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6월의 제주, 생각만 해도 즐겁습니다. 수국이 한창이겠죠.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 피는 꽃이라 '비의 꽃'으로도 불립니다. '슬픈'이라는 단어와도 어울리는 꽃이죠. 시인은 그런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기 위해 수국을 감시합니다. 사실은 수국에 푹 빠지는 거지요.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냥 툭, 말을 걸듯, 내던지듯 다가오는 말이네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혼자 살면서 자신을 알게 되었어요'라는 말은 전에는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누군가와 헤어져 지금은 혼자가 된 상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너무 큰 그림을 그렸나 봐요, 상대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자신도 자신을 모르겠다는 말이죠. 나도 나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마음을 먹었다가도 그새 마음이 헝클어지고 깨지기도 하잖아요. 잊어야지 해도 어느새 또 떠 오르는 일, 그런 사람이 있죠.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은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진술합니다.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은 '나는 더 이상 상처받기 싫다'라는 말로 들려요. 아주 심한 사랑의 상처가 보입니다. '수국의 즙'은 수국주(酒)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시인은 술은 약하다고 했으니 수국차만 마셔도 취할 것 같아 보여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제주의 삼다(三多)가 바람, 여자, 돌이라죠. 바람은 모든 걸 날려버리는 겁니다.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혀 나를 홀라당 드러냅니다. 모든 걸 다 드러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이제 하나씩 다져 나가야 합니다.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제주 살이가 즐겁지만 서울에서의 삶이 즐거웠나 봐요. 더구나 그와의 사랑의 추억이 많이 묻어있으니까요. 이젠 그런 모든 걸 잊어버리고 제주에서 단단히 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눈물을) 훔지지도 않을 거라며 마음을 결정합니다.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웃기면 즐겁고 행복한 삶이어야 하는데 시인의 삶은 웃기고 이상한 삶이군요. 웃는다는 말이 진짜 좋아서 웃는 것일까요? 아니면 웃음으로 해서 과거의 슬픈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요?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제주에 살러 온 사람들은 쉼이나 안식을 위해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일겁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여유, 약간의 지겨움을 즐기는 것이죠. 그런 곳에 현상수배범은 어울릴 턱이 있나요. 언제든 제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죠. 푸른 꿈이 있으니까요.
즐거운 시입니다라고 적고 싶은데 왠지 즐겁지가 않고 애잔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아직도 제주에 살고 있을까요? 벌써 현상수배범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진 않을까요? 그를 영영 잊어버렸을까요? 하루에도 수십 차례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모습이 그녀를 가만히 두었을까요? 수국의 즙은 어떤 맛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