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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재사랑산악회]—183차 산행] ♣ 부안 <변산반도 내변산-쇠뿔산> (2)
▶ 2017년 12월 17일 (일요일)
* [산행 코스]▶ 어수대→ 능선(우슬재)→ 전망바위→ 비룡상천봉(갈림길)→ 와우봉→ (고래등바위~동쇠뿔바위봉)→ 쇠뿔바위봉→ 지장봉→ 새재→ 청림마을→ 봉래동천(주차장)→ 부안 ‘이매창 공원’→ 귀경 * [산악회 정기총회 ; 2018. 신임회장 ‘김준섭’ 회장 추대·선출]
* [쇠뿔바위봉 전망대의 조망] — 내변산의 장엄한 절경이 펼쳐지는 …
오후 12시 40분, ‘서(西)쇠뿔방위봉’, 잔설이 소복히 쌓여있는 널따란 나무테크 전망대에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오늘의 산행의 정상 포인트이다. 미리 도착한 대원들이 사방의 풍광을 전망하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맑은 햇살이 쏟아지고 사방의 시야가 환하게 열린 곳이다. 공기는 싸늘하지만 바람이 없어 아주 쾌적한 산상(山上)이다. 내변산 일대를 조망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이곳이 직소폭포와 함께 내변산의 절경으로 꼽는 이유가 있다. 온 사방으로 펼쳐진 풍광이 가히 장관이다.
<서쇠뿔바위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쇠뿔바위봉>
동쪽으로는 바로 앞에 ‘동(東)쇠뿔바위봉’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단아하게 솟아있고 우리가 지나온 능선에서 거기에 이르는 암릉이 ‘고래등바위’이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산 능선이 보이는데 거기가 바로 ‘우금산성’[일명 주류성]이요, 그 산성에 돌올한 암봉이 ‘우금바위’이다. 나당(羅唐) 연합군은 660년(의자왕 20) 백제의 사비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는데, 백제 장군이었던 ‘도침’과 ‘중복신’이 저 우금산성에서 세력을 결집하여 백제 부흥을 위해 분투하였으나 663년 나당연합군의 공략을 받아 패망했다. 그러므로 저 우금산성은 백제가 역사에서 완전히 막을 내린 비운의 산성이다. 우금바위 동쪽 산록에 고찰 ‘개암사’가 있다.
저 뒤쪽의 산 능선이 <우금산성>이고 그 가운데 돌출한 바위가 <우금바위>이다
전망대에서 남쪽을 바라본다. 저 발아래에는 ‘우각봉’과 우리가 내려갈 산 능선이 보이고 그 뒤로는 내변산의 첩첩 산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좌측의 가까이 있는 산이 ‘삼예봉’이요, 멀리 서쪽의 ‘쌍선봉’과 변산의 산줄기가 그 동쪽의 ‘관음봉’으로 이어지는데 그 깊은 산곡에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바로 ‘부안댐 호수’이다. '어사대'에서 발원한 물을 비롯하여 내변산 골골이 흘러내려온 물들이 모여 변산반도의 한 복판에 담수호를 이룬 것이다.
청림마을의 고즈넉한 풍경 -(전망대 남쪽의 산아래 마을)
산곡(山谷)의 남쪽 끝에 보이는 <부암댐>의 호수 한 부분
그리고 서쪽으로 건너보이는 완만하게 솟은 큰 산이 내변산의 주봉인 ‘의상봉’이다. 그 산정에는 통신시설인듯한 시설물이 있다. 그리고 그 의상봉의 오른쪽으로 멀리 새만금방조제와 시퍼런 담수호가 아득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전망대의 서쪽으로 보이는 <의상봉>, 이 의상봉이 바로 <변산>의 주봉이다
멀리 <새만금방조제> 안의 파란 담수호가 보인다
* [나무테크 전망처 위에서의 점심식사] — 우리을 따라온 백구(白狗) 한 마리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는 널찍한 전망대 위에서, 우리는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나누었다. 겨울 공기는 차갑지만 다행이 바람이 불지 않아서 식사를 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늘도 ‘숙이’ 님이 신선하고 고소한 ‘배추전’과 ‘양념 굴무침’을 준비해 와 모든 대원들이 함께 별미를 맛보았다. 한결같은 정성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이 겨울 산정에 백구(白狗) 한 마리가 따라왔다. 사실 백구는 산행들머리 ‘어사대’에서부터 따라오기 시작하여 우슬재까지 올라왔는데 그 뒤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었다. 아마 선두의 대원들을 따라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출발지에서 5km가 되는 산길을 따라온 것이다.
우리를 따리온 백구(白狗) - 추운 설산의 정상에서 천연덕스럽게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참 신통한 영물이다. 어사대 입구에 있는 굿당집의 개인 듯한데 등산객들을 따라와서 음식을 얻어먹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백구는 사람들과 아주 스스럼없이 친하다. 점심을 먹는 대원들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죽치고 앉아서 음식을 주면 받아먹는다. 그것도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니라 고기나 육포만을 골라서 먹는다. 대원들이 “백구야!, 백구야!” 하며 쓰다듬고 안아주니 육친처럼 와서 안긴다. 뻐꾸기 권혁진 산우가 개를 안고 사진을 찍고 신수철 산우가 녀석을 말처럼 올라타고 사진을 찍으며 파안대소를 한다. 겨울 설산(雪山), 고고한 산봉에서 일어난 별난 풍경이었다.
백구를 안고
백구를 타고
백구와 함께
* [하산 길, 나무테크 긴 계단] — 주변의 설경이 아름다운 …
오후 1시 30분, 하산(下山) 길에 들어섰다. 삼거리 이정표에서 ‘중계교 부근’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나무테크 계단이었다. 계단은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계속 이어지는 계단은 길고 길었다. 쇠뿔바위봉은 일반적인 산의 고도를 볼 때 그렇게 높지 않으나 바다의 해발을 기준으로 하면 돌출한 암봉이므로, 가까이에서 오르고 내리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험난하다. 비록 계단은 가파르지만 그 주변의 설경(雪景)은 가히 별세계를 이루어 아름다웠다. 눈이 녹지 않은 응달이어서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조용히 눈을 뒤집어 쓴 나무들이 또한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바라본 <의상봉>(변산)의 풍경
* [토산의 완만한 눈길] — 설송이 만개한 목련꽃처럼 아름다운 …
오후 2시 15분, 아래로, 아래로 쏟아지는 계단을 지나고 다시 오르막의 고개를 넘었다. 다시 이어지 길,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가파른 바위고개를 넘어서니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 안부에 도착했다. 여기서 좌측의 길을 잡아 내려갔다. 산록에 눈뭉치를 이고 있는 한 그루 설송(雪松)이 만개한 목련꽃처럼 아름다웠다. 우회로를 돌아 나와 거대의 암봉의 동쪽 자락에 이르렀다. 우리가 머물렀던 쇠뿔바위봉이 아득하게 올려다 보이고 아래로는 청림마을이 아주 가깝게 보이는 지점이다. 우람한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장엄하고 위압적이었다. 일군의 대원들이 그 암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았다.
몽실몽실 탐스러운 눈꽃을 피운 설송(雪松)
하산 길 능선에서 바라본 정상에 전망대가 있는 <서쇠뿔바위봉>
우리 대원들이 머물렀던 <서쇠뿔바위봉>의 위용
더욱 가까워진 청림마을
장대한 설송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쇠뿔바위봉>
* [갈림길 새재를 지나고] — 쇠뿔바위봉이 병풍처럼 둘러처진 고즈넉한 청림마을
오후 2시 33분, 이정표가 있는 ‘새재’ 삼거리에 도착헸다. 완만한 경사면을 내려와서 응달의 골짜기에 접어들었다. 눈이 거의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어 설경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한다. 평지의 길로 접어들어 얼마 내려오지 않아서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나타났다. 청림마을에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이다. 오후 2시 40분이었다.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청림마을’은, 그 내변산 쇠뿔바위봉의 능선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를 말한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산체는 큰 황소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와우봉이 있고 그 남쪽에 두 개의 쇠뿔 형상의 암봉이 솟아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실제로 마을에서 올려다보니 그럴 듯한 산세였다. 마을길을 따라 내려와 736번 지방도로 앞에 있는 ‘봉래동천’이라는 현판을 내건 솟을대문 고택 앞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모든 대원이 무사히 하산을 완료한 것이다. 귀경 길, 부안 읍내에 있는 <매창공원>을 탐방하기 위해서 길을 잡았다.
이정표가 있는 <새재> 갈림길
하산지점(청림마을 등산로 입구)의 이정표
청림마을 앞에서 바라본 쇠뿔산
고택 <봉래동천(蓬萊洞天)>
* [부안의 매창공원] — 명기(名妓) 이매창의 무덤과 시비(詩碑)가 즐비한 …
매창(梅窓)은 본명이 향금(香今)이고, 자는 천향(天香)이며, 호가 매창이다. 계생(癸生), 또은 계랑(癸娘)이라고도 하였다. 1573년(선조 6)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만력(萬曆) 1573년 계유년에 나서 1610년 경술년에 죽었으니, 사망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평생토록 시와 노래를 잘했다. 지은 시(詩) 수백 편이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거의 흩어져 사라졌다가 1668년 무신년 10월에 아전들이 읊으면서 전하던 여러 형태의 시 58수를 구해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 『매창집(梅窓集)』을 간행했다.
부안 읍내 <매창공원> 안에 있는 명기 이매창의 묘
황진이·매창ㆍ일지홍(一枝紅) 등의 기생들은 웬만한 시인문사 못지않은 뛰어난 글재주를 보여주었다. 특히, 서경덕과 교유한 황진이(黃眞伊)나 이귀ㆍ허균 등과 교유한 매창(梅窓)의 경우는 당대 최고의 인물들과 교유한 기녀들이다. 재주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신분은 낮지만 그녀들은 남다른 서정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양반들과 풍류를 나누었고, 서로의 애틋한 감정을 시(詩)로 남기기도 했다.
매창(梅窓)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당시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었다. 뭇 양반들의 사랑을 받으며 명성이 높았던 매창이 신분이 중인인 유희경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은 서로 서민 출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둘 다 시에 능해, 시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중인(中人) 신분을 가진 시인들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劉希慶)이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을 찾아온다. 유희경은 그때까지 뭇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에게는 큰 관심을 보였다. 매창이 이미 유희경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유희경 또한 명성이 자자한 매창에 대해 알고 있었음은 그녀에게 지어준 시「계랑에게[贈癸娘]」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쪽 지방 계랑(癸娘)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
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
선녀(仙女)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시에 능통했던 유희경(劉希慶)과 매창.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을 시를 통해 주고받았다. 유희경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 매창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7편으로 확인된다. 유희경은 28세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매창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전라도 부안(扶安)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이별 후에도 두 사람은 사랑을 잊지 못하고 서로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만나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리움은 더욱 커지는 것일까? 유희경(劉希慶)은 서울에 있어 부안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낭주(浪州, 扶安)에 있고
我家住京口 내 집은 서울에 있어
想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으니
斷腸梧桐雨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어지누나!”
— 회계랑(懷癸娘) (유희경, 촌은집, 권1)
유희경(劉希慶)은 길을 가다가도 문득 매창(梅窓)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유희경, [촌은집], 권1)이 그것이다.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했듯이, 매창 또한 유희경을 한없이 그리워했다. 애틋한 그리움은 병이 되기도 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 매창(梅窓)의 시조(時調)『청구영언』; <매창공원>의 시비(詩碑)
不是傷春病 봄날 탓으로 생긴 병이 아니라오
只因憶玉郞 오로지 임 그리워 생긴 병이라오
塵寰多苦累 티끌 덮인 이 세상 괴로움도 많지만
孤鶴未歸情 외로운 학이 되어 돌아갈 수 없구나
誤被浮虛說 잘못은 없다지만 뜬 소문 도니
還爲衆口喧 여러 사람 입방아 무섭기도 하여라
空將愁與恨 시름과 한스러움 날로 그지 없으니
抱病掩柴門 병난 김에 차라리 사립문을 닫으리
— 매창의 시「病中」<매창공원>의 시비(詩碑)에서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나 다시 만났지만, 너무 짧은 재회의 시간이었다. 함께 시를 논했던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이것은 이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매창(梅窓)이 3년 뒤인 16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희경(劉希慶)은 “정미(丁未: 1607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하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이렇게 살아있다
이름난 기생 매창(梅窓)과 중인 출신의 유희경(劉希慶). 두 연인은 신분과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품은 사랑은 시를 통해 평생을 이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시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창(梅窓)은 1600년을 전후하여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며, 다른 사람들의 문헌에도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허균(許筠, 1569~1618)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대 최고의 문사인 허균은 매창(梅窓)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고, 이에 많은 문인(文人)들이 매창(梅窓)을 찾아와 시를 주고받으려 하였다. 당대의 인물들로는 권필ㆍ심광세ㆍ임서ㆍ한준겸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조선 최고의 시기(詩妓)로 부상하였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이었다. 그해 7월, 허균은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왔다. 이때,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곳에서 허균은 매창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이 허균의 문집에 남아 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 허균(許筠),『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권18, 문부15, 기행(紀行)·上 <조관기행(漕官紀行)>
매창(梅窓)에게 있어서 유희경ㆍ허균ㆍ이귀ㆍ한준겸 등 당대의 문사들은 마음을 함께 나누며 시를 노래하는 친구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매창의 삶은 너무 짧았다. 서른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매창은 평소에 “나는 거문고와 시(詩)가 참말 좋아요. 이후에 내가 죽으면 거문고를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했으며, 그 말에 따라 그녀의 무덤에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전해진다. 허균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介潔: 깨끗하고 굳음)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허균(許筠),『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권2, 시부2, <병한잡술(病閑雜述)> … <매창공원>에 추모의 시비(詩碑)가 있다.<아래 사진> …♣
당대 최고의 문장가 허균이 죽은 매창에 바치는 시
* [2018년을 산행을 마감하는 에필로그] — , 정유년 한 해의 뜨겁고 아름다운 산행을 회고하며
오늘의 부안 <내변산-쇠뿔바위봉> 산행은 2017년을 마무리하는 송년 산행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일 년 간 아무 사고 없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 참으로 멋지고 알찬 산행을 했다. 지난 1월의 ‘신년 산행’에는 충청북도 영동의 <각호산-민주지산>에서 거대한 산줄기를 타고 내리며, 순백의 설경 속에서 뜨거운 땀을 흘렸고, 2월에는 저 백두대간의 <소백산 비로봉-국망봉>의 장엄한 능선을 걸으며 차가운 바람을 갈랐으며, 봄이 오는 3월에는 새만금방조제로 육지와 이어진 신시도의 <월영봉-대각산>을 넘으면서 서해 고군산열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월영봉 아래에서 한 해의 안전한 산행을 기원하는 ‘시산제(始山祭)’를 올렸다. 봄이 무르익는 4월에는 저 남도의 순천 <조계산 장군봉>을 넘으며 성지 순례하듯 유서 깊은 고찰 ‘선암사’와 ‘송광사’를 탐방하였으며, 신록의 5월에는 김천의 백두대간 <황악산>을 주파하였는데, 녹음이 싱그러운 ‘우두령’-‘황악산’-‘괘방령’ 구간을 종주하였다. 연일 가뭄이 계속되는 6월에는 충청북도 내륙 지방인, 괴산의 <사랑봉-옥녀봉>을 넘고 ‘갈은구곡’의 비경을 탐방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에는 백두대간 <북설악 계곡>에서 맑은 물길을 따라 싱그러운 생명을 충전하였으며, 한여름 8월에는 홍천의 <공작산>에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뜨거운 땀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 <새재사랑산악회> 180차 기념 산행으로 시행한 9월의 산행에는 제천의 <월악산 영봉>에 올라 천하를 조망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비운을 회고하며 인생의 무상함에 젖기도 했다. 10월에는 멀리 경상북도 봉화의 <청량산> 정상에 올라 절경을 조망하고 명물 ‘하늘다리’를 건넜으며 그 산록에 연꽃처럼 자리한 ‘청량사’의 맑은 도량에서 잠시 무거운 육신을 놓기도 했다. 특히 청량산을 사랑하여 ‘无不敬’(무불경)과 ‘无自欺’(무자기)를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 명상과 공부에 진력하신 퇴계 선생의 숨결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감동이었다. 11월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백두대간 삼척의 <두타산-쉰움산>을 올라 거대한 백두대간의 정기를 온몸으로 안으면서, 거기 산의 고도를 높일수록 동해의 푸른 바다가 다가와 가슴속에서 출렁거렸다.
오늘 부안(扶安)의 <내변산>의 설산 산행은, 겨울가뭄 속에서 실로 경이적인 축복(祝福)이었다.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우리의 지향(指向)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건강한 심신을 단련하며 너와 내가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미덕으로 한마음을 이루어 언제나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일 년 간 고행(苦行)과 기쁨을 함께한 모든 산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알찬 기획과 안전하고 유쾌한 산행을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은 남정균 회장과 김준섭·한영옥 부회장, 민창우 기획·산행대장, 그리고 박은배 총무, 유형상 후미대장, 장병국 고문 및 김의락 자문위원 등 여러 임원들의 노고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
* [귀경 ; 서울 장안동 식당] — <새재사랑산악회> '정기총회' 개최 신임 김준섭 회장 추대 선출
오늘은 2017년 우리 <새재사랑산악회>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다. 그래서 부안에서 서둘러 귀경했다. 오후 7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장안동 문 사장의 <만두집>에서 오늘 함께 산행한 모든 대원들이 참석하여 따끈한 ‘칼국수 전골’로 만찬을 하면서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호산아 고문의 주재로 회의를 진행했다. 지난 2년 동안(2016~2017) 남정균 회장이 우리 산악회를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셨다. 많은 대원들이 연임을 원했지만 일신상의 사정으로 고사하였으므로, 오늘 총회에서 새 회장을 선출했다. 그 동안 안전 산행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산악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하여 헌신한 남정균 회장의 노고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2018년 <새재사랑산악회> 신임 회장은, 지난 12월 1일 임원회에서 추대한 김준섭 수석부회장을 오늘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하여, 선출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의 찬성이었다. 신임 김준섭 회장은 인사말에서 ‘비록 부족한 사람이지만, 우리 산악회의 발전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어서, 2018년 신년 산행부터 직무를 수행할 김준섭 신임회장은, 현 민창우 기획 및 산행대장과 박은배 총무가 계속 그 업무에 수고해 주실 것을 당부했다. 그 동안 우리 산악회의 알차고 아름다운 산행을 위하여 실질적으로 헌신하신 두 분에게 회원 모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모든 대원들은 ‘신임 회장과 두 임원을 위하여’ 건배하고, 이어서 ‘새해에도 우리 대원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산행을 위하여’ 마음을 모아 힘차게 건배를 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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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반 산행 때 마다 멋지고 훌륭한 산행기로 우리를 업되게 하시는 호산아 고문님이 이번에는 구구절절 나라사랑 즉
애국심이 묻어나는 사설(?)과 2017년 정기총회도 깔끔하게 진행해서 마무리 해 주심에 회원의 한사람으로
많이 마이 감사를 드립니다...2018년 새해에도 변함 없는 수고를 부탁 드려도 될까유???
매 번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 정상을 오르면 힘든생각 금방잊게만드는 산행코스 정하신 민총무님 께 한해동안 . 감사드립니다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새재사랑산악회 회원님 감사합니다
2017년 한해 수고하셨습니다ㆍ몸으로 느낀 것들을 좋은 글로 우리 산우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노력해주신
것압니다ㆍ2018년에도 향상 건강하시고 좋은 산행글로서 우리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하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ㆍ한해동안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