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公人’ 20년, ‘水友人’ 20년
나는 인생에서 두 곳의 직장을 다녔다. 군을 마치고 ’68년부터 ’78년까지 10년은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근무했다. ’78년 3월부터 ’98년 3월까지는 한국수자원공사에 다녔다. 만 20년을 다니고 그만둔 지 20년이 되었으니 ‘수공 인으로 20년’, ‘수우 인으로 20년’을 살았다. 젊어서는 아득해 보이던 인생이 지금 뒤돌아보니 한 뼘 길이밖에 안 된다.
나는 평소 “직장은 30년만 다니고, 여생은 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퇴직하던 98년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초기로 공사에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었다. 50대 중반이던 나는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얼마동안은 “등 떠밀 때까지 버틸 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잘한 선택이었다. 이 해에 700여 ‘수공 인’들이, ‘수우 인’이 되었다. 당시 25명이 모임을 만들었다. 98년 퇴직이니 “구팔 모임”이라 했다. 20년을 지나면서 이미 고인이 되는 등 사유들로 달랑 14명이 남았다. 매월 첫째 화요일에 모인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즐겁다.
나는 젊어서 역사나 전통에 관심이 있었다. 현직에 있을 때도 틈틈이 예서(禮書)를 읽고,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우리예절을 익혔다. 수백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들었다. 의문이 생기면 강사나 저자를 찾아갔다. 당시 연수원은 물론 외부 출강이 있으면 이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나름 인기(?)도 있었다. 그것은 생활 속에 녹아있는 우리 것,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우리민족의 이야기인 때문이었다.
퇴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전통관련 문헌들을 읽었다. 20년이 된 지금은 예가(禮家), 향토사학자로 통한다. 덕분에 강의나 원고청탁을 받는다. 시민대학이나 단체 등에 나가서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한 때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도 출강했다. 2005년부터 성균관 홈페이지의 ‘의례문답’ 답변을 쓰고 있다. 인터넷 카페(‘난석재예사랑: http://cafe.daum.net/YEsarang)를 개설, 10년 넘게 우리예절을 전하고 있다. 회원이 900명을 헤아린다.
20년을 ‘수우 인’으로 살면서 이런저런 공부를 했다. 1년에 수료증, 자격증을 몇 개씩 받았다. 예절지도, 효지도, 문화해설, 전통놀이, 청소년인성교육 등 10개 이상의 강사자격증이 있다. 동화구연과 마술도 배웠다. 지금도 아이들은 마술할아버지라 부른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아동센터 28개, 경로당 119개가 있다. 아이들에게는 어린이소학과 효(孝)를 일러주고, 경로당 어른들과는 세상이야기, 건강이야기를 나눈다. 대전의 유일한 보물(209호) 동춘당 해설은 내가 전문가이다. 좋은 직장에 다니며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조금이나마 되돌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우리 전통예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는 선조(先祖) 덕이다. 현대에도 예학의 필독서인 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전례문답(典禮問答)은 선조께서 지은 책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례의 규범이었다. 나의 어쭙잖은 향토사학은 예학의 곁가지다. 그런데도 지역신문에 “김정곤의 대전 역사 바로알기”를 썼다. 향토사와 관련한 일이 있으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가끔 나를 찾는다.
대전에는 두 개의 향교(회덕·진잠)와 두 개의 서원(숭현·도산)이 있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학교, 서원은 사립학교다. 숭현서원은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1609년 현재의 자리(유성구 원촌동)에 옮겨지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고종 때인 1871년 철폐된 후, 2001년 대전시가 복원했다. 지금은 내가 원장을 맡고 있다. 회덕향교에서는 교화, 의전수석 장의(掌議)를 지냈다. 매주 ‘대덕향토문화연구회’와 ‘회덕선비문화진흥원’에서 후학들과 향토문화를 익히고 고전(古典)을 강의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회덕향교는 조선시대 이른바 ‘3송(송준길·송시열·송규렴)’을 배출한 오늘날의 서울대학과 같은 명문이었다. 전국의 유림(儒林)들이 선진지 견학을 온다. 달빛 인문학을 개최하고 역사 강의가 이어진다. 초·중생들의 고전암송대회를 열고 동네 어른들에게는 기로연(耆老宴)을 베푼다. 숭현서원에는 외국 고등학생들이 와서 양반다리, 절하는 법을 배우고 간다. 문화관광부의 ‘인문학’ 향연을 서원에서 펼친다. 닫혀있던 향교·서원 활성화의 일환이다. 자치단체 및 중앙과 협의하여 프로그램을 따낸다.
우리나라는 문화유산 빈국이다. 이집트나 인더스, 황하문명과 견줄 수 없다. 국보 1호가 고작 숭례문이다. 그나마 방화로 불탄 것을 복원한지 겨우 4년이다. 현대의 첨단과학도 선진국에 뒤진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다. 곧 예절이 국력인 시대, 효 문화가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한국인의 예절과 효가 미래 인류의 희망”이라고 했다. 토인비의 말이 아니더라도, ‘Korea’가 인류의 희망인 시대가 올 것이다.
나는 아래로 ‘아들 둘에, 사내아이 하나(삼형제)’를 두었다. 그런데 막내로 딸이 하나 생겼다. 문화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던 미얀마의 ‘난쏘(Nanswat)’라는 여성이다. 내가 ‘한국 아버지’다. 덕분에 사위와 2녀1남 외손이 생겼다. 미얀마에서 출생한 큰아이는 여고생으로, 어릴 때 내게서 사자소학을 배웠다. ‘난쏘’는 인근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면서 다문화가정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고희가 지나면서 몇 번의 수술로 병원과 인연이 깊다. 연 초에도 전립선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고, 여러 달 동안 기저귀를 차고 다녔다. 암은 생존수명이 5년이라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다. 내가 살짝 암(세포)에게 말한다. “이놈아! 나 죽으면 너도 죽어!” 그래선지 요즘은 암도 조심(?)하는 눈치다. 투병자랑은 나이 들면서 건강을 챙기자는 메시지다.
이야기 주제가, “은퇴를 준비하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이다. 많은 수우 인들이 노후의 훌륭한 경험담을 들려줄 것이다. 나는 참여하는 보람으로 ‘20년의 인생2막’을 쓰고 보니, 부끄러운 자랑이 되고 말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다. 내일은 올지 안 올지 모른다. 오늘 살아서 이 글을 쓸 수 있어서 고맙다. 그 고마운 작은 마음을 ‘K-water’ 에 전한다.(2018. 8월)
첫댓글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부럽습니다. 역시나 朝鮮 禮學의 宗匠이신
沙溪 선생님의 後裔 다우시네요..
소장하고 계시는 古書의 수량이 어느 정도이신지.
아울러 漢學은 어떻게 공부하셨는지가 제일 궁금합니다.
암튼 건강하셔야 하실텐데..걱정입니다.
禮泉 선생님, 말씀 감사하고, 또 부끄럽습니다.
가진 책은 별로 없습니다. 공부에 필요한 책 정도입니다. 漢學도 별로 공부한바가 없습니다.
다만, 취미로 서예를 한 40여 년 했습니다. 제가 쓰는 글씨의 뜻 정도를 아는 수준입니다.[한갖 書生으로 공부하는 사람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