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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시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 김태근
언제나 시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시사철 시와 함께 속삭이며
시의 향기를 전하는 나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시낭송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스스로의 마음을 시낭송으로 어루만지고
소중한 가족의 마음에 시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
지친 이웃의 마음을 시낭송으로 어루만져 주는 사람
이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풀꽃과 나무에게 시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
별빛과 달빛 아래서 시를 낭송하는 사람
지리산 둘레길을 거닐며 시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
남사예담촌 대숲 사이를 거닐며 시를 낭송하는 사람
이런 마음이 넉넉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런 사람을 만나 서로서로 손을 잡고 시의 향기를 전하고 싶다
내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그대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우리의 마음도 더 아름다워져서
비로소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그런 세상과 마주하고 싶다
오늘
시의 향기를 전하는 나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김태근: 2016년 ‘문예사조’신인상 등단. 작품집‘지리산 연가’. 수상으로 김해일보 ‘남명 문학상’ 우수상. 현 ‘한국문화예술교육원’ 원장
그는 느닷없이 이 시를 암송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의아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썩 잘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자신의 성품과 직업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시였다.
내게 무슨 의도로, 어떤 의미로 시를 읊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시인인 내가 안 시인의 시를 암송하지 못한다는 건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고 했으나, 듣고 보니 어쩌면 가소로운 일이었다. 나야말로 어릴 때까지 연탄을 사용한 세대였으나 그는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았다. 연탄재 한번 안 갈아보고 내게 이런 시를 인용한 그는 아직 풋내기였다.
“시인이시니 이 시는 잘 아시죠?”
“그렇소.”
나도 모르게 내 말투는 짜증과 함께 바뀌었다. 그는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소주병을 집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흡혈귀처럼 벌겋게 달아올랐고 귀밑까지 붉은 기운이 뻗쳤다.
“그런데 이 시와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어떤 연관이 있소?”
그러자 그는 크게 웃었다.
“당신이 우리 집 연탄재를 차지 말라는 경고요.”
그의 눈은 의미를 왜곡하는 광란과 멸시에 차있었다.
“내가 언제 그대의 집 연탄재를 찼다는 말이오?”
술이 조금씩 오르자 나도 자신감이 붙어 말을 이었다.
“유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자신의 몸뚱어리를 바치고 그야말로 하얀 재만 남은 가련한 여자요. 연탄재를 찬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알코올 중독에다 여자를 때리는 나쁜 습성을 가진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소.”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해 봐요.”
“유희는 기본적으로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요. 행여 결혼 전에 그녀가 약간의 일탈을 했다 하더라도, 그쯤이야 그대도 다 알고 있었으니,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라 나는 판단하오. 당신도 어차피 이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잖소. 그런데도 서로의 아픔을 다 알고 있는 처지인 당신은 그녀를 위태위태하게 홀로 쓸쓸하게 내버려 두었소. 물론 가족을 위해 돈을 번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겠지요. 당신은 어쨌거나 결혼 당시 약속한 서약을 지키지 않았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은 유희에게 정말 나쁜 남자요.”
내 말에 그는 안내실이 무너질 듯 크게 웃었다.
“내 마누라가 착하고 순종적이다? 하하.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네. 그리고 뭐요? 내가 나쁜 남자라고?”
그는 또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데? 그년과 결혼 전만 해도 나는 술 한 방울 먹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 지금은? 물론 나도 인정하는 알코올 중독자지. 왜냐고?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년과 살 수가 없어. 그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그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역겨워! 그런데 당신은 유희가 착하고 순종적이라고?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녀는 ‘팜므파탈’같은 여자야.”
나는 불쾌했지만, 묵묵히 그의 술주정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혼생활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요? 어떤 점이 지금 당신 입으로 아내를 ‘그년’이라 부르게 했단 말이오?”
그러자 그는 잠시 멈칫했다.
“아! 미안, 미안합니다. 제가 감정이 격했나 봅니다. 결혼생활의 문제는 내가 아닌 그녀가 일으킨 겁니다. 신을 두고 맹세합니다. 최 시인님은 유희랑 제가 결혼할 때까지 그녀와 교제했습니다. 인정합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었죠.”
“버젓이 결혼상대자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무산 시에서 나 몰래 최 시인님과 놀아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유희와 놀아났다는 말에 격분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사랑을 했지, 결코 그의 말대로 놀아난 것은 아니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요?”
“유희, 그년이 최 시인님만 만나는 줄 아셨습니까?”
그의 말은 좀 엉뚱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당신 말고 또 다른 놈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의 말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다른 놈이라니?”
“유희는 동시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나 그리고 최 시인님, 또 그리고 그놈, 소설가.”
기억이 났다. 그때 유희는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에 대해 말했다. 분명히 소설가였고 유부남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나는 그 앞에서 아무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년이 만나고 유혹했던 세 명의 남자는 공교롭게 나를 비롯해 모두 유부남이었습니다. 세 명의 유부남이 모두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과연 이게 우연이었을까요?”
충격이었다. 그게 가능했을까.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유희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아, 나는 지금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려는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제야 나는 유희에게 들은 말을 그에게 하고 싶었다. 확인 차원이었다.
“아! 이제 생각이 나오. 그런데 유희 말론, 소설가란 친구와는 오래전에 헤어졌다고 그러더군요.”
그러자 그는 야릇한 웃음을 보였다.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지요. 그날 있잖습니까? 제가 무산 시에 내려가서 유희와 카페에 있을 때, 최 시인님이 와서 절 무작정 팬 날. 기억나시죠?”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적이 있었지요. 그땐 정말 미안했습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그만.”
“옛날 일이지요. 그건 됐고요. 어쨌든 그날 난 날 때리는 사람이 최 시인님이 아니라 그 소설가로 착각했습니다. 아니, 서울에 살던 그놈이 왜 무산 시까지 내려와 날 때리나 싶어 황당했었지요. 후에 알고 보니 그날, 그놈은 유희를 만나러 무작정 무산 시에 왔다가 그 광경을 목격한 모양입니다.”
“그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어느 날 유희의 휴대전화를 보니 그놈 이름과 문자 내용이 뜨더군요. 아! 최 시인님이 유희와 만나기 전 일입니다만. 그래서 제가 유희를 무산 시로 내려보냈거든요.”
그제야 나는 감이 잡혔다.
“그렇다면 관세사협회장에게 유희의 채용 부탁을 한 사람이 혹 당신이란 말이오?”
“맞습니다. 둘이 떼어놓으면 좀 낫겠다 싶어 일부러 제가 부탁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전처와 이혼소송 막바지였습니다. 이혼만 하면 무산으로 내려와 유희와 결혼하고 그곳에서 둘이 살려고 계획을 했죠.”
여기까지 그의 말을 정리하면 유희는 당시 나를 비롯한 세 명의 유부남과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저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녀는 날 철저히 속이고 있던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속단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현재 알코올 중독자였고 이런 유형의 인간은 대체로 거짓말을 잘하는 부류에 속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유희를 언제, 어떻게 만난 겁니까?”
내가 직접 유희의 이름을 거론하자, 그녀는 그제야 내가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고 판단했는지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삼 년 전쯤이었습니다. 유희랑 저는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회계법인에서 함께 근무했습니다. 그녀는 총무팀에서 급여 등 인사행정관리를 했고 저는 회계사니, 기업 쪽 담당이었어요. 당시 저는 결혼한 지 오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평소 가까운 직장동료로 지내던 중, 어느 비 오던 날에 둘이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유달리 비, 그것도 비바람치고 폭풍우가 있는 날을 좋아했지요. 그게 조금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점이야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첫 키스를 했고 몇 주 안에 둘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연애과정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희는 그랬다. 유난히 비를 좋아할뿐더러, 비바람치고 폭풍이 오는 것을 즐겼다. 그날 그녀와 남편이 펜션에 오던 날에도 그녀는 비바람 속의 개울에 홀로 있지 않았던가.
“그때 혹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며 정색했다.
“아닙니다. 결혼 오 년 차이고, 아이가 연년생으로 둘이나 있었으니 가장 행복할 때였죠.”
“그런데 왜?”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그때 선생님은 유희랑 왜 교제했습니까? 제가 알기론 교양있고 꽤 좋은 직업을 가진 사모님이 있다고 들었는데.”
피장파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굳이 물으신다면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빠져든 것은 사실, 제 인생에서 유희만큼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여자를 보지 못해서입니다. 저 아닌, 누구라도 그녀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면, 깊은 수렁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너무 예뻤고, 하늘거리는 몸매와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치명적인 독을 가진 요부였습니다.”
나는 그가 유희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요부라고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 역시 당시 그녀를 만난 후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무슨 일을 제대로 하지 못 할 만큼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오?”
내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에게 묻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최 시인님이 유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제발, 절 위해서 그만두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도 많이 지쳐있습니다. 유희가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제 아내이기도 하지만,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도 술을 줄이고 가정에 충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행여, 유희가 이곳에 또 나타난다면 허튼짓하지 마시고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는 과거 이야기를 통해 결론적으로 내게 협박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지만, 그보다 난 유희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세 사람의 유부남, 그리고 그 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그녀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과연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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