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스페인 내란에 참여해 파시스트들과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의 체험을 바탕삼아 그는 ‘미소’라는 짧은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미소’에서 주인공인 ‘나’는 전투 중에 적에게 포로가 되어 감방에 갇힌다.
그는 다음 날 자신이 처형되리라는 걸 직감한다. 그 이후의 상황을 작가는 이렇게 썼다.
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공포감 때문에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담배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졌다. 몸수색 때 발각되지 않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다행히 담배 한 개비를 발견했다. 나는 손이 떨려서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기조차도 힘들었다. 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나는 창살 사이로 교도관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혹시 불이 있으면 빌려주겠소?” 교도관은 나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기 위해 몇 걸음 걸어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성냥을 켜는 순간,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의 가슴속에, 우리 두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나의 미소는 창살을 넘어가 그의 입술에도 미소가 피어나게 했다. 그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나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그가 단순히 한 명의 교도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새로운 차원이 깃들어 있었다.
문득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자식이 있소?”
“그럼요, 있고말고요.”
나는 얼른 지갑을 꺼내 허둥지둥 나의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아이들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앞으로 계획과 자식들에 대한 희망 등을 이야기했다.
내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나는 다시는 내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 교도관에게 고백했다. 내 자식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는 것이 무척 슬프다고 말하자 그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갑자기, 교도관는 아무런 말없이 일어나 감방 문을 열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나를 이끌어 감방에서 벗어나 뒷길을 이용해 마을 밖까지 나가도록 안내해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돌아갔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미묘한 공양구(供養具)”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미소 띤 얼굴은? 나는 “미소 띤 그 얼굴은 신묘한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생텍쥐페리가 ‘미소’라는 소설에서 그린 미소는 그랬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고, 불교는 국가나 민족으로 나눌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 인류 모든 이들을 위한 종교, 얼굴에 미소를 띠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종교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면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럽게 명상이 된다.
출처 : 불교신문 김정빈 소설가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