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기와 넣기 / 김 근 우
붓을 잡을 때 손에 힘주지 마라. 위에서 잡아당기면 빠질 정도여야 한다. 초등학교 때 습자 선생님은 누누이 일렀다. 책받침을 받쳐야 할 만큼 연필을 야무지게 잡고 글씨를 쓰던 시기였다. 아리송했던 그 가르침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결혼하기 전에 잠깐 서예 공부를 했을 때다. 가로세로 줄긋기 연습이 끝나갈 무렵 서예 선생님은 붓글씨는 손으로 쓰는 게 아니고 어깨의 힘으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손은 붓과 어깨를 이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어서 힘을 줄 필요가 없다. 손에서 힘을 빼고 부드럽게 잡으면 어깨에 힘이 더 집중되어 붓을 꼿꼿하게 지탱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생소했다. 눈과 손에 닿는 감각에 익숙한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이 이해되지 않았다. 힘을 빼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붓을 쥔 손은 몸살이 심했다. 팔을 직각으로 들고 글씨를 써야 하는데, 붓을 잡은 손에만 힘이 들어가 획은 마냥 꿈틀거렸다. 글자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잘못 들어간 힘이 차고 넘쳐서 오는 아픔이 무수히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깨 힘을 키울 생각보다 흔들리는 붓을 따라 마음이 휘청거려 흐지부지 글씨 공부를 접고 말았다.
두 해마다 한 번씩 ‘국가건강검진 대상자’라는 안내문을 받는다. 일찌감치 통지받아 놓건만 삼백예순 날 중 하루라는 넉넉함의 빌미를 잡고 게으름을 피운다. 일 년을 미루다 받는 검진은 순번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몸살이 나도록 견뎌야 했다. 그런 중에도 지난번 국가건강검진 덕분에 유방암 초기 단계인 상피내암종을 발견해 수술했다. 협력 치료하는 과정에서 난소에 생긴 물혹을 일찌감치 제거하는 혜택까지 받을 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이번에는 검진 예약을 서둘렀다. 예약 안내자는 수면내시경이 아닌 일반내시경 검진을 권했다. 65세 이상은 깨어나는 데 자칫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서 정해진 병원의 방침이라고 했다. 정이나 수면 검진을 받고 싶으면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젊어서 두어 번 일반내시경으로 하다가 고통을 참기 어려워 수면 상태에서 검진받아 오던 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병원으로 가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일반내시경으로 예약하고 말았다. 검진을 기다리는 한 달여 동안 목에 삽입될 내시경 관이 떠오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목을 감싸곤 했다.
연말의 북새통 검진에 비하면 병원은 한산했다. 검사가 하나 끝나고 이동할 때마다 친절한 안내자가 아래위층으로 함께 다녔다. 일반내시경으로 검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안내자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등을 감싸 주고는 검사실 문을 열어주었다. 겁먹은 얼굴로 검사대에 누운 내게 간호사가 마우스피스를 물렸다.
“목에 힘주지 마세요. 침도 삼키지 마세요. 그래야 쉽습니다.”
몇 숨 뒤 의사가 마우스피스 구멍으로 내시경을 밀어 넣으며 목에서 힘을 빼라고 다시 주문했지만, 묵직한이물감에꼴깍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힘이 들어간 목 근육은 삽입되는 관을 세게 움켜잡았다. 붙잡힌 내시경이 울컥 속을 뒤집는 순간 목에서 힘을 빼라는 그들의 말을 감각으로 이해했다.
지시대로 목에서 힘을 뺐다. 혀는 허공에 방치했다. 물론 침도 삼키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손끝 발끝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자 목 안의 세포들은 침묵하고 호흡이 편해졌다. 헛구역질도더는 하지 않았다. 내시경이 뱃속을 돌아다니는 뻐근한 느낌은 생생했어도 고통은 견딜 만했다. 혹여나 안심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지 몰라 유연해진 목을 지켜보는 마음에 잔뜩 힘을 실어 주의를 기울였다.
속을 돌아다니는 내시경의 말을 검사실 모니터가 숨 가쁘게 전한다. 기계가 아무리 번쩍대도 나는 멀뚱히 바라볼 뿐 이해하지 못한다. 보고 있으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벌레 한 마리 잡초 한 포기에도 나름 살아가는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그 뜻을 읽어 내지 못하다가 오늘은 용케 알아들었다. 마주하는 것의 저항이 심할 때는 마음을 곧추세워 움켜잡지 마라. 다잡은 힘을 빼고 흘러가는 순리를 봐라. 들리지 않던 세상의 귓속말 중 하나를 챙겼으니 신나는 날이다.
한 달 넘게 위내시경 검진을 생각하며 조바심했다. 다행히 ‘불필요한 힘을 빼고 필요한 곳에 힘을 넣는 법’을 터득해 가볍게 넘어섰다. 간혹 헛된 생각에 힘을 쓰다가 허방을 디디는 고역을 치르기도 하지만, 힘을 빼라는 의료진의 설명을 해득한 오늘 같은 날은 쾌재를 부른다. 손에서 힘을 빼고 어깨 힘으로 붓을 지탱해야 획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서예 선생님의 이야기가 새삼 마음에 닿는다. 걸음은 붓끝이 해도 행보를 지지해 주는 힘은 어깨에 있다는 말과 목에서 힘을 빼고 지켜보는 마음에 힘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 등호가 생긴다.
이런 이치가 세상을 바로 읽는 철자법이 될까 싶어 마음에 담는다. 그런데 마음 주머니에 구멍이 났는지 지나고 보면 언제나 빈털터리다. 오늘 이해한 말도 오래전 서예 선생님 말씀도 내일이면 어딘가에 흘리고 말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주워 담은 기쁨으로 하루를 채운다. 신발장 한쪽에 천덕구니가 되어 있던 상자를 열어본다. 용이 누르고 있는 벼루와 붓 몇 자루, 인장, 침봉, 연적 등이 막힌 숨을 토하듯 묵은 먼지를 날린다. 용을 닦으며 마음에 하얀 화선지 한 장 펼쳐 놓는다.
어제는 두려웠던 내시경 검사가 오늘은 내심 기다려진다. 놀라운 일이다. 마음이 누군가는 가슴에 있다 하고, 어떤 이는 머리에 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따뜻한 무엇이 그득해 힘이 나다가도 못된 생각이 삐죽하게 솟아나면 마음에 찬 기운이 휘도는 날도 있다. 다섯 자 남짓 내 안 어딘가로 마음이 들고난다는 것을 느낀다.
사랑 미움 행복 불행, 그리고 고달픔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안을 드나들며 엉긴 글거리가 쏟아지려나. 비를 쏟아낸 구름 사이로 내려앉은 햇살 위에 반짝생각비가 얼비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쓴지 벌써 두 해가 훌쩍 지나 다시 건강 검진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늦장 부리지 말고 빨리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도 건강 잘 지키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