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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16
11월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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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솜씨나 인간적인 지혜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활동으로, 종말론적 강화(講話)에 최선을 다합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의 가르침이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무척이나 비장합니다. 마치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강력한 경고와 따뜻한 격려가 교차되고 반복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묵시 문학 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난세(亂世) 문학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현세에서는 강대국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겠지만, 종말, 곧 새로운 세상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문학 사상입니다.
이러한 종말 묵시 문학 사상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도 그대로 유입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 역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묵시 문학 사상을 ‘종말 심판 설교’라는 소재로 인용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건축 중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20년경 건축이 시작되었고, 기원 후 6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당대 이 성전은 얼마나 대단한 건축물이었던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습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외벽은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성소문을 덮고 있던 황금 포도 덩쿨은 장관이었습니다. 성전이 얼마나 수려했던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영광 가득한 예루살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일생에 아무런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을 주는 도시를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했던지 순례객들이 큰 목소리로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즉시 비운의 예언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복음 21장 6절)
예수님은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나 성전을 장식한 휘황찬란한 보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보다는 살아있는 성전, 가슴치고 회개하는 백성, 거룩한 백성에게 더 많은 관심을 지니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종말이 언제? 어떤 표징과 함께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복음 21장 7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곧 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빨리 오는 것도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대신 그날이 다가오면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킬 것인데, 그들에게 속지도 말고, 그들을 따라가지도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당시 성행하여 사회를 긴장시키고 혼란시켰던 거짓 예언자들의 ‘재림 임박 사상’을 경계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제자들은 동족 유다인들과 이교도 당국자들 모두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할 때 사제들과 성전수위대장이 나타나 두 사람을 체포해 투옥시켰습니다. 필리피의 치안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의 옷을 찢고 매질한 후 투옥시켰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그리파 2세 왕의 법정에, 고린토 총독 갈리오의 법정에 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스테파노는 산헤드린 앞에 섰습니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맞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는 것을 더없는 기쁨과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적대자들 앞에 섰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학식으로 따진다면 당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의회 의원들, 노회한 달변가들을 언변으로 눌러버렸습니다.
샛파란 청년 스테파노에 맞서 논쟁을 벌이던 가방끈 긴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언변에 있어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복음 21장 14~15절)
주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솜씨나 인간적인 지혜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위에서 주시는 능력,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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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움 받을 용기는 미워하지 않을 용기에서 나온다>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의 남서쪽에 리틀턴이라는 지역에 있는 콜롬비아인 고등학교에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이 증언한 놀라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 단원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 단원 둘이 총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학생들을 난사하고 있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학생 하나가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하느님 믿어?”
만약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나는 하느님을 믿어.”(Yes, I believe in God).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겨누고는 마구 총을 쏘았습니다.
캐시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 크리스천 십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 주의 한 도시에서는 2천5백 명의 십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이 집회는 마약 속에 찌들어 죽어가던 미국 그리스도인 십대들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목숨이 아깝다고, 미움 받는 것이 두렵다고 믿음을 부인하면 몸은 살아도 영혼은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음과 함께 사라지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미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시는데 이는 비단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을 믿었다가 예루살렘처럼 폐허가 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예루살렘의 그 자랑스럽던 성전은 서기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까지도 재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난해지고 박해받고 미움 받는 죽음이었습니다.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던 그들은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 폐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그런 종말을 맞지 말라고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미움 받을 용기가 없다면 박해를 이겨낼 수 없고 박해를 이겨낼 수 없다면 자신 안의 하느님의 존재를 증언하지 못합니다. 성전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증언하지 못하는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하느님을 모실 수 있고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도 생깁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오히려 관계가 집착이 아니라 더 친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술을 적정선에서 그만 마시겠다고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술을 더 즐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술을 끊을 용기가 없을 때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집착이 되고 중독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진짜 망가지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끊고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더 건전하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요? 미움은 나의 고통의 탓을 상대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의 탓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당신의 탓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 당신 탓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미워할 마음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쳐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할 용기가 있어야 미움 받을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려는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움 받을 용기를 포기하게 되면 정말 미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얻으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 할 줄 알아야합니다.
어떤 신부님이 피정 때 신자들에게 들려준 자신의 체험입니다.
“지난 11월이었습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피정지도 할 때) 미사를 마치고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영감이 왔습니다. 당시 우간다에 있었던 어느 신부님께 전화를 드리라는 아주 엉뚱한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 너무 엉뚱해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영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지요. 제가 전화를 한 그 순간에 신부님은 아주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숲속에서 차가 서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크게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2006년에 강도를 만나 죽을 뻔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당시 4명의 강도가 권총으로 저를 위협했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시동은 걸리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저는 보닛을 열게 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안에 있는 줄이 하나 끊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연결해 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차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차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는 엄청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우간다에 있는 차를 1분 만에 고쳐주었습니다. 저는 차 수리공입니다. 자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행복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출처: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사지 신부, 바오로 딸]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시려고 하는데 내가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도구로 쓰실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었다면 어쩌면 굶어 죽는 사람도 없고 환경이 이처럼 파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유럽에 있는 어떤 아이는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전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마더 데레사와 같은 수녀님을 통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지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미움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의탁해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만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어도 충분히 미움 받을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려면 먼저 미워하지 않으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려야합니다. 남 탓을 하면서 미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용기를 가집시다. 그러면 미움 받을 용기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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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는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 즉 야훼의 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1독서: 말라 3,19-20: 너희에게 승리의 태양이 비쳐오리라
1독서는 ‘주님의 날’에 있을 의인들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 ‘불’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주님의 날’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교만한 자들’은 ‘풀무불처럼 불이 타오르는 날’ 검불처럼 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며, 야훼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빛나는 ‘태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이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날일 것이다. 즉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복음: 루가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날이 올 것이다.”(6절)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절)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하고 떠들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8절)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공부 중요!
그러나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 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13-19절)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제2독서: 2데살 3,7-12: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10절)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들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보다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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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이두매아 출신으로 유다의 임금이 되었던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기원전 20년경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솔로몬 성전을 능가할 계획으로 성전이 산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성전 지대를 건설하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는데, 그 성전 지대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죽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예수님 시대를 지나 기원후 64년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보았던 성전도 여전히 증축 중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원후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은 티토가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는 제1독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건을 전후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대립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도 좀 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 복음서 마지막에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고 권고하셨습니다. 박해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시련이니, 그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로 삼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늘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 때와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언제나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가끔씩 종말을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종말을 잘못 이해하여 불안에 떨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호도하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교리가 넘쳐 나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종말을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우리에게 파멸이 아닌, 구원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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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여기서 사람들이 성전을 보면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성전이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감탄했다는 뜻입니다.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웅장했다고 전해집니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고 웅장하더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라는 말씀은 ‘완전한 파괴’를 뜻합니다.
종말 후의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완전히 새롭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는데, 적어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문명과 문화 등은, 그게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하나의 본보기가 됩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성전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건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는 질문이지만, 뜻으로는 “종말이 언제 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는 일을 ‘종말의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종말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관한 질문은, 이미 앞의 17장 20절에서 나왔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이 말씀의 뜻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또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종말의 날은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마르 13,32) 또 그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시지 않는다는 말과 그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어떤 표징을 보게 되면 그 날이 곧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흔히 ‘종말의 징조’ 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즉 가짜 그리스도,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 등을 언급하시면서(8절-17절), 그런 일들이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표징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 날이 마지막 날은 아니다.”, 또는 “그런 일이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표징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재림 예수’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날짜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옛날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또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칭 재림 예수’들과 종말의 날짜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경우, 종말처럼 생각되는 대규모의 참혹한 전쟁들은 인류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이 전쟁의 모습으로 닥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전쟁이 혹시 종말의 재난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말의 재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은 누구나 그것이 종말의 재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긴가민가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것은 종말의 재난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종말이 완성되기 전이나, 완성되는 그 날에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또는 일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쟁 자체가 종말의 표징은 아니지만, 신앙과 사랑을 증명하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심판 때에 어떤 선고를 받게 될지를 알게 해 주는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참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과 일으키는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과 평화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 그 날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즉 언제 그 날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예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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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새로 태어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언제인지, 또 종말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은 두렵고 무섭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나 전염병,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이 종말을 설명하는 주된 내용입니다. 종말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종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현재의 세상을 고치거나 리모델링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끝을 말하지만 새로운 것, 새로운 세상이 태동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종말의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생명의 탄생을, 여자의 출산을 염두에 둡니다.
어머니는 새 생명을 낳기 위해 진통의 시간을 겪습니다. 그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이 세상에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 자연의 현상은 성경에서 종말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 전에 어머니의 진통과 같은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그렇기에 종말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때로 생각합니다. 전쟁이나 전염병의 고통, 박해의 고난, 하늘의 표징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갈등이나 분열. 이런 모든 것은 진통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이 진통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은 새롭게 되고 새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모든 어머니들이 고통의 시간을 넘어 새 생명의 탄생에 기뻐하는 것처럼 종말 역시 고통을 넘어서는,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연중시기가 끝나가는 이 때에 우리가 듣는 종말에 관한 말씀은 새로 태어나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종말은 미래의 일이지만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신앙인은 종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늘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끝을 넘어 새로운 세상이 있는 것처럼, 죽음을 넘어 생명이 있는 것처럼, 새롭게 주어질 생명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희망은 우리의 믿음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신 것을 믿는 이들에게 종말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종말과 함께 희망을 약속합니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희망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그리고 그때에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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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장병욱 베네딕토 신부님]
<‘차라리’와 ‘그래도’>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여러 재앙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시작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살다 보면 누구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달자 시인의 글을 옮겨 적어 봅니다.
신달자 시인은 대화중에 수차례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차라리 헤어지고 말지!” “차라리 죽고 말지!” 하면서 삶의 한 부분 부분마다 ‘차라리’라고 말하는 이의 얘기를 들으며 한 때 자신도 차라리’를 연발 하며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인은 ‘차라리’ 하고 부정하기 다 ‘그래도’ 하면서 희망을 찾았던 것은 기도의 힘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 라는 섬에 살고 싶다”는 시를 적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 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이 끝장날 것만 같은 시기를 겪더라도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인내는 가끔 시련을 동반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십니다. 신달자 시인도 ‘차라리’가 아니라 ‘그래도’는 언제나 자신에게 희망의 공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 첫 머리에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 9,19) 하시면서 주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의 불안한 삶 안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라키 예언자도 유다인들이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기쁨과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또 다시 절망에 빠져 들자 ‘주님께 대한 신뢰를 가져라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차라리’가 아니라 ‘그래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 희망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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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제성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스포일러(spoiler)>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임사체험자(근사체험자)라고 한다. 임사체험자란 심장과 뇌가 그 기능을 멈추어 의학적 죽음을 겪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다시 살아나 죽음 이후를 체험하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각 학계와 개인별로 이 현상의 원인이나 진위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이유는 어찌 되었든 확실해 보이는 것은 그 체험을 한 사람들의 삶은 그전과는 다른 삶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 임사체험자들은 죽음 안에서 빛, 따스함, 사랑 등등 긍정적인 체험을 했다고 증언한다. 이 긍정적인 죽음 체험은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그로 인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게 해 준다고 한다.
이 체험으로 인해 이들은 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이며 삶의 순간순간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간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례로 이 체험을 통하여 타인에게 공격적이였던 사람도 헌신적인 삶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지막 즉, 죽음을 인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들의 증언은 필요 없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전례력으로 한해의 마지막이 되면 독서와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우리 신앙 안에서 세상의 종말은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희망을 의미한다.
종말이 희망을 의미한다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함으로써 삶의 중요성과 삶의 순간을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종말을 인지하는 것은 마지막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물처럼 와있음을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의 마지막의 내용을 이미 알고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마지막은 해피엔딩임을 미리 알고 있다.
미리 그 결과를 알기에 우리는 주인공이 어떤 죽을 만한 위험한 상황이나 많은 시련을 겪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잘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것을 알고 있기에 주인공의 위기를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서와 예수님의 세상 마지막에 관한 증언은 그 어떤 무서운 징조와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해도 믿고 견디어 내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그곳에서 함께 하는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즉,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 삶과 세상의 마지막이 해피엔딩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어떠한 어려움도 믿음 안에서는 고통과 괴로움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희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세상 종말에 관한 내용이 상징적인 언어들로 쓰여 진 성서를 묵시문학이라 칭하고 이 묵시문학을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희망의 책’이라 요약하여 표현한다. 아마 성서와 예수님은 좋은 의미로서 인류 최고의 스포일러(spoiler)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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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볼 수 있지>
루카 21,5-19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볼 수 있지>
누가 짓밟히는지
누가 짓밟는지
왜 짓밟히는지
왜 짓밟는지
누가 버림받는지
누가 버리는지
왜 버림받는지
왜 버리는지
누가 죽임 당하는지
누가 죽이는지
왜 죽임 당하는지
왜 죽이는지
사람을 보아야
세상을 볼 수 있지
살만한 세상인지
살 수 없는 세상인지
산 세상인지
죽은 세상인지
살리는 세상인지
죽이는 세상인지
세상을 보아야
길을 볼 수 있지
살림으로써 살 것인지
죽임으로써 죽을 것인지
살리기 위해서 죽을 것인지
살기 위해서 죽일 것인지
내가 걷는 길을 보아야
나의 끝을 미리 볼 수 있지
영원히 살 것인지
영원히 죽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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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고운님들이 참 좋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난 선교사에게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힘들게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가려면 큰 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강물이 너무 세게 흐릅니다. 사람이 떠밀려 내려갈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는 두려웠습니다. 그때 마을 어른이 선교사의 몸에 묵직한 돌을 매달아 주었습니다. 선교사가 불평합니다. 지금 걷기도 힘들고, 또 저 강을 건너가기도 힘든데 도대체 왜, 이 무거운 돌을 다리에 매달아 주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 어른은 그냥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장을 서십니다.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달고 강물에 발을 넣고 한 발을 떼자마자 그 무거운 돌을 다리에 매단 이유를 알았습니다.
“물살이 너무 세게 흐르기 때문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놓으니까 중심을 잡고, 떠밀려 내려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만일 무거운 돌을 매달지 않았으면, 거센 물살에 몸이 떠내려갔을 것입니다.”
고운님들도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많고, 시련과 고통, 특히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상,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이들이 좋게 선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거운 돌 때문에, 내가 주님을 더 찾게 되고, 내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내가 주님께 더 기도하게 되어 고운님들의 삶을 더 충만한 은총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때 유다인들은 조금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미친 소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성전을 모독하였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쳐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약 37년 후에 성전이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때 성전을 꾸몄던 금들이 녹아내리자 녹아내린 금을 찾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성전의 돌들을 다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대로 하나도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더라도 그래서 시련과 고통이 오더라도 전혀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켜나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8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 두레박과 고운님들이 믿는 하느님은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가끔 믿지 않는 친구들이 사제로 살아가는 저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요?”
그 믿지 않는 친구들이 저를 바라볼 때 힘들게 보이는가? 봅니다. 그때마다 제가 그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 눈에는 내가 힘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예수님이 참 좋다.”
그러면 친구들이 “아주 완벽히 미쳤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꼭 이런 말을 합니다. “부럽다. 기도 부탁한다.”
실제로 친구들 몇 명이 천주교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냉담한 친구도 있지만요. 그래서 저를 만나면 고해 성사보고 냉담도 풀고 나서 술 한 잔합니다.
“처음엔 미쳤다고 했지만, 나중엔 그 친구가 세례를 받고 나서 그럽니다.
“내 친구가 사제여서 참 좋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지금 시련과 고통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고운님들의 열정적인 기도를 통해 믿음을 금보다 더 빛나고 귀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께서 고운님들을,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들을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더 행복하게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저 두레박은 고운님들에게 큰소리로 외쳐봅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고운님들이어서 참 좋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거친 물살에서 보호받기 위해 매달린 돌이 생명을 지키듯, 고운님들이 지금 달고 있는 모든 짐의 그 무게만큼 큰 은총으로 변화시켜 치유와 회복으로 열매를 맺어 주시는 주님의 응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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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8)
♧♧ 시편 61편 4절…
"당신께서는 저의 피신처, 원수 앞에서 굳건한 탑이 되셨습니다."
* 당신께서는 저의 피신처...
‘피신처’란 어떠한 원수의 위협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그러한 피신처에 비유한 다윗의 고백은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 충실한 이들도 비록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적에는 완전히 희망이 끊어진 때에라도 지난날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체험한 하느님의 도우심을 기억한다면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굳건한 탑...
‘피신처’가 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도피처를 가리키는 반면, ‘굳건한 탑’은 요새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굳건한 탑은 주님께 충실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 시편 61편 5절…
"저는 당신의 천막 안에 길이 머물고 당신의 날개 그늘에 피신하고 싶습니다. 셀라."
* 저는 당신의 천막 안에 길이 머물고...
‘당신의 천막...’은 일반적으로 ‘성막’ ‘장막’ 즉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상징하는 처소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안전을 상징합니다. 즉 다윗은 오로지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함으로 안전을 강구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당신의 날개 그늘에 피신하고 싶습니다...
맹수의 위협이 있을 경우, 어미닭이 병아리를 그 날개 밑에 감추어 보호하듯이(신명기 32장 11절. 마태오복음 23장 37절.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같이 지켜 살피시며 날개 아래 품듯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시편 36편 8절, 57편 2절, 63편 8절. 참조) 여기서 ‘당신의 날개...’는 주님의 무조건적 은총과 온유하심을 상징합니다. 즉 다윗은 극심한 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음성을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 시편 61편 6절…
"하느님, 당신께서 저의 서원들을 들으시어 당신 이름 경외하는 이들의 재산을 제게 주셨습니다."
* 저의 서원들을 들으시어...
이는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다윗 자신의 모든 서원들을 들어주셨다는 말임과 동시에 그러기에 이제 또 다른 서원을 할 수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서원’이란 하느님을 위한 자발적인 헌신의 맹세로서 서원하는 이의 신앙의 열정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 서원을 맹세하고 있는 (6, 8, 9절) 시편 61편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다윗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 당신 이름 경외하는 이들의 재산을 제게 주셨습니다...
‘당신 이름 경외하는 이’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재산’이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그 땅에 대한 통치권을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대리 통치자입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 자신이 압살롬에게 반역 당해 왕궁을 떠나 피신해 있는 상태이지만, 하느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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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군가가 다시 20살의 ‘나’로 되돌려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역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할까를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20살에 뭐 하고 살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를 떠올리면 제대로 못살았습니다. 기도에 충실하지 못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부족함이 가득했던 시간이었지요.
그렇다면 다시 20살로 되돌아가면 지금 더 멋진 신부가 되어있을까요? 부족함의 시간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때보다 더 나은 ‘나’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친구 한 명이 요즘 너무 어렵다고 해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소위 잘 나갔던 친구였습니다.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하는 일마다 잘 되던 친구였지요.
이 친구가 근래에 커다란 실패를 겪게 된 것입니다. 신용도 떨어진 상태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서 울먹이더군요. 이제까지 실패가 전혀 없었기에 지금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볼 때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를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러한 실패나 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20세로 다시 돌아가서 실패나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좋은 길이 아닙니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때의 표징은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이 넘칠 때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가 나타나서 혼란을 가중한다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노아의 대홍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역사를 보면 계속된 적들의 침략과 점령으로 인해 유배 생활까지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현재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절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절망의 메시지만이 아닌 희망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세상의 멸망이 가까워진 만큼 구원자의 나라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실패나 커다란 실수를 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좌절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주님의 일을 실천하는 삶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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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실천}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책을 여러 권 출판해서인지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이런 질문에 무리 없는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송나라의 구양수 선생님의 말씀으로 글쓰기의 황금률로 자주 인용되는 ‘다문다독다상량(多聞多讀多商量)’입니다. 즉, 많이 듣고, 많이 읽으며, 많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말은 참 쉽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식사 거르지 마시고, 술담배 끊이시고, 열심히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정말로 이것밖에 없습니다.
글 잘 쓰는 비결이 담겨 있다는 책을 읽어봐도 결국은 ‘다문다독다상량’입니다. 정답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실천이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역시 정답은 뻔합니다. 하느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답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문제는 실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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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0년 전에 이민 오신 분들과 식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미국은 동경과 꿈의 나라였다고 합니다. 꿈은 이루어졌고, 40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미국은 동경과 꿈의 나라였지만, 부단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언어를 배워야 했고, 새벽부터 일하셨다고 합니다. 배우자는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미국 땅에 묻혔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40년의 삶이 절대 쉽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막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한 저에게 따뜻한 밥을 사 주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제게 앞으로 몇 년이나 있을지 물었습니다. 5년 정도 있을 예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힘든데 5년씩이나 있으려고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웃으면서 ‘힘든 일 다른 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제게는 40년 전에 이곳에 오셨던 분처럼 미국이 동경과 꿈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비교해서 한국에서의 삶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면서 문득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을 가지면 가시방석과 같은 자리도 꽃자리로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마음을 가지면 꽃자리도 가시방석으로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 멀쩡하던 차가 엔진오일이 새고, 배터리도 갈아야 했고, 수리 비용이 눈물 날 정도로 나왔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마음이 생기니,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생기는지 속이 상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미국 땅에서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 큰 사고를 미리 예방했다고 생각하니 비용도 그리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꽃자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늘 꽃자리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본인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때로 시련과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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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교회 전례(典禮) 주년(週年)은 대림(待臨)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王)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전례 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언어를 빌려옵니다. 묵시문학은 후기 유대교가 세상 종말에 대해 상상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시대 유대인들은 그 문서를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 종말을 말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재난(災難)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후기유대교 묵시문학은 상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합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날과 때”(마르 13, 32)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아가 기원후 66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후, 곧 기원 후 70년에 유대아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로마군대는 유대민족의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유대교묵시문학이 말하던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도 먹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이웃이 불행하면 도와주고, 이웃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실세들과 갈등을 겪고, 당신의 죽음이 다가 올 때도 당신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죽음의 휘장을 넘어 하느님이 예수님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아래에 밟힙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계절입니다. 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사생결단(死生決斷)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1) 하느님이 동기(動機)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한 우리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해주면서 하늘 저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 되도록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신앙은 권합니다.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헌신(獻身)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도 모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이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분이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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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난중에도 품위있고 아름다운 성인답게 삽시다>
-믿음, 희망, 사랑-
오늘은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연중 제33주일이자,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하느님이, 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공평하게 백성들을 다스리시러 주께서 오시리라.”(시편98,9).
교황님의 담화문을 A4용지 10포인트로 출력해 보니 무려 6쪽의 장문이었습니다. 교황님을 통한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정독하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담화문중 시편 구절을 주제로 한 첫 말마디와 이에 대한 설명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9,19).
이 시편 말씀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시의적절합니다. 신앙이 특히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불의와 고통과 불안한 삶 앞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이 말씀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가 성인입니다. 참으로 가난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아름답게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저는 이런 이들을 주변에서 자주 만날 때 마다 참 반갑고 기뻐하며 고마워합니다.
연중시기 마지막에 접어 드는 연중 제33주일 말씀 주제도 온통 세상 종말에 관한 어둡고 무섭고 두려운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을 전혀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가난중에도 깨어 품위있고 아름답게, 성인답게 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전 가난하나 착하게 살아가는 제자에게 성탄 츄리를 선물 받았고, 어제 역시 가난하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형제에게 성탄 선물로 예수님께서 활짝 웃는 초상화 그림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여 예수님 성탄의 희망과 기쁨을 앞당겨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잃으며 괴물이 된다!”
“중심을 잃으면 괴물이 된다!”
희망을 잃고,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중심을 잡고 희망을 살아야 할 곳은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궁극의 희망이자 중심은 두 말할 것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어떻게 가난중에도, 시련과 고통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아름답게,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겠는지요.
첫째,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무신불립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에 믿음의 뿌리 깊이 내린 사람들은 결코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고 약하기에 불안과 두려움에 포류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거창한 믿음이 아닙니다. 각자 주어진 삶의 제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하면서 묵묵히, 항구히, 한결같이 살아가는 여여如如한 정주의 삶이 참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믿음입니다. 바로 제2독서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이 좋은 모범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 낮으로 일하였습니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믿음의 진정성은 주어진 섬김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질서있는 삶을 통해 입증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 무질서한 삶입니다. 무질서하게 살 때 ‘무기력의 늪’에 빠지고 몸과 마음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우리 모두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제 삶의 자리에서 꿋꿋한 믿음으로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정주할 때 하느님 친히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둘째, ‘희망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정주의 믿음생활에 충실할 때 떠오르는 희망의 빛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희망을 숨쉬며, 하느님을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 절망의 자리 거기가 지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누구나 거칠고 사나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의 사람들은 결코 화려한 외관에 현혹되지 않고 고난의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희망의 눈을 지닌 이들은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넘어 본질을 직시하고 통찰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성전의 아름다운 돌과 자원예물에 경탄하는 제자들의 피상적 모습에서 이들의 희망이 얼마나 박약한지 깨닫습니다. 이들을 일깨우는 주님이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보이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무시무시한 종말의 전조들로 가득합니다. 참 다양한 재난의 시작입니다. 전쟁, 반란, 큰 지진, 기근, 전염병,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 박해, 분열, 배신, 순교 등 끝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종말의 전조는 새삼스런 것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봐도 국내외할 것 없이 차고 넘치는 불편하고 불길한 사건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새삼 이런 두렵고 불안한 현실의 와중에서도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무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 주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지요.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주님께 희망을 둔 이들은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약속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인내의 믿음이요 생명의 선물입니다. 엊저녁, 또 아침 성무일도 후렴도 이를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으리라.”
희망의 힘, 믿음의 힘이 참고 견딜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때 영적 승리의 삶이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셋째,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랑의 인생 여정입니다. 더불어 안에 홀로입니다. 연대와 친교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이요 괴물로 만듭니다. 사랑으로 이어져 연결되면 살고 미움으로 끊어져 단절되면 죽습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이시오, 함께 하는 공동체의 도반들입니다. 주님은 물론 차별없이 인생 여정의 동료들을,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병들고 약할 때, 특히 죽음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우리의 가난입니다. 참으로 이런 본질적인 가난을 깨달은 이들은 더욱 주님을 이웃을, 특히 가난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이들이 바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 교만과 탐욕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 없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라기 예언자는 참으로 실감있게 묘사합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참으로 단호한 심판이요 하느님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악을 저지름으로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느님과 가난한 이웃을 사랑했던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실현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리라.”
바로 이것이 우리 사랑의 열매이자 궁극의 희망입니다.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구입니다. 담화문중 감동적이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때때로, 아주 사소한 것이 희망을 되 살릴 수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 미소짓고 경청하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외로운 사람들이며,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가난한 이들은 모두 친절한 말 한마디를 기대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담화문처럼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가난에 대한 감동적이 글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친절한 사랑을 나누는 이도 아름다운 성인이고, 가난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도 아름다운 성인입니다. 이런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은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세상 종말의 험한 일들이 벌어져도 절대로 이런 의로운 이들은 하느님 친히 보호해주기고 인도해 주시기에 안전합니다.
누가 성인입니까?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신망애의 사람입니다. 날마다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고,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망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망애의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시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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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연중 시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즈음에 미사의 말씀들은 줄곧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종말을 떠올려 줍니다. 그리고 "그날"의 성패는 일상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오늘의 말씀들이 거듭 일깨우고 있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몇몇 사람이 하느님 현존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자부심인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이처럼 이르십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들이 쌓고 꾸미고 치장한 결과물이 무참히 허물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실제로 이루어지지요.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그들이 우리도 궁금해 할 내용의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거짓 메시아의 출몰,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 들에 대해 미리 예고하십니다. 여기까지 보면 꽤나 두렵고 험한 재앙들이긴 하지만 인류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닥칠 일이라 각 개인으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떻게든 비켜 갈 요행이 내 것이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없지 않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실 "이 모든 일에 앞서"(루카 21,12) 박해와 신문, 미움과 죽음까지 겪으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믿고 가깝게 지낸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등돌림 당하고 죽게 되다니 천재지변이나 전쟁 예고보다 더 가슴이 서늘해질 것 같습니다. 이제야 실감이 나지요.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대응책은 참 단순합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말씀에 가깝지요. 뭔가 더 특별하고 확실한 방법을 콕 집어주셔야 할 것 같은데 그저 흔하디 흔한 "인내"라니요.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편에서 인내 밖에 달리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꾸준히 주어진 일상을 채워나가며 십자가와 고통을 받아들이다보면, 박해도 증언의 기회가 되고 지혜와 언변도 주어질 겁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다가오는 그날"(말라 3,19)에 대해 선언합니다. 불붙는 날이 거만한 자와 악을 저지르는 자를 불살라서 뿌리조차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작스럽게 생겼다 사라지는 일회성 감정이 아닙니다. 경외는 지혜의 산물이며 그분을 알아모시는 항구하고 충실한 관계성의 열매지요. 악행을 거듭할수록 악에 무뎌져 더 큰 죄를 쌓아 가듯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쌓이고 쌓여 덕인 줄도 모르게 그의 인성이 되고 영성이 되어 갑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형제들을 위해 자기들이 보여준 모범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이 특별할 것 없는 권고는 사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간이 됩니다. 각자 받은 고유한 은사에 따라 소박하고 충실하게 개인의 소명을 채워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일상을 꽉꽉, 충실히 채워갈 때 헛된 허세나 기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할 것 없는 "지금 여기 오늘"에서 보물을 길어올리는 이들입니다.
종말이 언제 올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그날"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 급습하리라는 것만 말씀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지요. 지상에서 허락받은 삶을 나름 채워가던 모습 그대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또 그 모습에 맞갖는 보상이 주어질 겁니다.
그렇다면 종말을 기준으로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충실히 하느님을 경외하며 감사와 사랑과 정의와 자비로 영혼을 채운 이들은 그 모습대로 주님을 맞이해 일치를 이루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겠지요. 회개를 미루고 탐욕과 욕정과 이기심을 채우느라 급급하던 이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셔도 만족을 모르고, 더 채우고 더 쌓고 더 즐기려 승냥이처럼 헤매겠지요. 다른 게 아니라 그것이 곧 징벌일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영성체송).
"그날"이 오기 전에도, 또 "그날"이 온 뒤에도 이 고백이 일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지금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합니까? 십자가와 고통을 껴안은 채로 하느님 때문에 행복합니까? 그럼 "그날"은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날이 아니라, 이제껏 간직하고 누린 그 행복이 영원으로 연장되는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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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한 발치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J.H 뉴먼이 지은 시 인도하소서를 보면,
인도하소서 부드러운 빛이여
사방은 어두움에 잠기오니
그대 나를 인도하소서.
내 발을 지켜주소서.
먼 경치를 보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오니
한 발치만 한 발치만 밝혀주시면 족하나이다.
인도하소서 부드러운 빛이여!
뉴먼의 이 시는
가난한 이의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지탱할 양식을 청하고 인내하며
지금 앞의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청합니다.
미리 앞당겨 염려하다 심신을 해치거나
너무 욕심내고 살다보면 눈 앞의 돌뿌리에 꽈당!!
오늘 감당할 만큼만 하며 산다면 온 우주를 품는
사랑의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꼭 구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 품을 수 없으니,
내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나누고 살아간다면
나의 소리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 발치만 밝혀주시면 족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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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8)
받아들임의
여정이 인내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길이
바로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참고 견디는
인내입니다.
모든 생애에
필요한 십자가의
인내입니다.
인내로써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인내로써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
가까워지게 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참고 견딜수록
더 단단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무너짐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용기입니다.
생명을 얻는
예수님의 이름이
인내의 이름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인내의 자녀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고 견디는
우리가 인내의
신앙인입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은총의
주일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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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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