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견회10월 백제유적지 탐방기 (부여,공주)
<2015.10.1>
날씨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보견회 가을 유적지탐방은 11월에 있었는데 낮도 짧고 날씨도 스산해서 올해는 10월로 당겨 날을 잡았는데 하필 일기예보가 남쪽지방에 많은 비를 예보했다. 보견회 정회원 18명에 추가 2명 합 20명이 함께 백제유적지로 떠나게 되었다. 한창 여행철이라 해외로 여행을 떠난 회원도 많아 좋은 기회를 같이 못해 아쉬웠다. 죽전 간이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비가 내리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많은 산행객,여행객들이 많은지 관광버스들이 한없이 들어오고 나가고 한다. 필자도 전문산악여행사와 같이 해본 경험이 있기에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비오는 날 산행이라니~대단한 열정이다. 남말 할게 아니라 우리 또한 이 나이에 누구하나 취소하는 회원이 단 한명도 없었다. 배낭속에 갈아입을 옷과 양말까지 챙겨올 정도로--고마운 일이다.
버스에서 사무총장이 준비한 김밥과 물, 간식으로 배를 채운다. 마이크를 잡고 궂은 날씨에도 새벽같이 달려온 회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오늘 일정과 백제문화유적지에 대해 설명을 했다. 지난 7월4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등재된 백제문화유적지 8곳에 관해 간단한 설명을 했다. 정안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부여를 향해 차는 달린다. 인간 네비게이션인 사무총장이 여기는~ 저곳은 ~ 도대체 모르는 곳이 없다. 드디어 부여읍내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찾는 곳이 부소산성이다. 차에서 내려 부소산성 매표장으로 갔다. 지금 부여와 공주는 백제문화축제 기간이라 무조건 입장은 무료이다. 미리 예약한 해설사와 통화를 하니 삼충사를 보고 부소산성 광장으로 오란다.
부여 삼충사(三忠祠) 부여 삼충사(扶餘 三忠祠)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시대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충신으로,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5천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에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해마다 10월 백제 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삼충사를 보고 해설사와 약속한 부소산성 광장으로 일행이 자리를 옮기는 도중 해설사를 만났다. 먼저 삼충사 얘기를 듣고 곧 이어 부소산성의 해설을 들었다.
부소산성(해설 나정하) 사적 제5호로 둘레 2,200m,지정면적 98만여 제곱미터,부소산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사비루,영일루,반월루,고란사,낙화암,군창지 등이 있고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사자루(泗泚樓)에 올랐다. 아래 백마강이 흐른다. 백마강은 창강에서 이어 16km백마강을 흘러서 강경강에 닿는다. 여기서 군산항에 이르는 진강으로 흐르는 금강의 줄기이다. 백마강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소정방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 사비도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금강하구를 통해 배로 올라 올 때 파도가 하도 격하여 배가 운항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소정방이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의자왕의 아버지가 백제 수호신인 용이 되어 금강 속에서 격랑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를 잡으려면 흰 말(白馬)로 미끼 삼아 낚으면 된다는 계시가 있어 조룡대(용을 낚은 바위)에서 백마로 미끼를 넣으니 과연 용이 물어 낚시줄을 힘껏 당기니 용이 나와 떨어진 곳이 공주 방향 사비도성 밖의 용전(용이 떨어진 밭)이라는 곳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조룡대를 가장 먼저 보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설은 백제의 큰 강이라는 의미이다. 馬는 곧 크다(大)는 의미를 가졌다. 사자루(泗泚樓) 현판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글씨이고 정자 뒤쪽 백마장강(白馬長江)이라는 글씨는 서에가 해강 김규진의 명필이다. 나중에 나오는 고란사(皐蘭寺)도 김규진의 글씨이다.
백마강을 바라보며 그냥 지나칠수 있는가? 서상호회원이 선창으로 시작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 합창이 신나게 이어진다.
백마강과 함께 천정대에 얽힌 이야기도 풀어 놓는다. 고란사 앞 백마강에서 북으로 약 1.5㎞ 되는 곳에 범바위(虎巖)라 부르는 큰 호랑이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도 호암리라 부르고 있다.이 호암리 부근 동북편에는 주민들이 임금바위와 신하바위로 부르고 있는 바위들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천정대라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천정대를 정사암(政事巖)이라 하였으며, 또 동지(同誌) 남부여조에는 “호암사(虎巖寺)에 정사암이 있는데, 국가에서 장래 재상을 선출할 때에 후보자, 3-4인의 이름을 쓴 후 밀봉하여 바위에 두었다가 얼마후에 뜯어 보면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져 있어 그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으므로 정사암라는 이름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흥사지터-577년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창건한 절이 왕흥사이다. 2007년 10월10일 왕흥사지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이라고 음각된 것이 밝혀졌다. 660년 신라의 무열왕이 계탄(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왕실사찰의 절터로서 일명 ‘능사(陵寺)’로도 불린다.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능산리사지는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사적 제58호)과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1992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조사를 진행하여 사찰의 구체적 현황을 파악하였으며, 최근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사찰의 부속시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왕릉군으로 널리 알려진 인근의 능산리고분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비기 백제 국왕들의 무덤이 능산리사지 곁에 조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능사는 그들의 명복을 빌었던 기원사찰〔願刹〕로 이해된다. 1993년에 진행한 2차 발굴조사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었으며, 1995년 4차 발굴조사에서는 목탑지 심초석 하부에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국보 제288호)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확인된 명문을 통하여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실 주도하에 사찰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유명한 낙화암 백화정에 올랐다.
낙화암-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낙화암 꼭대기에 세워진 육각형의 백화정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백화정의 현판 글씨는 석정 안종원과 우하 민정식의 글씨이다. 낙화암에서 고란사로 내려간다.
고란사-낙화암 절벽 한쪽으로 도끼로 찍어낸 듯한 곳에 있는 고란사는 ‘고란초’라는 다년생 초본인 헛뿌리 식물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고란초는 고사리과로 1년에 한 개씩 잎사귀 뒷면에 홀씨주머니가 생기고 그 홀씨주머니의 숫자를 헤아리면 몇 년 된 잎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란초가 붙어 있는 암벽 틈으로 흘러 모아진 물이 약효가 있어, 의자왕이 이 물을 항상 먹고 싶어 이 물을 떠오라고 해도 워낙 절벽에 위치하여 떠오기가 힘들어 신하들이 다른 곳 물을 떠다 바쳐도 어떻게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고란 약수터에서만 구할 수 있는 고란초 잎을 한 장씩 물에 띄워 떠 오라 하니 그 이후로는 고란 약수를 먹을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란사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에 죽농거사 안순환이 친 난과 나란히 걸려 있다. 고란사 뒤편 고란정 안의 약수샘에서는 언제나 먹는 물을 퍼 마실수 있었다.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고 하여 모두들 빠짐없이 마신다. 두잔을 마시는 친구도~ 과욕하면 효험이 떨어진다고 하며 절제하는 모습도 현명해 보인다. 고란초를 보기 위해 여러번 사진도 찍었으나 허탕.단지 안내판 사진으로만 확인했다. 고란사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백마강유람선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백마강 유람선 비가 오니 우리 밖에 없다. 배삯이 4천원. 경노 안되요? 하니 경노 없단다. 모두 한바탕 웃었다. 여태껏 경노로 혜택을 봐가며 다니는데 모처럼 경노대접을 못 받아도 좋단다. 17명이 배를 전세내어 백마강을 유람한다. 배에서는 유행가가 사뭇 처량하게 흘러나온다. 손벽을 치면서 유행가 자락을 따라 읊조리고 분위기가 사뭇 뽕짝조로 흥겹기 그지없다. 어떤 친구는 1,400년전으로 돌아가 당시를 회상하는지 생각에 잠겨 있다. 조룡대를 시발점으로 고란사 낙화암을 올려다 보며 마치 백제의 한을 달래기라도 하듯 초가을 붉어지기 시작한 부소산을 감상한다.
부소산성 안내
부소산성 입구
안내도
삼충제 행사 플라카드
삼충제 행사 과거사진들
삼충사
문화해설사
부소산성광장으로
사자루
백마장강 현판-해강 김규진 글씨
낙화암 시
백화정
안개에 가린 백마강
고란사
고란사 높은 돌담
해강 글씨의 고란사 현판
고란사 법당
백마강이 보인다
고란사 소원지
약샘 고란정 석불과 고란초
유람선 선착장으로
유람선
조룡대
붉게 물드는 부산산
비오는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점심은 연잎밥 배가 닿은 곳이 구드레나루터이다. 버스가 이곳으로 와 있었다. 오전 스케쥴이 끝났기에 이제 밥 먹으로 간다. 미리 예약해둔 곳이지만 약속보다 30여분 늦었기에 연락이 바빠진다. "하늘채"에 도착했다. 겉보기에도 근사하다. 인터넷으로 엄선한 곳인데 입구로 들어가니 "보견회 별관"으로 특별히 안내판이 서 있다. 조그만 준비가 감동을 주는 법이다. 14,000원 연입밥 정식은 밑반찬도 좋고 돼지고기,된장 맛이 좋아 모두들 만족해하는 모습이라 기분이 좋다. 오늘 식사는 두회원의 스폰서로 이루어졌다. 문의용이 2십만원을 현금으로, 박상보 회원이 식대 2십만어치 카드로~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1시30분에 예약된 정림사지로 향했다.
부여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해설 이구헌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해설사를 만나 해설을 들었다. 사리구와 청동제 사리함 명문에 신기함과 그 정교함에 발길을 멈추게 한다. 왕흥사 목탑지 심초석 아래 장방형의 석재 안에 사리구가 안치되었는데, 청동제 사리합,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리는 불교에서 중요하게 받들기 때문에 다중 구조로 봉안되며, 내부에 들어가는 기물일수록 귀중한 재료로 만든다. 왕흥사의 사리구도 제일 안쪽에 금제 사리병을 두었는데, 굽이 있고 아래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로 만들었다. 뚜껑 가운데 보주형 손잡이가 있고 그 주위에 6개의 연꽃잎을 새겨 넣었다.은제사리호는 긴 목 아래로 둥근 몸체가 연결되며, 낮은 굽을 갖춘 항아리 형태이다. 뚜껑에는 연봉오리형 손잡이가 있고 주위에는 연꽃잎이 장식되었다. 목 부분에는 접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든 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청동제 사리함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이며, 몸체의 위쪽과 아래 부분에 두 줄의 음각선을 둘렀다. 사리함 뚜껑에도 같은 형태의 음각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에 달린 연봉오리형 손잡이는 부러진 채 발견되어 복원되었다. 사리구 외에도 왕흥사 목탑지 심초석 주변에서는 목걸이, 귀걸이, 팔찌, 허리띠 장식 등 금속공예품과 옥기, 곡옥, 다면옥, 환옥 등 옥공예품이 다량으로 동반 출토되었다. 백제의 뛰어난 세공기술과 조형 수준을 알려주는 유물이면서, 사리장엄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청동제 사리함의 표면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을 세웠고 2매였던 사리가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라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사찰의 건립과 사리구의 제작이 577년에 이루어졌고 창왕이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부여왕흥사지 사리기일괄은 보물 제1767호이다.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는 부여읍동남리에 있는 백제의 사찰 터이다. 정리사지터는 1983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01호로 지정되었다.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 배치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中門)·석탑(石塔)·금당(金堂)·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져 있고, 주위를 회랑(回廊)으로 구획지었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박물관 안에서 당시 작업현장이나 모형을 조형물로 감상하고 바깥 야외로 나왔다. 정리사지는 지금은 형태가 없고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만이 남아서 종전의 석탑과는 다른 안정되고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하고 있다. 모두가 놀란다. 너무나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이는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종래 보던 일반 불교석탑과는 기단이나 지붕 모양도 다르고 특이하다. 문의용 화가가 좀처럼 하지않는 감탄 일색이다. 미술적인 견해로~잘 모르는 우리 모두 공감하는 모습들이다. 해설사가 강조하는 백제의 문화수준에 고개를 끄떡인다. 특히 탑의 비례구조에 관해서~인터넷자료로 옮겨본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줍니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큽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의 비례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습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입니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됩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습니다. | 왕릉원(王陵園),능산리 고분군과 백제금동용봉대향로 (해설사 차선미) 시간이 적어 더이상 상세한 해설을 받지 못하고 바로 왕릉원으로 향했다. 능산리고분군 전시관에서 해설사를 만났다. 왕릉원과 금동용봉대향로에 관해설명을 먼저 들었다.왕릉원은 능산리 고분군을 말하며 이곳에서 그 유명한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이다. 여 해설사가 특히 향로에 관해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1993년 능사(陵寺)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용봉대향로(국보 제287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미술사와 고고학의 최대성과 였다. 향로의 크기는 높이 64cm,무게 11.8kg이나 되는 대작으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용이 입에 물어 올리는데 그 꼭대기에서 봉황이 날개짓하는 모습이다. 봉황새는 어느 학자는 천계(天鷄)라고도 한다. 이 향로의 뚜껑에는 신선세계를 나타내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불사조,물고기,사슴,학 등 26마리,다섯겹의 첩첩산중을 이루는 25개의 산봉우리,기마수렵상 등 인물상이 16명,피리,비파,북 등을 연주하는 악사가 5명,상상의 날짐승,호랑이,사슴 등이 39마리로 여기에 나오는 도상이 약 100가지나 된다. 모든 형상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봉황의 목에 여의주가 걸려 있고 봉황의 목에는 2개의 구멍이 있었으나 연기가 나오지 않아 그 아래주변에 10개의 구멍을 뚫어 향로 연기가 나도록 하는 백제인의 융통성을 자랑한다고-. 용의 발은 4개인데 아래 발은 세개로 안정을 이루면서 한개는 위로 올려 균형의 미를 살렸다.
능산리 고분군(왕릉원)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한 자리는 이른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점지(占地)된 전형적인 묘지로서의 지형을 갖추었다. 뒷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앞산인 염창리 산을 남쪽의 주작으로 삼았고, 묘지의 전방 약 200m거리에 능산리 천이 서류하는 남향의 왕실의 공동묘지이다. 고분은 전열 3기 후열 3기, 그리고 맨 뒤 제일 높은 곳에서 1기가 더 발견되어, 지금은 모두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고분군 전시관을 나와 멀리 발굴작업의 천으로 덮인 나성이 보인다. 금동용봉대향로를 발굴한 작업장은 아직도 작업이 진행중이다.능산리 벽화고분 모형관을 보고 7개의 고분(왕릉원) 그리고 서쪽에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장왕단비와 백제국 부여융단비를 둘러보고 부여 일정을 모두 마쳤다.
식당 하늘채 하늘채에서 점심식사 정림사지 박물관 청동제 사리함 명문
작업현장모습 재현 정림사지터 모습 5층석탑 발굴작업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지5층석탑 앞에서 능산리고분 능산리고분군 전시관 해설사
백제금동용봉대향로(국보제287호) 발굴현장 나성 능산리벽화고분 모형 벽화 의자왕 단비 능산리고분
공주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탐방 부여관광을 마치고 공주로 방향을 잡고 북향이다. 해설사와의 약속 때문에 늘 시간싸움이 된다. 4시에 약속을 했다.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매표소를 지나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장에서 해설사를 만났다. 나이가 지긋한 여성분이었는데 어떤 단체냐 해서 대구의 사대부고 동기동창이며 유적탐방모임이라고 소개했더니 좋은 취미로 건강히 다니는 모습이 너무 좋다며 특히 명문고라고 추켜세워준다. 알고보니 이분은 역사선생을 거쳐 교장과 교육장을 지내고 정년퇴직후 문화해설사로 일한다고 했다. 너무나 부럽다.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일자리는 물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자원봉사할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행운이가 싶다.
송산리고분군을 웅진시기(475-538)의 백제 왕릉군으로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다. 1~5호분은 굴모양의 돌로 쌓은 무덤이고 무령왕릉과 6호분은 터널형 벽돌로 쌓은 무덤이다. 특히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고 축조시기(525년)가 확인되며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가와 교류를 알수 있다.송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된 유적중 국보가 무려 17점이나 된다. 국보보유는 서울의 중앙박물관,경주박물관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5호분과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의 위치는 삼각형으로 신분이 높은 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5호분 단면에서 흰부분이 시선을 끈다. 회칠을 한 것이 떨어진 자국이다. 바닥에는 관을 올린 관대가 있다.
6호분은 벽과 천정의 벽돌무늬가 어찌나 정교한지 감탄이 흘러나온다. 무령왕릉보다 더 정교하다. 사신도(사방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을 그린 그림)가 있고 창문이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피장자의 이름을 알수 있는 고대의 유일한 왕릉으로 1500년전의 화려하고 세련된 미 의식과 공예기술을 통해 백제문화를 엿볼수 있는 값진 유적지이다.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 사마(무령왕 본래이름)라는 이름이 새겨 있고 62세에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확실한 증명이 된다. 왕비는 526년 천수를 누리고 합장되었다.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신발,팔찌,왕과 왕비금제관장식,목귀걸이,쇠젓가락,청동다리미 등으로 당시의 대단한 문화수준을 짐작케 한다.
공산성 공산성은 해설받을수 있는 시간이 지날 것 같아 송산리고분군 해설사로부터 해설을 들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웅진도읍기(475-538)의 공주를 방어하기 위한 왕성으로 금강변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아 천혜의 요새와 같이 되었다. 문주왕 원년에 한강유역(한성)에서 공주(웅진)로 천도, 성왕16년(538년)부여(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를 지켰다. 둘레 2,200m. 웅진성·쌍수산성으로 불린다.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산성이다. 공산성에는 4대 문루가 있다.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전망대에서는 야경이 일품이라는데 기회가 되지 않는다. 공산성 입구쪽에서는 알밤 축제행사도 같이 열리고 있어서 주차장에는 차량이 대만원이고 어둠이 깔리면서 강변에는 등불을 켜기 시작한다. 공산성은 시간상 답사를 생략하고 버스투어로 대치했다.
공주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입구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벽돌무덤
회칠 떨어진 자국
아치형 벽돌문
사신도
무령왕 해설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해설사
왕릉축조벽돌
화려한 문양의 벽면
출토물
무령왕 금목걸이 무령왕 금귀걸이
무령왕 청동거울 일괄 神수경
벽과 천정 문양
다양한 문양의 벽돌로~
탐방로 길안내
송산리 고분
공주 송산리고분에서
데크길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 놓았다.
공산성 주변길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공주 공산성 금강교부근
공산성 답사를 생략하는 바람에 다소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상경하면서 죽전휴게소에서 국수종류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미리 준비한 주류와 간식거리가 많이 남아 총장이 적절히 배분해주었다. 비가 오는 것을 감안 많은 준비를 했다는데 버스내에서 마시는 주량이 줄고 시간도 짧아 그런 것 같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필자를 비롯 3명이 죽전에서 하차하고 나머지는 교대에서 하차하기로 했다. 비록 비를 맞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랫만에 찾은 부여와 공주에서 역사문화 관광지로 크게 발전한 모습에 놀라움이 컸다. 마침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지 얼마 안된 시기에 우리 보견회의 행차는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모두들 많은 추억거리로 남으리라 여겨진다. 참가통보를 한 회원들은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참가와 행사에 협조를 주어 바쁜 스케쥴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고마움을 전한다. 상경과 동시에 많은 그리고 좋은 자료사진을 보내준 김문헌,박두열 두회원께 감사를 드린다. 다시한번 스폰서를 한 문의용,박상보 두회원 그리고 준비와 진행 마무리까지 하느라 수고한 김민효 사무총장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참가회원> 강순중,김능태,김문헌,김민효,김수철,문의용,박상보,박정륭,박준천,서강조,서상호, 오상평,이이춘,이 훈,장극두,최문택,최상탁,허현,강종웅,박두열 (20명)
<비용정산> 전월이월 3,744,493원 결산이자 +2,108원 + 2,108
참가회비(20명)@20,000원 +403,400원(박두열 간식대 23,400원) 스폰서(문의용 현금) +200,000원 " (박상보 카드) +200,000원 + 803,400
버스차량임대 -700,000원 주류,안주(기사준비 영수증0 -95,930원 생수(총장준비) -16,500원 김밥(총장 ") -40,000원 간식,해설사선물(총장 ") -95,660원 안주류(박두열 ") -23,400원 점심식사 310,000원 중 박상보 -200,000원 점심식사 본부부담 -110,000원 유람선(17명 @4,000원) -68,000원 고속도로 저녁식사 -112,000원 - 1,461,490
10월2일 현재 잔고 3,088,511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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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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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물사진을 중심으로 "추억의 앨범" 곧 올리겠습니다. 댓글도 한마디씩 달줄아는 보견회원이시죠?
백제금동용봉대향로(국보제287호)의 위쪽은 봉래산과 사슴, 호랑이, 코끼리 등 육상 동물 들이 디자인 되어 있고, 아래쪽(컵 같이 생긴 부분)은 가북, 악어 등 수중 동물이 디자인 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코끼리나 악어가 우리나라에 없는 짐승인데, 귀한 향로에 굳이 디자인 해서 넣었는가 이다. 아마 백제가 해상무역의 강국임을 과시하고자 한 의도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