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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너더리통신 34/170802]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7월 29일(토) 오전 6시 37분, 전화벨이 울리는 게 심상찮다. 불길한 예감. 아니나 다를까, “형, 아버지 잘 가셨어요” “그래, 그랬구나. 알았다” 전화를 끊은 후 얼마 있다가 화장실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752번지에서 1933년 10월 10일 태어나셨다. 성함은 잡을 병(秉), 목숨 수(壽). 향년 85세. 이름은 ‘목숨을 붙잡는다’해놓고 숨을 놓으셨습니다. “작은 아버지, 죄송합니다. 지난주 뵐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목디스크 치료차 전날 입원한 병실에서 들은 숙부의 별세소식.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 했다. 오늘은 동생들이 삼우재(三虞祭)을 지내는 날, 신새벽 일어나 모처럼 책상에 앉아 숙부와 나, 숙부와 우리집 관계를 회억하며 추모의 글을 쓴다.
부계(父系)로는 유일한 친척(할아버지가 초계草溪 최가 5대 독자이다. 고모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는데, 일찍이 소식이 두절됐다)이기에 작은집과는 남달랐다. 더구나 우리 청소년 시절, 전주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 아버지 여덟 살에 숙부는 돌 갓 지난 두 살, 당신들의 어머니는 27살, 청상과부였다. 세 분만 달랑 남은 세상천지, 한 세상 헤쳐나오기가 얼마나 신산(辛酸)했을 것인가? 아버지는 일찍이 철이 들었다. 어머니만 어디로 안가신다면(재취) 한미(寒微)한 이 집안 꼭 일으켜 세우리라. 동생도 버젓이 잘 돌봐 학교도 가르치리라. 결심했다 한다. 가훈(家訓)에 또렷히 적혀 있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을 91세가 된 오늘날까지 ‘근면검소(勤勉儉素)’하며 온몸으로 실천하고 계신다. 또한 ‘육친가화(六親家和)’에 힘쓰셨다. 여기에서 ‘육친’은 ‘부-모-형-제-처-자’를 말하며, 이 세 가지는 아버지가 환갑때 내려준 우리집 가훈이다. 그 동생이 영원히 못올 길로 갔다는 소식에 오열(嗚咽)하셨다 한다. 동생의 영정 앞에서 “아무리 죽음에 순서가 없다하지만, 어떻게 형보다 먼저 가느냐”며 호곡했다고 한다. 심야에 사촌동생이 “큰아버지가 이렇게 쓰셨네”하며 내미는 부의금 봉투 속종이 내용에 눈물이 절로 주루룩 흘렀다.
<슬푸다/이 무슨 청천벽역이야/兄을 두고 먼저 간단 말이야/가는 마당에 말 한마디 못하고 이별이야/슬푸고 원통하구나. 후천세상에 만나자구나/이승에서 못다이룬 한을 후천세상에서나/다 이루어라. 원통하구나. 兄의 바램/로자로 百萬원>
아버지는 동생 황천길 노잣돈으로 1백만원을 넣으시며 소회를 짧지만 곡진하게 쓰신 것이다. 누군들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글귀에 감동하지 않으랴. 작은형이 이 글귀를 보시더니 “우리 죽어도 순서대로 죽자”하여 웃기도 했다. 그것이 마음대로만 된다면야 오죽 좋으랴.
작은 아버지 호칭은 지금도 어색하다. 세상에 “삼춘”(三寸) “고모” “이모” “오빠” “형”과 같은 멋지고 정다운 호칭이 있을까? 특히, 삼촌은 어린 시절, 우리의 우상(偶像)이었다. 훤칠한 키에 배우 신성일보다 더 잘 생기신 외모(전주농림학교 시절 규율부 사진을 보라). 아버지는, 여섯 살 터울,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쳤다. 갓 시집온 어머니는 시계도 없는 시절, 도련님 새벽밥을 해먹이고 4km쯤 떨어진 오류역까지 통학차를 타고 다니게 했다던가. 대학 등록금하려고 논 한 다랭이 팔아 뚤방(토방)에 나락 30가마를 쟁여놓았다던가? 학업에 별 취미가 없으셨는지 대학을 떨어졌는데, 그 나락은 아버지가 일제말 징용에 끌려가지 않으시려고 ‘대타(代打) 징용’를 사는데 들어갔다고 한다. 대타로 보낸 ‘징용꾼’은 해방 이후 귀국했는데,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며 ‘그나마 큰 죄 안졌다’고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동생이 한국전쟁때 군에 입대하는데 당신의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듯 슬펐다고 이번에 둘째딸에게 고백을 했다. 숙부는 제대 후 도유림(道有林) 관리원이 되어 11년 동안 완주 화산, 진안 동향, 장수 계북 등에서 활동하셨다(취직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아버지가 전북 임업시험장의 아는 분에게 쇠아치(송아지) 한 마리를 팔아 뇌물로 주었다고 한다). 가난하던 시절이라 횡행하는 벌목꾼 단속이 주임무, 원리원칙에 입각해 단속을 하도 엄하게 한지라, 누군가 고발을 하여 파면조치를 당했으나 무효소송에서 승소하여 명예회복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미 전주로 나와 구멍가게(쩜빵)를 차린 후이고 절차도 복잡해 복직을 포기하셨다. 이후 생업(生業)을 그것으로 삼고 4남매(아들 둘, 딸 둘)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셨다.
관리원 시절, 숙부는 참으로 멋쟁이셨다. 명절 때 고향에 오실 때에는 장총처럼 긴 공기총을 가지고 오셔 참새와 꿩을 잡았다. 나를 비롯해 동네친구들이 졸졸 따라다니는데 삼촌이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주에 둥지를 틀고 가게를 하면서도 통반장을 수십년 하며 동네의 궂을 일을 도맡아 하시는 ‘민원(民願) 종결자’셨다. 동사무소를 출입하며 행정처리는 물론, 수도나 전기가 고장 나면 손재주가 좋은 덕분에 쉽게 해결해 주는 ‘친절맨 맥가이버’의 대명사(소싯적에는 나무로 자전거 바퀴를 만드시기도 했다). 성품이 워낙 욕심이 없고(내가 숙부를 닮았다?) 어린애들을 좋아하여 동네 애기들은 모두 숙부의 품에서 떠날 줄을 모를 정도였다(이것도 숙부를 닮았다. 둘째동생이 태어나자 너무 예뻐 하도 손톱을 빨아 손톱이 빠졌다한다. 그 동생은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나 공소시효가 지나도 너무 지났다).
타인에 대해선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성실한 ‘절대호인(絶對好人)’인데도, 숙모를 비롯한 식구(食口)들에게는 ‘이무럽다(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언어폭력의 상처를 주기도 했다(이것도 닮았다). 아버지격(格)인 아버지 앞에선 평생 어려워 하셨지만, 형님의 자식인 우리 일곱 조카들은 하나같이 당신의 자식인 것처럼 차별없이 사랑해 주셨다(전주 진북동집에서 상당기간 같이 살았다. 기억이 없어진 치매로 앓으실 때에도 큰조카 이름은 잊지 않았다 한다). 달랑 구멍가게 하나 하면서 4남매 가르치기가 얼마나 버거웠을 것인가. 숙모님은 가뜩이나 몸이 안좋으신데도 하숙을 치시고, 팔북동 옷공장에 나가시며 ‘억척 아줌마’로 살 수밖에 없었다. 별세 소식에 온갖 에피소드가 파노라마식으로 뇌리를 스쳐갔다. 그중에 몇 개만이라도 적어놓아야 나를 사랑해 주신 숙부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듯하다.
# 중학교때 말썽을 피워 담임선생님이 엄한 징계를 내린다했다. 할 수없이 숙부께 말씀드리자 아버지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설탕 2kg 한 푸대를 메고 선생댁을 찾아 ‘조카 좀 잘 봐달라’고 읍소하셨다.
# 고등학교 1학년때 축대에서 떨어져 엉덩이가 엉망으로 찢어져 50바늘도 넘게 꼬매고 보름이 넘게 통원치료를 하는데, 모든 뒷바라지를 오로지 숙부가 해주셨다. 지금도 생각난다. 짐빠리 자전거에 덜썩 큰 조카를 뒤에 태우고 병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던 장면(짐빠리라는 단어가 생각안나 한참을 끙끙거렸다).
# 사촌동생은 나와 세 살 터울. 초등학교 5학년일 때 2학년, 같이 살았으므로 같이 놀 때가 많았는데, 자주 다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숙부는 둘이 나란히 세워놓고, 항상 당신의 아들인 동생 종아리를 때리셨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미안해 제발 똑같이 때려주기를 바랐지만, 형님의 아들이라고 조카인 나는 세워놓기만 했다. 지금도 각별하게 지내는 동생에겐 지금도 미안하다.
# 우리 초계 최가가 사람은 다시 없이 좋은데 ‘불뚝성질’ ‘욱성질’이라고 성격이 너무 급하고 괄괄하다(여자들도 그렇다). 예를 들면 이렇다. 무슨 작업을 할 때 못이 필요하니 얼른 갖고 오라고 시키는 것은 좋은데, 가지러 가는데 ‘오냐?’라고 하는 통에 우리는 늘 주눅이 들곤 했다. 동생은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을 얘기한다. 나도 아버지한테 숱하게 들은 말이다. 당신을 성(마음)에 안차니, 불쑥불쑥 화를 내시는 거다.
# 숙부는 참말로 따뜻한 분이셨다. 당신 자식들 졸업식 등 무슨 행사에는 못가도 조카들의 입학식 등 작은 행사에는 꼭 오셨다. 전주에 같이 살 때에 아버지 역학을 톡톡히 하셨는데, 그게 당신의 형님에게 입은 은혜를 갚을 길이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사촌동생들이 역차별당한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 숙부 입관식때 떠오르는 장면으로 손꼽힌 것은, 옹색한 구멍가게만으로는 운영이 안되니, 여름철이면 야깡(청과물도매시장)에서 수박을 몽땅 리어카로 떼어다 진안사거리(전주고와 풍남초교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파시는 것이었다. 숙모는 가끔 얼음 동동 띄워 미숫가루를 타서 가지고 오셨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참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같이 착한 동생들이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 그 시절엔 냉장고가 없을 때였다. 아이스케끼(아이스크림)를 파는데, 긴 통에 얼음주머니를 넣어 녹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항상 조카들을 먼저 주시던 그 사랑, 겨울이면 삼립호빵이 또 최고의 인기였다. 우리는 작은아버지 덕분에 께끼와 호빵을 원없이 먹을 수 있었다.
# 2010년 11월인가, 검진차 올라오셨다가 용산역에서 작은어머니와 동생들을 놔두고 갑자기 사라지셔 온가족이 엄청 걱정했던 일이 있었다. 다행히 5시간여만에 전주 집으로 무사히 귀가하셔 안도했지만, 돈도 없었는데, 어떻게 가실 수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또 한번은 일산 큰아들 집에서 새벽에 나가 하루종일 행방불명이 되신 일도 있었다. 하늘이, 할머니가 도왔는지, 두 번 다 그래도 쉽게 찾아 오래 사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기야 85세는 요즘 세상에도 호상(好喪)이라면 호상이겠지만, 막바지에 간(肝)이 안좋아 아프셨다니 그게 유감스러운 일이다.
# 숙부, 장주 계북의 관사에 사실 때, 우리는 그곳에 가는 게 엄청 큰 즐거움이었다. 관사 뒤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임실에서 거기를 가려면 험난한 구비구비 비행기재를 넘어야 했다. 예쁘장한 동생은 당시에는 귀물인 세 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곳을 10여년만에 들른 적이 있어 관사와 이발소를 찾던 기억이 뚜렷하다.
#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크면서 청소년 시절 어머니(할머니)와 형(아버지)에게 반항도 했다고 한다. “너그들은 아버지 얼굴 봤잖아?”하시면서. 사실은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 얼굴을 간신히 기억만 한다고 한다. 그럴 때 할머니가 혼을 내려고 하면 아버지가 매번 오죽하면 그러겠냐며 ‘내비두라’고 말리셨다고 한다. 그 숙부님, 60년만에 할아버지 이장(移葬)하면서 금이빨을 발견하자 손에 올려놓고 “이것이 말로만 듣던 당신의 금이빨(야매 치과의사이던 할아버지가 직접 해박았다고 한다)이냐”고 하시며 통곡하던 모습,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1993년의 일이다. 이제 그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영원히 잠드신 게다.
큰집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베리 굿, 베리 굿”하며 좋아하시던 작은 아버지의 선한 얼굴. 당신과의 추억이 어찌 위에 든 몇 가지만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느 아버지들도 그러하겠지만, 작은 아버지의 생(生)은 평범하셨지만 위대하셨습니다. 당신의 총생들 하나같이 제대로 성장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몫씩 단단히 하고 있는 걸요. 큰 동생은 대기업 임원으로, 작은 동생은 공공기관 간부로, 셋째와 넷째동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조신한 며느님 둘과 든든한 사위 둘. 단지 조카로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성가(成家)시키고 조금 허리를 펴고 살만하시니까 70대 중반을 넘어 몹쓸 병마(病魔)가 숙부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제 단란한 가정의 어르신으로 행복을 만끽해야 할 순간인데요. 손자들과 함께 물놀이라도 한번 가셨어야지요. 그 흔한 해외여행이라도 가셨어야지요?
느닷없이 찾아온 기억력 감소의 치매(癡呆․인지장애), 제 아버지 말씀처럼 ‘이런 청천벽역’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또 다행인 것은 거의 10년을 투병하셨지만 종류가 200개도 넘는다는 치매, 그중에서도 ‘이쁜 치매’였습니다. 당신의 성품, 그대로였습니다. 남들에게는 눈곱만큼 피해를 안주는(전라도에서는 법 없이도 살 그런 사람을 ‘고진’이라고 하지요. 당신은 고진 중에도 ‘상 고진’이었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한 숙모를 언사(言辭)로 괴롭히기는 많이 하셨다지요. 이제 후천세상에서 만나면 오로지 사랑만 해 주세요. 작은 어머니도 당신 수발 드느라 고생 참 많이 하셨습니다. 작은어머니는 하관식에서 “영주 아버지, 그곳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하시더군요. 아시죠? 꼭 그러셔야 돼요. 작은 아버지, 치매를 앓으시며 참 재미난 일 하나는 시골(임실 봉천)에 계시는 형님(아버지)께 하루에도 십 수 번 안부전화를 하셨다지요? 전화 끊고 돌아서면 또 전화하신다는 숙모의 핀잔에 눈을 흘기시며 “내 형님한테 전화도 못하게 하냐”고 그랬다지요. 의식을 잃기 전까지도 그 시골집이 당신집이라며 가보고 싶어하셨다지요? 아무렴요. 그 시골집은 작은 아버지가 자란 작은 아버지의 집이고, 우리집이기도 하지요. 기억을 놓지 않으시려 날마다 일기를 쓰셨다지요? 마지막 날짜가 6월 25일이었다고 셋째동생이 그러더군요. 평생 몸에 익숙한 일상, 전주고등학교 운동장 몇 바퀴 돌기, 팔아버린 지 수십 년이 된 진북동 형님댁(宅) 순찰하기, 단순한 일상사들을 적는 것이지만, 그것이 거의 10년을 버텨온 지혜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소원하시던 집을 엊그제 영정으로 한 바퀴 돌다 가셨지요. 몸이 불편한 우리 어머니, 마루에서 당신의 영정을 쓰다듬고 “작은 아버지” 하시며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형수님(우리 어머지)의 전송까지 받고, 이제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바로 아래에서 영면(永眠)하시는 작은 아버지, 생전에 당신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 백분의 일도 못한 못난 조카 울면서 절합니다. 계실 때 무엇 하나 더 기쁘게 못해 드려 죄송합니다. 큰집, 작은집 합해서 11남매(6남 5녀), 해마다 ‘남매계’라도 해서 양가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것도 한번 못했습니다. 주제넘게 사부곡(思父曲)이 아닌 ‘사숙부곡(思叔父曲)’을 쓰려니 ‘그동안 저를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데…’ 불효가 가슴을 칩니다. 저는 몸이 불편해 운구조차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내려갈 때에는 묘비에 저희와 동생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작은아버지 동판사진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작은아버지, 사랑합니다. 작은어머니 사랑합니다. 네 동생들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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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숙부님에 대한 추억이 너무 애잔하그려.작년 tv나올때 그 얼굴 어렴풋이 떠오르는군요.삼가 위로를 드리고 우천도 속히쾌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