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97卷-列傳10-李永-000
李永.
#高麗史97卷-列傳10-李永-001
○李永字大年安城郡人
이영의 자는 대년(大年)이니 안성군(安城郡) 사람이다.
父仲宣以本郡戶長選爲京軍.
그의 아버지 이중선(仲宣)은 그 고을의 호장(戶長)으로 있다가 경군(京軍)으로 선발되어 입대하였다.
永幼從師學父沒欲繼永業田爲胥吏以狀付政曹主事揖不拜主事怒且罵.
이영은 어려서 선생에게서 글공부를 하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영업전(永業田)을 물려받고 서리(胥史)로 되려는 생각으로 청원서를 정조 주사(政曹主事)에게 제출하면서 인사를 하였는데 읍(揖)만 하고 절(拜)하지 않으므로 주사가 성이 나서 그를 꾸짖었다.
永卽裂其狀曰:
이영은 즉석에서 청원서를 찢어 버리면서
"吾可取第仕朝何禮汝輩爲?"
“내가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서 벼슬하겠는데 무엇 때문에 너희들 따위에게 절한단 말이냐?”라고 말하였다.
肅宗朝擢乙科直史館.
그 후 과연 숙종 때에 을과(乙科)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官)으로 임명되었다.
內侍林彦請討東女眞永曰:
내시 임언(林彦)이 동여진을 토벌하자고 건의한 데 대하여 이영이 말하기를
"兵凶器戰危事不可妄動
“무기는 흉악한 기계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니 함부로 발동하여서는 안 됩니다.
彦當無事時欲用兵生釁甚不可也."
임언은 아무 사변도 없는 이때에 무력을 사용하여 분쟁을 일으키려 하니 대단한 잘못입니다.”라고 하였으나
王不聽命平章事林幹討之永亦從軍師敗坐免官.
왕이 듣지 않고 평장사 임간에게 명령을 내리어 여진을 토벌하게 하고 이영도 역시 종군하였는데 패전한 죄로 면직당하였다.
後知京山府以廉勤
후에 경산부(京山府) 원으로 임명되어 백성에게 청백했고 직무에 근면하였다.
聞累遷禮部侍郞右諫議大夫.
이것이 상부에 알려져서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예부시랑 우간의대부로 되었다.
仁宗初知御史臺事寶文閣學士及李資謙殺韓安仁永以安仁妹壻坐流珍島或有告永曰:
인종 초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보문각 학사로 임명되었더니 이자겸이 한안인을 죽인 후 이영을 한안인의 매부라 하여 공모자로 몰아 진도(珍島)로 귀양 보냈는데 어떤 사람이 이영에게 말하기를
"公之母子將沒爲奴婢."
“당신의 어머님과 아들이 장차 적몰당하여 관청의 노비로 된답니다”라고 하였더니
永曰: "吾內省不疚故忍死以待若老母以予故沒爲賤隸吾苟生何爲?"
이영이 대답하기를“내 스스로 반성하건대 잘못이 조금도 없으므로 죽을 것을 참고 때를 기다렸는데 만약 나의 노모(老母)께서 나 때문에 적몰되어 그 천한 종노릇을 하시게 된다면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하겠느냐?”라고 하더니
乃飮酒一斗憤懣而卒時人惜之.
술을 한 말이나 마시고 분이 북받쳐서 죽으니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資謙遣術士瘞道傍牛馬不敢踐或病瘧者就禱則愈.
이 소식을 듣고 이자겸이 술사(術士)를 보내서 그의 시체를 길가에 묻게 했더니 지나는 마소(牛馬)들도 감히 밟지 못했으며 혹 학질에 걸린 사람이 그 무덤에 기도를 드리면 병이 떨어지곤 하였다.
資謙敗永子請改葬掘之屍不變
급기야 이자겸이 패망한 후 이영의 아들이 고쳐 장사하기를 청원하고 무덤을 파고 본즉 시체가 변하지 않은 채 있었다.
贈簽書樞密院事命吏部削罪案.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첨서 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벼슬을 추증하고 이부(史部)에 명령을 내리어 그의 죄명을 장부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永天資方直不爲權貴所撓
이영은 천성이 방정하고 강직하여서 권세 있는 사람에게 굴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然取友不端拓俊京等謀毁李汝霖智祿延等毁斥朴景升永皆與焉.
그러나 친구를 잘 가리지 못한 관계로 척준경(拓俊京)이 이여림(李汝霖)을 해하려는 음모에나 지녹연(智祿延) 등이 박경승(朴景升)을 중상 배척한 사건 등등에 이영이 매양 가담한 사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