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7년(1407)에 개항한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는 일본과 무역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늘어나자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 세종(1418~1450) 때에 웅천읍성을 지었다. 읍성邑城이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청과 민가 등 고을 중심부를 둘러 쌓은 성을 가리킨다. 웅천읍성은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으로 동문이 함락돼 소실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주둔하던 웅천왜성에 딸린 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남해안을 방어하는 주요 거점으로 활용됐으나 고종 32년(1895)에 이르러 읍성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웅천읍성은 세종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평면 모양이 정사각형에서 현재와 같이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읍성의 전체 둘레는 936m로,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약 500m이며 성벽의 폭은 4.5m, 높이는 4.4m이다. 성벽은 땅과 수직이 되도록 쌓았으며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들을 끼워 넣었다. 북쪽 성벽은 진해-부산 간 국도를 건설하면서 철거됐고,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은 민가와 도로 등이 들어서면서 일부가 훼손됐다. 지금은 동쪽 성벽만 출입문 터와 함께 온전히 남아 있다.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519-6. 경상남도 기념물.
*내이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4~5세기 신라와 가야의 해상무역 발달과 함께 동래포구(부산), 염포포구(울산), 원산포구(원산만) 순으로 항구가 만들어졌다. 근대적인 항구의 출현은 대략 15세기 이후로 본다.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조와 태종은 회유책을 써서 왜인의 왕래를 허락했으나 무질서하게 정박하는 왜인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태종은 1407년 동래의 부산포富山浦와 웅천의 내이포를, 1418년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와 고성군의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해 이곳에만 정박하게 하는 왜관倭館을 설치했다.
이후 왜관은 역사의 여러 상황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반복한다. 그러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왜관이 소재한 부산이 가장 먼저 개항하게 된다. 차례로 원산, 인천 등이 개항하면서 개항장 내에는 여러 외국인이 거주하고 활동했고 나라별로 다른 양식의 건물이 지어졌다.
개항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의 편입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특히 인천은 부산이나 원산보다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외국 상사들의 무역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