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형익은 인조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이형익은 인조의 심리치료사였다. 심리적 안정을 찾게해준 이 형익은 인조로부터 대단한 특혜를 받았다. 인조를 움직여 현령을 제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와 자식까지도 음직을 차지하게 했다. 이렇게 인조가 이형익을 무한신뢰한 이유는 번침을 놔주고, 심리적 안정을 주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이형익과 인조를 연결시켜주는 고리를 사관이 지적하고 있어 주목된다.
'형익은 침술로 상께 총애를 얻었다. 일찍이 병을 치료할 일로 조소용의 어미집에 왕래했는데, 이로 인하여 추잡한 소문이 있었다'...인조실록 23년 1월 4일
조소용은 인조의 후궁이다. 조소용은 투기가 심한 모사꾼이었다. 조소용은 소현세자빈 강씨와 불화가 많았다. 이간질에 능통한 조소용은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멀어지게 했고, 심지어 장렬왕후와도 별거를 시켰다.
조소용은 밤낮으로 인조에게 세자내외의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참소했다. 세자빈 강씨가 대역부도했고 저주를 했다는 무함이었다. 그러잖아도 소현세자에게 불만이 많았던 인조는 조소용의 말을 듣자 소현세자를 더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소현세자가 죽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연루된 인물이 이형익이었다.
1645년(인조 23) 4월 22일 어의 박군이 세자를 학질로 진찰했다. 그러자 약방이 이형익에게 침을 놓아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인조에게 청했다. 24일과 25일에 연이어 침을 맞은 세자는 갑자기 창경궁 환경당에서 숨졌다. 왕세자가 죽었으니 당연히 시술했던 의관들은 국문을 당해야 했다. 양사가 이형익과 의관들을 잡아다 국문하자고 청했지만 인조는 냉랭했다. 귀한 세자를 잃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을 통해 시신의 처참한 모습이 세상에 전해졌다. 세자는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형익이 인조에게 총애를 받는 의관이자 조소용에게 지원을 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큰 의문을 갖게 한다...
시골의원이었던 이형익은 인조에게 번침을 놓아준 이후로 어의까지 승승장구했다. 그가 정말 번침을 통해 저주로 생긴 사기를 다스렸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1649년. 5월 8일 인조가 세상을 뜰 때 이형익은 어의였다. 치료를 못하고 임금을 죽게했으니 사형을 당하는 것이 마땅했다. 더욱이 인조가 위독한 날에 이형익은 모든 의원을 배척하고 여러 혈에 함부로 침을 놓았던 것이다...
사람들 모두 이형익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효종은 선조의 뜻을 참작하여 이형익을 유배형으로 처벌했다. 1년 후 왕대비의 증세가 위급해지자 효종은 이형익을 특별히 석방시켰다. 이래저래 이형익은 운이 참 좋은 사람이었다...164 - 169쪽
조선궁궐 저주사건, 유승훈, 2016년,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