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곳을 낯선 눈으로 보다 / 양선례
9월에 전화가 왔다. 대학 동창이다. 광주 역사 선생님들이 주가 되는 답사가 10월 연휴에 있는데 함께하겠냐고 물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기에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막상 답사일이 되자 망설여졌다. 익숙한 얼굴이 거의 없는 답사팀에 합류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비가 내린다. 가을 속 여름처럼 더웠던 하루를 씻는 듯 세차다. 여행은 날씨가 하는 일이 반인데 이 비를 뚫고 가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아침이 되자, 하늘은 흐리나 비는 거의 내리지 않는다. 벌교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십여 분 기다리니 멀리 빨간 버스가 보인다. 유일하게 아는 얼굴인 친구가 반갑게 맞아 준다. 버스는 잘 뚫린 4차선 도로를 달려 고흥 땅에 접어든다. 고흥. 내가 근무하는 지역이다. 오래 전, 삼십 년도 더 전에 10개월의 짧은 강사 생활을 했던 기억밖에 없는 땅에 공모 교장으로 부임한 지 올해로 2년째다.
포두면 송*초등학교는 교직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정식 교사가 되기 전 강사의 신분이었다. 이학년 담임을 맡았다. 코찔찔이 영한이는 오후에 남겨 글자를 가르쳐도 돌아서면 잊었다. 지금이었더라면 당차게 가르쳐 냈을 텐데. 글자를 제대로 깨치지 못한 그 아이는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반장인 은주는 부모님이 느타리 버섯을 키웠다. 혜정이는 동료교사 신선생님의 늦둥이 딸이다. 퇴직을 앞 둔 혜정이 아빠는 호탕한 웃음이 일품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거의 발령이 났는데 나만 낯선 곳에서 강사나 하던 때라 자존감은 낮았다.
그래도 위안이었다면 한방에서 자취하던 두 살 아래 유치원 선생님과의 기억이다. 서로가 초임이라 친자매처럼 아껴 주고 다정하게 살았다. 밤이면 함께 음악을 듣고 월급날이 되면 고흥 읍내로 마실 나갔다. 저녁 먹고 탁구라도 치고 오고 싶었지만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는 7시 반이 막차였다. 정말 심심한 날이면 구령대에 올라 유일한 청중 유치원 선생님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불렀다. 세상은 88올림픽으로 들끓는데 가슴 속에 바람이 휙휙 지나던 나날이었다.
유리창을 뚫어 길게 매단 굴뚝이 있는 나무 난로가 교실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었다. 땔감이 없어서 교실은 늘 추웠다. 아이들이 하교한 텅 빈 교실에서 곱은 손 비비며 업무를 보던 내가 보인다. 내 첫 제자였던 아홉 살 아이들은 이제 마흔두 살, 중년이 되었겠다. 전남에서 네 번째로 넓고, 해남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고흥은 이제 전국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소멸 위기 지역’이 되었다. 송*초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고흥에는 75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다. 2021년 고흥에는 단 17개의 초등학교가 있을 뿐이다. 두 곳을 제외하곤 전교생이 백 명 이하다. 빈집은 늘어가고 한 번 도시로 나간 청년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는다.
버스는 포두를 지나 도화면 발포마을에 있는 <역사 전시 체험관>으로 간다. 발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선조 13년(1580년)에 이순신 장군이 만호(종4품)로 18개월간 재직한 곳이다. 서른두 살에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이 맨 처음 부임한 곳은 여진족과 싸우는 압록강변이다. 발포는 육군이었던 그가 수군으로 맨 처음 근무한 곳이다. 남도의 물길을 공부한 이때의 경험이 훗날 임진왜란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체험관은 아담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기에는 충분했다. 남도 문화를 이십오 년이나 공부하고 있다는 노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전시관을 둘러본다. 이순신 장군이 임란에서 승리한 가장 큰 이유는 거북선이라는 최첨단의 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전함은 속도를 낼 수 있는 뾰족한 배다. 이 배에서 성능이 좋은 소총으로 공격한다. 이에 비해 우리 바다는 갯벌이 많고 수심이 얕아 부표처럼 넓은 배가 유리하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함으로 1층에서는 격군이 노를 젓고, 2층에서는 병사들이 대포로 적을 공격하였다.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360도 회전이 가능하여 전쟁에 유리하다. 전라좌수영이 관리하던 육지 행정구역 5관(순천도호부,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고흥의 옛 이름)과 수군 행정구역인 5포(방답진,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 중에서 고흥에 1관 4포(방답진만 제외)가 있으니 그만큼 중요한 곳이 아니었을까.
내가 인상 깊게 본 인물은 고흥 포두면 출신의 정걸 장군이다. 1591년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은 그는 이순신 장군을 도와 판옥선을 만들었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놀라운 건 그때 그의 나이 78세의 노인이었다는 것. 또 1592년 치러진 네 차례의 해전(당포해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조선 수군은 왜선 330여 척을 격파하였는데 전사자 211명 중 62%가 고흥 사람이었다. 즉 고흥 수군의 전투력이 바로 전라좌수군의 전승 동력이었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사랑하게 된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물음에 첫 손가락에 꼽는 이가 이순신 장군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충무공이 한때 이곳에서 근무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단편적인 지식 몇 가지로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지인에게 고흥을 안내할 때도 관광지인 쑥섬이나 연홍도, 소록도를 소개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격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조선 수군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친구들과 차분하게 이곳을 다시 둘러보리라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아산 현충사나 통영에서 찾는다. 태어난 생가가 있고, 마지막 전사지가 노량해전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래 활동한 곳이 전라도 고흥, 여수, 완도 고금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발포에는 규모는 작지만 전시관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년에는 아이들 체험학습장으로 권장할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고장의 역사를 알고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일도 교육의 역할이리라. 언젠가는 충무공의 주무대였던 전남이 업적과 함께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바로 앞 <충무사>로 향했다. 월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다. 앞에 있는 청렴박석 광장을 둘러본다. 이순신 장군이 발포 만호 재임 시절 직속 상관이던 전라 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 욕심으로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 하자, ‘이 나무는 관청의 재물로 누구도 함부로 베어갈 수 없다’고 거절한 일화가 전해 오는 곳이다. 현재는 청렴박석 1,580개(이순신 장군이 발포에 부임한 해)를 포함하여 모두 16,237개의 박석이 광장을 메우고 있다. 뜰에 심은 오동나무가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우람해질까. 아직은 볼품이 없다.
돌아 나오는 길에 오늘 답사의 하이라이트인 <안동 고분지>에 들렀다. 포두초등학교를 조금 못 미쳐 오른쪽 나지막한 야산에 있다. 눈 밝은 답사팀이 아니었다면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곳이었다. 이 일대는 너른 해창만 간척지가 있는 곳으로 간척되기 전에는 고분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한 번 도굴이 되었으나, 도굴꾼이 초보자였는지 그 안에 있는 진짜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고, 2006년 임영진 교수가 이끄는 전남대 박물관팀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금동관 1점. 금동 신발 2점, 구슬류 564점, 금동 귀걸이 2점, 청동 거울 1점 외에 일본(왜)풍의 갑주류(투구, 견갑, 판갑)이 함께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본다. 무덤의 주인은 삼국 시대의 지역 토착 세력자과 왜인이라는 설이 있다. 왜인이라고 보는 이유는 왜계 석곽과 갑주류를 비롯한 무기류 위주의 부장품에서 연유한 거란다. 또 마한이냐, 백제냐도 부딪치는데 나주 반남 신촌리 고분 9호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마한의 것이 확실하나 이 금동관은 백제 것으로 보고 있다. 금동관 위쪽의 뿔 모양의 긴 줄의 존재 유무에 따라 백제와 마한으로 나뉘는데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본 금동관에는 긴 줄이 선명했다.
고분 바로 곁에는 안동사가 있다. 전라좌수사, 경사우수사, 전라우수사를 두루 역임하고 판옥선을 만든 정걸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무너진 기와, 마당에 우거진 풀, 곳곳에 핀 곰팡이가 역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철저히 자기 위주로 사는 세상에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 뉘 있으랴.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남편이었을 의병이나 독립운동가가 목숨을 바쳐 구한 나라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혹여 이순신이라는 밝은 별에 가려 빛을 잃은 별은 없나 살펴볼 일이다.
고흥은 지리적으로 특별하다. 삼면이 바다다. 육지와 연결된 남은 한 면도 호리병 입구처럼 좁다. 벌교와 연결된 그곳을 막아 버리면 육로로 고흥으로 가는 방법은 없다. 육지 끝이라 멀기도 멀다. 그뿐이랴. 길은 어찌나 구불구불한지 고흥 오면서 멀미 안 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 길이 우주 항공의 중심지가 되면서 사통팔달로 뚫렸다. 소록도, 나로도도 다리로 연결되었다. 최근에는 바다를 가로질러 여수까지 갈 수 있는 팔영대교가 놓였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지역의 초입에 있어서 행정구역으로는 고흥이지만 생활권은 벌교이다. 뜻밖의 답사로 그 속살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훌륭한 지도자는 혼자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 고흥 출신의 정걸, 정운, 송희립, 이대원 같은 지혜로운 부하가 있었기에 명장 이순신이 가능했을 것이다. 금덩이를 쥐고도 알아보는 눈이 없는 이에게는 돌로만 보인다더니 꼭 내가 그 꼴이었다. 틈날 때마다 고흥 곳곳을 둘러보리라 다짐한 하루였다.
첫댓글 남도의 물길을 공부한 이때의 경험, 유리창을 뚫어 길게 매단 굴뚝이 있는 나무 난로, 뜰에 심은 오동나무가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우람해질까. 아직은 볼품이 없다. 5관 4포, 밝은 별에 가려 빛을 잃은 별은 없나 살펴볼 일,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고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