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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3권 / 묘갈명(墓碣銘) / 성균 생원 양졸 이공 묘갈명 병서 〔成均生員養拙李公墓碣銘 幷序〕
성균 생원 양졸(養拙) 이공은 나의 왕고(王考)이신 하계 부군(霞溪府君 이가순(李家淳))의 벗이다. 내가 일찍이 황지(潢池)의 승경을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도중에 분천리(汾川里)를 지나게 되었다. 당시 매서운 가을바람에 낙엽이 쓸쓸히 날리고 있었다. 공의 유거(遺居)를 물어보았으나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강 북쪽의 풍애산(楓厓山)과 연남산(燕南山) 사이에 은은하게 맑고 문명(文明)한 기운이 있음을 보고 내심 아주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어느 날 공의 손자인 호연(昊淵) 씨가 자신의 손자 유선(裕宣)을 보내 공의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공의 묘소가 있는 곳이 바로 풍애산의 슬봉(瑟峯)이었다. 나는 그제야 한 줄기 문명한 기운이 공의 몸에 모였으니 공이 세상에 왔을 때에는 분천에서 빛났고 공이 떠났을 때에는 풍애산에서 빛나고 있던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의 휘는 용정(用正), 자는 성립(聖立)이며 양졸(養拙)은 그의 호이다. 대조(大祖)인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 이상 가계(家系)의 연원은, 나의 선조 문순공이 지은 효절공 행장(行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효절공의 둘째 아들인 희량(希樑)은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냈는데, 선성(宣城 예안(禮安))의 분천리(汾川里)에서 풍기군(豐基郡) 이천리(伊川里)로 거처를 옮겨 효절공의 별업(別業)을 지켰다. 이분이 공의 10대조이다. 증조는 휘가 중백(重白)이고, 조부는 휘가 명옥(明玉)이다. 부친 휘 사석(師錫)은 빼어난 자질과 순수한 덕으로 선대의 훌륭함을 잘 계승하였다. 모친 우계 이씨(羽溪李氏)는 경철(慶澈)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백(氣魄)이 고상하고 순정했으며 재주도 뛰어나, 누가 독려하지 않아도 학업에 힘을 쏟아 명성을 얻었다. 서른 살에 생원시에 합격하니 동학들이 공을 ‘학문인(學問人)’으로 지목하였다. 응제(應製)한 작품으로 상(賞)을 받던 날 반장(泮長 성균관 대사성)인 이만수(李晩秀)가 어제(御製)를 받들어 시(詩)와 문(文)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화답하여 지은 율시 한 수가 성대하게 회자되었다.
얼마 뒤 물러나 태백(太白)의 분천리에서 은거하였는데, - 《하계공일기(霞溪公日記)》를 살펴보니 “병인년(1806, 순조6) 2월 이공은 임자년(1792, 정조16) 의리소(義理疏)의 소두(疏頭)인 면암(俛庵) 이공(李公)을 절도(絶島)로 유배하라는 명을 듣고, 도기(到記) 때가 되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공의 큰 절개인데, 공의 유사(遺事)에 빠져 있고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묘갈명에도 그 내용이 없다. 그래서 여기에 추록해 둔다. - 마을 이름이 옛날 살았던 곳과 똑같다고 좋아하였다. 벽에 효절공의 〈애일당도(愛日堂圖)〉를 걸어 놓고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니 성대하게 가풍이 일어났다. 거상할 때에는 공의 형제들이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정해진 예법보다 훨씬 더 슬퍼하여 몸이 상할 정도였다. 여러 친척 가운데 공의 부친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후사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공이 그 제사를 주관하였다. 거처의 동쪽에 사자암(四子菴)을 건립하고 학규(學規)를 세워 제생(諸生)을 가르치니 산골 마을의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공은 평소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 옛 서적들을 낭송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좋아하였는데 도상(圖象)의 정밀한 의미에 대해 명확히 터득한 것이 많았다. 고을 수령이 여러 차례 공을 조정에 천거하였지만 끝내 단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때때로 좋은 계절이 되어 훌륭한 벗들이 모여들면 그들과 산수의 운치를 평하고 명리(名理)를 논하였는데 조리 있고 고상한 그 말이 깊은 산속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세상 사람들은 김엄뢰(金嚴瀨), 이계촌(李溪村), 이녹문(李鹿門)을 소천(小川 지금의 봉화군 소천면)의 은자들이라 하였다. 그들의 고원(高遠)한 운치는 서릿발처럼 싸늘하였으니 공의 명성이나 절개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지만, 은거하며 유유자적했던 마음은 똑같다고 하겠다.
공은 72세에 세상을 떠나니 바로 헌종 정유년(1837, 헌종3) 7월 30일이었다. 부인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학봉(鶴峯)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인 영주(英柱)의 따님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18년 되던 해 8월 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5세였고 공과 합장하였다.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은현(殷鉉)과 주현(周鉉)이다. 딸은 첨지중추부사 이치두(李致斗)와 이석순(李錫純)에게 출가하였다.
은현의 아들은 호연(昊淵)이다. 주현의 아들은 욱연(頊淵)이다. 이치두의 아들은 진사 석우(錫㝢),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면우(冕宙), 석가(錫家)이고, 딸은 이만후(李晩厚)에게 출가하였다. 이석순의 아들은 효연(孝淵)과 목연(穆淵)이고, 딸은 임준호(任俊鎬)에게 출가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분천리에서 대대로 덕을 쌓아 / 世德汾陽
어진 임금 정조 시대에 / 哲辟弘齋
재능 감추고 움직일 때 기다렸는데 / 藏器待動
어쩌면 그렇게도 빨리 숨으셨던가 / 胡遄卷懷
잘 봉양함과 녹봉으로 봉양함은 / 善養祿養
경중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로다 / 輕重有差
애오라지 졸로써 수양하면서 / 聊以拙修
높다랗게 패를 걸어 놓았네 / 峩峩掛牌
경의와 치사를 가르치니 / 經義治事
책 읽는 소리 낭랑하게 울려 퍼져 / 絃誦喈喈
궁벽한 시골 태백에 / 天荒太白
사방으로 큰길이 생겨나게 되었네 / 兌爲皇街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었으니 / 無怨無惡
이러한 즐거움을 누구와 함께 했던가 / 此樂孰偕
붓 아래에 구름이 피어오르며 / 筆下雲生
흘러가는 물소리와 어우려졌네 / 流水渢諧
사람들이 공벽처럼 받들어 / 人奉拱璧
그 검광이 묻히지 않았어라 / 劍光不埋
계수나무에 가을바람 부는데 / 桂樹秋風
공을 찾으러 어디로 갈까 / 招之曷階
처사의 정령이 / 處士之精
풍애산에 떨어졌으니 / 隕于楓崖
아아, 나무꾼과 목동들아 / 嗟爾樵牧
세상의 모범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 毋侵模楷
[주-D001] 황지(潢池) : 대본에는 ‘潢池’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부분 ‘黃池’로 쓴다. 현재 태백(太白)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동강의 근원지로 알려져 있다.[주-D002] 효절공 행장(行狀) :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농암 이 선생 행장(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聾巖李先生行狀)〉을 말한다. 《退溪集 卷48, 韓國文集叢刊 30輯》[주-D003] 이만수(李晩秀) : 1752~1820.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ㆍ극원(屐園),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791년(정조15)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숭정대부에까지 올랐다. 글씨에 능하였고 문집에 《극원유고》가 있다.[주-D004] 임자년 …… 명 : 이공(李公)은 이광정(李光靖)의 아들 이우(李㙖, 1739~1811)를 가리킨다. 이우는 1792년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연명(聯名)으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라는 상소를 올릴 때 앞장섰다. 1806년(순조6)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순조(純祖)에게 이우를 벌할 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純祖實錄 6年 1月 8日》[주-D005] 도기(到記) :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들의 근태(勤怠)를 기록하기 위하여 식당에 비치한 출석부를 말하며, 일정한 출석 일수를 채운 유생들에게는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여기서는 그 시험을 말한다.[주-D006] 명리(名理)를 논하였는데 : 명리는 위진(魏晉) 시대의 청담가(淸談家)들이 사물의 명(名)과 이(理)를 분석하며 시비(是非)와 동이(同異)를 따지던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벗들과 어울려 청담을 나누었음을 말한다.
[주-D007] 김엄뢰(金嚴瀨) : 김성월(金聖鉞, 1659~1745)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로(聲魯), 엄뢰는 호이다.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제자백가를 섭렵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奉化郡史編纂委員會, 奉化郡史, 奉化郡, 2002》[주-D008] 이계촌(李溪村) : 이도현(李道顯, 1726~1776)으로,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치문(穉文), 계촌(溪村)은 호이다. 눌은 이광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아들 응원(應元)이 사도세자의 원통함을 밝혀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고종 때 신원되어 가선대부 내부협판(嘉善大夫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계촌집》이 있다. 《香山集 卷11 李溪村先生 道顯 贈爵焚黃祝文 代本孫作》[주-D009] 이녹문(李鹿門) : 이한익(李漢翊, 1775~1836)으로,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백황(伯黃), 초명은 한중(漢中), 호는 녹문처사(鹿門處士)이다. 《香山集 卷16 鹿門處士李公行狀》
[주-D010] 재능 …… 기다렸는데 : 큰 재능을 지니고 등용될 때를 기다렸다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가 앞으로 자기가 크게 쓸 물건을 몸에 간직했다가 때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 무슨 이롭지 않은 일이 있겠는가.〔君子藏器於身 待時而動 何不利之有〕” 하였다.[주-D011] 잘 …… 때문이로다 : 도기과에서 시험지를 제출하지 않고 돌아가 은거하며 부모님을 봉양한 사실을 가리킨다. 정이(程頤)의 문인인 윤돈(尹焞)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과장에 들어가 보니, 글 제목이 원우(元祐)의 제신(諸臣)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원우의 제신은 사마광(司馬光), 정이 등을 지칭한다. 윤돈은 훌륭한 분들을 비판할 수 없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고 그대로 물러 나와 정이에게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였는데, 정이는 “그대는 노모가 계시니, 과거를 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윤돈이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잘 봉양할 것〔善養〕이라는 것만 알지 녹봉으로 봉양할 것〔祿養〕은 모르겠다.〔吾知汝以善養 不知汝以祿養〕” 하였다. 정이가 이 말을 듣고 그 어머니의 훌륭함을 극구 칭찬하였다. 《宋史 卷428 尹焞列傳》[주-D012] 높다랗게 …… 놓았네 : 원문의 ‘괘패(掛牌)’는 ‘괘패승불(掛牌乘拂)’로도 쓰는데, 패는 일종의 게시판으로 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불(拂)은 고승이나 도사가 설법을 하거나 청담을 할 때 드는 불자(拂子)로, 어리석음을 털어 내는 것을 상징한다. 사슴 꼬리로 만들어 ‘주미(麈尾)’라고도 한다. 큰 사슴이 우두머리가 되어 꼬리를 세우고 가면 뭇 사슴들이 뒤를 따라가기 때문에, 스승 혹은 강석(講席)의 의미로 쓰인다.[주-D013] 경의(經義)와 치사(治事)를 가르치니 : 경의는 경전의 뜻을 연구하는 것이며, 치사는 관청의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의 호원(胡瑗)은 호주(湖州)의 교수로 있을 때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설치하고 과목을 구분하여 각자의 재주와 능력에 맞게 교육한 바 있다. 《宋史 卷432 胡瑗列傳》[주-D014] 사람들이 …… 않았어라 : 이용정의 훌륭함을 사람들이 받드니 아무리 숨어 지내더라도 그 훌륭함이 빛났다는 의미이다. 공벽(拱璧)은 두 팔로 감싸 안아야 할 만큼 큰 옥을 말하고, 검광이 묻히지 않았다는 것은 간장(干將)과 막야(莫邪)의 두 명검이 땅속에 묻혀서 하늘 위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를 내뿜고 있다가 발굴되어 세상에 나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민 (역) | 2010
響山文集卷之十三 / 墓碣銘 / 成均生員養拙李公墓碣銘 幷序
成均生員養拙李公。吾王考霞溪府君心友也。余嘗探潢池之勝。道由汾川。時秋風慘惔。落葉蕭蕭。問公之遺居。莫有應者。惟見江北諸山楓厓燕南之間。隱隱有淸淑文明之氣。心甚異之。日公之孫昊淵氏。遣其孫裕宣。請公墓文。墓之所在。卽楓厓之瑟峯也。余於是始知一端文明之氣。萃公之身。其來也光於汾川。往也光於楓厓也。
公諱用正字聖立。養拙其號也。大祖孝節公聾巖先生以上系源。詳具於我文純先祖所撰孝節公狀中。孝節公第二子希樑奉化縣監。自宣之汾川。移守孝節公別業於豐基伊川。於公十世也。曾祖諱重白。祖諱明玉。考諱師錫。茂才醇德。趾美承承。妣羽溪李氏。慶澈之女。公自幼氣度雅馴。才藝秀拔。不待敎督。課學騰譽。年三十中生員。齋中指爲學問人。應製被賞之日。冸長李晩秀奉御製試詩若文。公賡進一律。甚膾炙焉。俄而退隱于太白之汾川里。按霞溪公日記。丙寅二月。李公聞壬子義理䟽首俛庵李公島配之命。當到記不呈券而歸。因不復應擧。此公之大節。而其遺事闕不槩見。故碣文亦然。追錄于此。 愛里名適符故居。壁揭孝節公愛日堂圖。奉養老父。菀有家風。居喪兄弟廬于墓下。哀毁踰制。庶親有恩於父而不血。公攝其祀。構四子菴於所居之東。立學䂓訓諸生。峽俗丕變。公平居必晨起端坐。念誦古書。於易尤晩喜圖象。精微之義。犂然多契悟者。刺史屢薦。終不得霑一命。有時佳辰令節。良朋萃至。與之平章山水。論難名理。秩然文采。照耀乎穹林。世之人以金嚴瀨李溪村李鹿門爲小川之隱類。而高風遠韻。凜然如霜。公之名檢。略有不同。其隱居自樂之心。卽一致也。年七十二卒。卽憲宗丁酉七月三十日也。配義城金氏。鶴峯文忠公后英柱女。後公十八年八月七日歿。壽八十五。葬同封。生二男二女。男殷鉉,周鉉。女李致斗僉樞,李錫純。殷鉉男昊淵。周鉉男頊淵。李致斗男錫㝢進士,冕宙文承旨,錫家。女李晩厚。李錫純男孝淵,穆淵。女任俊鎬。銘曰。
世德汾陽。哲辟弘齋。藏器待動。胡遄卷懷。善養祿養。輕重有差。聊以拙修。峩峩掛牌。經義治事。絃誦喈喈。天荒太白。兌爲皇街。無怨無惡。此樂孰偕。筆下雲生。流水渢諧。人奉拱璧。釰光不埋。桂樹秋風。招之曷階。處士之精。隕于楓崖。嗟爾樵牧。毋侵模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