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외양포' 마을
이장댁은 무기창고, 박씨네는 헌병대 막사…마을이 통째 옛 일제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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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 마을의 이성태 이장 가옥. 일제강점기에 무기창고로 쓰인 이 집에는 현재 두 가구가 산다. |
- 100년 전 일본군
- '러'와 전쟁 위해
- 주민 내쫓고 포대사령부 꾸려
- 봉우리마다 관측소·탄약고…
- 해방 뒤에야 귀향
- 한 건물에 함께 둥지 튼 여러 가족
- 지붕색 달리 칠해
"우리 웃대까지 잡으면 100년이 훌쩍 넘을끼요."
부산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 마을의 교통정리원 박수출(74) 씨.
선친 때부터 3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순수 외양포 토박이다.
박 씨 선친은 일본군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 난 1세대 주민.
쫓겨난 가족은 만주 간도를 전전하다 해방이 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뒤로 70년.
박 씨는 평생을 고스란히 고향에 묻어두고 사는 셈이다.
'100 년 전의 마을', 외양포(外洋浦).
외양포는 가덕도 남쪽 맨 끝의 갯마을이다.
전형적인 어촌의 한적함이 묻어난다.
마을 어귀에는 성황당이 보이고, 빨강, 파랑, 초록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해바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100여 년 전, 일본군 제 4사단 휘하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뼈아픈 장소.
일본군이 러시아와 전쟁을 대비해 포대사령부를 설치한 곳이다.
원래 있던 마을은 모두 소개하고 군사시설로 완벽하게 요새화했다.
■ 당시 건물과 우물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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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양포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일제강점기의 포진지. 최원준 시인 제공 |
지금도 해군 '군사시설지역'으로 묶여 옛 모습 그대로 오늘에 이르렀다.
외양포는 일제강점기 시대가 정지되어 남아 있다.
마을 뒤 언덕에는 그 시절 '일본군 포진지' 흔적이 고스란하고,
일본군 막사건물들이 원형대로 남아 주민의 거처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외양포에는 현재 23호, 33세대가 산다.
이들이 사는 집은 모두 그 시절 요새사령부 관련 건물이다.
헌병대막사, 무기고, 장교사택, 사병내무반 등을 수리해 지금껏 쓰고 있다.
외양포 방파제 앞 낚시점 건물.
박정출(76) 씨 댁으로 당시 헌병대막사 자리다.
부대 내 치안을 담당했던 곳이라 건물 지하에 격리시설인 감옥을 갖춰놓았다.
아직도 그 시설이 보존되어 있다.
"고구마나 호박 저장하는 창고로 쓰다가 인자는 방을 들랐다 아이가.
일본식 공중변소도 있었는데 태풍(매미) 때 씰려 내리가뿟따."
박 씨의 말이다.
매점 바로 앞 큰 기와건물은 무기창고로 쓰던 건물.
이성태(62) 이장의 집이다.
현재 두 가구가 나눠 쓰고 있다.
기름 먹인 목조건물로, 목조벽 외부에 함석을 덧대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창문 위 눈썹지붕도 일본 건축양식이다.
당시 건물의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 중 하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콜타르를 입힌 천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시절 유행한 '트라스 공법'으로 건축하여 실내기둥이 없다.
그 덕에 공간이 넓고 활용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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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병내무반이던 건물. 현재 4가구가 사는데 가구마다 지붕 색깔이 다르다. |
마을 중간쯤 사병내무반 건물.
마을에서 제일 큰 건물로 현재 4가구가 사는데,
가구마다 지붕 색깔이 다르다.
건물은 하나지만 지붕 색과 모양은 가구별로 각각이다.
마을을 돌아보니 그런 집이 많다.
사령부 대장사택도 그렇고, 장교막사도 그렇다.
여러 가구가 한 건물을 나누어 쓰다 보니, 어떤 가구는
새로 함석지붕을 얹었고, 어떤 가구는 옛 기와지붕에
에폭시 방수처리를 했다.
이성태 씨와 서성학 씨 집처럼 목조건물에 기와가 그대로 보존된 건물이 있고,
서영자 씨 집처럼 함석으로 만든 집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건물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마을을 돌다 보면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당시의 우물터도 8개쯤 볼 수 있다.
마을 군데군데 있는데, 제법 튼튼하게 지어 아직 우물 기능을 하는 곳도 있다.
"우물마다 물맛이 달랐는데, 서영자 씨 집 옆 우물이 제일 맛있었어요.
그래서 근처 우물보다 그쪽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습니다."
이성태 이장의 말이다.
■ 쑥 죽, 톳 죽 나누던 인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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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봉우리에 있는 탄약고 앞에서 최원준(아래) 시인이 주민과 대화하고 있다. |
지금 외양포에 사는 주민은 대부분 인척이라 한다.
같은 성씨이거나 아니면 사돈에 외가 팔촌들이다.
명절이면 온 동네가 하나가 된다.
"명절에 우리 동네는 북 치고 장구 치며 놀았어요.
전축 틀어놓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곤 했지요,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러나 외양포 생활은 팍팍하기만 했다.
험하고 거친 바다에 몸을 기대어 살아야 했기에 그렇다.
쌀 한 주먹에 쑥을 넣어 '쑥 죽'을,
톳나물을 넣어 '톳 죽'을 만들어 끼니를 해결하는 생활이었다.
마을 뒤 포진지 안으로 들어선다.
주민의 삶과는 무관하게 포진지는 견고하기만 하다.
입구에 '사령부발상지지'라는 '요새사령부건립비'가 서 있고,
오른쪽으로 포 2대씩 설치할 수 있는 포대 터 3곳. 탄약고 2동이 보인다.
왼쪽에는 상황실 자리가 2개 남아있다.
이 진지를 토성을 쌓듯 5, 6m 높이로 돌아가며 쌓아올려, 얼핏 보면 마을 뒤 조그마한 언덕쯤으로 보인다.
외벽 주위로 대숲과 갈대 등이 자생해 절묘하게 진지를 은폐하는 형국이다.
이렇듯 요새사령부의 포진지는 마을과 함께 외부에서 쉽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육로는 물론 해로 어느 곳에서도 맨눈으로 확인하기 쉽지 않다.
마을을 형성하는 군막사도 당시에는 삼나무 숲을 조림해 위장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외양포를 완벽하게 '숨은 요새'로 구축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함대를 향해 일제히 포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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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이 만든 옛 우물 가운데 하나. |
"대부분 사람들이 포격 방향을 외양포 해안가로 보는데요, 아닙니다.
해안가는 초소를 설치해 기관총으로 방어했고요, 포격은 포진지 남쪽
국수봉 쪽으로 곡사포를 쏘았어요.
포진지 포대 터를 보면 포가 총 6문 있었는데요,
모두 남쪽 국수봉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양포 포진지 산불감시원 서동원(68) 씨 말이다.
외양포를 둘러싼 주위 봉우리에는 관측소와 대공포 기지를 만들어
포진지를 방어했는데, "외양포를 둘러싼 봉우리마다 관측소와 탄약고, 대공포 1대씩을 설치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발견한 것만도 7, 8개 되니까요."
외양포 이성태 이장의 설명이다.
서동원 씨는 "산봉우리 관측소로는 포진지와 연결되는 갈지(之)자 길을 개설했죠.
말을 이용해 군 인력과 탄약 등을 날랐다 해 '말길'이라 불렀습니다.
이 길을 따라 각 능선의 관측소가 연결됩니다."
■ 역사 현장 보존방법 찾아야
외양포 마을 입구 고갯마루. 산불감시초소 뒤로 산길을 오른다.
봉우리에 산재한 관측소 중 한 군데를 찾아간다.
참호와 참호를 연결하는 교통호(交通壕)를 따라 계속 오르는데, 초행길에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애를 먹는다.
이때 한 무리 염소를 몰고 가는 초로의 여인이 길을 안내해 준다.
알고 보니 외양포 함석집 주인 서영자(68) 씨.
교통호 중간지점에 콘크리트 구조물이 무덤처럼 자리하고 있다.
탄약고다.
입구는 어른이 허리 숙여 들어갈 정도인데, 안에 사람 두엇 들어갈 공간이 있다.
"이곳에 집 없이 떠돌던 할아버지가 살았어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 비바람과 추위를 막기에도 좋아 보인다.
서 씨의 말에 따르면 그 노인은 이 탄약고에서 몇 년을 살다가 세상을 떴는데,
연고가 없어 마을사람들이 조촐하게나마 장례를 치러줬다.
한 마을 전체가 일제강점기 때 모습을 그대로 가진 외양포 마을.
일제 침략의 기억이 아직 속속들이 남은 곳이다.
뼈아픈 식민지시대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다.
아픈 과거라도 역사는 남겨 보존할 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하여 이 마을 보존방법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기이다.
동의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