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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경상도(慶尙道)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張潛 1497 1552 仁同 浩源 竹亭, 逍遙齋
竹亭 張潛을 모신 賢巖書院
유헌집(遊軒集) 장석룡(張錫龍)생년1823년(순조 23)몰년1908년(순종 2)자진백(震伯)호유헌(遊軒), 운전(雲田)본관인동(仁同)초명용규(龍逵)시호문헌(文憲)
遊軒先生文集卷之四 / 疏 / 請先祖文康公從祀文廟疏 戊子○代士林作
고종 11 1874 갑술 同治 13 52 겨울, 旅軒 張顯光의 請廡疏를 짓다. ○ 대사간, 좌승지, 공조 참의가 되다.
고종 25 1888 무자 光緖 14 66 2월, 대사헌이 되었다가 우승지로 옮기다. ○ 겨울,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좌승지로 옮기다.
伏以周武王式商容之閭。漢太祖先闕里之祀。蓋所以重天理之常而順人心之安也。閭巷匹庶之事。號籲不已。則必有可伸之日。况儒賢崇終之事乎。竊伏念先儒臣文康公張顯光從祀聖廡之請。凡九度于玆矣。惟我殿下以聰明之聖。承艱大之業。政令施措之間。有䨓厲風行之威。昔之未遑者已擧。前所未作者已成。文風蔚於一時。德敎加於四方。表章儒賢之擧。如文敬公臣金集,文烈公臣趙憲。已允下從享。而獨未遑於張顯光。朝家之盛典。豈可曰無欠。士林之公議。亦可曰盡伸乎。伏願殿下特垂淵鑑。如以臣等之言。有所未盡。則試取其文集。徐考其學問之邃。淵源之正焉。蓋其天姿純粹。德器宏深。自在童丱。儼然老成。作學顔錄曰。寧學聖人而未至。不可作第二等人。作宇宙要括帖曰。能做天下第一事業。方爲天下第一人物。其自得之妙。自期之大。於斯可見矣。平日工夫。以誠敬爲本。以修齊爲務。躳行心得之餘。加之以眞積力久之功。天地之大。性命之奧。豁然貫通。列題心法十二目於壁上。而始以道德誠敬。終以博厚高明。以爲恒居自省之要。實踐之工。發而爲經緯說,性理說,圖書發揮等篇。皆所以明理學之本原。而尤精於易。爲之圖而縱橫錯綜。爲之說而明白纖悉。卷目有九而放爲屢千言。參天地達事物。總萬殊於一理。深得乎朱夫子啓蒙旨訣。至若喪制手錄冠婚儀諸篇。無不本之於儀禮而折衷於家禮。以言乎出處。則年纔弱冠。被選於才行卓異之薦。宣廟盛際。屢膺除拜。與門人論出處之義。有三不可二可恥之說。其略曰。學未優則不可仕也。學已優而時不可則不可仕也。時則可而禮未至則不可仕也。欲潔其身而亂大倫一恥也。欲假其名而索其價二恥也。及拜縣官。莅任之初。爲文飭戒邑中。而以尊德行敦孝悌勵廉恥爲先務。在昏朝時。屢徵不起。以守貞固之義。及仁祖大王改玉。以山林宿德。膺聘而起。朝野倚重。首除國子司業。國朝初無是職。至是特設。蓋待以師儒之任也。自此以後。超躋八座。再次卜相。登筵勉德。封章陳戒。非止一再。而其中建極之疏。推演反覆。幾至萬言。其佗三不忘大機軸之說。皆以一心爲主。聖批隆重。至有書紳服膺之敎。以言乎節義。則聞丙子南漢之報。深入永陽之立巖。巖在東海之上。改其名曰卓立巖。以寓蹈海之義。以言乎聞望。則賊臣弘立前驅渡江。聞金長生,張顯光,鄭經世在朝。歎曰此數人。必不以非道事其君。旋卽退兵。可見人心之畏服也。其平居渾然確然。沈默凝重。充積之久。斐然而章。在國家。爲蓍龜之重。在山林。有山斗之望。一世講學之徒。知所依歸。束脩盈門。莫不質疑而考德。心悅而誠服。鼓舞薰陶。隨才而成就。如羣飮于河。各充其量。夫以間世之才。膺期而生。學問如是醇精。德行如彼卓越。承先賢而羽翼乎斯道。啓後學而標準乎當世。其事君莅民之蹟則大有補於治化。其闡道育才之功則大有關於世敎。當休明之時則啓沃聖心。値危亂之際則扶植倫綱。其道學也德行也事功也。兼有於一身。垂耀於百代。則此非臣等之私言。上自朝家之褒奬。下洎士林之稱述。自有彰明可考者也。仁祖賜祭文曰。五百膺期。大東偉器。眞知實踐。體段已具。優遊理窟。與化爲徒。正廟朝親製祭文曰。養性林樊。潛心經旨。淵源有自。陶山退水。氣緯理經。立言垂示。發揮圖書。啓鍵抽秘。庚戌年請廡疏批。又若曰先正經術行誼。予所欽尙。不後於爾等。哲廟朝批旨。若曰文康操履進修之篤。造詣淵源之重。予所欽尙。逮至我殿下。士林之前後陳疏。又四度矣。而終靳允兪。實爲多士之抑鬱。亦爲朝家之欠典。玆敢不避煩黷。裹足號籲於崇嚴之下。伏乞聖慈特推崇報之典。誕降允兪之命。以光盛德。以幸斯文焉。
批曰。文康之學問操履。不待爾等之言。常所欽誦。而今此所請。以其事體愼重。有難遽議。爾等諒悉退去。
請先祖文康公從祀文廟疏
장석룡(張錫龍) 1823년(순조 23)~1908년(순종 2)
순조 23 1823 계미 道光 3 1 10월 17일, 仁同 吳山里에서 태어나다.
고종 11 1874 갑술 同治 13 52 겨울, 旅軒 張顯光의 請廡疏를 짓다. ○ 대사간, 좌승지, 공조 참의가 되다.
유헌집 삼(遊軒集 三)
請先祖文康公從祀文廟疏 戊子○代士林作 39 /158
유헌집 오(遊軒集 五)
기는 竹亭 張潛을 모신 賢巖書院이 철거된 자리에 세운 竹林精舍記 18 /152
遊軒先生文集卷之八 / 記 / 竹林精舍記
郡城西數里地有竹林。卽竹亭張先生幽居舊址也。晦齋李先生宰本郡。每衙罷。命駕臨話。家有竹林。林有盤巖。以待來賓。李先生謂曰。竹林主人。飽喫麥飯笋羹。常看聖賢書而味之。一生淸樂。無過於此也。逐日追遊。竟晷而還。時人謂其巖曰二賢。先生歿。仍設俎豆於此地。號以賢巖書院。與吳山東洛兩院巋然幷峙。殆至三百有餘年。先生學問之邃。造詣之精。先祖文康公詳言於墓誌。而鄕黨之尊慕。後學之矜式。愈久而愈深。不幸撤院。而苾芬馨香之地。徒見山高而水長。其在羹牆之慕。彷徨而悽愴者。果何如哉。諸雲仍與鄕章甫謀鳩財拮据。始刱建數架。扁曰竹林精舍。顧余耄洫。固不敢記其萬一。而有一言勉之者。不但以表遺址肎舊堂。爲能盡其誠。各自講明詩禮。篤襲孝悌。讀先生之書。慕先生之志。無負先生之謨訓也。
道淵齋記(金宗直) 13 /152
旅軒先生文集卷之十二 / 碑銘○墓碣○墓誌 / 竹亭張公墓碣銘
張潛 1497 1552 仁同 浩源 竹亭, 逍遙齋
公諱潛。字浩源。遠祖諱金用。高麗朝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於公十八代也。高祖諱脩。司憲府掌令。曾祖諱俌。豐儲倉丞。祖諱孟儲。通禮門通贊。考諱嫡孫。忠順衛。妣和順崔氏。大司成士老之子典護軍漢忠之女。公生于弘治丁巳。自少不事家業。手寫經傳以讀之。常曰。一日不對卷。鄙吝必萌。淸心之要。只在讀書。年十八。就師受學於京師。染臥大疫。鄕奴持內艱訃音至館外。未及告。公忽自起坐曰。鄕家某奴來耶。遂不得已以實告之。則擗踊號痛。卽冒雪奔喪。匍匐千里。尙保性命。得抵本家。執喪以禮。廬墓終制。朝夕哭泣之餘。危坐看書。當膝處衣袴盡穿。末弟演貧甚。欲毁宗家祭田。以益三弟。公懇禁莫止。則獨自却之。不令歸益於己。使二弟分執而已。歲辛卯。中進士。不待榜下鄕。聞無喜色。邑宰循例。命致門賀。以無具慶。辭而不受。外舅鄭公爲設慶宴。公不爲之樂赴。鄭頗怒訶。公徐曰。得小科。何足慶乎。人無不大其器局焉。晦齋李先生宰本縣。每衙罷。命駕臨話。家有竹林。林有草亭。以待來賓。先生謂曰。竹林主人。飽喫麥飯筍羹。常看聖賢書而味之。一生淸樂。無過於此也。其唱酬詩章。往復書札。編成一部矣。常入京居館。時縉紳禍起。遂稱病出齋。卽負笈歸鄕。自是永停擧業。中廟朝。草疏時弊十二條幾萬言。而竟不果上。其有意焉。姓譜舊有而中失。公重修而序之。仍立契約。隨時講睦。以爲恒式。置鄕案完鄕議。以嚴好惡勸懲之意。條學規於鄕校。以爲士子矜飭之範。晩聚鄕閭。幼少敎訓不倦。入其門者。頗知趨向之方矣。自號曰竹亭。嘉靖壬子。其終年也。府西北鼎山酉坐者。卽此原也。公之先塋及長兄墓在其前。娶迎日鄭氏麗朝名相襲明之後生員濩之女。生三男。長曰崑。後受通政大夫戶曹參議職帖。次嵂,次嵷。長壻李泰春。次姜滌。參議有六子。天翰,景翰主簿,光翰,龍翰,鳳翰,鴻翰。一女適忠義衛金宗孝。餘各有子女及孫。而俱沒於賊亂之日。惟嵷有一女。適司空誨。天翰有一女。適士人趙熙道。孼子三。慶錫,福錫,順命。主簿一男乃貞。女壻三。朴之㕀,朴有文,宋惟寬。孼壻僉使柳世溫。光翰二男。乃節,乃迪。孼男乃順。壻金重吉。龍翰一男乃亮。一女適李長立。鳳翰一男以兪。一女適生員李重亨。忠義衛二男。慶長,喜長。司空誨四男。欽,銑,鐸,鎔。一女適李宗成。有玄孫男女幷內外凡六十餘人。舊無碣。今者景翰與其弟鳳翰及乃貞,乃亮等。共議具碣。遂爲鐫銘。銘曰。
十室忠信。聖云必有。惟公懿質。得於天受。德備剛柔。行全孝友。不出性分。有爲有守。世所奔趨。公獨囚首。出言有法。行己不苟。安厥丘園。遠脫塵臼。膏粱非願。麥筍可口。綠竹擁亭。日成佳趣。卷中師友。何患不偶。閭行去馬。筠杖在手。汎愛親仁。人服其厚。猶存規範。不容稂莠。知愛雖多。有畏嚴糾。或被非斥。亦不歸咎。公之於天。可謂無負。積善餘慶。宜有其後。伐石銘傳。乃公之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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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立齋集) 정종로(鄭宗魯)생년1738년(영조 14)몰년1816년(순조 16)자사앙(士仰)호입재(立齋), 무적옹(無適翁)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 최흥원(崔興遠)의 문인.
立齋先生文集卷之四十三 / 行狀 / 成均進士竹亭張公行狀
張潛 1497 1552 仁同 浩源 竹亭, 逍遙齋
公諱潛字浩源。竹亭其自號也。張氏世居玉山。麗有諱金用。官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後世至德寧尹安世,金海府使仲陽父子皆義不事二君。我太祖以有邸舊。降御札屢徵。終不出。遺命並官銜不書碣。府使生本朝掌令脩。掌令生豐儲倉丞俌。丞生通贊孟儲。通贊生忠順衛嫡孫以孝聞。是爲公皇考。妣和順崔氏大司成士老之孫典護軍漢忠之女。以弘治丁巳六月二十六日生公。公生有美質。性高潔孝順。甫離襁褓。已不處汚穢。母夫人疾。見其痛楚。常在側啼號。不隨羣兒遊戲。九歲丁忠順公憂。哀毁服喪如成人。十二始讀經傳。皆爲之手自淨寫。斂袵端坐而讀之。無惰慢色。十六方伯親試士本縣。公作居魁。公以讓長者曰序不敢亂。方伯偉其器量。十八遊京師。就靜庵趙先生學。與白休庵仁傑,成聽松守琛結爲四科友。明年從靜庵於砥平之龍門寺病痘臥。聞崔氏喪。力疾冒雪而奔。廬墓終制。常見鼠汚奠物。泣自責。有頃鼠自斃於床下。己卯靜庵謫綾城。公往拜而歸。及聞其卒。嗚咽不食者三日。移卜幽居于鳳顙洞深處。名其塘曰洗心。臺曰嘯咏。草屋竹籬。唯以書史自娛。甲申晦齋李先生知本縣。禮重甚至曰竹亭主人。飽喫麥飯筍羹。讀味聖賢書。一生淸樂孰過焉。每衙罷杖屨臨訪。或亭或巖。與之講劘經義。亹亹到夜分。有人題其巖曰二賢巖。其迎送之衢。又號爲德衢云。嘉靖辛卯中進士。不待榜而歸。邑宰致門賀。辭以永感而不受。外舅鄭公爲設宴邀之亦不赴。庚子夏旱。草疏論時弊十二條。將上之。旋聞退溪李先生以持平已達於筵中。遂焚之。乙巳爲伸靜庵寃。與館儒合疏。其略曰趙某以豪傑之才聖賢之學。感先王不世之遇。知無不言。言無不盡。徒知有君而不知有身。不幸讒言罔極。倉卒難辨。至於抱恨入地。是豈我先王之意哉。伏願殿下洞燭而快雪之。未幾仁廟大漸。降復職之命。是年尹元衡等搆大獄。戕殺善類。延及者多。公遂稱病歸鄕。因廢擧業。作小齋扁以逍遙。讀書其中。樂而忘憂。絶口不談時事。然每淸宵皓月。撫琴悲歌。以舒慷慨之懷。壬子正月二十六日終于家。壽五十六。三月葬于縣西北卯向原。公自少嗜學。常曰一日不對卷。鄙吝輒萌。淸心之要。只在讀書。雖以母夫人命從事科臼。而其所志不在於是。及得大賢爲師。學業日益進。作進修警心等箴以自顧省。又嘗命畫工摸聖賢遺像揭座右。肅敬瞻仰。如在函丈閒。居常竟日危坐。以俯讀仰思。日用言行。動慕古人。伯氏歿其孤方幼。公常置膝下。不離須臾。出則使人襁負而前。卒致其成立。二弟貧甚。議設宗家祭田。公分自家臧獲以與之。修姓譜以敦門族。揭學規以飭黌儒。創置鄕約法與善惡籍。以峻好惡勸懲之方。收聚童蒙。敎授不倦。從之遊者多知趍向焉。迨其寢疾。手書遺戒十條。以詔家人。又嘗謂門弟子曰士生斯世。不得達施其道。致君民於堯舜。則寧囂囂然處畎畝之中。讀古人書求古人心。安分樂天。以終其年。不亦可乎。若公其可謂有學有德。而庶幾於古之逸民也夫。配延日鄭氏。麗相襲明之後。生員濩之女也。生三男。長曰崑參議。次曰嵂。次曰嵸。參議有六男。曰天翰無嗣。曰景翰主簿。曰光翰。曰龍翰號岐村。有德行。享于鄕祠。曰鳳翰號㝏翁。有學問及忠義。享于鄕祠。曰鴻翰判官。主簿一男曰乃貞。光翰二男曰乃節縣監曰乃迪判事。岐村一男曰乃亮司僕寺正。㝏翁一男曰以兪生員。判官四男曰慶曼贈參議,曰慶暹,曰慶最,曰慶昱。自玄以下多不錄。乃者公之八世孫敬穆氏。持公遺事及旅軒先生所撰碣銘而來。示余言曰。吾先祖享於賢巖書院。今已三十五年。而尙闕狀行之文。子盍勉諸。余以非其人辭不獲。且念公之行已得大賢而揄揚之。無復餘蘊。則此特備禮依文而已。初非待我輕重者。故遂爲之撮其大綱而序次如右。
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통정대부 훈융진병마 첨절제사 옥산 장공 묘지명 병서 〔通政大夫訓戎鎭兵馬僉節制使玉山張公墓誌銘 並敍〕
금상〔철종〕의 신유년(1861, 철종12) 3월 10일에 절제사(節制使) 옥산 장공(玉山張公)이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그의 아들 유량(有良)이 나에게 장례를 치렀음을 알려주고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공과 이웃해 살아 공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또 선친과도 교분이 있었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두빈(斗斌)이고 자는 유헌(惟憲)이다. 시조는 휘가 금용(金用)이니 고려 시대에 상장군이었다. 11대를 지나 휘 안세(安世)는 부윤(府尹)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그로부터 6대 뒤에 죽정(竹亭) 선생 휘 잠(潛)은 조선조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조정암(趙靜庵)을 좇아 배웠으며 이회재(李晦齋)와 잘 지내 사류(士類)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현암서원(賢巖書院)에 제향 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10대조가 된다.
증조부의 휘는 태일(台一)로 승지(承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성한(成漢)으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언극(彦極)으로 진영장(鎭營將)을 지냈으며 80세까지 장수한 덕택으로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분으로 인하여 3대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첫 번째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수경(守慶)의 따님이고, 두 번째 어머니는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두주(斗柱)의 따님이다. 공의 생부는 통덕랑(通德郞) 휘 언국(彦國)이니, 곧 동지중추부사공의 형이다. 생모는 공인(恭人) 선산 김씨(善山金氏)로 하건(廈健)의 따님이다.
공을 건릉(健陵 정조의 능호) 기유년(1789, 정조13)에 낳았다. 겨우 7세에 생부의 상을 당하였는데, 슬퍼하여 몸이 여윔〔哀毁〕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성장하여서는 또한 재주가 있어서 비록 문사(文詞)를 일찍 성취하였으나 무관이 바로 세업(世業)이었기에, 마침내 붓을 던지고 무과 시험을 보았으나 여러 번 낙방하였다. 이 때 공은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기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는데, 동지중추부사공이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만일 효성스럽다면 마땅히 보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과연 순조 갑오년(1834, 순조34)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부모님의 봉양을 위하여 황해도(黃海道) 중군(中軍)과 전라도(全羅道) 중군(中軍), 그리고 장기 현감(長鬐縣監)과 통우후(統虞侯)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의 명성이 있었다. 세 임금을 차례로 섬김에 은총이 더욱 융성하였다. 이미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거처함에 임금께서 특별히 훈융진병마 첨절제사(訓戎鎭兵馬僉節制使)에 임명하시자, 공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 곡을 노래하였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신 이유로 조정에 가서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돌아왔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병이 들어 죽었으니 향년 73세였다. 인동부 북쪽 옥계동(玉溪洞) 뒤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은 질박하면서도 곧았고 자애롭고도 믿음직스러웠으며, 강직하고도 반듯하고 효성스럽고도 우애로웠다. 여든의 어버이를 봉양함에 맛있는 음식과 살진 고기가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형과 조카들을 대함에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으며, 이것을 인척과 빈붕(賓朋)들에게 적용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흡족함을 다하였다. 오직 의리에 맞지 않으면 준엄하게 물리쳐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본성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창녕 조씨(昌寧曺氏) 윤탁(胤鐸)의 따님으로, 신해년(1791, 정조15)에 태어나 을해년(1815, 순조15)에 죽었다. 묘소는 인동부 서쪽 양촌(楊村) 뒤 자좌(子坐)에 있다. 외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유량(有良)으로 지금 부장(部將) 벼슬을 하고 있다. 둘째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순천 김씨(順天金氏) 종권(宗權)의 따님으로 정사년(1797, 정조21)에 태어나 기미년(1859, 철종10)에 죽었다. 묘소는 인동부 서쪽 한천곡(寒泉谷) 묘좌(卯坐)에 있다. 외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유룡(有龍)이다. 부장(部將) 유량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주익(周翼)으로 지금 무과에 급제하였고, 차남은 승택(升澤)이며 삼남은 규택(奎澤)이고, 두 딸은 정세용(鄭世容)과 윤택규(尹宅逵)에게 각각 시집갔다. 유룡(有龍)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우익(宇翼)이고 차남은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도는 복을 정하고 / 孝可定
치적은 최고였네 / 治可最
하늘이 보답하여 / 天以報
후손을 창대하게 하리 / 俾昌大
[주-D001] 현암서원(賢巖書院) : 경북 구미시 황상동에 있다. 1761년(영조37)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잠(張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다.[주-D002] 중군(中軍) : 각 도의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정3품 당상관 벼슬, 곧 순영중군이다.[주-D003] 통우후(統虞侯) : 통제영(統制營)에 딸린 우후(虞侯)로 정3품 벼슬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四未軒文集卷之九 / 墓誌銘 / 通政大夫訓戎鎭兵馬僉節制使玉山張公墓誌銘 並敍
當宁辛酉三月初十日。節制使玉山張公。病卒于私第。其孤有良。以葬聞。責余銘。余於公隣。而知公審。且有先契敢辭諸。公諱斗斌。字惟憲。初祖諱金用。麗上將軍。歷十一世。有諱安世。官府尹。謚忠貞。六傳至竹亭先生諱潛。我中廟朝司馬。從趙靜庵學。與李晦齋善。爲士類重。享賢巖院。是於公爲十世祖也。曾祖諱台一。贈承旨。祖諱成漢。官府使贈兵參。考諱彦極。官營將。以大耋授同樞。追贈三世。先娶咸陽朴氏。守慶女。繼娶礪山宋氏。斗柱女。生考通德郞諱彦國。卽同樞公兄也。妣恭人善山金氏。廈健女。生公健陵己酉。甫七歲。丁生考憂。能哀毁如成人。長且才。文詞雖夙就。弓釰乃世業也。遂投筆。屢屈兵省。時公處人所難言。惟盡己之道。同樞公感悟曰。若孝宜有報。果登純廟甲午科。爲養爲黃海,全羅中軍,長鬐縣監,統虞侯。皆有治聲。歷事三朝。恩渥彌隆。旣告老居家。而特除訓戎僉使。公唱感君恩一曲。以母夫人在堂。肅謝而還。仍感疾不淑。享年七十三。葬府北玉溪洞後負艮原。公質直而子諒。剛方而孝友。奉八耋親。不乏甘肥。處兄若姪。無物我。推諸族姻賓朋。必致款洽。惟非其義。則峻斥不能容。性然也。配淑夫人昌寧曺氏。胤鐸女。生辛亥。卒乙亥。墓府西楊村後子坐。生一男有良。今部將。繼配淑夫人順天金氏。宗權女。生丁巳。卒己未。墓府西寒泉谷卯坐。生一男有龍。部將男三女二。長周翼。今武科。次升澤,奎澤。女鄭世容,尹宅逵。有龍男二。宇翼。餘幼。銘曰。
孝可定。治可最。天以報。俾昌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