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부(楊山部)이씨(李)에서 李와 원래의 성 李의 의미는 / 이민영
신라 6촌장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씨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記)에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성을 주었다 하는 기록이 있는 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하고 성은 이(李)로,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하고 성은 최(崔)로,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로 하고 성은 손(孫)으로,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하고 성은 정(鄭)으로,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로 하고 성은 배(裵)로,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하고 성은 설(薛)로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 편 삼국유사에는 사량부의 최와 본피부의 정이 서로 바뀌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게 되어 있다.
이 6부는 혁거세가 임금이 되기 전에는 촌(村)으로, 알산양산촌(閼山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그리고 각 촌에는 촌장이 있었는 데, 양산촌에는 알평(閼平),
고허촌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 대수촌에는 구례마(俱禮馬), 진지촌에는 지백호(智白虎),
가리촌에는 기타(祇陀), 고야촌에는 호진(虎珍)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6촌장에게 사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6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신라에서 성을 사용한 시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보다 훨씬 뒤인 건국 후 약 600년이
지난 제24대 진흥왕 때 부터라는 주장이다.
이는 앞에서 도 살펴 보았지만 진흥왕 때 이전에는
어디에도 왕의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없다.
또 제3대 유리왕 때 이 6촌장들에게 성을 주었다면
유리왕 때부터 진흥왕 때 까지의 역사 기록에서 6촌장의 성씨가 붙은 기록이 있어야 하는 데,
그런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신라는 지증왕 때 와서야
‘신라’라는 국호를 썼다.
그 전에는 사로(斯盧)나 사라(斯羅)라고 하였다.
또 지증왕이 돌아가자 법흥왕은 중국의 격식에 따라
선왕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는
시호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씨(李) 족보에
신라3대 유리 이사김이 왕위로있던 해(32년)에
여섯부에게 각각 최(崔),이(李),정(政),손(孫),배(裵),설(薛) 이라는 성
이중 '이'는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라 하며 이로 하고
고허부는 사량부라고해서 최씨, 대수부는 모량이라고해서 손씨 등인데 최 손 설 이 배
이씨의 의미는
(李)를 조상, 지도자로 섬기는 백성들,제정일치시대에 '이'라는 관직은
함경도나 평안도, 하북성과 같은 동쪽부방 지역에서
사용하던 정부 책임자, 이때에는 아래 백성들을 다스리는백성정부가 있고
그위에 권력을 휘두루는 귀족정부로 나뉘어있었다.
그렇지만 이후 고대 시대로 넘어 오면서
점점 백성정부로 변하게 되고 왕,제왕등이 모두
통치자를 뜻하는 이름(옛언어)의 명칭을 사용한다 좀더 자세히 보면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행정,국방의 책임자로 계급은 지금의 수상이나 총리를 말한다
이씨 본관은
전주가 282만명,경주가 154만명으로 전체의 3분의 2정도 차지하며 전주이도 경주이가다,
그외의 본관과 시조는 성주(신라말의 명재상인 이순유) 광주(신라내물마립간시대의 내사령인 이자성)
연안(당나라장군 이무) ,한산(고려호장 이윤경) 전의(태사이도) 함평(광종때 대장군인 이언) 합천(고려호장 이개) 영천(평장사 문한문한) 벽진(고려대장군 이총언) 고성(반의 24세손인 이황) 성산(태조의 딸과결혼한 이능일) 평창이나 용인, 원주 여주등이 3만명에서 7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