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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에 관한 자료 연구*
이석원**
Ⅰ. 머리말
Ⅱ. 관련 자료 소개와 그 성격
Ⅲ. 수습, 안장[이장]의 시기별 지역별 특성
Ⅳ. 맺음말
<국문초록>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pp.177~240)
https://doi.org/10.35135/casky.2022.21.177
이 논문은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그 특성을 밝히려는데 목적이 있다. 1791년(신해) 이후 1879년(기묘)까지 순교한 신자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통해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는 275명[안장 231명, 안장 못함 44명]이다. 조선 정부의 기록에는 신자들의 시신이나 무덤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순교자 시신에 관한 천주교 측의 기록은 선교사제나 신자들의 서한[보고서], 순교자의 행적[약전], 시복 수속을 위한 증인 재판[시복재판록]에 나오는데, 시복재판록 기록이 가장 상세하고 신빙성이 높다. 재판 조목 중에 시신의 수습과 안장, 이장, 관련된 영적(靈蹟) 사실을 묻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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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22년 3월 31일에 개최된 초남이성지 2차 학술세미나 ‘초남이성지 역사재조명과 종교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 제고 방안’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발표 당시 에는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가 273명[안장 229명, 안장 못함 44명]으로 파악되었는데, 발표문을 수정보완하는 과정에서 순교자 2명[안장됨]이 누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누락된 내용을 추가하여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를 275명[안장 231명, 안장 못함 44명]으로 정리했다.
**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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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자료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상대적으로 선교사제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시신이나 무덤에 나타나는 영적에 대한 증언이 많은 반면 수습·안장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명확하게 기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신 수습과 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 275명을 시기별 지역별로 분류해 도표로 제시하고, 그 특성을 살펴보았다. 1839년과 1846년 박해 때 처럼 신자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나섰을 경우 수습·안장 비율이 높았다. 반면, 1801년과 1866년 박해 때처
럼 천주교 박해가 혹독하여 신자들이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는 수습·안장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수치를 지역별로 비 교하면 순교자의 지역별 수치와는 비례하지 않는다. 1866년 이후 박해가 혹독했던 경기 지역은 순교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의 수습·안장 비율은 낮았다. 충청 지역은 1868년 박해가 격화되면서 순교자 시신·안장은 1866~67년에 주로 이루어졌다. 1866년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전라와 경상 지역에서 수습·안장된 시신은 대부분 1839년 이전에 순교한 경우이다. ‘박해시기’라는 특성 때문에 안장된 순교자의 시신이 이장되는 경우는 서양 선교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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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순교자 시신의 이장, 순교자 시신 관
련 기록, 순교자 약전, 시복재판록, 영적(靈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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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2021년 3월 11일 바우배기 지역[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17번지]을 성역화하기 위해 초남이성지 주관으로 무연고 분묘 이장 작업을 하던 중 순교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유해가 발견되었다. 무덤 안에 발견된 2개의 백자사발 지석(誌石)에서 먹으로 쓴 명문 기록이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지석 밑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가 윤지충과 권상연임이 밝혀졌다.1) 같이 발굴된 다른 유해 1구 위에도 백자제기 접시가 출토되었지만 명문은 적혀 있지 않았고, 윤지충 및 해남유씨 친족 사이의 부계유전자 검사를 통해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로 추정되었다. 2)
윤지충과 권상연의 시신 수습과 안장, 무덤에 대한 기록은 구베아 주교의 서한, 『사학징의(邪學懲義)』에서 확인된다. 1791년 12월 8일3) 전주에서 참수 순교한지 9일째 되던 날[12월 17일경]에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뤘는데4) 안장한 장소[무덤]는 언급되지 않지만 원래 거주지인 진산 지역이었을 것이다. 1795년 음력 4월 유관검이 서울로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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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주교구 순교자현양단,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의 진정성에 관한 기록』, 천주교 전주교구, 2021, 80~93쪽, 128~139쪽. 이 ‘순교자 유해 발굴 보고서’에 실린 ‘묘소의 수습 경위와 과정’, ‘지석의 기록 내용’ 참조.
2) 위의 책, 124~127쪽, 169~173쪽. 부계 혈연관계가 성립된 유전자 검사 외에 유해의 팔과 다리, 머리 등이 예리한 도구로 절단되었기 때문에 1801년 10월 24일 능치처사된 윤지헌으로 추정한 것이다.
3) 이 발표문에 제시된 일자는 양력을 기준으로 했다.
4)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1797년 8월 15일에 사천대목구장 생마르탱 주교에게 보낸 서한(SC 39, ff.550~558) ; 위의 책, 38쪽 번역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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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가 주문모 신부와 함께 자기 고향집으로 내려가는데 도중에 윤지충· 권상연 무덤을 지나갔다.5) 이를 진술한 유관검의 공초에는 무덤의 위치가 나오지 않지만 2021년 3월 발견된 백지사발 지석6)을 통해 그 장소가 바우배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문헌자료와 지석을 비교해 보면 1791년 12월 진산에 안장했던 윤지충, 권상연의 유해가 1792년 11월 25일에 바우배기로 이장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유항검·유관검 형제가 이장 작업을 주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무덤에서 발굴된 지석은 묻힌 유해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며, 새로운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7)
한국 천주교 순교자 무덤에서 지석이 발굴되는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윤지충·권상연의 지석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8) 이번의 유해 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유해, 유품, 지석]과 문헌자료와의 비교 연구가 진척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윤지충·권상연을 포함한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이 순교한 후 그 시신이 수습·안장되는 과정, 안장된 유해가 다른 곳으로 이장되는 과정에 대한 실증적인 문헌자료 연구가 함께 진행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전의 순교자 약전이나 연구에서는 개별 순교자와 관련하여 시신 수습, 안장과 이장이 언급되었지만, 하나의 주제로서 집중적으로 고찰되지 못했다. 근래 서울 광희문성지가 개발되고 성지와 관련된 학술심포지엄이 2017년 11월 25일 개최되면서 ‘순교자 시신의 유기와 매장’이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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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학징의』 2권 233쪽, ‘유관검 공초’ ;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 Ⅱ』,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22, 86~87쪽.
6) 윤지충, 권상연 지석 모두 ‘乾隆五十七年 壬子 十月十二日’이라는 일자가 적혀 있는데, 이는 1792년(임자) 10월 12일[양력 11월 25일]에 유해를 바우배기에 안치했다는 의미이다.
7) 송란희, 「한국 천주교 순교자 지석(誌石) 연구」, 『부산교회사보』 108, 부산교회사연구소, 2022, 27~28쪽.
8) 2022년 현재까지 이장이나 발굴 과정을 통해 확인된 순교자 지석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송란희에 의해 진행되었다. 위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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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발표되었다.9) 이를 수정·보완한 글이 2019년 8월에 간행되었는데, 특히 서종태의 글은 엄혹했던 ‘박해시기’ 서울의 형조 전옥과 포도청 옥, 의금부 옥 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일부는 신자나 가족에 의해 수습되었지만 대부분은 광희문 일대에 버려져 묻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10) 특히 유기된 순교자들의 시기별 지역별 분포를 분석하여 도표를 제시하고, 1801년(신유)부터 1879년(기묘)까지 죽임을 당하여 유기된 신자 794명을 총망라하여 도표를 제시한 것은 선구적인 업적이다. 그러나 연구가 서울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 같은 공식적인 사형을 받은 서울 순교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서울 이외 장소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제외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박해시기’11)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이 수습, 안장[이장]된 사실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기초연구가 급선무
라고 할 수 있다.
기초연구로서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이장]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것은 방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검토를 통해 계속 수정·보완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러한 기초연구의 시론에 해당하며 가능한 한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수합 하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Ⅱ장에서는 1791년(신해) 이후 1879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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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제1과 주제2가 모두 순교자 시신의 유기, 매장을 다루고 있는데 주제1을 맡은 서종태는 ‘박해시기’ 전반에 걸쳐 관련 사실을 정리했고, 주제2를 맡은 원재연은 1846년 순교성인 6위를중점적으로 고찰했다.
10) 서종태,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유기 및 매장과 광희문 밖」,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 천주교 서울대교구 광희문성지 순교자현양관, 2019.
11) 한국교회사에서는 천주교가 조선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탄압을 받았던 시기를 ‘박해시기’로 구분한다. 공식적인 천주교 금압은 1791년 진산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지만,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폐지 조치는 없었다. 따라서 ‘박해시기’의 종결 시점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한불조약]의 체결로 서양인 선교사제의 전교 자유가 일정부분 묵인되는 시점까지를 ‘박해시기’로 볼 수 있다. 다만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선교사제와 신자를 체포, 구금, 처결한 사건은 1879년 드게트 신부의 체포와 석방[신자들은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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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까지12) 순교한 신자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하면서 그 자료들이 가지는 성격을 밝히겠다. Ⅲ장에서는 소개된 자료들을 통해 드러나는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이장]의 특성을 간략하게나 시기별 지역별로 정리 하겠다.
필자는 자료를 통해 수습과 안장이 확인된 경우는 물론 시신이 수습되지 못한 경우까지 포함하여 순교자 275명[안장 231명, 안장 못함 44명]을 확인했다. 275명의 순교자를 시기별 지역별로 구분하여 도표로 제시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명단 도표는 [부록]에 실었다.
Ⅱ. 관련 자료 소개와 그 성격
1.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자료 소개
1791년(신해) ‘진산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는 사악한 종교[邪學, 邪敎] 로 낙인찍혔고 천주교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체포, 심문, 처벌을 받게 되었다. 끝까지 신앙을 지켜 목숨을 바친 이들은 치명자(致命者), 즉 순교자가 되었고, 그들의 삶과 죽음은 물론 죽음 이후 과정까지도 목격되고 전해지게 되었다.
1791년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해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앞에서 언급한 구베아 주교의 서한이다. 이 기록은 조선 신자들이 구베아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근거한 것13)인데,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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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위의 시기 범주 설정에 따라 1791년 이전의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과 김범우(토마스), 1888 년의 복자 윤봉문(베드로)은 제외했다.
13) 조선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피를 묻힌 수건과 함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보냈다. 이 서한에는 두 순교자의 유품과 관련되어 일어났던 영적(靈蹟, 기적) 현상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각주 4번의 번역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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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순교자에 대해 특별한 공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신앙과 순교, 순교 이후 과정[영적 현상 포함]까지도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한편, 천주교 옥사를 주도한 조선 정부의 기록에는 신자들에 대한 심문과 처분[처형, 유배, 석방] 내용만 나오고, 처형 이후 신자들의 시신이나 무덤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미 죽은 시신은 그들의 주요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자들의 진술 기록을 통해 시신의 안장이라든가 무덤에 대한 내용이 확인되기도 한다.14) 1801년 이후의 관변 측 사료에서도 천주교 신자의 시신이나 수습·안장에 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15)
1791년 이후 1879년까지 천주교가 금지되어 탄압받았던 시기 동안크고 작은 박해[교옥(敎獄)16)]가 이어졌고 순교자들은 계속 생겨났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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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앞서 언급한 『사학징의』 유관검의 공초에서 윤지충, 권상연 무덤 내용이 나오는데, 심문자의 관심은 무덤 자체보다는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운다’는 말에 있었다고 보인다(『사학징의』 1권 18쪽, ‘이우집 공초’ ;, 22쪽, ‘유관검 공초’). 1797년 11월[음력] 유관검이 이우집에게 ‘천주당은 윤지충 무덤 위에 세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문자가 이를 추궁하자 유관검은 ‘서양인은 반드시 천주학 때문에 죽은 사람[순교자]의 시체를 천주당 안에 장사지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에게 들은 내용과 같다(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 1』,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83~84쪽, 90쪽). 또한, 한덕운의 공초에 그가 홍낙민의 시신을 찾아가 애도하고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의 시신을 수습해 준 내용이 나온다(『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正法罪人秩), 한덕운 공초 ; 『역주 사학징의 Ⅰ』, 224~226쪽 ;
차기진 역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3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1998, 259~262쪽). ‘대역죄인’을 공공연하게 애도하고 가족도 아닌 그가 신자의 시신을 수습한 것이 주요 죄목이 되었다. 자신이 신자임을 당당하게 드러낸 한덕운의 사례는 특이하고 유일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5)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1868년에 체포된 신자들의 진술에서 베르뇌 주교의 시신을 안장한 내용이 나온다. 1868년 3월 8일(양력 3월 31일)에 진술한 조성로 마두[마태오]와 그해 3월 30일(양력 4월 22일)에 진술한 박순지 요한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주교의 시신을 거둬 와서 현(瓦署峴, 왜고개)에 안장했다고 말했다. 『우포도청등록』(1985년 영인본 중권), 699~700 쪽, 708쪽. 베르뇌 주교 등 새남터 순교자들의 시신 안장에 대해서는 이석원, 「베르뇌 주교 등 7위 순교자 시신의 왜고개 안장에 참여한 신자들」, 『상교우서』 84, 2022, 수원교회사연구소, 1~4쪽을 참조할 것.
16) 조선 정부가 천주교 신자를 공식적으로 체포·심문하고 판결·처형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킬 때 사옥(邪獄), 박해(迫害), 교난(敎難) 등의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한 조선 정부 측에서 사용하는 ‘사옥’이나 천주교회 측에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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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그들의 순교 과정과 죽음 이후를 목격하거나 들은 이들의 진술도 신자나 선교사제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시기순으로 구분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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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 개념은 객관적인 역사용어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정부가 천주교를 금지하고 탄압하는 정책(법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자를 처리한 옥사라는 의미에서 ‘교옥(敎獄)’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13쪽,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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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표 1의 자료들은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뿐 아니라 순교자의 삶과 순교, 신앙 등을 다룬 교회 측 자료를 망라한 것이다. 이 자료들을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문제에만 국한하여 구분한다면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선교사제나 신자들의 서한[보고서] 자료, 순교자의 행적[약전] 자료, 시복 수속을 위한 증인 재판[시복재판] 자료가 그것이다.
선교사제나 신자들의 서한[보고서] 자료에는 위에 언급한 구베아 주교 서한, 1801년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인 황사영의 「백서」17)와 신년 서한18), 1801년 이전부터 1839년까지 순교한 신자들19)의 기록을 남긴 모방 신부의 서한20), 1839년 순교자에 대한 기록21)인 앵베르 주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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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01년 신유년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 측 기록은 박해 와중에 작성된 황사영의 「백서」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백서」에는 위기에 처한 조선 천주교회를 구원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황사영이 파악한 순교자들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는데, 순교 이후의 과정, 즉 시신의 수습·안장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내용만 나온다. 황사영 「백서」(82~83행)
18) 1811년(신미)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교구장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신자들은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 사실을 알리면서 북경교구의 도움과 선교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아울러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주요 순교자들에 대한 약전을 기록했는데, 황사영의 「백서」에 비해 더 자세한 내용이 확인되지만, 시신의 수습·안장에 대한 기록은 마찬가지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문모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부분에서도 오히려 「백서」보다 내용이 적다.
19) 모방 신부가 모은 자료에서 확인되는 예전 순교자는 박(취득) 라우렌시오[1799년 홍주 순교, 복자], 이(도기) 바오로[1798년 정산 순교, 복자], 김(세박) 암브로시오[1828년 대구 순교, 복자]이다. 모방 신부의 기록에는 시신의 수습·안장이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도기가 매장된 무덤을 지키던 포졸들이 밤중에 무덤에서 빛이 나는 걸 목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모방 신부는 관련 증인 3명을 찾아보려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했다.
모방 신부는 예전 순교자뿐 아니라 몇 년 전에 순교한 신자나 자신이 입국한 이후에 순교한 신자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1835년 서울 감옥에서 옥사했다는 황(석지) 베드로, 샤스탕 신부가 조선 의주에 들어온 1837년 1월 2일에 서울 감옥에서 옥사한 김 아가타가 그들이다. 이 두 순교자에 대한 기록에도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석원, 「‘하느님의 종’ 황석지 베드로에 대한 최초의 교회측 기록 - 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다」,
『상교우서』 87, 수원교회사연구소, 2022, 1~4쪽. ; 이석원, 「1837년 1월 옥중 순교자 김아가타의 이름, 가족, 순교일 - 관련 자료 소개」, 『교회사학』 20, 수원교회사연구소, 2022,189~218쪽.
20)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온 모방 신부는 서울과 지방의 순회 사목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예전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모방신부는 ‘사형을 당했을 때나 사형을 당한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 조사했는데 사람들이 ‘영적[기적]’으로 보는 일들에 주목했다. 하지만 기대한 것과 달리 믿을 만한 증언자를 찾지 못해 아쉬워했다(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 9일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60, ff.110~111) ; 최세구 신부 역주, 「모방 신부의 서한 9」, 『상교우서』 6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26쪽). 1837년 1월에 입국한 샤스탕 신부도 조선에서 순교한 신자들에 대하여 작성된 자료들을 최선을 다하여 모아놓았는데, 그것을 전부 앵베르주교에게 주었다고 했다. 샤스탕 신부는 앵베르 주교가 그 자료들을 검토한 다음 추려서 파
리 본부에 보낼 것으로 기대했다(샤스탕 신부가 1838년 10월 5일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신부들과 마카오 대표부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106)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샤스탕 신부 서한』, 수원교회사연구소, 2019, 413쪽). 그러나 샤스탕 신부가 정리한 자료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자료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21)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보고서는 박해 과정에서 보고 전해 들은 생생한 사실을 기록한 1차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박해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습·안장되었는데 앵베르 주교는 교회 묘지로 사용할 목적으로 구입한 땅에 5월 24일 참수 순교자 9명의 시신을 안장하도록 신자들에게 지시했다(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A-MEP, Vol.1254, ff.151~152)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547쪽). 모방 신부는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관련 내용[왜고개 묘지, 순교자 8명 안장, 1명은 가족이 따로 안장]을 보완하고 무덤 약도까지 그려 넣었다(모방 신부의 「1839년 8~9월 마지막 서한(박해 보고서)」(A-MEP, Vol.1260, ff.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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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22)와 모방 신부의 마지막 서한23), 최양업 신부의 서한들24), 1866년 이후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인 페롱 신부의 「1866년 순교자 행적」, 칼레 신부의 「1866년 조선인 순교자 보고서」25), 1878년 리델 주교의 체포와 추방에 연관된 순교자들26)에 대한 기록인 리델 주교의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27)와 조선대목구의 『교구연보』2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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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838년 말과 1839년 초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신자들의 체포가 이어지자 앵베르 주교는 박 해의 조짐을 느끼고 그에 대한 일지 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이 바로 주교가 체포되기 직전인 8월 7일까지 작성한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이다. 8월 11일 포졸에게 자수한 앵베르 주교는 그 전에 보고서를 비롯한 서한들을 신자들을 통해 모방 신부에게 보냈다.
23) 피신해 있던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 따라 샤스탕 신부와 함께 자수하기로 했고, 다른 곳에 피신해 있던 샤스탕 신부가 오기까지 「1839년 8~9월 마지막 서한(박해 보고서)」 을 기록했다. 이 서한에는 1839년 기해교옥의 원인과 시작, 주교가 체포된 경위와 함께 앵베 르 주교의 박해 보고서를 수정·보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모방 신부가 1839년 9월 6일에 포교성 장관추기경에게 보낸 서한(summariun, pp.66~67)에도 1839년 천주교 박해령이 반포된 이후 참수당한 신자들과 감옥에서 옥사한 신자들을 순교자로서 기록했다.
24) 1849년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바쁜 사목활동 중에도 부모에 대한 증언들을 수집하여 직접 부모의 약전을 서술하여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냈다. 이후에도 부모에 대한 증언을 추가로 확보했고, 다른 순교자에 대한 자료들도 수집하여 최(해성) 요한의 약전을 서술했다. 이 외에도 최 신부는 계속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857년 다블뤼 주교가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천주교회사와 순교자 행적을 공식적으로 담당하게 되자 최 신부는 자신이 모은 자료 전부를 주교에게 넘겨주었다(이석원, 「최양업 신부 관련 사료 현황과 검토」, 『교회사학』 19, 수원교회사연구소, 2021, 93쪽.). 최 신부가 기록한 약전 역시 이전의 『기해일기』나 페레올 주교의 행적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순교 이후의 시신 수습·안장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부친인 최경환의 약전을 기술하면서 1839년 당시 최경환이 동네 신자들을 설득하여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매장했다고 했다. 이 내용은 『기해일기』의 최경환 약전과 거의 같다. 청주교구 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편,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107쪽. 참조.
25) 1866년 당시 피신했던 3명의 선교사제들[리델·페롱·칼레 신부]은 피신지에서 신자들의 상황과 순교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순교자 행적과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페롱 신부의 「1866년 순교자 행적」과 칼레 신부의 「1866년 조선인 순교자 보고서」 에는 9명의 순교 선교사제와 함께 신자들의 순교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1866년 이후 중국으로 피신한 선교사제에게 신자들이 서한을 전달하여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여기에도 순교자들에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26) 1876년 이후 선교사제들의 입국이 속속 이루어졌고 천주교회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878년에 리델 주교가 체포되었고, 1879년에는 드게트 신부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련된 신자들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조선 정부에 의해 두 사제는 추방 형식으로 풀려나 중국으로 보내졌지만, 갇혀 있던 신자들은 고문과 굶주림으로 옥사 순교했다. 이 박해는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한 마지막 사건에 해당하며, 이후 ‘박해 시기’는 끝이 나고 ‘신앙자유 확보기’[개항기]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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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행적[약전] 자료로는 1839년 순교자들의 약전인 『기해일기』 29)와 김대건 신부[당시 부제]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30), 페레올 주교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31), 1846년 순교자들의 약전인 페레올 주교의 「1846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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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살림출판사, 2008.
2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서울교구연보』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9)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것을 지시했는데 현석문, 이경천, 최영수가 이 유지를 받들어 신자들의 증언과 서한 등을 모아 만든 책이다. 『기해일기』는 3명의 선교사제를 비롯하여 참수, 옥사, 교수 순교한 신자들의 대략적인 삶과 순교 과정을 기록한 약전이다. 개별 순교자의 약전에는 순교일, 순교지, 나이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순교이후의 시신 수습·안장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순교자들의 활동 중에 다른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안장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문우 요한의 약전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 안장한 내용이 확인된다. 『기해일기』, 88b~91b, 107a~109a ; 하성래 감수,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134~137쪽, 157~159쪽.
30) 1845년 입국한 김대건 부제는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이 보고서 중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약전]은 『기해일기』의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상해로 출발할 시간이 촉박하여 『기해일기』의 일부분만 번역하였고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했지만,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순교하는 바람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김 신부의 보고서 역시 『기해일기』의 틀을 따랐기 때문에 순교 이후의 시신 수습·안장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3명 선교사제의 순교 이후 신자들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노고산에 매장했고 다시 관악산으로 이장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기해일기』에는 나와 있지 않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개정판), 한국교회사연구소, 2020, 170~171쪽). 현석문 등이 처음 정리한 『기해일기』에도 이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면, 김대건 부제가 따로 신자들의 증언을 듣고 첨가한 것이다.
31)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39년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이 보고서의 저본도 김 신부의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기해일기』였다. 순교자 약전 중 일부는 제외하고 새로 김성우 약전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1839년(기해)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MEP Vol.577, ff.831~960)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657~903쪽.
32) 1846년 9월, ‘1839년 순교자들의 행적’이 완성될 무렵에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관련하여 체포된 신자들이 포도청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순교자들의 약전을 새로 저술했다(A-MEP Vol.577, ff.966~971 ; 『페레올 주교 서한』, 905~927쪽). 그해 11월 파리외방전교회의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서한 안에 포함된 ‘1846년 순교자들의 행적’은 앞선 1839년 행적의 틀을 따라 기록되었다. 따라서 두 행적 모두 순교 이후의 시신 수습·안장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 행적은 홍콩에 있었던 최양업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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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 주교33)의 저서34)인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35)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36), 1866년 이후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록[약전]인 『치명일기』 37), 『병인치명사적』38), 『박순집 증언록』39)이 있다.
시복 수속을 위한 증인 시복재판록은 1839년(기해)과 1846년(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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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와 메스트르 신부에게 전해져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로 보내졌다. 이후 1839년과 1846년 순교자들이 시복되는데 두 행적이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33)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다블뤼 주교에게 순교사와 순교약전 정리를 전담하게 했다. 이로서 이전에 선교사제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던 작업이 좀 더 체계적으로 진행되었고, 내용도 풍부해 졌다. 다블뤼 주교는 순교자의 삶과 순교 외에 순교 이후의 과정 [수습, 안장]까지 자료를 수집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했고, 그 결과물이 다음의 두 저서이다.
34) 일반적으로 ‘순교자 약전’(1859년)과 ‘비망기’(1860년)로 불리는 두 책은 한국천주교회의 설립부터 1839~1841년까지 주요한 천주교 관련 사건과 천주교 박해[교옥], 순교자 관련 기록을 총정리한 것이다. 1874년 달레 신부가 저술한 최초의 한국교회사 통사인 『한국천주교회사』의 주요 저본이기도 하다.
35) 유소연 역주,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순교자 약전에 대한 완역 본이다.
36) 최석우·조현범·연숙진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 『교회와 역사』 356~53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2019. 비망기에 대한 역주본을 연재한 것으로, 조만간 완역본 책으로 간행될 예정이다.
37) 시복재판을 예비하기 위한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895년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치명일기』를 간행하여 배포했다. 순교지별로 구분하여 순교자의 명단과 간략 정보를 실었는데, 신자들이 이 명단을 확인하고 추가 증언을 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따라서 『치명일기』에는 순교자에 대한 내용이 많지 않으며, 시신의 수습과 안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38) 시복재판의 위임판사였던 서울대목구 부대목구장 드브레 주교는 주교관에 보관되어 있던 증언 및 관련 자료들을 필사하여 책자로 묶었는데 그것이 『병인치명사적』(전 24권, 1~2권누락)이다. 1866년 이후 순교자들[약 1,400명]에 대한 가장 방대한 자료인데, 시신의 수습과 안장이 기록된 순교자들은 전체 순교자 중에서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병인치명사적』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높다.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병인치명사적』 1~6, 천주교 수원교구, 2020.
39) 1888년에 박순집 베드로가 푸아넬 신부의 지시로 권치문 다태오에게 구술하여 기록한 자료를 다시 필사, 편집한 것이다(김영수 역주, 『박순집 증언록(ⅠⅡⅢ)』, 성황석두루가서원, 2001).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박순집 증언록』은 제1권만이 박순집이 증언한 것이며, 나머지 2, 3권은 다른 신자들의 증언록 모음이다. 『박순집 증언록』 1~3권과 『병인치명사적』 1~3권이 같은 내용의 다른 서책이라는 점은 이석원, 「병인치명사적 대조역주(전 6책) 해제」, 『교회사학』 17, 수원교회사연구소, 2020, 258~259쪽 ; 「『병인치명사적』 1~2권과 『박순집 증언록』 1~2권은 같은 내용의 자료이다 -『병인치명사적 전 24권 인명 색인』과 『박순집 증언록』의 비교 도표-」, 『교회사학』 18, 수원교회사연구소, 2021, 231~285쪽을 참조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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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에 대한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전 5권)40)과 1866년 순교자들에 대한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 1차』(교구재판, 전 10권), 『병인순교자 시복재판록 2차』(교황청위임재판, 전 9권)가 있다.41)이와 같이 ‘박해시기’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그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했고, 1839년과 1846년 순교자들이 시복되는 1925년과 병인 시복재판(2차)이 완료되는 1926년까지 관련 자료들이 대략 수합, 정리되었다. 1968년에 1866년 순교자의 시복이 이루어지고, 1984년 103위 성인이 탄생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와 1839년 이전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시복운동이 전개되었다. 그와 함께 1839년 순교자 중 시복대상자에서 제외되었던 서울 이외의 순교자들42)도 새로 대상자로 추가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시복대상자 관련 자료를 수합, 정리하는 자료집이 간행되었다.43)
2022년 현재 조선 후기와 근현대 순교자들이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으며 그에 대한 시복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시복자료집이 편찬, 간행되고 있는데 ‘박해시기’와 관련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자료집』을 2권까지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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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1839년(기해)과 1846년(병오) 순교자들[82위]에 대한 시복 수속이 1882~1883년부터 시작 되었다. 1839년과 1846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수속 과정 중 1886년에 증언 출석 재판이 마무리되었으며, 그 관련 기록이 5권으로 편집되었다. 이 시복재판록은 현재 판독대조 역주 본이 나와 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2, 천주교 수원 교구, 2011~2012
41) 1866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수속은 1899년부터 진행되어 1900년까지 1차 수속(교구재판)[29위]이, 1921~1926년 2차 수속(교황청위임재판)[26위]이 이루어졌다. 1차 시복재판록은 전 10권 중 6권이 남아 있으며, 2차 시복재판록은 전 9권 중 1권을 제외한 8권이 남아 있다. 병인 시복재판록의 판독역주 작업을 현재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다.
42) 서울 지역 순교자이지만 페레올 주교의 행적에서부터 제외되었던 이성례 마리아[1840년 당고개 순교자]가 시복 대상자로 추가되었다.
43) 1990년대 후반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간행한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시복 자료집』과 2000년대 후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간행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시복 추진이 진행되어 2014년 124위 복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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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복자료집들은 순교자별로 앞에서 언급한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으며, 후대의 전승[무덤 발굴]이나 족보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관련 기록을 확인하는데 유용하며, 인용된 원전 자료와의 검토도 쉽게 할 수 있다.44) 따라서 새로수합·편집된 시복자료집도 위의 서한[보고서], 순교자 행적[약전], 시복 재판록 자료들과 함께 검토하면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이장] 관련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2.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자료의 성격
위에서 언급한 대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자료들은 크게 선교사제나 신자들의 서한[보고서] 자료, 순교자의 행적[약전] 자료, 시복수속을 위한 증인 재판[시복재판] 자료로 구분할 수 있다.
선교사제들의 사목 서한[보고서]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순교자 관련 기록은 간략할 수 밖에 없고 시신의 수습·안장은 더더욱 비중이 작아지게 된다. 신자들의 서한 역시 마찬가지로 「백서」나 ‘신미년 서한’에서 시신의 수습·안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약전]을 목표로 기록한 자료에는 순교자의 생애와 순교 과정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은 시신이나 무덤에서 나타나는 영적 현상과 함께 순교 이후 과정으로서 약전에 포함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선교사제들이 작성한 약전이나 신자들이 증언한 약전(『기해일기』, 『병인치명사적』)은 개별 순교자에 대한 내용 서술이 대부분 길지 못하고 순교 과정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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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24위 복자와 133위 하느님의 종 자료에 비해 오히려 103위 성인의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이 주도한 시복시성 과정에서 한국어로 된 자료집이 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문제는 물론이고 순교자 전반에 대한 연구 진전을 위해서도 103위 성인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 수집과 정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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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이후 과정에 대한 서술도 짧거나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즉 누가 언제 시신을 수습하여 어디에 언제 안장했는가에 대한 사실관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거나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대신 영적 관련 내용이 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시복 수속(재판)은 시복대상자의 가족, 동료들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위임판사와 서기공증관 앞에서 명세를 하고 정해진 조목에 따라 답변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시복재판 조목 중에는 시신의 수습과 안장[이장], 그 과정에서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영적[증언]을 묻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45) 따라서 그 어떤 기록보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과 안장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집될 수 있었다. 특히 시신 수습과 안장에 참여했던 신자가 증인으로 참석하여 증언한 경우는 그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46)
시복재판 기록은 아니지만 박순집이 구술한 『박순집 증언록』 제1 권에는 시신의 수습, 안장에 대해 증언이 순교자 대부분에 첨부되어 있다. 47) 시복대상자가 극히 제한적이고 증언 내용이 많지 않은 1866년 순교자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박순집의 증언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크다.
서한[보고서] 자료와 행적[약전] 자료는 순교자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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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시복재판의 질문 조목 중 제21조목은 순교자의 시신 수습 여부를 묻는 것이고, 제24조목은 시신을 찾아 장사지냈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제25~48조목에서는 순교 후 일어난 영적 현상, 순교자의 유물 보관 여부, 순교자에 대한 공적 공경 여부 등이 있었다.
46) 증언자들이 수십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증언하는 것이고 시간과 지역 이름 등을 꼼꼼하게 증언하는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정보의 한계는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자료들에 비해 내용이 구체적이고 믿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재판 진행과 함께 시복대상자의 무덤을 위임판사와 서기공증관이 직접 답사하여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했다.
47) 박순집이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선교사제들과 신자들의 시신 수습과 안장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부친인 박 바오로가 1839년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 안장했고 그 뒤를 이어 박순집이 1866년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과 안장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도 높고 관련 정보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자신의 가족들이 많이 순교한 상황에서 그 가족 순교자에 대해 증언할 때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시신의 수습, 안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안장하지 못한 경우도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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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내용이 그리 많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시복재판록에는 수습·안장과 관련된 조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관련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집될 수 있었다.
세 가지로 구분한 자료들은 각자 특성이 있지만 동시에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에 대해 부족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선교사제에 대한 내용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국법에 따라 처형된 죄수라고 해도 그 가족이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인 정서일 것이고 효제(孝弟)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가족은 물론 친지와 지인까지도 시신을 수습하고 안장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런데 연고도 가족도 없는 서양인 선교사제에 대해 신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 시신을 수습·안장하려 한 것은 전통적인 가치관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조선 신자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내가 베르뇌 주교에게 천주교의) 현묘한 (도리를) 배웠으니 사제간 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다. 그 장[베르뇌] 주교의 혼이 천당에 오른[순교한] 날에 이르러서 그 영혼이 영원토록 무궁한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는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육신이 모래밭에 (버려져) 드러나 있다고 해도 조금도 애달프지 않다. 그러나 거룩한 혼(魂)과 아름다운 백(魄)이 수(십)년간 머물러 접해있던 그릇[器, 육신]이 새들에게 쪼아 먹히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나와 교우 최사관(崔士寬) 등 몇 명이 밤을 틈타 (베르뇌 주교의시신을) 거두어 몰래 와서현(瓦署峴, 왜고개)에 장사지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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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우포도청등록』, 무진년(1868) 3월 8일(양력 3월 31일) [영인본 중권, 1985, 699~700쪽] 戊辰 三月 初八日 罪人 趙成老 年六十 마두 … 於斯之間 學得戊辰 三月 初八日 罪人 趙成老 年六十 마두 … 學得其玄妙 師弟分已定矣 及其張主敎魂陞天堂之日 知有靈魂永享無窮之樂而些無肉身暴露沙場之哀 而旣是聖魂美魄 幾年留接之器 不當爲烏鵲所啄 故矣身與敎友崔士 寬等幾人 乘夜襲斂 暗葬於瓦署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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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3월에 우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조성로 마태오는 베르뇌 주교와 자신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로 표현했다. 조선사회에서 스승은 아버지와 같이 존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신자 조성로에게 주교는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바로 ‘영혼의 아버지’=신부(神父)였던 것이다.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해 순교한 날은 바로 영혼이 천당에 오른날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하며 그 시신이 모래밭에 뒹군다 해도 천주교의 가르침에서 보면 조금도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육신은 수년간 거룩한 영혼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결코 새들에게 쪼아 먹히는 참혹한 지경에 빠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과 함께 주교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백(魂魄) 이라는 유교적 개념을 사용한 것이 흥미롭기도 한데 유교적 인식과 천주교 교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조성로 같은 신자에게 주교=선교사제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컸는지 선교사제의 시신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법에 따라 순교자들의 시신은 3일 동안 광장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나[앵베르 주교]는 5월 27일 새벽에 (어떤 사람을 시켜) 시신들을 거둘수 있었고, 묘지로 쓰려고 미리 조금 사 두었던 (왜고개의) 토지에 모두 함께 매장할 수 있었다. … 이리하여 우리는 천국에 계신 많은 보호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바랄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 이 조선 땅에 신앙의 자유가 공포되고 교회가 번창할 때 공경할 성 유해를 충분히 가지게 되었다.49)
1839년 5월 24일 그해 첫 번째 참수 순교자가 배출되자 앵베르 주교는 신자로 하여금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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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A-MEP, Vol.1254, ff.151~152) ; 『앵베
르 주교 서한』, 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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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가 천주교회에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 순교자 안장을 지시한 것은 순교자의 유해를 가짐
으로써 나중에 성인품에 올라 천주교회의 주보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과 안장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그 순교자가 대목구장이자 주교일 경우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제들의 시신을 수습·안장하려 했던 것이다.
수습·안장 관련 자료의 두 번째 공통점은 시신이나 무덤에 나타나는 영적에 대한 증언이 많다는 점이다. 반면 수습·안장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명확하게 기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신자들의 인식에서 수습·안장의 구체적 과정보다는 영적 현상이 가지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해가 벌어지는 동안에 일어났던 기적들을 목격한 일이 그들의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고 한다.[신태보 수기] … ‘조선에서는 순교자들과 동정녀들과 관련하여 많은 기적들이 있었다.’[이승화(이태권) 수기] …
‘수많은 순교자들의 유해 근처에서 일어난 셀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을 사람들이 말하곤 한다’[신태보 수기] …
수도 한양에는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에서 시신을 지키는 외교인 파수꾼들이 있었다. 통상 3일 정도 그 장소에 시신을 버려두기 때문이었다. 이 파수꾼들은 시신 위에 불기둥이 나타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그들은 어째서 순교자들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지, 그리고 범죄자의 시체들마냥 악취를 풍기지도 않는지 자주 놀라워하였다.50)
(1867년 1월 16일 장 골룸바가 공주에서 교수되어 순교하자) 그 아들과 친정 외인[비신자] 동생과 6~7인이 가(서)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려 할 제 본 즉 목을 얽었던 자리는 붉은 빛이 나고 몸은 생명 있는 사람 같으매 그 외인[비신자] 동생이 하는 말이 “아마 누님이 살 듯 하니 방에 두 고 기다리자” 하거늘 (큰아들 정) 아나타시오(가) 말하되 “자고이래로 치명자의 시신이 이러하니라”하고 안장하였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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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ff.20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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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한 ‘박해시기’를 살아가야 했던 신자들에게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위로를 주고 구원의 희망을 품게 하는 징표로 여겨졌던 것이 영적 현상이었다. 많은 순교자들이 순교하는 순간에, 또는 그 시신이나 시신이놓여 있던 곳[묻혀 있던 곳]에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은 신자들과 비신자 들에게 목격되었고 주위에 전파되었다.
더 나아가 치명자의 시신은 원래 이래야 한다는 인식[기대]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즉 ‘참된 순교자’의 징표로 당연히 영적 현상이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었다.
신자들의 증언 기록에 주로 나오는 영적 현상은 시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평안하고 깨끗했으며, 시신 주변에 불기둥이나 빛이 났다는 것이었다. 모방 신부의 사례처럼 선교사제들 역시 순교 사적을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할 때 영적 현상이 있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한 증인을 확보하고자 했다. 시복재판의 조목 중에 영적 현상에 대한 질문52)도 있었다는 점에서 순교자와 관련된 영적 현상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적 현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수습·안장 과정에 대한 사실 확인을 약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즉 순교 이후 과정에 대한 기억이나 증언에서 영적 현상 유무가 수습·안장 내용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된것이 아닌가 한다. 그 결과 교회 측 자료에서 시신 수습·안장에 대한 구체
적인 증언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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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병인치명사적』 23권 193쪽.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병인치명사적』 5, 천주교 수원교구, 2020, 545~547쪽.
52) 위의 각주 45번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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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시복자료집을 포함하여 위에 언급한 자료들을 검토하여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기록들을 수합, 정리했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수정·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수합한 자료들을 통해 시신의 수습·안장[안장 못한 경우도 포함]이 확인된 순교자는 275명이며, 그에 대한 시론적 분석은 다음 장에서 다루어 볼 것이다.
Ⅲ. 수습, 안장[이장]의 시기별 지역별 특성
1. 시기별 특성 - 수습·안장의 비율과 박해의 강약 및 수습 노력의 상관성 확인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사학으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았던 ‘박해시기’(1791~1879년)에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 275명을 시기 연도별로 분류하면 다음 도표 2와 같다.
이 시기 구분은 대규모 천주교 박해인 교옥이 일어난 1801년(신유), 1839년(기해)·1846년(병오), 1866년(병인)을 기준으로 그 전후 시기를나눈 것이다. 박해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에는 순교자의 숫자도 적었고 시신이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숫자도 적었다. 1791~1800년 시기에는 천주교 박해 지역이 제한적이고 확인된 순교자들도 소수였다.
이 경우는 1846년 시기나 1878~1879년 시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박해가 거센 시기에는 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고, 그에 따라 시신이 수습·안장된 순교자도 많았다. 1838~1841년까지 이어졌던 ‘기해교옥’과 1865~1873년까지 이어졌던 ‘병인교옥’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1801~1802년 ‘신유교옥’은 이러한 경향과는 거리가 있다.
‘신유교옥’은 국가적 차원에서 발생한 천주교 박해로 처형된 신자가 100명이 넘었고,53) 복자(59위)와 하느님의 종(19위)이 된 순교자도 73명에 다다랐다. 그러나 시신이 수습된 순교자는 15명에 불과했고, 주문모 신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특히 박해의 중심지였던 서울에서 시신이 수습된 경우가 적었다. 또한, 가족들이 수습한 경우를 제외하면 신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시신을 수습한 경우가 없었다.
그에 반해 ‘기해교옥’의 박해 규모는 ‘신유교옥’과 비슷했지만,54) 시신이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수가 3배 이상으로 많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는 첫 번째 참수 순교자가 나오자 3일 후 신자들로 하여금 시신을 수습하여 왜고개에 안장했다. 이처럼 선교사제가 주도적으로 나설 만큼 당시 신자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안장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지도자 신자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당시 기록에서 순교자 시신 수습·안장을 주도한 신자들이 확인된다.
『기해일기』를 작성했던 현석문 가롤로[1846년 순교, 성인]는 선교 사제의 시신 수습에도 참여했고, 헌금을 모아 갇힌 신자들을 돌봐주었다.55)
역시 『기해일기』 작성에 참여했던 최영수 필립보[1841년 순교, 하느님의 종]는 수배를 피해 피신을 다니면서도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수습· 안장했다.56) 허대복 안드레아[1841년 순교, 하느님의 종]도 감옥에 찾아가 갇힌 신자들을 위로하고 순교자의 시신을 많이 수습·안장했다.57) 권 득인[1839년 순교, 성인]의 처남으로 같이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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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이장우,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92~106쪽. <표5> ‘신유박해 때 처형된 사람들’에 나온 숫자는 120명이 된다.
54) 『기해일기』 총론에 의하면, 서울에서만 참수 순교자가 50명, 옥사 순교자가 60명이었다. 전라, 강원, 충청, 경상 지역을 다 포함하면 대략 150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기해일기』(역주본), 17~18쪽.
55) 97회차 이 베드로 증언 (5권 48하)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733~735쪽.
56)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f.17 ; 유소연 역주,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32쪽.
57)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f.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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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안드레아는 순교자들의 시신 안장에 깊이 관여했고, 체포된 신자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어 옥살이를 견디게 했다. 그는 돈의 출처를 궁금해 한 포졸들에게 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58) 최경환[1839년 순교, 성인]이 헌금을 모아 동네 신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안장한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59) 이문우 요한도 7~8명 신자들과 상의하여 밤에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했다.60) 박순집의 부친 박 바오로[1868년 순교]는 형제와 아들을 데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선교사제 3명의 시신을 수습·안장했다.61) 그는 당시 열성적인 신자 5~6 명을 데리고 순교자 시신을 수습·안장할 때 밤이면 옷을 벗고 다만 고의적삼 걸치고 거적 하나에 시신 2~3구를 싸서 져다가 묻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수많은 시신을 장사했다고 한다.62)
자신도 잡혀 순교하는 신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안장에 참여했고, 그 결과 기해교옥 시기 많은 순교자들이 안장될 수 있었다.
1846년 ‘병오교옥’에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9명이 순교자[모두 성인이 됨]가 나왔다. 신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시신을 수습했으며, 나머지 포도청 옥 순교자 7명의 시신은 한이형 은이 회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과 신자들이 수습했다. 김대건 신
부와 신자들 시신의 수습·안장을 주도한 대표적 신자들은 박순집의 부친 박 바오로63)와 김 프란치스코64)이다. 박해의 여파가 크지 않았고, 서울 지역 신자들이 ‘기해교옥’과 마찬가지로 시신 수습·안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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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모방 신부의 「1839년 8~9월의 마지막 서한(박해 보고서)」(A-MEP, Vol.1260, f.180)
59) 『기해일기』(107a~109a),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자 역사 비
망기』,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
60) 『기해일기』 88b~91b.
61) 85회차 박순집 베드로 증언 (4권 70하)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557쪽.
62) 『박순집 증언록』 1권 18 뒤~19앞 ; 김영수 역주, 『박순집 증언록(ⅠⅡⅢ)』, 성황석두루가서원. 2001, 62쪽.
‘병인교옥’ 시기에는 수습·안장된 순교자가 많았지만 반대로 수습하지 못한 순교자 시신도 많았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박해[교옥]에 비해 그 기간이 길고, 전국에 걸쳐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것을 생각해 보면 수습· 안장된 130명의 수65)는 많은 것이 아니다. 가장 방대한 자료인 『병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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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박 바오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새남터 모래밭에서 김대건 신부 손에 남은 흉터[예전 강아지에게 물린 상처]를 확인하고 시신을 찾아 안장했다(89회차 김 마리아 증언 (5권 8하)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613~615쪽). 또한, 사돈인 임치백이 순교한 후 그 아들과 박 바오로가 함께 시신을 찾아 둔지미에 장례를 지냈다. 72회차 김성서 요아킴 증언 (4권 8상)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65쪽.
64) 교회의 밀사로 활약했던 김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이 현석문의 시신을 찾아 왕십리에 장사지낼 때 자신이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옥중에서 순교한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의 시신이 수구문[광희문] 밖에 버려진 것을 신자들이 찾아 장사지낼 때도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81회차 김 프란치스코 증언 (4권 53상~54하)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503쪽, 507쪽.
65) 병인교옥 시기 시신이 수습된 순교자는 129명이다. 연도 미상으로 분류된 순교자 1명[시신안장됨]도 병인교옥 시기로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숫자를 포함하면 130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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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적』과 『박순집 증언록』(제1권)을 통해 순교자의 수를 파악해 보면 대략 1,432명에 이른다. 이 순교자 추정 수와 수습·안장된 신자의 수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적은 비율임을 알 수 있다.
1866년 초반 박순집을 비롯한 신자들이 선교사제들과 지도자 신자들의 시신을 상당수 수습·안장하는데 성공했는데, ‘기해·병오교옥’과 비슷하게 신자들이 선교사제와 신자들의 시신을 수습·안장하려고 노력했기때문이다. 하지만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 박해가 다시 격화되면서 순교자 시신의 수습이 힘들게 되었다.
위의 도표 3를 보면 1867년에 비해 1868년 시신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수가 적게 나온다.(38명 : 21명) 1868년 덕산굴총사건으로 말미암아 천주교 박해가 더 격렬해졌고 순교자들이 1867년보다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235명 : 344명)과는 맞지 않은 수치이다. 혹독한 박해 때문에 시신 자체가 수습이 되지 못하거나 시신 수습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게 아닌가 추정된다. 1869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순교자가 나왔지만, 시신 수습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천주교 박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혹독한 박해라는 배경 아래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2. 지역별 특성 경기 지역, 충청 지역, 전라 지역, 경상 지역의 특성 확인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사학으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았던 ‘박해시기’(1791~1879년)에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 275명을지역, 순교지별로 분류하면 다음 도표 4와 같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수치를 지역별로 보면 서울(95명) 〉 충청(74명) 〉 전라(31명) 〉 경상(21명) 〉 경기(6명) 순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울과 충청 지역이 순교자도 많고 시신이 수습·안장된 시신도 많은 것은 당시의 박해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기 지역의 수가 적은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경기 지역은 서울, 충청 내포와 함께 박해가 집중되었던 곳이자 원래 신자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특히 ‘병인교옥’ 시기에 경기 지역의 신자들이 많이 체포되어 순교했음에도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수가 적다.
『치명일기』와 『병인치명사적』을 통해 ‘병인교옥’ 시기 지역별 순교자 비율을 보더라도, 경기 지역 순교자가 서울과 충청 다음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서울(359명) 〉 충청(326명) 〉 경기(75명) 〉 경상(37명) 〉 전라(34명) 순이며, 『병인치명사적』에 의하면 충청 (625명) 〉 서울(447명) 〉 경기(127명) 〉 경상(63명) 〉 전라(49명) 순으로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지역에서 수습·안장된 순교자 수가 적고, 비율로 볼 때도 전라, 경상 지역보다 낮은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병인교옥’ 시기에 서울과 가까웠던 경기 지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한 경우가 많았고, 교옥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신앙공동체가 거의 다 파괴되고 신자들이 흩어지면서 시신의 수습·안장 과정을 목격하거나 증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 지역은 서울 지역 다음으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건이 많지만, 수습된 시신은 대부분 1866~1867년 순교자였다. 즉 1868년 덕산굴총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가 충청 지역에 더 격화되면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이 어려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충청 지역을 더 세분화하면 공주 감옥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습·안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명이 한꺼번에 한 구덩이에 묻힌 공주 국실[현재 세종시 금남면 국곡리] 신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66) 그 수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높은 수치이다. 실제로 수습·안장된 경우가 많았거나 증언 기록으로 채록된 비율이 높았다고 여겨진다. 이는 충청의 다른 지역 순교자 및 수습된 시신 숫자를 비교해 보아도 확인된다.67)
병인교옥 당시 전라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박해의 정도가 심하지않았고, 따라서 순교자들의 수도 높지 않았다. 하지만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수도 많고,68) 반대로 수습 못한 순교자의 수도 많다. 특히 기해교옥 시기 참수된 신자가 모두 수습·안장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반대로 1839년 당시 10명의 순교자가 수습·안장이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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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1866년 음력 4월에 국실 신자 27명이 공주 포교에게 잡혀갔고 그중 19명이 공주에서 교수되어 순교했다. 그때 함께 잡혀 갔던 박중현과 배군일이 그 19명의 시체를 다 져다가 한 구덩이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인치명사적』 24권 5~6쪽.
67) 충청 지역에서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공주, 홍주, 해미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주 순교자는 『치명일기』에는 164명, 『병인치명사적』에는 303명으로 나오는데 수습·안장된 순교자는 46명이다. 홍주 순교자는 『치명일기』에는 83명, 『병인치명사적』에는 113명으로 나오는데 수습·안장된 순교자는 8명이다. 해미 순교자는 『치명일기』에는 39명, 『병인치명사적』에는 84명으로 나오는데 수습·안장된 순교자는 4명이다. 해미 지역의 수습·안장 비율이 대략 5~10%, 홍주 지역의 비율이 대략 7~10%인데 비해, 공주 지역의 비율은 15~28%로 압도적으로 높다.
68) 1866년 전주 참수 순교자들의 시신은 가족·신자들에 의해 수습·안장되었다. 『병인치명사적』과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2차)에 관련 증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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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전주 지역 순교자의 시신·안장 내용은 하나의 문서에 근거한 것이다. 1922년 2월 서산 상홍리본당에 제출된 김 아우구스티노의 증언과 소장 문서에는 1839년 참수, 장살된 신자에 대한 시신 수습·안장, 이장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69) 이 문서는 1841년 4월 17일 장사를 지 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 바오로와 진산 마근리 지역 신자들이 힘을 합쳐 전주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마근리는 물론 인근 고산 지역, 먼 남포와 거창까지 가서 시신을 안장한 것이다.70)
이 문서를 제출한 김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에 의하면 1866년 봄에 김아우구스티노의 부친인 김 요한 회장[김 바오로의 아들]이 신자 5명과 함께 홍재영과 심 바르바라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산 신응왜재에 있는 조부 김 바오로의 무덤 옆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장의 이유는 나와 있지않고, 이장 과정에서 가족이 병이 낫는 영적 현상을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71)
신유교옥에 순교한 유항검 가족 7명에 대해서 그 시신이 수습·안장되었는지는 자료에서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1914년 4월 초남리 발굴을 통해 유항검과 유중철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유항검 가족이 그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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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오래 보관된 문서에 의하면, 증언자의 조부인 김 바오로는 동네 신자들과 함께 1839년 5월에 참수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 김대권 베트로, 정태봉 바오로, 이일언 욥, 이태권 베드로를 진산 마근리[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로 안장했다. 그해 11월에 참수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 오종례 야고보, 최 바르바라, 이 막달레나, 옥사한 심 아가타[심 바르바라의 오기로 보임, 홍재영의 며느리] 등 5명의 시신도 수습했다. 11월 순교자 중 홍재영과 심 아가타 [바르바라]는 마근리에 안장되었다. 나머지 시신들도 신자들과 함께 고산 석장리[현재 전북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와 남포 간재[현재 충남 보령시 주산면 금암리], 거창 왕바위[경남 거창군 응양면 신촌리]로 안장한 것으로 나오는데 원문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해석하기 어렵다. 반면 박중화 베드로, 송 필립보, 김여첨 도미니코, 최왈보, 신 요한 사도, 김 아가타, 신신택 안드레아, 임 서방, 이 서방, 홍 영해(嬰孩, 어린 아기)[홍봉주와 심 바르바라의 아들] 등 10명의 장살 순교자는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나온다. 10명의 순교자에 대해서는 『일성록』 헌종 5년(1839) 8월 19일[양력 9월 26일] 기사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비망기』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인명을 비정할 필요가 있다.
70) 『병인치명사적』 16권 31~32쪽 ; 『병인치명사적』(역주본) 3책, 175~177쪽.
71) 『병인치명사적』 16권 28~30쪽 ; 『병인치명사적』(역주본) 3책, 169~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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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72) 출토된 지석으로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이 확인된 것인데 이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례와 비슷하다.
경상도 지역 역시 병인교옥의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지역이었다.
대신 1815년 을해교옥과 1827년 정해교옥의 중심 지역이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특이한 점은 후대 전승에 의해 순교자 무덤이 발굴되어 유해가 수습되었다는 것이다.73)
대구의 참수 순교자 중 1867년에 순교한 이윤일 요한[성인]을 제외한 나머지 10명 복자, 즉 을해교옥74)과 기해교옥75) 순교자들에 대해 신자들이 아닌 관원과 아전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나중에 신자들이 수습해가도록 도와주거나 예를 갖추어 안장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처형된 천주교 신자의 임시 무덤에 명패를 세워 시신을 쉽게 찾아갈수 있도록 한 것은 상주에서도 확인된다.76) 김 수산나의 아들이 직접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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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빅벨, 1998, 950~951쪽, 1240~1241쪽.
73) 1866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1866년 대구에서 순교하여 김해에 안장되었다는 신석복, 1868년 동래에서 순교한 이정식과 양재현, 1868년 울산에서 순교한 허인백, 이양등, 김종륜, 1867년 진주에서 순교한 정찬문[모두 복자]의 무덤이 후손들의 전승에 의해 발굴되었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제5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8, 359쪽, 367쪽, 372쪽, 396~403쪽, 412쪽.
74) 1816년에 참수된 7명 순교자들의 시신은 관례대로 처형장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 관장의 명령에 따라 인근 지역에 매장되었다. 땅속 깊이 묻지 않고 각자 비문이 적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시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4개월 후 친척과 신자들이 그들의 시신을 찾아 다른 적당한 장소로 옮겨 무덤 네 개를 만들고 안장했다. 다블뤼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ff.250~251.
75) 12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에야 참수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3명 모두 복자]의 시신은 아전들에 의해 수습되었고, 그들은 예를 갖추어 장사를 치러주었다. 이러한 사례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다고 다블뤼 주교가 강조했을 만큼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다블뤼 주교는 오랜 감옥 생활 중에 순교자들이 보여주었던 훌륭한 귀감에 탄복한 아전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존경을 표했다고 해석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ff.389~390.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f.78 ;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역주본), 122쪽.
76) 1867년 1월 교수형을 받아 치명한 김 수산나[하느님의 종]의 아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을 때 상주 영장이 신자들의 무덤 위에 명패를 박아 놓고 시신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지시를 내렸음을 알게 되었다. 김 수산나의 아들이 영장을 찾아가자 그는 시신을 싸맬 수 있는 자리와 돈을 주고 문서와 대조한 다음 무덤 자리를 가르쳐 주도록 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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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한 내용을 보면, 처형된 신자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관원과 아전 등이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 수산나가 자신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미리 사발에다가 글씨를 써서 옥사장이에게 부탁을 했고, 옥사장이가 그 부탁대로 사발을 시신과 함께 묻었음을 알 수 있다. 김 수산나가 남편과 자신의 이름[세례명], 그리고 아들의 이름까지 적어 놓은 사발은 지석 역할을 한 것이다.
옥졸이나 군졸이 처형된 신자의 시신을 가매장한 후 그 무덤 앞에 명패를 박아 놓는 경우는 1867년 1월 홍주에서 순교한 최 마리아[하느님의 종]77)와 1866년 12월 전주에서 참수 순교한 조화서 베드로 등 6명 순교자[성인]78)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방식이 관원이나 옥졸들의 ‘배려’인지 ‘관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을 쉽게 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반대로 시신을 마구 버려두어 구분하기 어렵게 되면 시신의 수습 가능성은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수습·안장된 순교자 시신의 숫자와 사례를 지역 순교지별로 구분해 보면 지역별 특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간의 비교도 가능하다. 앞으로도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통해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에 대한 시기별, 지역별, 주제별 분석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 ‘박해시기’ 이장 사례와 그 특성
마지막으로 ‘박해시기’ 이미 매장한 시신[유해]를 다시 옮기는 이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학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신자들의 시신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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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명패를 보고 모친의 무덤을 찾았고, 모친의 시신에서 그가 생전에 글을 적어 함께 묻게한 사발 그릇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 수산나의 아들은 쉽게 모친의 시신을 찾아 안장할 수 있었다. 『병인치명사적』 3권 40~45쪽 ; 『병인치명사적』(역주본) 1책, 149~159쪽.
77) 『병인치명사적』 21권 163~165쪽 ; 『병인치명사적』(역주본) 4책, 595~597쪽.
78) 『병인치명사적』 24권 43~44쪽 ; 『병인치명사적』(역주본) 5책, 663~6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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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학죄인’인 신자들이 제대로 장례 도구를 갖추어 안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옥졸이나 아전들에 의해 가매장된 시신을 찾아 적절한 곳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고, 버려진 시신을 찾아 가매장을 한 후 나중에 옮겨가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주교와 신부, 어느 정도
부유한 집안의 신자가 아니라면 관을 마련하여 제대로 안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자료 속에서 확인되는 시신 이장 사례는 많지 않으며, 주로 선교사제[김대건 신부 포함] 등이 격식을 갖춘 이장을 할 수 있었다.
선교사제의 경우라도 고마 수영 근처에 매장되었던 다블뤼 주교 등의 시신은 들짐승들에 의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주교 등 순교자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다시 남포로 이장되었다.79)
한편 서울 인근 묘지로 많이 사용되던 노고산, 문배부리, 왜고개 등의 지역은 비교적 매장이 쉬웠지만, 수많은 무덤 속에서 순교자의 무덤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천주교 박해가 지속적으로 발생되는 상황 속에서 순교자의 무덤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 시신의 경우도 문배부리에 가매장되었다가 박해가 잦아든 이후에 정식으로 장례 도구와 행렬을 갖추어 미리내에 이장할 수 있었다.80)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이장이 주로 유해의 보존을 위해 이루어졌다면, 좀 다른 이유로 이장된 경우가 확인된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시신은 노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후 많은 신자들이 그 무덤에 와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순례가 천주교회에 위험
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 신자들이 상의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인적이 드문 높은 산[관악산의 줄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천주교회의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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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이후 다블뤼 주교 등의 유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1882년 블랑 신부의 지시에 따라 다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에 보내졌다. 이후 신앙의 자유가 확보되자 다블뤼 주교 등의 시신은 조선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80) 86회차 박순집 베드로 증언 (4권 73상)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5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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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이며 스승이자 ‘영혼의 아버지’인 선교사제들에 대한 공경심으로 신자들이 노고산 무덤에 찾아가게 되었는데, 많은 신자들이 무덤 앞에서 기도를 함으로써 신자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들킬 위험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에 천주교회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이장을 결정한 것이었고, 이는 ‘박해시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능한 이장이었다.
Ⅳ. 맺음말
1791년(신해)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해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구베아 주교의 서한이다. 이 기록은 조선 신자들이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근거한 것인데, 그들의 신앙과 순교, 순교 이후 과정[영적 현상 포함]까지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천주교 옥사를 주도한 조선 정부의 기록에는 신자들에 대한 심문과 처분[처형, 유배, 석방] 내용만 나오고, 처형 이후 신자들의 시신이나 무덤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미 죽은 시신은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801년 이후의 관변 측 사료에서도 천주교 신자의 시신이나 수습·안장에 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1791년 이후 1879년까지 천주교가 금지되어 탄압받았던 시기 동안 크고 작은 박해가 이어졌고 순교자들은 계속 생겨났다. 동시에 그들의 순교 과정과 죽음 이후를 목격하거나 들은 이들의 진술도 신자나 선교사제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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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페레올 주교의 「1839년(기해)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MEP, Vol.577, f.855) ; 『페레올 주교 서한』, 705~707쪽. 70회차 오 바실리오 증언 (3권 96상~96하)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35~337쪽. 76회차 김 프란치스코 증언 (4권 28상~28하) ; 『기해·병오 순교자시복재판록』 423~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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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료들을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문제에만 국한하여 그 성격을 구분해 본다면, 선교사제나 신자들의 서한[보고서] 자료, 순교자의행적[약전] 자료, 시복 수속을 위한 증인 재판[시복재판록]으로 나눌 수있다.
서한[보고서] 자료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순교자 관련 기록은 간략할 수 밖에 없고 시신의 수습·안장은 더더욱 비중이 작아지게 된다.
순교자들의 행적[약전] 자료에는 순교자의 생애와 순교 과정이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하지만 실제 선교사제들이 작성한 약전이나 신자들이 증언한 약전은 누가 언제 시신을 수습하여 어디에 언제 안장했는가에 대한 사실관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거나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시복재판록 자료는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과정에 대한 가장 상세하고 신빙성이 높다. 재판 조목 중에 시신의 수습과 안장[이장], 관련된영적 사실을 묻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기록보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과 안장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집될 수 있었다. 시복재판 기록은 아니지만 박순집이 구술한 『박순집 증언록』 제1권에는 시신의 수습, 안장에 대해 증언이 순교자 대부분에 첨부되어 있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관련 자료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하나는 부족한 자료 내용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선교사제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신자들에게 선교사제는 스승이자 영혼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안장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제들의 시신을 수습·안장하려 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시신이나 무덤에 나타나는 영적에 대한 증언이 많다는 점이다. 신자들의 증언 기록에 주로 나오는 영적 현상은 시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평안하고 깨끗했으며, 시신 주변에 불기둥이나 빛이 났다는 것이었다. 수습·안장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명확하게 기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시 신자들이 수습·안장의 구체적 과정보다 는 영적 현상이 가지는 의미를 더 크게 인식한 것이다.
위의 자료들을 통해 시신의 수습·안장[안장 231명, 안장 못함 44명] 이 확인된 순교자는 275명이며, 이를 시기 연도별, 지역 순교지별로 분류 하고 도표 2~4로 제시했다.
시기 구분은 대규모 천주교 박해[교옥]가 일어난 1801년(신유), 1839 년(기해)·1846년(병오), 1866년(병인)을 기준으로 그 전후를 나눈 것이다. 박해의 정도가 약했던 시기에는 순교자의 숫자도 적었고 시신이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숫자도 적었다. 하지만 1801~1802년 ‘신유교옥’은 이러한 경향과는 거리가 있다. 그에 반해 ‘기해교옥’의 박해 규모는 ‘신유교옥’과 비슷했지만, 시신이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수가 3배 이상으로 많다. ‘병오교옥’의 경우도 순교자 9명 중 8명이 신자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당시 선교사제와 신자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안장해야 한다는 인식했고, 지도자 신자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일을 했다. ‘병인교옥’ 시기는 수습·안장된 순교자가 많고 반대로 수습하지 못한 순교자 시신도 많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박해에 비해 그 기간이 길고, 전국에 걸쳐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것을 생각해 보면 수습·안장된 비율은 매우 낮다. 격렬한 박해가 지속되면서 신앙공동체가 거의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신자들이 흩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시신을 수습·안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박해시기’ 전체 순교자가 약 1,700명 중에 수습·안장된 순교자는 231명에 불과하며 비율로는 13.58%이며, 7명 중 1명의 시신도 수습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병인교옥 시기 순교자 약 1,400명 중 수습·안장된 순교자는 130명[연도 미상 포함]에 불과한데, 비율로는 9.2%이며, 10명 중 1명의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셈이다. 박해 상황이 혹독할수록 수습· 안장의 비율은 줄어들 수 밖에 없지만, 가족과 신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습·안장하는데 노력함으로써 순교자의 시신이 수습될 수 있었다.
시신의 수습·안장 여부가 확인되는 순교자 숫자를 지역, 순교지별로 비교하면 서울 〉 충청 〉 전라 〉 경상 〉 경기 순으로 정리된다. 실제 순교자 수치로는 서울, 충청 다음인 경기 지역에서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수가 적은 것이 특이하다. ‘병인교옥’ 시기에 서울과 가까웠던 경기 지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한 경우가 많았고, 교옥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신앙공동체가 거의 다 파괴되고 신자들이 흩어지면서 시신의 수습·안장 과정을 목격하거나 증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 지역은 서울 지역 다음으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건이 많지만, 수습된 시신은 대부분 1866~1867년 순교자였다. 즉 1868년 덕산굴총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가 충청 지역에 더 격화되면서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이 어려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충청 지역을 더 세분화하면 공주 감옥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습·안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라 지역에서는 ‘병인교옥’ 당시 박해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고, 따라서 순교자들의 수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수습·안장된 순교자의 비율은 높은 편이다. 특히 ‘기해교옥’ 시기 참수된 신자가 모두 수습·안장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경상도 지역 역시 ‘병인교옥’의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지역이었다. 대신 1815년 을해교옥과 1827년 정해교옥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 시기 순교자들의 시신은 신자들이 아닌 관원과 아전이 수습하여 나중에 신자들이 수습해 가도록 도와주거나 예를 갖추어 안장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후대 전승에 의해 순교자 무덤이 발굴되어 유해가 수습되기도했다.
‘박해시기’ 이미 매장한 시신[유해]를 다시 옮기는 이장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료 속에서 확인되는 시신 이장 사례는 많지 않으며, 주로 선교 사제[김대건 신부 포함]등이 격식을 갖춘 이장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서울 인근 묘지로 많이 사용되던 노고산, 문배부리, 왜고개 등의 지역은 비교적 매장이 쉬웠지만, 순교자의 무덤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이장이 주로 유해 보존을 위해 이루어졌다면, 다른 이유로 이장된 경우가 확인된다. 수많은 신자들이 노고산에 있는 선교사제의 무덤을 순례하자 위험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인적이 드문 높은 관악산으로 이장하였다. 천주교회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이장을 한 것이었고, 이는 ‘박해시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료 분석과 기초 연구를 바탕으로 앞으로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에 대한 시기별, 지역별, 주제별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발굴, 출토되는 유물[지석]과의 비교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