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장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왜 비난을 받겠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나도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 것같이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노니 이는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0장 30절 31절 32절 33절
1. 바울이 감사함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받지 않음의 의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죄에 동참하는 것과 죄에서 분리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일입니다.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7절
죄의 욕망을 다스리는 일은 우리의 권세이자 의무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가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가진 권세는 거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그들과 그들의 죄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몇번의 권고나 권면 뿐입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 우리가 참여하지 않음은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고 권고와 권면도 세상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권면과 권고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한다면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비난을 받음은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비난을 받는 일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난을 적게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모든 일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세상에 우상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가 모두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여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지만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해서 우리가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 우리는 우상을 피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이웃을 위한 것이지 그것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작아보이지만 우리에게 자유함으로 큰 평안을 주는 본질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부정한 것과 잘못된 것들 모든 것들은 그것이 부정하고 잘못된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회피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하여 본질로 자유하게 대하여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것을 먹든지 마시든지 심지어 우상의 바쳐진 제물을 먹을 지라도 (연약한 형제의 양심에 해가되지 않는 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는 각각의 특성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며,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특성이 다른 집단에 모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은 각자의 믿음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그들이 믿지 않는 죄를 짓는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권고나 권면은 그들에게 거치는 일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자를 막아서는 것이 거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믿음을 사람의 힘으로 자라게 하려는 태도도 거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모두가 우리가 할수 있는 권한이 없는 일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일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아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능력이 부족해서 막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일에 일정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하신 것처럼 권고와 권면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7절
하나님께서는 카인의 상태를 보시고 그가 아벨을 죽이지 않는 선택을 하도록 권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벨을 죽이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허락이라기 보다 사람의 죄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월호라는 인신제사가 하나님의 허락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막아서지 않으시는 것이지 악을 허락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근거는 몰렉신에게 자신의 자녀를 불로 태워 제물로 바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짓을 하는 자들도 죄도 하나님의 허락이라고 할 것입니까?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막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카인과 반대로 죄의 욕망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길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속에서 우리의 의지로 경배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짓고자 하는 것을 막아서 우리가 무죄하길 원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못하여 죄를 짓지 아니함은 무죄함이 아니라 죄를 아직 짓지 아니한 것이며,
본질로 보면 이미 죄를 지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그의 마음에 그녀와 더불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죄의 본질은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음욕을 참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음욕의 대상이 아닌 이웃으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웃을 음욕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음란물과 포르노를 보면서 음욕을 절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공포영화를 즐기면서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몇안되는 일들중의 하나입니다. 속임수이고 가짜인 음란물을 보면 볼 수록 절제하기 힘든 음욕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욕망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과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개선을 하는 것은 다스리는 일입니다.
세상의 법에서도 살인 미수라는 죄가 있습니다. 즉 사람은 죽이지 않았지만 그럴 의도가 있었고 시도도 처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마음을 먹고 죄를 지으려 한다면 이미 죄를 저지른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세월호는 사탄숭배자들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사탄에게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인신제사입니다.
그 가슴아픈 사건의 가장 피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사고로 죽은 사람들도 아니고 그들의 유가족도 아니며 가장 불행한 자들은 사탄을 숭배하고 인신제사라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세상의 가벼운 법에 처벌을 일부 받겠고 또 주범들은 정체를 감추고 아무 처벌도 받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가장 불행한 자들입니다.
세월호에서 시신으로 나온 아이들의 표정이 밝았다고 하니 그들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거두어 주셨을 거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믿음에 대해서 권고와 권면이상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야야 하는 것입니다.
그 권고와 권면은 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이라면 권고와 권면은 하지 않는 것이 유익입니다. 아무래도 권고와 권면은 편하고 수월하기만 한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심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있는 권고와 권면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