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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임보신(任輔臣) 찬(撰)
○ 이음애(李陰崖 이자(李耔))의 상우당(尙友堂)의 시 발문에 이르기를, “우리 조정의 이름 높은 재상으로는 세종 때의 황희와 허조이다.” 하였다. 선릉(宣陵 성종) 때에는 허종(許琮)을 치는데, 허공의 자는 종경(宗卿), 호는 상우당이다. 처음에 벼슬하였을 때에 불교를 업신여기다가 노여움을 사, 세조가 위협하여 그 지조를 시험해 보았으나 그는 태연자약하여 의범(儀範)을 잃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벼슬을 올려주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날로 떨치어 계급을 거치지 않고 뛰어넘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용모가 위대하고 풍채가 장엄하여 위엄이 가을 하늘, 겨울날과 같아 바라보기에도 씩씩하였으나 가까이 대하여 보면 온화하였다. 성리학을 좋아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골몰히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고, 잔 것이나 따지고 이목을 꾸미는 사람들과는 비길 바가 아니다. 또 역대의 역사에도 널리 통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 주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열람하여 20일 동안에 마치니, 그 부지런하고 민첩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처리하는 일들은 모두 모방하여 본받을 만하였다. 성종(成宗)의 지우(知遇)를 받아 그의 덕을 원수(元首)에 비기어 조정에 들어가서는 고기(皐蘷)가 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방소(方召)가 되어 기쁘고 흐뭇하여 큰 그릇이 되기를 기대했으나, 갑자기 죽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그가 시와 글을 지은 것도 그 덕과 같아서 연마하지 않아도 혼후(渾厚)하고 단정 성실하여 저절로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진실한 말이 있는 법이니 어찌 믿지 아니하리오. 공은 평소에 성격이 호방하고 남다른 기절이 있어 집안 사람이 생업을 일삼지 않아 거처하는 방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태연하였다. 매양 녹봉을 받으면 즉시 친척 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족의 자제에게 친절하게 글읽기를 권하고, 가르침에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권세를 좋아하지 않아 집으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재상이 된 지 수 년 만에 큰 뜻을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그의 손자 허항(許沆)은 김안로에게 아부하여 소행이 개돼지 같았는데, 일찍이 경연청(經筵廳)에서 눈물을 흘리며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은 허종의 손자이오니 아마 임금을 속이고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인의 태도가 이같이 심했으니, 한충유(韓忠猷) 공에게만 탁주(佗冑)와 같은 손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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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충유(韓忠猷) 공에게만 탁주(佗冑)와 같은 손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한충헌(韓忠獻)
*韩琦(1008年8月5日-1075年8月8日 [1]),字稚圭,号赣叟。相州安阳县(今河南省安阳市)人。 [123]北宋政治家、词人。追赠其为尚书令,谥号“忠献”,并准其配享英宗庙庭。宋徽宗时追封魏郡王。至清代,更先后从祀历代帝王庙及孔庙。
*한기(韓琦) (1008~1075) 중국 송(宋) 나라 인종(仁宗)~신종(神宗) 때의 재상. 인종 때 재상에 올라 십여 년간 국정에 참여하여 치적을 쌓았으나, 신종 때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 실시와 거란(契丹)에 대한 영토할양에 적극 반대하며 관직에서 물러남.
충헌(忠獻)@한기 노한(潞韓) 치규(稚圭)@한기 한충헌(韓忠獻) 한위공(韓魏公) 위국(魏國)@한기 위국공(魏國公)@한기 위국충헌왕(魏國忠獻王) 위한(魏韓) 공수(贛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