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방의 추억
2024년 7월 한 달 동안 ‘제19회 평창 이야기 전(展)’이 평창 무의예술관에서 열렸다. 평창미술인협회에서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평창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19명의 작품을 평창군민과 방문객에게 선보인 행사다. 유화, 아크릴화, 수묵화, 문인화, 조소(彫塑) 등의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한 기회였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조소 작품이 있었다. 작품명은 ‘철가방/오브제’(정현교 作)다. 오브제(objet)는 다다이즘(dadaism) 혹은 초현실주의에서 자연물이나 일상에서 쓰는 생활 용품 따위를 원래의 기능이나 있어야 할 장소에서 분리하여 그대로 독립된 작품으로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이른 말이다. 지난 우리 추억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철가방이 세월이 지나면서 미술 작품으로 거듭났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철가방은 1970~80년대 우리 음식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짜장면을 배달하던 가방이다. 짜장면(灼醬麵)은 이름 그대로 볶은(灼) 장(醬)에 면(麵)을 얹어 먹는 중국요리다. 중국어로 ‘zhájiàngmiàn’(쩌장미엔)이 약간의 변형을 거쳐 ‘짜장면’이라 불렀다. 본래는 ‘자장면’이 표준어였으나 2011년 8월 국립국어원에서 짜장면도 널리 사용되어 자장면과 함께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짜장면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1882년 임오년에 군대가 일으킨 변란(壬午軍亂) 전후다. 조선 조정은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용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청나라 군대의 보급을 위하여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인 쿨리(Coolie, 苦力)들이 인천항으로 들어와 인근(현재 차이나타운)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착했다. 이후 1890년대 이들이 산둥성 가정식 작장면을 인천항의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길거리에서 판 칼국수가 짜장면의 시초였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중국인이며 근대 화교(華僑)의 시작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중국 사람이 한국에 들어와 살던 역사는 매우 오래다. 은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중기까지의 고대시기부터 화교역사가 시작되어 조선말기 1882년부터 중화 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인 1949년까지인 근대를 거쳐 1949년 이후 현대에 이른다. 본격적으로 화교가 정착 시기는 근대 초기부터였다.
화교공동체가 자리를 잡아 가자 정식으로 청요리집이 생겼고 서민음식이었던 짜장면은 청요리집의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중국 산동지방 복사지역에서 들어온 수타 기술자가 직접 면을 만들어 짜장면은 수타면으로 바뀌었다. 개항 이전인 인천항 일대의 차이나타운에서 이미 수타 짜장면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 후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짜장면으로 발전하여 1970~80년대에는 짜장면이 기념일에나 먹을 수 있는 특식으로 인기가 좋았다. 어릴 때 여자 아이들은 짜장면 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 될 정도로 짜장면은 이제 우리와 너무 친숙해져서 우리의 전통 음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동네마다 구멍가게처럼 작은 중화요리 식당이 만리장성, 천안문, 길림성, 홍콩반점이란 거대한 이름으로 생겨났다. 이때 짜장면은 굳이 식당에 가지 않고 배달(配達)의 민족답게 배달시켜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방식으로 확대되어 짜장면 보급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보통 한 가족이 내 집에서 짜장면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특별한 혜택처럼 느껴졌다. 전화 한 통에 짜장면과 탕수육까지 주문을 넣은 뒤 기다리는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전화로 언제 오느냐고 물으면 항상 지금 간다고 대답한다. 그 새빨간 거짓말인데도 그 말에 짜장면 먹을 희망이 부푼다. 은빛 찬란한 철가방 아저씨의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이내 철가방 문이 격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다. 귀하게 모시고 온 짜장면은 가방 멘(man)의 빠른 손놀림으로 학수고대(鶴首苦待) 하던 미식가의 입에 사고 없이 배달된다. 짜장면은 근사한 잔칫상의 제물이 되어 굶주린 이들에게 아낌없이 희생한다. 그때부터 철가방은 짜장면과 함께 찾아오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돌아보니 그 가방에는 짜장면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입학, 졸업, 운동회를 격려하고 내 생일을 기념하는 어머니의 아들 사랑, 시험 합격에 축하하는 딸 바보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어릴 적 짜장면 배달해 주신 홍콩반점 철가방 아저씨를 보았다. 흰머리 날리며 여전히 철가방을 들고 분주하게 배달하는 그 어른의 모습에는 장인 정신까지 느껴졌다. 철가방은 사랑이고 우정이며 희망이고 추억이다.
그런 그 철가방이 세월이 지나자 이제는 예술 작품이 되어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귀하신 몸으로 인생 역전을 이루었으니 철가방에 얽히고설킨 추억이 많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감흥을 일으킨다. 배달 아저씨 손에 들려 음식에 기쁨을 담았던 철가방이 노년이 된 그의 손에서는 추억을 날라주었고 작가의 손을 거치자 예술의 세계로 안내한 것이다. 누구의 손에 붙들리는 가에 따라서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신 그 작품에는 유명 브랜드(샤넬) 마크가 박혀 있었다. 이제 감히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귀하신 철가방으로의 신분 격상은 바로 이 마크가 필수였다. 2024년 ‘평창이야기 전(展)’에 전시된 작품 ‘철가방/오브제’를 감상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그냥 짜장면이나 나르던 추억의 철가방 같은 인생도 거장(巨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그의 마크가 몸에 명확하게 새겨 있다면 작품 중의 걸작품으로 거듭난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가 진정 명품 인생이다. 그리스도인인 당신과 내가 그렇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17).
철가방 오브제(objet) - 정현교 作
신속배달 철가방
국민음식 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