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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SUMMER 1
씬 1. 농구구조물. 아침.
문을 모두 열어놓은 준하의 차.
카스테레오에서 나오는 빠른 비트의 음악.
운전석에 벗어둔 재킷과 구두, 뒷좌석에 걸려있는 셔츠와 넥타이.
브이넥 면티를 받쳐 입은 캐주얼 정장에 농구화를 신은 준하.
시작한지 오래 되었는지 땀에 흠뻑 젖어있다.
주변 벤치에 어린 여자애가 아이스크림을 물고 앉아서 준하를 보고 있다.
준하, 부러 열심히 드리블해서 멋지게 레이업슛을 시도한다.
바스켓을 빙빙 돌다가 그냥 옆으로 툭 떨어지는 공.
여자애를 보는 준하.
여자애, 별 표정 없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머쓱한 김에 그냥 날려보는 슛, 그제야 들어가는 공.
여자애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있다.
준하, 빈 벤치를 보다가 다시 공을 주워 든다.
조수석에서 혼자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멜로디.
최신가요에 묻혀서 준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아래에 농구하고 있는 준하.
INDIAN SUMMER
씬 2. 길. 준하의 차. 아침. 비
아스팔트에 구멍을 낼 기세로 떨어지는 비.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꽉 막힌 도로.
조수석에서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준하의 핸드폰 멜로디.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는 앞 신과 같은 차림의 준하.
준하: 네. 서준합……. 사무장님. 거의 다 왔어요. 셋만 세세요. 셋만.
플립을 닫고 막힌 길이 답답한지 클락션을 눌러보는 준하.
그러자 사방에서 준하에게 하듯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클락션들.
한 곳에 틈이 보이자 그곳으로 얼른 차머리를 들이미는 준하.
씬 3. 법원. 아침. 비.
적당한 곳에 주차해 있는 준하의 차.
차 안에서 셔츠를 갈아입고 있는 준하,
급하게 구두를 갈아 신고 서류와 가방을 챙겨 내리려는데. 문득, 앞 유리로 보이는 분주한 사람들과 법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 위로 와이퍼를 작동시켜 보는 준하.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규칙적으로 보이는 건물과 사람들.
그때,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핸드폰 멜로디.
정적 속에서 나오는 준하, 핸드폰과 서류를 챙겨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 섞여 법원 건물로 들어가는 준하.
준하가 보던 비 오는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뛰고 있는 준하의 모습.
씬 4. 법원. 로비. 아침. 비
비 오는 밖을 등지고 어딘 가로 초조하게 전화를 하고 있는 사무장.
받지 않는 지 플립을 닫고 다시 전화를 시도한다.
사무장: 셋만 세 란지가 벌써 15분이네……. 비까지 갑자기 쏟아져서는.
종이컵의 커피를 마시면서 오고 있는 준하.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도 마주 오는 사람들을 잘도 피하며 걷는다.
자신을 지나쳐 가는 준하를 발견하는 사무장.
사무장: 변호사님!
준하, 문득 사무장을 돌아보다가 뒤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히는.
커피로 엉망이 되는 준하의 서류와 셔츠.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사무장.
씬 5. 법원화장실. 아침
화장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준하와 사무장.
준하, 세수를 하고 핸드 타월을 뽑아 얼굴을 닦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과 짧게 목례를 나누며 서류들을 준하에게 차례로 건네는 사무장.
사무장: 이건 태진 최 회장 변론 요지서고, (나가는 사람에게 인사) 식사하셨어요? (다시 준하에게) 이건 이진만 그 폭주족 껀이요.
준하: (서류들을 받아 보며) 합의서는요?
사무장: 아직요. 오늘 가져오기로……. (재킷과 셔츠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는 걸 보다가) 거 이리 줘 보세요.
재킷을 건네받는 사무장, 얼룩이 진 곳을 입으로 빨아내며,
사무장: 뭐 하느라고 전화도 안 받고 이렇게 늦으셨대요.
준하. 생각 좀 하느라고요.
사무장: 생각이요?
준하: (젖은 머리를 탁탁 털고) 연수 신청하고 오는 길이에요. 한 시간 전에.
보는 사무장.
씬 6. 법원. 계단과 복도. 아침
총총히 계단에서 복도를 걸어오는 사무장과 준하.
사무장, 준하의 옷매무새를 털어 주는 등 손놀림도 걸음만치 바쁘다.
사무장: 잘 생각했습니다. 자주 오는 기회도 아니고 5년 걸려 겨우 한 번씩 오는 건데. 왔을 때 잡아야죠. 언제 가는 거죠?
준하: 10월이니까……. 석 달쯤 남았나요?
무장: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쓰겠네요. 천천히 짐도 싸놓고 그래요. 닥쳐서 하지 말고.
준하: 짐이 뭐 있나요.
사무장: (흡족한지) 이번 태진 그룹 부도 건 잘 마무리하시고 한 이년 연수까지 다녀오시면. (준하 보며) 그때 가서 나 모른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준하: (쑥스럽게 웃는)
문에 다다른 두 사람.
사무장: 그나저나 뭐 생각 할 때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시는 겁니까? 전화도 안 되고.
준하: 너무 깊이 알려고 들지 마세요. 다쳐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준하.
사무장, 들어가려다가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멈춘다.
씬 7. 법정. 아침
피고인석을 중심으로 좌, 우에 검사와 변호사, 서기와 속기사 그리고 중앙엔 판사들. 방청석의 방청객들.
기자들과 고급 양복들로 빽빽한 방청석.
이미 변호인 대기석에 앉아있는 황변호와 김변, 최변 등. 이제야 들어서는 준하를 못마땅한 듯 보는.
겸연쩍게 김변, 최변 옆에 앉는 준하.
초조한 듯 변론 요지서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김변.
준하, 이상하게 보다가 최변에게 소곤대는.
준하: 왜 저래?
최변: (방청석 가리키며) 대형 무대는 오늘이 첨이거든요.
준하: (김변보고 웃고는) 최변은 괜찮아?
최변: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래봬도 대형 무대에서 데뷔한 몸입니다.
그때, 앞선 재판이 끝나고 일어서는,
황변호: 3215홉니다.
판사: 3215호 불구속 피고인 최일만.
우르르 변호인 석으로 올라가서는 황변호와 김변, 최변들, 옷매무새를 다듬고 서류들을 챙기고…….
판사: 최일만 피고인.
방청석을 둘러보는 판사.
황변호, 역시 당황한 얼굴로 둘러보다가
판사: 변호인, 피고인 출석 확인했어요?
황변호. 그게 아직……. 도착을 안 한 거 같은데…….
판사: (편치 않은 얼굴로) 어떻게, 더 기다릴까요?
황변호: 연기하겠습니다.
판사: 다음 기일은 3주 뒤 7월 14일 오후 2십니다.
다시 줄줄이 내려서는 황변호와 변호사들.
김변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준하는 방청석을 본다.
줄줄이 일어서 나가는 방청석의 기자들 덕분에 휑한 방청석.
씬 8. 법정. 복도. 아침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서성이는 사무장.
귀걸이와 염색으로 요란한 한 무리의 폭주족들이 복도로 들어온다.
그중 한 명을 쥐어박으며,
사무장: 지금이 몇 시야? (차림을 훑고) 교복 입고 오랬더니 왜 말 안 듣냐.
폭주1: 아이 씨, 왜 이래요. 나 아니에요.
사무장: 아냐? (무리들을 보며) 이거야 원 바둑이 새끼들 마냥 얼룩덜룩 그놈이 그놈 같아 알 수가 있나. (폭주족을 찾아내고) 합의서는? (쇼핑백을 든 폭주에게 합의서를 받는다.) 빨리 갈아입고 들어가.
그때, 법정 문을 거칠게 열고 나오는 황변호와 변호사들.
사무장 주춤 인사하면 건성으로 받으며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황변호. 따라가는 변호사들과 준하.
사무장 눈으로 준하에게 ‘왜 그래요?’ 묻는 등.
황변호: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못 나올 거 같으면 비서 시켜서 전화라도 해주던지. 큰 고객이라고 굽신거려 줬더니 끝이 없어.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피고인 출석 확인도 안하고 말이야. (가려다 멈춰서 준하를 잠시 훑고는) 꼴은 또 왜 그래? 비가 서준하 머리로만 퍼 붰어?
얼룩진 옷과 젖은 머리가 겸연쩍은 준하.
혀를 차며 돌아서 다시 걷는 황변호.
준하, 몇 걸음 같이 걷다가 멈추는. 가던 김변, 최변 돌아서 눈으로 손으로 준하에게 인사하면 웃음으로 받는 준하.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변호사들.
씬 9. 법정. 아침
피고인석의 폭주.
준하: 훔치겠단 생각은 아니고 그냥 한번 타보고 돌려주겠단 생각이었죠?
폭주족: (작게) 네.
준하: 이번 일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다시는 과속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죠?
판사님 보면서 크게 대답하세요.
폭주족: (크게) 네.
준하: 이상입니다 (합의서를 서기에게 건넨다.)
오전에 피해자와 합의한 합의서입니다.
판사: (서기에게 합의서 받고) 6월21일자 피고인 반성문 접수됐고, 6월22일자 부모님들이 낸 탄원서 접수됐습니다. 그런데 피고인
폭주족: ……. 네.
판사: 본 판사의 이름은 김개동이 아니고 김재동입니다. 부모님들한테 다음에 탄원서 낼 땐 이름 잘 확인하고 보내라고 하세요. (준하와 검사를 본다.) 더 할 건 없죠? 결심하죠. (검사에게) 의견 말씀하세요.
검사: (대충 일어나) 징역 1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준하에게) 변론하시죠.
준하: 변론요지서로 대신하겠습니다만 피고인이 아직 미성년자이고, 학생신분이란 점, 또 피해자와 합의가 됐다는 점 등을 감안하셔서 이번에 한해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피고인 일어나세요. 할 말 있으면 해요.
폭주족: 조용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점 죄송하고요, 앞으론 정말 조용히 살겠습니다.
판사: 선고는……. 7월 9일 오전 10시에 하겠습니다. (내려가려는 폭주족에게) 피고인 잠깐만. 지금 정학 상태죠?
폭주족: (작게) …….네
판사: 평소에도 바깥에 돌아다닐 때 지금처럼 교복 입고 다녀요?
폭주족: ……. 아뇨.
판사: 근데, 누가 교복 입고 나오라고 했어요?
폭주족: ……. 제가. 그냥 입었는데요.
판사: (폭주족을 본다.) 법정에서 거짓말하면 위증죄로 처벌받는 거 알죠?
폭주족: (당황한) 저……. 변호사님이 시켰는데요.
황당한 표정으로 폭주족을 보던 준하, 사무장을 본다.
멀끔히 딴 청을 하는 사무장.
판사: (준하에게) 변호인, 이왕이면 귀걸이 떼란 말도 하지 그랬어요?
서류로 얼굴을 묻는 준하.
씬 10. 준하의 차, 낮
운전석의 준하, 조수석엔 준하의 눈치를 살피는 사무장.
사무장: (괜히 하늘을 보며) 구멍 난 것처럼 퍼붓더니 금세 또 말짱하네. 참……. (가방에서 서류 꺼내며) 엊저녁에 들어온 국선 변호 건인데 깜빡 했네요. 태진 건하고 같은 재판부라 이쪽으로 떨어진 모양이에요.
준하: 무슨 사건이에요?
사무장: 살인 사건 항소심인데 사형수고……. 여자예요.
준하: (잠깐 사무장 보는)
사무장: (서류를 준하 무릎 위에 던져 놓으며) 기록들 다 받아다 놨으니까 직접 보세요. 그 동안 국선 지겹게도 많이 했었는데 어쩌면 서울에서 하시는 마지막 작품이 되겠네요.
그때, 바람같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몇 대.
놀라 급히 멈추는 차.
마지막으로 폭주의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차안으로 뭔가를 던져 넣는다.
폭주족: (크게) 선물이요.
두 사람, 정신 차리고 보면 고농도의 포르노 잡지다.
멀리 사라지는 폭주족들.
사무장: (황당하게 보다가) 저것들 진짜 학생 맞아요?
준하: 교복 입은 거 보셨잖아요.
사무장: 순대 창에 스파게티 쑤셔놓은 거 마냥 어울려야 말이죠. (잡지 보며) 국선이 무료 봉산 줄만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또 수임료가 생깁니다. (하면서 슬쩍 가방에 넣으려는)
준하: 근데 왜 거기 넣으세요?
사무장: 거시기……. 아유, 변호사님이 앱니까? 이런 걸 보시게.
준하: 사무장님은 앤 가봐요?
사무장: 나야 거시기……. 우리 막내 갖다 주려고 그러죠.
준하: 아버지 맞아요?
잠시 서로를 보다가 웃는 두 사람.
체증 없는 도로를 달리는 준하의 차
씬 11. 교도소. 접견신청소. 낮
서류 봉투를 들고 신청서를 내미는 준하.
신청서를 받는 직원, 준하를 올려다보면,
준하: 이신영씨 항소심 국선 변호 맡은 변호삽니다.
씬 12. 접견실. 낮
난도질 된 남자의 시신, 피투성이의 욕조 등…….
사건 현장의 사진들을 보고 있는 준하.
사르륵사르륵 서류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실내.
한곳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여교도관1.
문 열리는 소리 들리고.
여교도2E: 나오지 않겠답니다.
돌아보는 준하.
문 앞에 혼자 서있는 여교도관2.
여교도2: 2932번 접견 거부예요.
여교도관2를 보는 준하.
씬 13. 교도소마당. 낮
건물에서 나오는 준하.
여교도2: (소리) 아마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거 에요.
한쪽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여 재소자들.
다소 불편한 얼굴로 교도소를 빠져 나오는 준하.
여교도2: (소리) 일심 때도 변호사님이 두 번 정도 다녀가셨는데 못 만나 보셨거든요.
준하, 잠시 운동중인 재소자들을 본다.
줄지어 걷고 있는 무리들 중에 작은 체구의 무표정한 신영도 섞여있다.
(신영인 줄은 모르고)보다가……. 입구를 빠져나가는 준하 (또는 준하의 차).
씬 14. 준하 원룸. 밤
벽에 커다란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준하.
셀로판테이프로 귀퉁이를 고정하고 올려다보는 포스터는 연수와 관련된 곳이다.
흡족하게 보는 준하.
커서가 깜박이고 있는 노트북.
노트북 옆으로 또 책상 아래로 사건 서류들과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것들을 보다가, 어느새 박스를 가져와 정리를 마친 준하.
박스를 한쪽에 밀어 놓는 준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신영의 사진을 보게 된다.
준하, 사진을 가만히 보다가 냉장고로 가서 포켓 가득 꽂힌 캔 맥주 하나를 꺼내든다.
씬 15. 법정. 낮
개정시간 전의 법정 안. 서너 명의 방청객들.
변호인 대기석의 변호인들이 심심파적 농담을 나누고 있다.
오는 경위.
경위: 구속 피고인 있습니까?
변호1: 없어. (경위 보며) 얼굴 많이 상했네. 어린 마누라 데리고 살기 힘든가봐.
경위: 아이고 한 변호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순번 체크하며) 오늘 증인 있으시죠?
변호1: 연락 왔는데 못 나오겠다고 하네…….
변호2: 오늘 빨리 끝나시겠습니다. (놓인 가방을 보고) 저건 누구 가방이야?
경위: 강변호사님이요.
변호2: 또 사무장 시켜서 가방 갖다 놨구만. 하여간에 말은 하 세월이면서 자린 빨리 잡아.
변호1: 뭐라도 하나 빨라야 먹고 살지.
이동수레에 공판기록들을 싣고 들어오는 서기.
속기 타자기를 설치하는 여직원.
준하가 들어와 변호사들과 인사를 하면서 검사석을 본다.
박필주 검사, 편한 얼굴로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있고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 나누는 준하와 박검.
(시간 경과)
고작 서너 명이 앉아 있는 방청석.
준하: (변호인 석으로 오르며) 1627홉니다.
판사: 1627호 이 신영 피고인.
호송경찰에 의해 법정으로 나오는 신영,
준하와는 눈도 마주하지 않고 피고인 대기석에 가 선다.
(시간 경과)
박검: 피고인 이 신영은 2000년 2월 5일 남편인 성종훈에게 약물을 투여,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후, 살해 흉기인 메스로 경동맥을 포함 모두 네 군데를 찔러 살해한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돼 지난 5월 13일 일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피고인석의 무표정한 신영.
신영을 보는 준하.
신영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아서 얼굴을 보기는 어렵다.
판사: 심문하세요.
박검: 흉기에서 발견된 지문과 죽은 성종훈의 손톱 밑에서 채취된 모발 모두 피고인의 것으로 사실 확인 된 점, 외부 침입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점, 치밀한 계획성 등 과학적 증거들이 명백하고 피고인 역시 경찰, 검찰 조사와 일심재판에서 시종 묵비권을 행사한 점 등을 감안, 더 이상 심문할 내용 없습니다.
표정 없는 신영.
머리칼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신영의 얼굴을 보는 준하.
판사: 변호인 반대심문 하세요.
신영을 보다가 일어서는 준하. 그때
신영: 재판장님.
판사: 뭡니까?
신영: 재판 그만 하고 싶습니다.
황당해지는 재판부. 당황하는 준하. 보는 박검.
신영: 재판 그만 하고 싶어요.
판사: 피고인, 피고인한테는 재판 거부할 권리 없어요.
신영: 왜 안 된다는 거죠?
준하: 이신영씨.
신영: 그만 하겠어요.
준하: (작지만 단호하게) 이신영씨. (판사에게 서둘러) 재판 연기 신청합니다.
신영: 그만 두겠다고요!
일순 소란해 지는 법정.
판사: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불쾌하게 나가는 재판부.
다가오는 호송경찰을 거칠게 뿌리치는 신영.
신영: 놔! 그냥 사형 받겠다고! 다시 재판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누구 맘대로 이러는 거야! 놔!
호송경찰에 의해 거칠게 끌려 나가는 신영.
멍하니 보던 준하, 박검을 돌아본다.
별 일 없었다는 듯 서류들을 챙기고 일어서는 박검.
준하, 안되겠는지 챙기던 서류를 한곳에 두고 피고인 대기실로 향한다.
씬 16. 피고인대기실. 낮
몇몇의 피고인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 안.
마침 나가는 피고인과 입구에서 잠시 부딪히며 안으로 들어오는 준하.
대기실 안의 소란스러운 곳을 보면, 한명의 호송경찰이 신영의 어깨를 부서질 듯 거칠게 잡고, 다른 한명이 손목에 거칠게 수갑을 채우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잠시 보다가 다가가는 준하.
준하: 이신영씨.
그 상태로 강하게 쏘아보는 신영.
준하: 진정해요. 이러는 거 이신영씨한테 불리해요.
신영: (흥분한 상태로 보는)
준하: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며 잡고 있는 호송에게) 그 어깨 좀 놔주시겠어요.
신영: 참견하지 말고 나가요!
준하: …….
계속해서 준하를 쏘아보는 신영.
호송들, 나가도 되겠냐는 듯 준하를 보면, 준하 역시 표정으로 수긍한다.
신영, 준하를 보다가 호송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간다.
준하를 이상하게 보는 피고인들.
신영이 나가는 것을 보다가, 밖으로 나오는 준하.
씬 17. 판사실. 낮
노크와 함께 들어오는 준하.
불쾌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판사와 박검이 앉아있다.
판사: (앉는 준하에게) 새로운 증인이나 증거물 제시할 거 있어요?
준하: 아직은 없습니다.
박검: 정신 감정결과도 정상이고, 일심 때도 별 말썽 없었습니다.
판사: 그럼 정황 심문도 끝났고……. 시간 끌 거 없잖아요? 계속 묵비권을 쓴다는 거 자체가 범행을 시인하는 거 나 다름없는 건데.
준하: (판사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런 준하를 보는 박검.
씬 18. 교도소. 접견신청소. 저녁
준하와 직원.
직원: 징계 차원에서 독방에 수감됐어요. 접견 안 됩니다.
준하: ……. 얼마나 있게 될까요?
직원: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준하: 그럼 연락을 좀 주시겠습니까?
명함을 건네는 준하,
나오며 삭막한 교도소 건물을 올려다본다.
씬 19. 교도소. 독방. 저녁
겨우 한 사람 정도 누울 공간의 좁은 거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는 신영, 열리는 배식구.
배식구로 스며든 불빛을 통해 드러나는 신영의 얼굴…….
입구에 먹지 않은 그대로인 식기를 꺼내 가는 손.
힘겹게 눈을 뜨는 신영.
남자의 다리가 신영의 시야로 걸어오고, 문이 거칠게 닫힌다 ― 닫히는 배식구.
땀에 젖은 얼굴로 가녀린 숨을 밭게 몰아쉬는 신영.
씬 20. 로펌. 회의실. 아침
조용한 이른 아침의 회의실.
신영의 사건 사진들을 보고 있는 준하.
회의실에 들어오는 김변, 최변.
각자 자리로 가서 서류 등을 꺼내 놓으며,
최변: 벌써 나오셨어요?
김변: (목례로만 인사하는)
준하: 어……. 그냥 잠이 안 와서. 둘은 지금 나오는 거야?
최변: 네. 김변이 아침부터 얼마나 꼼지락대는지 시끄러워서 깼죠 뭐.
준하: 둘이 같이 살아?
두 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최변: 두 달쯤 됐어요.(하며 김변을 보는)
김변: ……. 서선배 커피 하실래요.
준하: (종이컵을 들어 보이며) 난 했어. 벌써.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황변과 변호사 몇.
황변: (김변 보며) 난 아직 안 했어.
이어서 ‘나도’ ‘나도’하며 자리에 앉는 변호사들.
최변과 서로 미루다가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가는 김변.
넓은 회탁에 둘러앉은 와이셔츠 차림의 변호사들.
20대 후반의 변호3, 태진 부도 건을 브리핑하고 있다.
앞쪽에서 종이컵을 돌려가며 커피를 마시는 황변호.
변호3: 서류상으론 태진 그룹의 보유 재산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금융 기관들로부터 받은 대출금과 태진 명의로 발행된 어음에 대한 지불의무는 이행할 필요가 없는 상황입니다.
서류를 보고 있는 준하.
김변E: 근로자 임금은 어떻게 처리되는 거죠? 5개월 가까이 체불 돼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 김변을 보는 준하.
김변: 은행 쪽도 그렇고, 모든 날짜가 너무 딱 맞는 게……. 부도에 분명 고의성이 있습니다.
김변을 보는 황변호.
김변의 맞은편에 있는 최변이 그 둘을 번갈아 살핀다.
황변호: 자자 우린 근로복지 조사단이 아냐. (일어서며) 재판 일정 잡힐 때 까지 서변이 알아서 진행해. (김변 앞으로 나가며) 하여간 신참들이 문제야.
서류 챙기다 머쓱해지는 김변.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 준하, 황변을 따라 나가는.
씬 21. 로펌, 황변호방, 아침
뜨악하게 올려다보는 황변호.
책상 앞에 서 있는 준하.
황변호: (표정 달라지며) 지금 그 말 책임 질 수 있어?
준하: …….
황변호: 이 땅에 수임료 그만치 집어주는 놈 치고 도둑놈 아닌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이건 뭐 아래윗니가 딱딱 맞아야 라면이라도 잘라먹지. 법적으로 하자 있는 부분이 있으면 찾아와 봐. 당장 손 뗄 테니까.
준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황변호: (보다가) 아닌 줄 알면서 김변보다 먼저 나서서 왜 말 못했어?
준하: …….
황변호: 더 용건 없으면 가서 일해. 요즘 안 바빠? 민 사무장님 말에 의하면 바빠서 돌아가시겠다던데. (서류 챙기기 시작하며) 용기 있으면 때려 쳐 봐. 안 말릴 테니까.
준하: …….
황변호: 나쁜 놈 편들어주는 게 우리 일이야. 우리가 안 해도 누군가 해.
준하, 뭔가 더 말하려는데 울리는 핸드폰.
황변호: 안 받고 뭐해?
답답한 듯 서 있다가 핸드폰을 받으며 나가는 준하.
씬 22. 병원. 로비. 아침
안으로 들어오는 준하.
교도관: (소리) 이신영씨가 폐소 공포증이 이랍니다. 아침 배식 때 발견돼서 지금 병원으로 옮겼어요.
잠시 둘러보다가 접수대로 간다.
씬 23. 병원. 병실 앞 복도. 아침
계단을 올라와 경찰이 지키고 있는 병실로 가는 준하.
준하, 경찰에게 말하려는데, 갑자기 와장창 병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병실로 뛰어 들어가는 준하와 경찰.
씬 24. 병원. 병실. 아침
바닥에 깨진 채 뒹구는 링거병, 바닥을 흐르는 주사액.
흐트러진 침상에 낭자한 선혈.
구석에 피를 흘리며 쪼그려 앉아 깨진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긋고 있는 신영.
놀란 준하, 신영의 손목을 잡아 저지하며 유리조각을 뺏으려 한다.
소리 지르며, 유리조각을 던지며 준하와 실랑이를 벌이는 신영.
준하, 간신히 유리조각을 뺏어 던져놓는다.
사태를 보다가 의료진을 부르러 가는 경찰.
거칠게 저항하는 신영의 양쪽 손목을 잡는 준하.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준하와 신영.
실랑이 끝에 잠시 숨을 몰아쉬는 둘.
떨리는 손, 떨리는 입술, 떨리는 눈,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진다.
짧지만 긴 시간……. 입을 여는 신영.
신영: (한숨처럼 흐느끼는) 죽고 싶어요……. 정말……. 죽고 싶어요…….
그 신영의 눈을 보는 준하.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친 모습은 없고 약하게 흔들리는 신영.
간호사와 경찰이 달려와 준하에게서 신영을 떼어낸다.
뒤늦게 도착한 이동침대에 실려 밖으로 나가는 신영.
따라 나가는 준하.
씬 25. 병원. 복도. 아침
신영을 응급실로 옮기는 간호사와 경찰.
이동침대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가는 신영.
응급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남는 준하.
준하, 가려다가 문에 난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누운 채로 침대를 부술 듯이 몸부림을 치는 신영.
남자 간호사에게 가격 당하고 주사바늘이 꽂힌다.
준하, 움찔 안으로 들어가려 해 보다가 그렇게 못하고 힘없이 누운 신영의 옆얼굴로 눈물이 타고 내리는 것을 본다.
씬 26. 병실. 아침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병실.
준하, 쓰레기통을 곁으로 가져와 유리조각들을 담기 시작한다.
흐트러진 침상을 대충 정리하다가 베어진 자신의 손을 뒤늦게 발견하는 준하.
숨을 돌리듯 침대에 걸터앉아 창에 비친 자신을 본다.
씬 27. 로펌. 로비. 아침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 사무장.
김변, 최변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간다.
사무장: 슬리퍼 짝 마냥 바짝 붙어 어딜 그렇게들 가십니까?
김변: 오늘이 첫 변호 맡은 사건 선고 날이거든요.
사무장: 그래서요? 법정엘 가시게?
최변: 왜요. 안돼요?
사무장: 안된다기보다는. 가세요.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가보는 게 빠르죠.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두 사람.
사무장 괜히 재판 져가지고 돈 토해내라고 봉변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닫히는 문.
(시간 경과)
열리는 문.
얼굴의 상처와 지친 얼굴로 옷이 엉망인 채 내리는 김변, 최변.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던 사무장이 방으로 가는 두 사람을 본다.
사무장 아유 심하게들 당하셨나보네.
대꾸 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둘.
승강기 문이 닫히다가 다시 열리고 그 안에서 여기 저기 피가 묻은 준하가 내린다.
사무장, 깜짝 놀라 다가서는.
사무장: 뭐에요? 같이 갔었어요?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준하.
씬 28. 로펌, 준하방, 낮
사무장: 별 일이네요.
와이셔츠를 벗고 면티로 갈아입는 준하.
사무장: 가만히 앉았으면 어련히 사형 시켜줄까 왜 그렇게 못 죽어 안달이래요.
남들은 변호사 그림자만 지나가도 살려달라고, 입천장에 낙지 마냥 들러붙어서는 난리구만.
사무장 수다와 관계없이 혼자의 생각에 빠진 준하.
옷을 갈아입다가 문득 멈추고는 창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사무장: 안달을 내도 살까 말깐데…….(하며 준하를 보는) 벗다 말고 뭐해요?
준하: (그대로, 혼잣말처럼) 그거 아세요?
사무장: ?
준하: 죽고 싶다는 말이……. 살려달라는 말보다 더 절실하게 들리는 거…….
모를 표정으로 보는 사무장.
준하, 잠시 그대로 있다가 재킷을 걸쳐 입고,
준하: 사건 현장 검증 비디오테이프 수배해 주시구요. 이신영씨하고 죽은 성종훈 가족사항들 좀 알아봐 주세요. 언제쯤 볼 수 있죠?
사무장: 현장 테이프이야 경찰에 부탁해서 퀵 서비스로 받아 보면 되고. 뒷조사야 법적으로 하면 일주일 불법적으로 흥신소 동원하면 내일 오후면 끝나지 않겠습니까?
준하: 법적으로 내일 오후까지 해 주세요.
사무장: (빤히 보다가) 혹시 그 여자 이뻐요?
황당한 얼굴로 돌아보는 준하.
사무장, 멀끔하게 보다가,
사무장: 커피 까만색 뽑아요. 똥색 뽑아요?
준하: (어이없이 웃고) 똥색이요.
웃으며 나가는 사무장.
웃다가, 밴드로 감아놓은 자신의 손가락을 까딱여 본다.
씬 29. 로펌입구. 낮
요란한 굉음과 함께 나타나는 오토바이 몇 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무장, 일어서 가까이 온다.
사무장: 무슨 퀵 서비스가 주소도 제대로 못 찾고, 엎어져 코 닿을 데를 몇 시간 걸려오냐? 소달구지가 건너왔어도 벌써 왔겄…….
헬멧을 벗어드는 퀵 맨.
사무장, 찬찬히 뜯어보면 폭주족이다.
사무장: 아니……. 이 바둑이들……. 아직도 몰려 댕기냐?
폭주족: (봉투에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며) 부탁하신 물건 왔습니다.
사무장: (받아들며) 그래. 그건 그런데…….
폭주족: 사회에 물의 안 일으키고 조용히 살기로 했잖습니까. (헬멧 쓰며) 전 바빠서 이만.
사무장: 벌써 갈라고?
폭주족: (가려다.) 참……. (뒷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잡지를 사무장에게 주는) 선물 그 두 번째 이야깁니다.
받아들고 잠시 보는 사이 쏜살같이 사라져 버리는 폭주들.
어이없이 보는 사무장.
씬 30. 로펌. 준하방. 저녁
현장 검증 비디오를 보고 있는 준하.
수감 복을 입고 포승된 채 경찰의 지시에 따라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신영.
신영의 얼굴이 카메라에 크게 스칠 때마다 가만히 보는.
경찰에 이끌려 침실로 들어오는 신영.
옷장 앞에 서서 옷을 꺼내 화장대 곁에서 갈아입는 시늉을 하는.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하는 시늉을 해 보이는.
클로즈업 되는 무표정한 신영의 얼굴.
문득, 준하……. 뭔가 발견했는지 테이프를 앞으로 돌린다.
다시 옷을 갈아입는 시늉하는 곳으로 가서……. 옷을 어디에 두는지 확인하는.
신영은 옷을 화장대 곁에 두는 시늉을 한다.
뭔지 이상한 듯 준하, 사건 현장 비디오를 데크에 넣는.
빠르게 감기는 테이프,
침실에서 체포되는 신영을 찍은 모습,
다시 돌려보는 준하……. 끌려 나가다 돌아보는 신영의 복잡한 얼굴.
뭔가 감 잡은 준하.
그때, 안으로 들어오는 사무장.
돌아보는 준하.
마주보는 두 사람.
씬 31. 병원, 병실, 저녁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준하.
간호사E: 다행히 동맥 손상은 없어서 내일 중이면 교도소로 옮길 수 있을 거예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신영.
준하,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추고 문 앞에서만 보고는 문을 닫는.
씬 32. 병원, 로비, 저녁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는 준하.
음료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춰 선다.
씬 33. 병원, 병실, 저녁
창가 곁 테이블에 캔 커피로 살짝 메모를 눌러놓는 준하.
준하, 돌아서려는데 지는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 신영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 보이는.
준하, 가만히 창으로 가서 블라인드를 조정해 빛을 가린다.
잠시 더 보다가 나가는 준하.
준하, 나가고 나면, 슬며시 눈을 뜨는 신영.
침상에 걸터앉아서 커피를 감싸 쥐고 메모를 드는 신영.
가만히 보는 신영.
준하의 명함 뒤에 <곧 다시 봅시다. 우리>라고 적혀있다.
씬 34. 신영의 모습들.
호송차로 옮겨지는 신영.
거실로 들어오는 신영.
사무장(E): 죽은 성종훈이 쪽은 작년 가을에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교도소안. 좁은 콘크리트 마당에서 운동을 하는 재소자들.
무표정한 얼굴로 햇살 속을 천천히 걷는 신영.
사무장(E): 이 신영은 열두 살 때 어머니 돌아가시고 혼자 됐어요. 둘 다 형제는 없고요.
줄지어 거실로 들어오는 재소자들 속의 신영.
복도 철창 밖으로 정장차림의 남자 변호사가 접견실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이는.
사무장(E): 열아홉 살 때 까진 춘천에서 이모하고 같이 있었어요.
신영, 잠시 멈춰 서서 남자를 살피는……. 준하가 아니다.
재소자들에 부딪혀 다시 걷기 시작하는 신영.
사무장(E): 그 후로 춘천 개인병원 간호조무사로 3년간 있었고,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신영.
사무장 (E): 거기서 지금 남편을 만났답니다.
씬 35. 카페. 테라스. 낮
사무장: 아니, 죽은 남편을요.
샌드위치를 한 손으로 우걱우걱 먹고 있는 사무장.
사무장: 좌우당간 여자 잘 만나야 돼요. 여자 하나 잘못 만나 한창 나이에 송장 됐잖아요. 그저 턱 밑에서 같이 오입질하던 여자두…….
사무장의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커피까지 홀짝 다 비우는 준하.
준하: 사무장님은 사건 당일에 다른 사람이 침입할 수 있는 단서가 없는 지 좀 알아봐 주세요.
사무장: 검사님이 달려들어서 아니라고 밝혀낸 걸 제가 어떻게 뒤잡습니까.
일어서는 준하.
사무장: 어디 가세요?
준하: 춘천에요.
사무장: 춘천엔 갑자기 왜요?
모를 표정으로 보다가 따라 일어서는 사무장.
사무장, 빌이 테이블에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사무장: 변호사님! 변호사님!
빌을 챙겨 준하를 부르며 급히 따라간다.
씬 36. 준하의 차. 낮
조수석에 교통지도를 펼쳐놓고 운전하는 준하.
풍광 좋은 길을 달리는 준하의 차.
씬 37. 이모 집. 낮
하얀 기저귀가 마당 가득 팔락이는 담 낮은 시골 양옥.
대문 밖에서 안을 기웃대는 준하.
그때, 삐걱 문이 조금 열리면서 50대 여자, 신영의 이모가 고개를 내민다.
이모: 누구 찾아요?
준하: 저……. 이신영씨 일 때문에…….
말도 끝나기 전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이모.
황당한 듯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준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동시에 물세례를 받는 준하.
아이 업은 채로 씩씩대며 입구에 서있는 이모.
황당하게 보는 준하.
이모: 한동안 잠잠한가. 했드니만……. 뭐 더 얻어들을게 있다고 또 와요?
준하: 뭘 잘못 아신 거 같은데 저는 이신영씨 변호삽니다.
문 안쪽에서 빠끔히 보다가 문을 닫아버리는 이모.
젖은 몸을 하고 답답하게 서 있다가 돌아서는 준하.
그때, 낮은 담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이모.
이모: 저기!
준하: (돌아보는)
이모: 변호사면 우리 신영이편이유?
보는 준하.
씬 38. 이모 집. 신영의 방. 낮
햇살과 먼지로 부연 방.
이모: (소리) 3년 전 이든가? 마지막으로 온 게. 그 후론 전화도 못 해 봤네요.
그 때 왔을 때, 지 남편한테 아주 혼 줄이 나서 끌려갔거든요. 보지 않아도 뻔하지……. 기우는 혼사가 오죽 했을라고요.
들어오는 준하, 둘러보다 책상으로 간다.
꽂이에 꽂힌 참고서와 교과서들.
필기구 몇 개가 뒹구는 서랍을 여는 준하.
다음 서랍을 열려 하지만 잠겨 있다.
몇 번 흔들어 보다 포기한다.
허리를 숙여 책상 밑을 들여다보는 준하.
종이배가 가득 접혀 담겨있는 커다란 유리병이 보인다.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여는 준하.
종이배 하나를 꺼내 보고 다시 병에 담아 놓는다.
나가려던 준하, 다시 책상 앞으로 간다.
필기구 서랍을 꺼내자, 열리지 않던 아래 서랍 내부가 보인다.
몇 권의 낡은 화집들을 꺼내어 펴 보는 준하.
작은 종이가 여러 장 꽂혀 있기도 하고, 말린 꽃잎도 있고.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서랍을 닫는
씬 39. 접견실. 저녁
앉아있는 준하,
책상 위의 메모지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내 접어 보다가,
준하: (교도관에게) 배 접을 줄 아세요?
여교1: 띄우는 건 잘하죠.
어이없는 듯 피식 웃는 준하.
여교1: 그거 황당한 짓이에요.
종이배라는 게 띄워 놓으면 꼭 험한 데로만 골라 가거든요.
준하: 어떻게 하면 좋은 길로 가는데요?
여교1: 입으로 불어야죠. 근데 그것도 잠깐이에요.
조금 가는 듯 하다간 금방 또 지 맘대로 가거든요.
문소리…….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하.
여교도2에 의해 들여보내지는 신영.
마주앉은 두 사람.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
붕대를 감은 위로 수갑을 하고 있는 신영의 손목을 보는 준하.
준하: (교도관에게) 수갑 좀 풀어 줄 수 있어요?
준하를 보는 신영.
다가와 수갑을 풀어주는 교도관.
신영이 수갑 없는 손목을 가만히 보다가 살며시 무릎에 내려놓는 동시에,
준하: 인사가 늦었어요. 국선 변호 맡은 서준합니다.
신영: ……. 변호 부탁드린 적 없습니다.
준하: ……. 나도 이신영씨 일을 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어요.
신영: (보는)
준하: 국선 변호란 게 원래 그런 거죠. 부탁한 사람도 부탁 받은 사람도 없이……. 그냥 하는 거예요. 둘 다. 설명이 됐나요?
신영: …….
준하: 그럼 시작할까요?
신영: …….
준하: 상처는 괜찮아요? 보기엔 괜찮은 거 같은데.
신영: 원래 그렇게 남하고 상관없이 자기 좋을 대로 참견하길 좋아하시나 보죠?
준하: 글쎄요. 내가 그랬나요?
신영: 내 일에 상관하지 말아요.
준하: ……. 그럴 순 없어요. 이신영씨 일이 내 일이기도 하니까요.
신영: (못 참겠다는 듯) 변호사라는 사람들 바쁜 사람들 아닌가요? 왜 갑자기 나타나서 귀찮게 이러는 거죠?
준하: 궁금한 게 있어요.
신영: …….
준하: 왜 죽고 싶죠?
잠시 서로를 보는 둘.
준하: 신영 씨가 누명을 쓴 게 억울했다면 어떻게든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을 거고, 살인은 다른 목적이 있을 때만 가능해요. 죽는 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죠. 왜……. 죽고 싶죠?
신영: ……. 대답하면 더 이상 재판 없이……. 죽게 해줄 수 있어요?
준하: 아니요. 난 변호사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난 마지막까지 이신영씨를 살려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니까.
신영: (잠시 준하 보다가, 교도관에게) 들어가겠어요.
준하: 안돼요.
신영: (쏘아보는)
준하: 그렇게 싫었다면 왜 여기 나왔죠? 접견 거부해도 됐을 텐데.
신영: …….
준하: 신영씨도 도움이 필요한 거 에요. 왜 그걸 몰라요. 아무도 이신영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심 없어 하니까 화난 거 아니에요. 지금!
자리에서 일어서며 테이블을 거칠게 준하 쪽으로 밀어버리는 신영.
제지하려는 교도관들.
그런 교도관들을 제지하는 준하.
멈추는 교도관.
신영: 관심 가져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찾아와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준하: 말했지만 신영 씨한테 관심 갖고 찾아오는 게 내 일이에요.
신영: (보다가, 교도관에게) 들어가고 싶어요.
준하: 지금까진 내가 아니었잖아요. 우린 이제 처음 만났어요.
신영: …….
준하: 나한테 기대를 좀 걸어봐요.
도움이 되고 싶어요.
말없이 보는 둘.
신영: 아무도 날 돕지 못해요.
준하: (부러 여유 있는) 노력할게요.
신영: …….
준하: 앉아 봐요. 반가운 소식이 있어요.
신영: (그대로)
준하: 신영 씨한테 조카가 생겼어요. 사촌 동생 결혼한 거 몰랐죠?
신영: …….
준하: (신영의 표정을 살피다가) 반가워 할 줄 알았어요. (일어서며) 처음엔 아들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튼튼한 딸이었어요. 엄마 닮아서 그렇다는데 정말이더라고요. 튼튼한 딸.
신영: …….
준하: 오늘은 이만 갈게요. 내일 저녁에 다시 봐요.
나가는 준하.
신영, 나가는 준하를 본다.
씬 40. 교도소입구. 준하의 차. 저녁
지친 듯 운전석에 몸을 기대는 준하.
잠시 교도소 쪽을 향해 숨을 돌리고, 벨트를 맨다.
씬 41. 교도소. 거실. 저녁
점호 직전의 거실 분위기.
재소자들에 섞여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곰곰이 보는 신영, 신영의 시선엔 낡은 화집 한 권이 놓여있다.
씬 42. 태진 그룹. 입구. 낮
입구에서 밖으로 나오는 황변호, 준하를 포함한 변호인 단.
얼굴에 계란 세례를 받는 황변호.
보면, 건물 앞에 모여 시위하는 시위대가 있다. 계속해서 욕설과 함께 계란과 페인트가 담긴 계란을 던지는 시위대.
그들을 피해서 빠른 걸음으로 차로 오는 변호인 단.
황변호, 자신의 차에 오르려다 준하에게 다가오며,
황변: 서준하!
준하: (돌아보는)
황변: (메모지를 건네며) 최 회장 있는 양수리 별장 주소야. 오늘 중으로 찾아가 봐.
준하: 저 오늘 저녁에…….
이미 빠른 걸음으로 차에 오르고 있는 황변.
더위와 피로에 지친 시위대를 보다가 할 수 없이 차에 오르는 준하.
씬 43. 별장 앞. 낮
저택 앞에 차를 세우는 준하.
차에서 내려 들고 있는 메모지와 주소를 확인한다.
위압적으로 달려 있는 대문 위 CCTV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준하.
씬 44. 별장. 낮
정원 한 곳에 놓인 테이블 세트.
경직된 모습으로 어딘가를 의식하는 준하.
보면, 품종 좋은 세퍼트 두 마리와 준하: 사이에 서류 한 장이 떨어져 있다.
서류를 잡으려고 의자에서 아래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준하.
서류에 거의 다가갈 즈음 으르렁대며 다가오는 세퍼트.
준하, 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소리를 낸다.
세퍼트가 주춤하는 사이 서류를 집어 드는 준하.
테이블 세트에 마주 앉은 준하와 60대 중반의 최일만,
최일만: 이제 대충 끝난 건가?
준하: (보다가) 근로자들 임금하고 퇴직금은 어떻게 처리하실…….
최일만: (자르며) 달 보면 짖는 게 개야. 회사 망했다면 임금 달라고 악악대는 게 노존가 뭐 그 치들이고. 부도나서 깡통 찬 처지에 거기까지 어떻게 챙기나. 지금까지 내 덕에 다 밥 먹고 살았으면 된 거지. (다른 톤으로) 아직 서류상으로 기한이 안 된 게 있다면서.
준하: (불쾌한 기분이지만) 청주 땅이 조카 분한테 소유 이전한지 아직 만 일 년이 안 돼서 조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최일만: 그때까지 시간 좀 끌어 줘야지 뭐.
옅은 미소를 띠고 준하를 보는 최일만.
씬 45. 교도소. 거실. 저녁
화집을 뒤적이고 있는 신영.
책갈피에서 나오는 정사각형의 색종이.
교도관이 지나갈 때 마다 그쪽을 의식하는 신영.
씬 46. 준하의 차. 국도. 저녁
주차장처럼 늘어선 차들.
그 가운데 초조하게 핸드폰 액정 시계를 열어 보는 준하.
씬 47. 교도소. 거실. 저녁
점호 시간 부근.
교도관들 복도를 오가며 거실을 점검한다.
종이로 작은 배를 접고 있는 신영.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접던 것을 책갈피에 끼워 넣는다.
그때, 신영의 거실 앞에 서는 교도관.
씬 48. 접견실. 저녁
다소 지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하.
교도2에 의해 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신영.
준하: (교도1에게) 잠깐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죠?
두 사람을 보는 교도관1,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둘만 남겨진 실내.
준하: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신영: …….
준하: 나와 줘서 고마워요. 우리 서있지 말고 앉을까요?
신영: (앉는)
준하: (털썩 앉고 신영을 보다가) 몰랐는데 이마 위쪽으로 상처가 있네요.
신영: ……. 낮에 이모가 다녀가셨어요.
준하: (피식 웃고) 재밌는 분이세요. 이모.
신영: 나 때문에 그렇게 귀찮은 일 겪고 있는 지……. 몰랐어요.
준하: 유일한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신영: 친정 식구 거두면서 가족들한테 내내 눈치보고 사신 분이에요. 더는 귀찮게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준하: (보다가) 그럴게요.
신영: …….
준하: 이제 내 차례죠? (편하게 고쳐 앉으며) 오늘 참 피곤했거든요. 일 얘기하기 싫은데 그냥 좀 앉아있다 갈게요.
신영: …….
준하: 난 한 달이면 보통 재판을 스무 번쯤 해요. 그 스무 번을 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건 아니고 하기 싫은 게 대부분이에요. 아주 하기 싫어 죽겠어요. 처음엔 일하는 거 재밌고 좋아했는데……. 신영 씨 만나고 알았어요. 왜 일하는 게 재미없어 졌는지.
신영: (보면)
준하: 언제부턴가 내가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냥 일하고 있는 건데……. 다들 도와달라고 부탁하니까 우쭐해 져서는……. (신영 보며) 신영 씨가 도와달라고 안 매달려서 고민 좀 했거든요. 바보같이. 정말 바보짓일지도 몰라요. 내가 하는 일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준하, 씁쓸한 웃음을 접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런 준하를 보는 신영.
준하: 목숨이 걸린 사람 앞에서……. 나 너무 한심하죠?
신영: (보는)
노크 소리.
여교1: (E) 점호 시간 다 돼갑니다.
서로를 보는 둘.
준하: (담백하게) 난 신영 씨가 좋아요. 그래서 친해지고 싶고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어요. 진심으로…….
신영: (보는)
준하: 신영씨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시 노크 소리.
준하: (보다가) 갈게요. 갈 시간이 됐나봐요.
법정에서 다시 봐요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하.
준하: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들어준 걸로 답이 된 거 같아요.
보는 신영.
씬 49. 준하의 원룸. 밤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벌렁 눕는 준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보다가 빨래바구니에 농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씬 50. 교도소. 밤
재소자들에 섞여서 잠들지 못하는 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