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특히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있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살지요. 그런데 사랑이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그것의 자연스러운 특성인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을 기리는 노래나, 스승을 기리는 노래들은 한결같이 그 은혜와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스승의 은혜, 부모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아무리 갚고자 노력할지라도 그것을 갚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자가 스승이 되면 자신의 제자에게 내리사랑을 베풀게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면 자기 자식에게는 내리사랑을 아낌없이 베풀게 되지요.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이요 흐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치사랑은 없다.”는 말에 굳이 동의하고 동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에게, 부모에게 그분들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방식으로, 그렇게 똑같이 사랑을 베푸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치사랑’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치사랑은 없다.”는 그 말 속에는 타락한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부패성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왜 없겠습니까?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궤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 하나님에 대한 반역, 부모님에 대한 거역, 그리고 지나친 자기 주장... 이런 것은 인류 역사 속에 계속되어 왔고, 성경의 몇몇 구절들에서는 말세의 징조로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딤후 3: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평가하십니다. 윤리적으로 말하여도 자녀가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윤리적인 것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기에 부모님에 대한 순종과 효도는 ‘신앙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종교 행위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지지고 볶는 관계와 삶 속에서 가장 잘 증명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