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많은 이유 / 정선례
4대가 함께 살면서 세 아이 키우며 농사일에 직장까지 다녔다. 주말에는 축사로 밭으로 종종걸음으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는 나를 보고 남편 지인들은 마누라 잘 얻었다고 한마디씩 하나보다. 그럴때면 남편은 늘 “같이 한 번 살아봐요” 한다. 속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지껏 살면서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달리 나를 못마땅해 한다. 나도 힘들었다. 남편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거기에 술도 한 잔도 안 마신다. 설날 아침에 먹은 마음 동지섣달 그대로여서 매사 자로 잰 듯이 정확한 사람과 사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지 안 살아본 사람은 속 모른다. 더군다나 아침형이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커다란 유리창이 대낮처럼 환하다. 전자파가 우리 몸에 해롭다고 해서 베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충전시켜 놨던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8시다. 옴매! 어짜스까.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주방으로 가서 밥을 앉힌 다음 일복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작은 축사로 갔다. 남편이 큰 축사 일이 덜 끝났는지 이곳에 오지 않아 포장이 아직 안 올라가 있다. 얼른 양쪽의 포장부터 올렸다. 퇴비장 옆에 공터를 이용해서 축사를 지어서 사료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부 수동이다. 25kg 번식우 사료 포대를 배에 바짝 붙이고 두 손으로 감싸안아 들고 구시에 골고루 부었다. 여덟 칸에 새끼 밴 소들이 두세 마리씩 들어있다. 한 칸에는 젖떤 송아지 네 마리가 있는데 육성 사료를 마리당 한 바가지씩 부어주면 나란히 구시에 얼굴을 들이밀고 허겁지겁 먹는다. 원형의 볏짚도 풀어서 낫으로 끌어안아 던져주고 돌아서니 남편이 다가와서 밤새 이상이 없는지 임신우들의 상태를 살핀다.
다행히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늦잠 잔 걸 들키지 않았다. 알고도 모른 척할 수도 있다. 예전, 그러니까 아프기 전 같았으면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한마디 했을 것이 분명하다. 마누라가 아파서 오랫동안 병원에 있는 동안 생각을 많이 했나 보다.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온유해진 걸까? 천성이 게으른 나는 부지런하고 손끝 매운 사람과 사느라고 힘들었다. 도무지 그이의 기준에 못미친다. 우리 부부싸움의 팔 할은 내 잠 때문에 일어난다. 어제저녁만 해도 잠이 오지 않아 양 300마리까지 세었다. 그 뒤로는 까무룩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여름에는 해가 빨리 떠서 내가 이불 속에 있는 시간에 동네 사람들은 벌써 들에 나와서 일을 시작한다. 봄이면 우리 집 뒷산의 취나물이나 고사리도 내 차지가 안 된다.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마을 아짐들은 벌써 한바퀴 휘돌아 우리 집 앞으로 내려가서 개가 짖느라 요란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집 주변에 있는 산나물도 내 차지가 안 되어 보이는 대로 뿌리를 캐와 밭 가에 심었더니 산에서 뜯은 나물과 달리 향이 덜하다.
사람들은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으로 나눠진다.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은 일어나는 시간이 늘 일정하다. 잠자리에 몇 시에 든 것과 별개다. 올빼미형인 나와 달리 같이 사는 사람이 전형적인 아침형이다. 보통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움직인다. 일찍 일어나니까 하루의 시작을 허둥대지 않고 차분하게 한다. 아무리 늦게 자거나 밤중에 송아지 새끼를 받느라 새벽에 잠들어도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고 하니 나로서는 신기하다. 그런 그가 기상 시간이 들쑥날쑥한 나를 이해를 못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를 보면서 아침형과 저녁형은 타고 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녁형이다. 밤만 되면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김치를 담그거나 책을 읽어도 졸리지 않다. 않다. 아무리 밤늦게까지 일해도 힘들지 않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난 그가 밤늦도록 책읽고 있는 내방을 열어보고 전기차단기를 내려버린 적도 있다.
아침에는 일찍 못 일어난다. 학교 다닐 때도 아침밥은 통 못 먹고 다녔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깨워야 겨우 일어나서 허겁지겁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서 학교에 갔다. 회사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입을 옷은 미리 꺼내 소파에 걸쳐두고 가방도 현관에 두고 잔다. 차에서 화장하고 급하게 가느라 복장도 치마보다는 바지를 주로 입었고 굽 높은 구두보다는 신어본 적이 거의 없이 발 편한 단화를 애용했다. 내가 걸음이 빠른 것도 그때부터 경보하듯이 걷는 습관이 들어선다. 마을에서 관광 차를 불러 멀리 여행 갈 때도 알람을 맞춰놓고 남편에게 시간 맞춰 깨워달라고 부탁한다. 늦게 자는 만큼 깊이 자는지 밤새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모른다. 잠 때문에 아침 시간을 바쁘게 보낸다. 늦게 일어난 만큼 낮잠은 거의 자지 않는다.
잠이 많은 이유를 생각해 봤다. 상추에는 수면 성분에 도움 되는 물질이 있다는데 상추를 좋아해서일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집에는 한 겨울 말고는 밭에 늘 상추가 자라고 있다. 시기별로 품종이 달라서 잘 골라 심어야 한다. 쌈을 좋아해서 아침에도 한 바구니의 상추, 쑥갓, 케일 등 쌈 채소가 아침상에도 놓여 있다. 나는 고기를 싫어해서 마늘, 참기름, 참깨 넣어 만든 된장이나 고추장에 먹는다. 남편은 내게 다른 데 가서는 상추쌈 먹지 말라고 이른다. 눈 크게 뜨고 한 번에 대여섯 장씩 입이 터지라 먹어서 보기에 민망하다는 이유에서다. 고기나 회 맛이 나지 않도록 상추를 여러 개 싸서 먹는다. 상추는 냉해에 잘 견디는 채소다. 12월에 노지에 토종 적축면 씨앗 뿌려 놓아도 추운 겨울에 뿌리가 얼어 죽지 않고 있다가 이른 봄에 잎이 활짝 올라와 4월에 먹는다. 3월에 적치마, 아삭이, 꽃상추, 양상추 씨앗을 종류별로 뿌려 5~6월에 먹는다. 장마 지나자마자 여름 상추 씨앗을 뿌리면 9월에 먹을 수 있다. 김장 채소 심는 시기에 뿌린 상추는 품종에 상관없이 심어도 잘 자란다. 나는 항상 씨앗을 배게 뿌려서 어릴 때 솎아 겉절이를 하거나 비빔밥, 막국수에 듬뿍 넣는다.
나주 한방병원 다인실에 입원했을 때 일이다. 마침 세 명이 나이가 비슷하고 장기 환자들이라 재미있게 지냈다. 어느 날 60대 초반의 환자가 들어왔다. 말이 없다. 침대에 걸린 명찰을 보니 병명이 써지지 않아서 물어보니 잠을 못 자서 입원했다고 들릴까 말까 하게 대답했다. 며칠째 잠을 못 자서 기운이 하나도 없나보다. 뒷날 아침에 간호사가 그 환자에게 잠 좀 잤냐고 물으니 뜬 눈으로 날을 샜다고 한다. 우리는 그날부터 낮에라도 좀 주무시라고 호실에서 거의 나와 있었다. 그 뒤로도 도통 잠을 못 잤다. 수면제도 듣지 않는 불면증.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저렇게 못 잘 수가 있을까? 그분은 잠 잘 자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고 했다. 보기에 너무 안타까워서 정말 나눠 줄 수만 있으면 내 잠을 좀 건네주고 싶었다.
첫댓글 엄청 부지런하신 것 같은데. 게으르다는 말은 안 쓰셔도 될 것 같아요. 남편 지인들 말이 맞다고 큰소리 치시고 남편을 세뇌시키세요.
부지런하고 바쁘게 사시니 잠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농촌에 사시는 분들은 초저녁에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는데, 정 선생님은 늦게까지 글 쓰시고 책 읽으시잖아요. 자는 시간만 따지면 비슷할 겁니다.
날마다 하느님께 감사 기도 올려야겠어요. 정 선생님처럼 하루만 살아도 아마 하루종일 잘 것 같아요.
저 어제 시댁와서 잤는데
새벽 밥 먹으니
오전 열 시쯤엔
거의 하루를 다 산 것 같더라고요. 하하.
저녁형 선생님께서
농촌에 사느라 얼마나 애쓰셨을까요.
선생님, 재밌게 읽었습니다.
'선례'라는 이름이 잠이 많을까요?
전형적인 올빼미인 저와 똑같습니다.
농토가 없는 집으로 시집 와서 천만다행이네요. 하하.
그 많은 농사일을 하니 잠이 부족하겠지요.
그러면서도 책과 글쓰기를 놓지 않으니 대단하네요.
저는 시골에서 살았다면 쫓겨났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