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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암스트롱 살아있는 전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은 프랑스를 일주하는 유명한 국제 사이클 경기인
‘뚜르 드 프랑스’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우승, 2연패를 거둔 미국 사이클 선수다.
미국 사이클링 매거진은 그의 승리를 "20세기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불치의 암을 극복하고 우승하는 감동의 인생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각고의 노력으로 고환암, 폐암, 뇌암 등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는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그대 향해 달려가리라’의 내용을 요약해서 싣는다.
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대형 트럭이 지나가며 나를 진흙탕 속으로 내동댕이칩니다. 암도 내게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25세에 고환암에 걸렸고 그것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강인한 체력을 지녔고, 직업상 긴 싸움과 극심한 장애를 헤쳐 나가며 고통과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좋아하고, 열심히 경기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게 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텍사스주 플레이노 출신인 나는 1996년 사이클 선수로서 고지에 도달했다고 느꼈습니다.
플래시 왈론느 대회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했고, 또 뚜르 드 뽕에서 우승,
리에지-바스 또뉴-리에지에서 2등…. 처음으로 세계 톱 파이브(top 5)에 돌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고작 25세인 내게 고환암이 찾아왔습니다.
전국적으로 1년에 7000건밖에 생기지 않는 그 병에 걸렸던 것이죠.
두통, 기침을 하면 나오는 피, 목의 통증, 눕기만 하면 곯아떨어지는 등등….
나는 고통 받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었고 결혼도 물 건너갈 차례였습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 나의 직업, 나 자신….
암은 나의 삶과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마저도 빼앗아 갈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나의 암은 고환에서 폐까지 전이된 3기에 해당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장해둘 수 있는 나의 정자는 이미 필요한 양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17세에 나를 임신한 채 결혼했고, 내가 두 살 때 이혼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모릅니다.
나의 이름은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그는 나를 두들겨 패곤했는데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잘 몰랐지만 마음만은 아팠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은 어린 시절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기회로 삼아라"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끈기 있는 운동선수로 만들어준 것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무시해 버리는 능력과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어 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의 매조차도.
암 진단을 받은 후 어머니와 나는 마치 사이클 경기를 위해 훈련할 때처럼 열심히 계획을 세워서 실천 하면 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결코 혼자 있지 않도록 ‘공동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항암치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움직여야 한다’ 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산책도 하고 활보도 하면서 매일 아침 사이클을 탔지요.
암에 걸렸는데 왜 사이클을 타냐구요? 아주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화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듯 한 심정으로 떠나지만 전 속력으로 다섯 시간 정도 달리고 나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힘을 불러일으켜 주는 발전기와도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 비서 일을 하는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사이클 연습을 했는지 모릅니다. 교차로에서 차에 받쳐 뇌진탕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3종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가 지난 후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도 찬성이었습니다.
결과는 3등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내 목표는 이미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 2학기였을 때 전미 사이클 연맹에서 주니어 미국 전국 팀과 함게 훈련을 하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초대를 받았고, 1990년 세계청소년 챔피언십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게 되기도 했습니다. 20세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US 프로 챔피언십에서 나는 우승했습니다.
다음해에 나는 뚜르 드 프랑스의 스테이지에서도 21세로 최연소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꿈 같은 일이었죠.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 챔피언십에서도 이겼습니다.
스물한 살 난 선수가 사이클 경기에서 세계적인 타이틀을 얻은 적은 없었습니다.
사이클은 인생에 대한 은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일 뿐 아니라 가장 즐겁고 가슴이 미어지는 체험과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 산과 평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자국, 사이클 타이어 펑크, 세찬 바람, 극도의 악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하품 날 정도의 무감각, 그리고 깊은 자기 성찰….
나는 암을 경기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만이 달라졌을 뿐 사람을 녹초로 만들고 시간에 의존하며 일정 시기마다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아보고, 숫자와 혈액검사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체크 포인트가 있다는 점이 사이클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사이클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 조바심을 내도 안 되고 한눈을 팔아도 안 된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순간 거기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삶을 되찾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는 생각을 하면 기운이 났습니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 나는 이것저것 팔고 검소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암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기 시작했죠. 환자는 그저 의사의 지시만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역시
노력하는 것이 의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암은 뇌에까지 전이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머리 속에 불청객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암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넌 사람을 잘못 골랐어"
나는 고환암에 관한 책을 쓴 아인 혼 박사를 찾아 인디애나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병원에서 니콜스 박사와 샤피로 박사, 그리고 아인 혼 박사의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 생명이 달린 치료를 담당할 의사와 병원을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뇌 수술까지 받아야 했거든요. 뇌 수술이 있기 전날 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죽게 된다면,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인지 평화롭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암이 별거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신념은 용감하고 영원한 인간의 특성입니다.
스스로를 믿고, 의사들을 믿고, 치료를 믿고, 내가 믿겠다고 선택한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소름끼치는 세상의 부정에 대항하여 어떻게 매일 싸워야 하는지,
서서히 스며드는 냉소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서서히 죽게 만들고, 냉소주의 그 자체이며, 영혼의 상실입니다.
6시간 동안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뇌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나이키, 지로, 오클리로, 밀튼-브레들리…. 치료비를 지원해줄 회사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계약을 끝낼 권리가 있었는데도 계약금을 모두 지불해 주었고, 내가 다시 사이클을 탈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
항암치료는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였습니다.
탈모, 창백한 안색, 황폐화같은 것들은 암의 증세가 아니라 치료에서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항암치료는 암만 죽이는 게 아니라 건강한 세포도 함께 죽입니다. 외로운 치료입니다.
항암치료는 살아 있는 죽음 같았습니다. 약물은 내 조직을 구석구석 태우고 내 몸에 얼룩까지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항암치료 결과는 날로 좋아졌습니다. 내가 암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사이클 선수의 본능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나는 암이 뒤쫓아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사이클을 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혈액세포를 파괴해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끌어내려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같은 간호사 라트리스는 내가 다른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전히 나 자신에 관한 것, 내 치료, 내 투여량, 내 문제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는데 내가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8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온갖 형태의 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회복기는 훨씬 힘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항암치료를 할 때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도 사이클 선수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의 병상을 지켜 주었던 연인 리사와도 헤어졌고,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암 연구를 하거나 경제학 공부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매력 있는 여인, 나의 아내 크리스틴이 나타났습니다.
강인하고 독립적이고 민감하고 또 때가 묻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크리스틴은 눈썹도 없고 머리도 박박 민 나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유럽으로 가서 투르 드 프랑스를 구경했고 사랑을 고백했죠.
마침내 나는 다시 경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4년 9월 4일 나는 1998년 시즌에 사이클 경기로 복귀하겠다는 선언을 하러 인터팍 엑스포에 갔습니다.
기자회견을 열고 신문기자들과 사이클 전문가들을 방안 가득히 모아놓고 경기 계획을 알려주었지만 아무도 내게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틴은 나의 청혼을 받았들였습니다. 크리스틴 어머니의 친구가 “어떻게 딸을 암 환자와 결혼시킬 수 있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럭저럭 70년 살기보다는 1년이라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크리스틴의 생각이었죠.
나는 공식적으로 암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병이 재발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일상세계로 복귀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암을 앓고 난 후 직면하게 된 문제였습니다. 마음 속 깊이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시 사이클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문을 두드려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8개월 만에 내가 참가한 경기는 5일간 스페인 전역을 통과하는 하이킹인 루타 델 솔이었습니다. 14등을 했는데 사람들은 놀랐지만 저는 괴로웠습니다. 2주일 후 힘든 구간 경기인 파리-니스 경기에 참가 19등. 이기는 데 익숙해 있던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나는 아내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침착했습니다.
직업도 버리고 프랑스에 이사를 오고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거의 하룻밤 사이에 다시 은퇴를 하자 는데도 말입니다. 아내 덕분에 은퇴 선언을 미뤘지만 나는 룸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이 가볍지도 않았고 자유롭거나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암을 앓고 나서 생존자들이 느끼는 전형적인 태도였습니다. 신체가 회복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체와 더불어 영혼도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정말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뒹굴뒹굴 지내고 있었지요.
크리스틴과 친구들은 나 없는 데서 어떻게 하면 내가 선수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대화 하며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은퇴를 하겠다는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998년 5월 크리스틴과 샌터 바바라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는 완전히 복귀했고 1998년 10월 1일 내가 암선고를 받은 지 거의 2년이 되는 날 부엘타를 완주했습니다. 거기서 4위를 했는데 내가 한 경기 중 가장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 경기는 너무나 힘들어서 반 이상의 선수들이 포기를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3일 동안 2348마일을 달리는 부엘타에서 4위를 한 것은 복귀 그 이상의 것을 의미 했습니다.
경기내내 괴롭혔던 마약 구설수
뚜르 드 프랑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입니다.
고속도로 가드레일처럼 길게 이어지고 여름 짚단을 말리는 들판처럼 넓게 펼쳐집니다.
피레네 산맥의 얼음 덮인 봉우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세 나라의 전경만큼이나 길게 계속됩니다.
이제 나는 옛날처럼 무모하고 불안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기술과 방법 면에서 세련되었고 공격적인 면이 줄어들었습니다.
무언가 나를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밀어대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뚜르 드 프랑스였습니다.
나는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쉴 때도 나는 혼자 훈련했습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승리하는 것과 체외수정으로 어렵게 얻은 아이를 건강하게 낳는 것,
그 즈음 크리스틴과 나는 이 두 가지 목적만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크리스틴은 진지하게 헌신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지루해하거나 불만을 표시했다면 살아가기가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내가 우승하리라고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게는 단지 미국의 감동적인 암 생존자라는 각주만 붙어 있었습니다.
르 퓌 뒤 푸에서 열린 시작 경기에서 나는 승리했고 나는 미국 팀을 위해 미국산 사이클을 타고 뚜르 드 프랑스에서 선두로 달리는 최초의 미국 선수가 되었습니다.
"암스트롱에게 무언가 있을 거야”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프랑스 언론이 마약 의혹을 나타낸 것입니다. 항암치료가 경주하는 데 득이 되었다고 말한 기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암 치료가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1초라도 할 수가 있다니! 암 환자가 받는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고, 약물검사를 하고, 내 결백을 강조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사이클연맹은 내 약물 검사가 사실상 깨끗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경기조직위원장인 장 마리 르블랑은 “병을 이겨낸 암스트롱이 투어를 달린다는 자체가 상징이다.” 라고 했습니다.
파리에 들어가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설 때 감정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수십만 명의 관중들이 거리에 둘러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결승선을 지났습니다. 내가 우승한 것입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의 승리와 암 극복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겠냐고 물으면 나는 암을 택할 것입니다. 암이 인간으로서, 남성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나에게 해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당신은 살 확률이 90%라든지 50% 혹은 1%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암이 재발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전히 싸우라고 할 겁니다.
랜스 암스트롱과 얀 율리히 - 아름다운 라이벌
3주 동안 약 3천 5백여 킬로미터를 달리는 사이클대회 '투르 드 프랑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이 대회에 도전한 선수들이 지난 7월 22일 열다섯번쨰 구간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을 때였다.
선두 그룹은 암을 이겨 내고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 스페인의 이반 마요, 독일의 얀 울리히가 지켰다.
결승점을 9.5km 남겨 놓은 지점,
응원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한 꼬마 관중의 가방끈에 암스트롱의 자전거 핸들이 걸려 쓰러진 것이다.
바로 그 뒤를 따르던 마요는 마처 피할 틈도 없이 같이 엉켜서 넘어졌다.
다행히 울리히는 급히 핸들을 꺽고 가까스로 충돌을 면했다.
97년 대회 우승 이후 만년 2인자에 머물렀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그러나 울리히는 기다렸다.
암스트롱에게 15초 차로 뒤지고 있던 그때,
자전거 페달에서 발을 내려놓은 채 암스토롱과 마요가 다시 일어서기를...
그날 울리히의 배려로 암스토롱은 15구간 경기 우승뿐만 아니라
대회 마지막날 5년째 파리 샹젤리제 거리 결승점을 1위로 통과했다.
2위 울리히와는 1분 1초 차였다.
라이벌의 불운을 기회로 삼지 않고 정정당당히 경쟁하는 것,
그것은 2년 전 경기에서도 지켜졌다.
울리히가 내리막길을 달리다 넘어지자,
암스트롱은 속도를 늦춰 그가 다시 재 속도를 내도록 도와줬던 것이다.
사고 직후 독일 언론은
'울리히가 우승기회를 허비해 버렸다' 며 못마땅해 했지만,
세계는 그를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 선수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사고로 우승자가 결정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며
페어플레이는 사이클 경기에서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필수 요소입니다."
라는 그의 말과 함께...
본명 : Lance Armstrong
출생 : 1971년 9월 18일
국적 : 미국
신체 : 키: 180cm, 체중: 75kg
소개 : 1996년 고환암 판정, 투병 후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대회 7연승 (1999~2005년)
암이 내 육신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정신을 바꿔놓았을 뿐이다.
암이란 진단을 받기 전의 나는 대단한 게으름뱅이였다.
100%의 노력을 다하지 않고도 상당한 액수의 월급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게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정말 올바르게 살겠다고.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2.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가 보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면서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깨달음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면, 매일 아침
신선한 기분으로 깨어나 내게 특별한 또 하루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활기차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하루하루를 이어가자고
다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가 내게 오로지 사이클에만 매달려 장대비 속에서도 여섯 시간씩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게 바로 내 대답이다.
#3.
누가 내게 묻는다면 인생이란 거짓된 한계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운동선수로서 내게 던져진 도전의 과제는
사이클을 타고 그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병상에서 그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은 한 자연인으로서의
내게 주어진 도전의 과제였다.
암은 누구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도전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의 도전 과제였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건 나로 하여금 높이 뛰어올라
그 장애물을 넘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4.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 세상을 보는 관점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가 하는 선택이다.
결정은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다.
#5.
세상에는 자신감을 사거나 조작하려는 사람,
또는 그런 체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자신감을 거짓으로 꾸며낼 수가 없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내게 그 방법을 묻는다면,
노력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하겠다.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노력해야 한다.
2003년 뚜르 드 프랑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온몸을 부숴버릴 듯한 노력과 함께...
#6.
1999년 내가 뚜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미스터리도 아니었고 기적의 약물 때문도 아니었다.
다른 선수보다 치밀한 훈련과 테크닉의 힘이었고,
투병 경험과 그에 버금가는 희생의 대가였다.
내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나고 묻는다면,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다.
누구든 큰 일을 이루겠다는 야망이 있다면,
강한 의지와 사소한 부분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주의력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큰 일을 이룬 위인들을 쭉 살펴보라.
어떤 이들은 카리스마가 있었고, 어떤 이들은 없다.
어떤 이들은 키가 크지만 어떤 이들은 작다.
어떤 이들은 뚱뚱하지만 어떤 이들은 호리호리하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어떤 어떤 한 가지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집중력이다.
1999년 이후로 나는 오직 하나, 뚜르 드 프랑스에만 전념했다.
개인적은 도전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우리 팀 전체를 위한 객관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레이스는 나 아닌 타인을 물리치는것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경쟁의 상대로 삼는 일이다.
" 나는 점점 더 나와의 경쟁에 익숙해졌고 전보다, 작년보다,
지난달보다, 아니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레이스를 하게 되었다.
#7.
고통이 주는 진짜 대가는 이런 것이다. 바로 자기 인식, 자각이다.
그러나 고통 앞에서 포기한다면 고통은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항복이라도 그 고통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된다.
포기하고 싶을 땐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고통과 평생 함께 살고 싶은지 고통 아닌 다른 것과 함께 살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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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얼마만에 들어 왔는데...사진이 안보이네??? 원본을 보고 싶으신 분은 목포 철인클럽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랫만에 오셔서 좋은 글 올려주셨네요... 저는 예전에 책으로 읽었었는데....^^
신 목사님 반갑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처음인것 같습니다. 여전이 강건하시지요. 가끔이라도 소식 좀 전해주세요.
넘 반갑습니다 ~~ 성호가 문을 닫아 어디서 운동 하시는지... 개인 비밀훈련 무쟈게 하신다고 바람으로 들어서 금년 아연맨 또 하시리라 생각했는 데... 간혹 주말 정모 때 얼굴 좀 보여 주세요 ~~
몇번을 읽어도 감동적 입니다. 정말 오랜만 입니다. 바쁘시더라도 한번 나오셔야죠??
와우~~드뎌 신목사님 부상하시나요 태평양 바다는 잔잔 한가봅니다 반갑구 보고싶습니다.....
이번엔 아이언맨 하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다리에 핸폰 전화번호 써놓고 홀로 라이딩 하시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