로, 인도네시아 등지로 진출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미국이나 일본 등을 상대로 하는 데에 제한될 수 없고, 한국의 거대 독점자본이 제국주의적으로 발전해가는 경향에도 대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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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제국주의 시기의 경계선 문제에서 가변성을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적 종속과 관련해서도 유연한 사고를 요구한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정책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금융자본과 그 대외정책−이는 곧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분할을 위한 열강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이 국가종속의 수많은 과도적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국이라는 두 개의 주요 집단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융적⋅외교적 종속의 그물에 갇혀 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속국들도 이 시대의 전형이다.”(제국118) 물론 다양한 형태 속의 본질은 종속국에 대한 지배와 착취이다. “제국주의는 금융자본과 독점의 시대로서, 어디에서나 자유가 아닌 지배에 대한 열망을 가져온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 간에 이들 경향의 결과는 어디에서나 반동이며, 정치영역에서의 대립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민족적 억압과 병합의 열망, 즉 민족자주의 침해는 더욱 심화된다(병합은 바로 민족자결권의 침해에 다름 아닌 것이다).”(제국158)
20세기 전반기까지와 달리 오늘날에는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국을 ‘주요 집단’이라고 할 수는 없고,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종속국’, 이른바 신식민지가 직접적인 식민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진보적 의미를 인정하더라도, 그에 따라 제국주의적 지배관계가 더욱 교묘해진 가운데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레닌의 논의는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게 하면서도 그 변화 속의 불변적 지배관계를 놓치지 말도록 요구한다.
형식적인 정치적 독립성과 경제 발전의 역동 및 규모를 고려할 때 한국을 통째로 식민지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금융적⋅외교적 종속의 그물’과 아울러 군사적⋅문화적 종속 문제를 놓고 보면 한국이 식민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원하지 않은 사드 배치, 대규모 미군 주둔과 주둔비 갈등, 거액의 무기 수입, 전시 작전권 미반환, 남북관계에서의 미국 의존 등의 문제에서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자본⋅문화⋅기술에 등에 대한 종속성 등에 근거해 한국을 식민지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를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거부하기보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변혁운동이 감당해야 할 당면과제를 강력히 부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물론 이 종속관계의 극복 없이는 어떤 변혁운동도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빠지지 않는 가운데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최적의 투쟁방식을 만들고 실천해가야 하겠지만, 반자본주의 투쟁과 대외적 종속 극복 투쟁을 별개의 문제로 분리하거나 대립시키기보다 유기적으로 결합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투쟁은 제국주의에 맞서고 노동자 국제주의를 실현하는 투쟁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요모순 해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마오의 이론에 근거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배타적 우선성을 놓고 양보 없는 노선투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모순들의 현실적 비중과 관계에 적합한 복합적 해결방안을 찾아 운동의 통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레닌은 이러한 결합운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그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억압을 확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열강들 사이의 전쟁’을 ‘민족의 자유’, ‘민족자결권’, ‘조국방위’라는 구실로 정당화하는 ‘사회애국주의자들’, ‘사회배외주의자들’, ‘카우츠키주의자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선진국들의 배외주의와 민족주의에 맞서 투쟁할 임무를 제기한다.(민족152, 165) 레닌이 보기에 일차대전은 그에 참여한 ‘양 진영 모두에게 제국주의전쟁, 즉 침략적⋅강도적⋅약탈적 전쟁’이었을 뿐이다.(제국32) 그는 어느 진영에도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떤 정당한 민족해방전쟁도 불가능하다고 보고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경시하는 룩셈부크 등의 입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민족175) 그는 힐퍼딩의 글을 끌어들이며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병합과 민족적 억압이 저항을 격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로이 개방된 나라로 수입된 자본은 대립을 심화시키고, 민족적 자각에 눈을 떠가는 민중들의 침입자에 대한 저항을 끊임없이 증대시킨다. 그리고 이 저항은 쉽사리 외국자본에 대한 위험스런 저항수단을 사용하는 데까지 발전한다.”(제국159)
레닌은 이러한 저항의 변혁적 힘을 극대화하기 위한 실천 논리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의 시각에서 모든 민족을 억압민족과 피억압민족으로 분리해야 한다.(민족152) 또 억압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피억압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반면에 피억압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피억압민족의 노동자들과 억압민족의 노동자들의 무조건적 통일을 지지해야 한다.(민족161) 또한 레닌은 모든 피억압민족의 자유와 민족자결권을 부여할 필요성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절박한 문제라고 주장한다.(민족166) 이때 레닌은 “선진국에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전과, 발전하지 않은 후진적이며 억압받는 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을 포함하는 일련의 민주주의적 혁명운동이 결합되는”(민족265) 형태의 사회혁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 아시아 아프리가 등지의 수많은 식민지 예속민족들의 민족해방 요구와 그 혁명적 잠재력을 존중하는 현실적 판단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국가 단위의 종속과 억압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아직 의미 있는 전략이다. 특히 제국주의적 요소와 식민지적 요소를 함께 안고 있는 한국에서의 변혁운동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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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단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 곧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레닌의 경우에도 운동의 무게중심은 전자에 있다. 그에게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인 것이다. “요컨대 독점은 자본주의로부터 보다 높은 체제로의 이행이다.”(제국121) 세계대전의 민족주의적 광기와 망명의 난관 속에서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비판적 인식이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생산의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나 의식에 반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 곧 완전한 자유경쟁으로부터 완전한 사회화로의 과도적인 질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제국53) 그러나 아직 제국주의는 ‘완전한 사회화’에 이른 것이 아니다. 생산수단이 사적 소유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레닌은 철도건설이 이 근본적 모순을 집약하고 있다고 보았다. “철도의 건설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민주주의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을 보급하는 사업인 것처럼 여겨진다. 적어도 자본주의적 노예제를 밝은 색채로 윤색함으로써 보수를 받고 있는 부르주아 교수들이나 쁘띠부르주아적 속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수천 가닥의 연결망으로써 그러한 사업을 생산수단 일반의 사적 소유와 결합시켜 주는 자본주의적 끈은 철도 건설사업을 (식민지⋅반식민지의) 수억의 민중들, 즉 ‘문명’국의 임금노예를 포함하여 종속국에 살고 있는 지구상의 절반 이상의 인구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화시켰던 것이다.”(제국32-33) 이 점에서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과 극소수 자본가 사이의 계급모순이자,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지 민중들 사이의 민족모순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문명을 보급하는 가운데 절대다수 민중들을 노예노동에 묶어놓거나 산업예비군으로 내몰아 빈곤에 빠뜨려버리는 사업들이 수없이 늘어났지만,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견고하게 남아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제국주의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제국32) “자본주의체제의 현실에서 볼 때, 그 형태가 어떠하든, 즉 다른 것들에 대립되는 하나의 제국주의적 연합이든 아니면 모든 제국주의열강을 포괄하는 전반적 동맹이든 그것들은 모두 전쟁과 전쟁 사이의 하나의 ‘휴전’ 이상의 것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제국157) 불균등발전으로 인한 제국주의 세력들 간의 갈등⋅투쟁⋅전쟁은 외형상의 평화와 동맹 속에서도 항상 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점에서, 레닌의 지적은 현재적이다. 이 점에서 ‘제국주의적 평화기와 제국주의적 전쟁기간의 살아 있는 연관’(제국157)을 밝히라는 레닌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본의 무한증식 원리가 인류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 외형상의 평화와 번영과 질서 속에서도 전쟁을 통한 인류 공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그 대응책으로서 자본권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일을 변혁운동의 당면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 체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상태는 지배기구로서의 국가는 물론이고 민주주의조차 필요 없게 되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저절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귀결되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변증법적 실천이론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주체의 의식적 투쟁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수시로 ‘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말로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절단하는 듯하지만, 그러한 테제 자체가 변증법적 맥락 속에서 구사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주관적 관념론자들과 상대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자, 객관적 현실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인식과 주장에 대한 책임을 떠안겠다는 주체적 자세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변혁이론과 실천에서 변혁주체들의 의식은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다음 주장도 그러한 입장을 전제한다. “영국측과 독일측 가운데 어느 쪽 금융약탈자 집단이 보다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느냐를 결정짓는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수천만 명의 사망자와 불구자, 그리고 이 두 개의 ‘평화조약’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짓밟히고, 억압받고, 기만당하고, 우롱당해 온 수백 수천만 민중들을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각성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전쟁이 빚은 전반적인 폐허로부터 성장하고 있는 전세계적인 혁명적 위기는 아무리 길고 험난한 도정들을 거칠지라도 결국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그 승리로 종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제국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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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이야말로 계급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했을 때, 레닌은 이를 ‘극좌메시아주의’라고 칭하고 그 주관주의를 비판했다. 민중의 각성만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그 승리’가 도래하리라고 보는 것을 레닌의 현실주의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혁명의 주체들이 겪어내야 할 ‘길고 험난한 도정들’은 결코 공문구가 아니다. 레닌은 합법과 비합법, 봉건유제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의식적 전위조직 운동과 자발적 대중운동,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등 혁명적 실천과 직접 관련되는 주요 문제들만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상학 등 세계관 및 사유방식에 대한 문제들을 놓고도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며 동료들과 대중들을 설득하고 혁명적 실천으로 끌어들였다. 그것부터가 길고도 험난한 도정이었다. 물론 현실사회주의체제 건설과정과 그 이후 제국주의 세력과의 오랜 전쟁 기간, 그리고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전세계 노동자⋅민중이 겪어내고 또 앞으로도 겪어야 할 도정은 그보다 훨씬 길고 험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레닌의 이론과 실천은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