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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음악 : SCHUBERT - IMPROMPTU in G Flat Maj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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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항생제 : (자유주의 사상감상시(思想感想詩)7.: 호세 피네라 편)
맑은 샘
악마(惡魔)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악마(惡魔)도 피는 흐른다
피를 타고 뇌(腦)속으로 들어간다
뇌(腦)속에서 드디어 '자유'라는 푸른 곰팡이 폭탄을 터트린다
악마(惡魔)는 천사(天使)가 된다
시나리오라도 악마(惡魔)가 천사(天使)로 된다면,
언제부터인가 '귀족노조(貴族勞助)'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조그만 공장의 사장은 2000만원짜리 기계를
울며겨자먹기로 비정규직 아이와 함께
밤새 라면을 끓여먹으며 티코를 타고
손익분기점도 안되는 1500만원에 팔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대기업의 노조조합장은 밥벌이 데모가 끝난 후
호텔에서 미국산 비프 스테이크를 뜯고 있다
지도자로 나선 이들이여
그대들의 애국심(愛國心)이 진심(眞心)이라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라
어떤 악취나는 장기(腸器)속에서도
푸른 자유란?
없어지지 않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지니고 있으니
제발 저 암(癌)덩어리를 없애다오
강력한 항생제가 되어 다오
무엇이 악(惡)인지도 선(善)인지도 모르는 이들이여
암(癌)덩어리 없애고 배가 불러 자유 만발한다면
나 기꺼이 푸른 항생제가 되어
미친 돈키호테가 대수랴?
푸른 노고지리는 지금도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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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배경 :
호세 피네라 그는 누구인가 ?
「시카고 보이 출신의 하버드 맨」
칠레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이 장기 집권했던 나라, 또한 「일 포스티노(Il Postino)」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벨文學賞 수상 詩人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나라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파불로 네루다는 쉬르 리얼리즘 계열 좌파 시인이다.)
그러나 칠레는 국민연금에 관한 한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가장 과감하고 혁신적인 개혁에 성공한 나라이기도 하다. 피노체트 군사정권 시절이던 1981년 5월1일 처음으로 도입된 칠레의 新연금제도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잘 계승되어 오고 있을 뿐 아니라, 10여 개 국가에서도 채택되고 있다.
칠레의 노동 및 연금 개혁을 주도한 호세 피네라는 1950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駐UN 대사를 지냈다. 그의 삼촌은 추기경을 지냈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성공한 사업가, 학자도 있으며, 막내 동생 호세 미겔 피네라는 中南美의 대표적인 라틴록 가수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갖춘 가족적 분위기 덕분에 호세 피네라는 「思考의 자유」를 누리며 성장했다.
그가 공부한 칠레 가톨릭大의 경제대학장 훌리오 차나(Julio Chana)는 1956년 美 시카고大 시어도어 W. 슐츠 (Theodore W. Schultz) 경제대학장과 「칠레 프로젝트」라고 명명된 광범위한 경제학 교류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 후일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라고 불리게 되는 젊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이들은 이후 칠레의 경제정책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호세 피네라는 칠레 가톨릭大 경제학부를 마친 뒤, 시카고大 대신 하버드大로 진학한다. 이미 시카고大의 「100% 子회사」라고 불리던 칠레 가톨릭大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상,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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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그가 장관이 되었을 때 한 칠레 신문은 그를 「시카고 보이 출신의 하버드 맨」이라고 칭했는데, 피네라는 이러한 평가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호세 피네라는 4년 동안 하버드大에서 공부하면서 경제학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건국헌법에 명시된 자유주의 사상에 心醉(심취)했다. 피네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로는 존 로크(John Locke), 아담 스미스(Adam Smith), 프레데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 1801~1850, 프랑스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언론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칼 포퍼(Karl Popper),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시카고 學派의 巨匠(거장)이라 불리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를 중요한 스승으로 손꼽는다. 피네라는 『1962년에 나온 밀턴 프리드먼 교수의 「자본주의와 자유」를 읽고 나는 처음으로 사회보장제도의 민영화를 생각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아옌데의 失政에 지친 국민들이 쿠데타 부추겨
1959년 쿠바의 공산혁명이 성공한 뒤, 체 게바라(Che Guevara)의 말처럼 「라틴아메리카의 베트남化」 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1970년 칠레에서는 「선거에 의해 수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이 들어섰다. 아옌데 시절, 빈곤층 사람들은 부유층이 모여 사는 동네를 습격, 무단 점거·약탈·절도를 일삼았다. 이를 방치하는 정부의 무관심 가운데 부유층 사람들은 스스로 민병대를 조직, 순찰 및 방어를 해야 했다.
아옌데 집권 2년째부터는 살인적인 인플레로 인해 물가가 뛰기 시작하자 공산국가처럼 생필품 배급제도가 시작됐다. 당시 칠레의 國技(국기)를 「줄서기」라고 할 정도였다. 국민들은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줄만 서 있으면, 그 줄이 무엇을 배급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워낙 길어서 끝이 안 보이므로), 일단 줄을 서고 봤다.그 결과 中南美 가정주부들의 전형적인 데모 형태인 「카세롤라소(Cacerolazo)」가 시작되었다. 이는 먹을 것이 없다고 집에 있는 빈 솥들을 두드리는 家內示威 (가내시위)를 말한다.
한 집에서 빈 솥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 옆집에서도 두드리고, 또 그것이 이웃집으로 계속 전달되어 도시 전체가 밤새 솥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차게 된다. 정부를 향한 성난 民心의 소리였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칠레 軍部는 아르헨티나 등 인접 中南美 국가들의 軍部와 비교할 때, 非정치화된 집단이었다. 그러나 칠레의 경제가 회복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국회가 아옌데 정권의 「20大 反헌법적 행위」를 公表하며 아옌데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자 전통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준수해 오던 軍部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지나가는 군인들에게 닭 모이로 쓰이는 옥수수를 집어던지곤 했다. 닭은 「겁쟁이」를 의미했다.
즉 『나라가 이 꼴인데, 보고만 있는 당신네 군인들은 겁쟁이요!』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1915~ ) 육군참모총장이 이끄는 육·해·공군 및 경찰軍[Carabineros·칠레의 경찰은 軍部에 소속된 경찰軍과 내무부 소속 수사국(Investigacion)으로 나누어져 있음-필자 注]은 아옌데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軍의 거듭된 투항권유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대통령이 決死抗戰(결사항전)의 뜻을 보이자, 공군 전폭기가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宮을 폭격했다. 하루 종일 계속된 총격전 끝에 군인들이 대통령宮에 진입했을 때, 아옌데는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했던 AK 소총으로 이미 자신의 목숨을 끊은 뒤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피노체트는 육·해·공·경찰軍의 수뇌로 구성된 4人 군사평의회(Junta de Gobierno)의 首長으로 鐵拳(철권)통치를 펴면서 개발독재정책을 추진했다. 칠레 역사에 있어서 피노체트 장군만큼 功過(공과)가 뚜렷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노체트 집권 16년 동안 약 2000명의 칠레인 및 외국인들이 불법 체포, 투옥되어 고문받거나 실종되었다. 아직도 그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대 南美 여러 나라들이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 으로 일컬어지는 정치·경제적 소용돌이 속에서 허덕이는 동안 피노체트 治下의 칠레는 과감한 자유시장주의를 도입했다.
먼저 보호무역정책에서 탈피, 「일방적 무역개방정책」을 통해 칠레를 「南美의 홍콩」으로 만들었다. 경제뿐 아니라 노동, 사회복지, 심지어 교육 분야에서도 자유시장원리를 적용했다. 그 결과, 2003년 현재 칠레는 南美에서 가장 모범적인 시장경제주의 국가이자, 南美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국가 스타일의 경제발전을 이룬 「南美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28세의 노동복지부 장관
호세 피네라는 1974년 末 하버드大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12월 귀국했다. 이후 母校인 칠레 가톨릭大 경제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그는 혜성같이 나타난 자유주의 학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77년 5월, 한 세미나에서 피네라 교수는 「칠레는 과연 선진국이 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이 자리에서 피네라는 『1973년 9월 군사정권이 舊사회주의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遺産이라고는 오직 경제 파탄뿐이었다.
자유시장경제 원칙과 개인의 창의력에 기초한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만이 칠레의 경제성장률을 年평균 7%대로 끌어올리는 유일한 해결책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세미나에 참석했던 정부 고위인사의 요청으로 일주일 뒤 피네라는 피노체트 대통령과 군사평의회 위원 및 국무위원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같은 내용의 강연을 했다.
발표가 끝난 뒤 피노체트를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각료 몇 명과 피네라 사이에 간단한 질의·응답이 오간 뒤 모임은 끝났다. 그로부터 일년 반이 흐른 1978년 12월16일 호세 피네라는 피노체트 정권의 노동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그의 아버지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칠레 기독교민주당의 거물이었고, 삼촌이 추기경이었던 가족적인 배경에서 볼 때, 그가 피노체트 정권에 합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피노체트 내각에 합류하기로 한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는 군사정부라는 체제에 대한 反論이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곤 했다』라고 고백한다. 나는 민주주의자이며, 나 스스로를 민주주의 신봉자로 믿고 있다. 민주주의를 존중하며, 그 무엇보다도 「자유」를 중요시하기에 이러한 「소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소신 때문에」 군사정부를 돕게 되었다. 칠레 군사정권이 행한 일부 인권탄압 행위는 분명히 용서받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완전히 손을 씻고 뒤로 물러서서 칠레의 현실을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쳐다보거나, 아니면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더 많은 자유를 위한 구조개혁, 더 큰 복지를 향한 경제발전, 그리고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사회 건설이라는 나의 3大 목표를 추진해 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노동복지부 장관 취임선서를 할 때,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한 점 양심에 거리낌 없이 이 두 번째 代案을 선택하였다』노동복지부 장관으로 노동 및 연금 개혁을 달성한 피네라는 광업부 장관 재직 중이던 1981년, 피노체트 정권의 정치인 추방정책에 반발하여 군사정권과 訣別(결별)했다.
5大 노동개혁 기본원칙
1970년대 初까지 칠레의 勞組지도부들은 「노동貴族」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없을 정도로 많은 특권을 누렸었다. 칠레의 노동법은 선거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일부 특정 勞組지도부에게 이익을 주는 법규로 變質되었다. 피네라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칠레에서는 1970년대 초 이러한 현상이 극에 달했다. 勞組나 동업조합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이 없는 사람은 이발사가 될 수도,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도, 그래픽 산업에 종사할 수도 없었으며, 전기기사가 되지도 못하고, 호텔에 고용될 수도 없었고, 개인적으로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거나 쇼를 할 수도 없었고, 영화제작 기술자로 고용될 수도 없었으며, 빵집에서 일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면서 生計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勞組지도부의 旣得權(기득권)을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우선 勞組의 脫정치화를 위해 勞組간부가 되기 위해서는 최근 10년간 어떠한 정당에도 가입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勞組회비를 월급에서 控除(공제)하는 것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했으며, 勞組지도부 산하의 수많은 「철밥통型」 이익단체들을 해산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에 대해 기득권에 상처를 입은 칠레의 勞組지도부는 당연히 반발했고, 그 불만이 국제노동단체의 보이콧 위협으로 이어졌다. 칠레 勞組의 부추김을 받은 美 노동총연맹 산업별회의(AFL-CIO)는 칠레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상품에 대해 1979년 1월8일부터 전면 보이콧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다.
AFL-CIO가 對칠레 보이콧 작전의 개시일로 公布한 1979년 1월8일을 불과 20여 일 남겨둔 1978년 12월16일, 호세 피네라는 노동복지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AFL-CIO의 조지 미니 노조위원장에게 칠레 노동법 개혁을 약속하고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피네라는 피노체트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향후 칠레노동정책의 방향을 알리는 「5大 노동개혁 기본원칙」을 미국인 사업가 피터 그레이스를 통해 AFL-CIO의 조지 미니에게 전달했다. AFL-CIO는 1979년 7월까지 칠레 노동법 개정을 前提로 보이콧 기한을 연기해 주었다.
피네라가 제시한 「5大 노동개혁 기본원칙」은 ▲勞組 설립 및 가입 등 勞組의 완전한 자유 보장 ▲지도부 선출, 파업찬반 투표, 勞組회비 납부 등의 안건에 있어 노조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적인 의결과정 보장 ▲각 단위 勞組別 단체교섭권 보장 ▲시장원칙에 의거한 파업권 보장 및 무조건적 고용보장 排除(배제) ▲勞組운영 및 단체교섭에 있어서 정부의 無개입 원칙 등이었다. 피네라가 칠레의 노동법 전체를 개혁한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에 대한 부분만 개혁한 것이다. 피네라가 노동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 이미 칠레의 고용시장은 탄력성을 갖추고 있었다. 칠레 근로기준법 제155조 F항은 미국의 레이오프(Lay-off)와 같은 「無귀책사유 근로자 해고」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개혁에 대해 피네라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조합법의 개정에 있어서 우리는 非타협주의의 珠玉 같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의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권했던 그 방법을 따라야 했다.
즉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의 첫 章을 통째로 뜯어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첫 章의 개념은 편견으로 가득 찬 救濟不能 상태였으며, 도저히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노동 분야에서 定說로 여기는 상당수의 이론들이 한낱 잘못된 선입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단체교섭은 「단위회사別 교섭」을 원칙으로 하였다. 왜냐하면 『단위회사別 단체교섭은 산업別 단체교섭이 유발시킬 수 있는 전형적인 계급투쟁형(근로자 對 사용자) 모델을 건전한 시장원칙에 입각한 해당 기업 간의 善意의 경쟁형(한 회사의 근로자 및 사용자 對 他경쟁사의 근로자 및 사용자) 교섭모델로 대체시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이는 종래 「단위회사別」 勞使교섭에서 「산업別」 교섭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한국의 勞使교섭 추세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계급투쟁적 産別 교섭 대신 기업별 勞使 협상 도입
결국 수십 년 동안 정치화되고, 기득권을 누리며 지내 왔던 칠레 勞組지도부층의 권한을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근로자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피네라의 노동조합법 개혁의 핵심이었다. 피네라는 매주 칠레 국영 TV를 통해 짧은 주간 논평을 할 기회를 얻어, 勞組의 민주화와 勞組의 자유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온 국민에게 홍보했다. 자유시장 원칙을 노동 분야에 도입한 피네라의 개혁안은 정부와 노동단체들의 동의를 거쳐 1979년 7월2일 공표됐다. 이 내용에 만족한 AFL-CIO도 칠레에 대한 보이콧을 완전히 철회했다. 자유시장원칙에 입각한 피네라의 노동법이 오히려 혼란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정부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해 8월부터 수많은 칠레 기업들은 新노동법에 의거, 자치적이면서도 자유스러운 분위기 下에서 단체협상에 들어갔고 합리적인 합의도출에 성공했다.
한때 구리광산 노동자와 사용자 간에 협상이 결렬되어 파업돌입의 위험이 발생했다. 피노체트 대통령은 공권력 개입 의사를 밝혔으나, 피네라는 적극 이를 말렸다. 구리광산의 勞使협상도 결국 勞使 간의 원만한 협의로 단체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호세 피네라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지지하는 「勞使政위원회 모델」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는 『勞使政주의는 시장원리에 따른 해결책과 결정을 극도로 불신하는 집단주의적 모델』이라면서 『勞使政위원들은, 세 사람이 한 테이블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導出(도출)해 낸 결론이 수백·수천만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표명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결정보다 公益을 위해 더 정당하고 지혜롭고 유리하다고 看做(간주)한다.
이러한 知的 오만의 양상을 띤 勞使政주의는 원래 사회주의 체제下에서 胎動(태동)했다』고 비판했다. 노동복지부 장관 재임 기간 피네라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ILO 연차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남반구에 추운 겨울이 찾아드는 매년 5, 6월이면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도시 제네바에서 열리는 ILO 연차회의에 참가 신청서를 내려는 사람들로 노동복지부 廳舍(청사)는 북새통을 이룬다. 약 한 달간에 걸쳐 ILO의 회원국 勞使政 대표 수백 명은 연단에 올라 연설도 하고, 샴페인 잔을 들어 건배도 한 뒤, 잊지 않고 아름다운 南프랑스의 해안을 찾아 관광을 한다. 이 勞使政대표단의 위원 한 명이 유럽의 관광 盛需期(성수기)인 6월 한 달 동안 지출하는 비용은 칠레 노동자 35명의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한다』
『허구의 약속은 이제 그만하자』
칠레 군사정권 시절 노동복지부 장관에 불과했던 호세 피네라가 오늘날 全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한 「公的 연금제도」라는 거대한 고양이의 목에 처음으로 "방울"을 달았기 때문이다. 1889년 독일의 鐵血宰相(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국가가 개인의 老後를 책임진다」는 취지의 公的 年金보험법을 세계 최초로 제정한 뒤, 이 제도는 이후 100여 년간 유럽 및 세계 전역에서 복지국가 체제의 核心으로 자리를 잡았다(한국도 1988년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함으로써 公的연금국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칠레는 1924년 公的연금제도를 도입, 南半球에서 최초로 公的연금제도를 제정한 나라가 되었다. 칠레의 公的연금제도는 이미 1970년대 末 칠레 GDP 대비 10%, 정부 支出 대비 25%를 넘어서면서 국가財政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은 40년에서 50년 동안 일한 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액수의 年金을 받으며 퇴직한 반면,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집단의 근로자들은 15년만 일하고도 주택보조금과 年金급여 자동조정의 혜택을 받았다.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 (1965~1970년)은 1968년 한 연설에서 당시 年金제도의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표현했다. 칠레에는 年金에 관한 2000여 개의 법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2000여 개의 年金관련 법률과 규정, 그리고 각 年金관리공단의 협약등은 한없이 커 가는 괴물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공증소와 법원기록보관소에 근무하는 2100명의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年金관련 법률만도 27개입니다. 단 2100명을 위해 27개의 법률이 있는 것입니다! 칠레에는 30개의 연금관리공단이 있고, 사회보장제도 보조기관內에 70개의 복지관련 부서가 있습니다. 총 年金가입자의 90% 이상이 사회복지공단, 민간근로자 年金관리공단, 공무원 年金관리공단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심각한 문제는 칠레가 GNP의 18.1%를 年金재정 지출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만간 칠레는 退職者(퇴직자)의 나라로 전락할 것입니다』
호세 피네라는 노동복지부 장관으로 入閣하기 전인 1978년 3월 한 주간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年金개혁이라는 시급한 과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칠레의 국가적인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여러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본질적인 변화가 봉쇄되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장벽은 누구도 이 문제 해결에 대해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現 정권이 연금개혁을 이루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영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피네라는 구체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편견에 얽매인 허구의 약속은 이제 그만하자. 年金문제가 시한폭탄이 되지 않게 하려거든 하루 빨리 진정한 개혁을 시도하라. 국가가 사회보장적 기능을 감당하되 最低 年金저축액에 대한 의무만 규정하고, 국민들이 어떻게, 어디에 개별적으로 年金을 저축할 것인가는 국민의 자유에 맡겨라』
국민들에게 年金제도 선택의 자유 부여
호세 피네라가 고안한 칠레 年金제도의 特徵(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가 주도해 오던 公的연금제도를 민간회사가 운영하는 私的연금제도로 바꾸었다. 국가는 단순히 근로자들에게 年金가입의 의무만 法的으로 정할 뿐이며, 어느 年金관리회사(AFP·Administradora de Fondos de Pensiones)에 가입할 것인지는 근로자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다.
둘째, 年金관리회사는 각 年金가입자에게 年金저축통장을 발급하여, 자신의 年金 積立(적립) 현황과 해당 年金관리회사의 年金기금 운영실적에 따른 수익률을 매일 매일 체크할 수 있다. 年金관리회사는 年金기금을 뮤추얼 펀드로 구성, 정부가 정해 놓은 철저한 가이드 라인下에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투자하며, 매달 基金운영 실적을 투명하게 告示해야 한다. 근로자가 수령할 年金은 각 年金관리회사의 실적에 따라 결정되므로, 근로자는 수익률이 더 높은 年金관리회사로 移轉(이전)할 수 있다.
셋째, 종전과 달리 年金납부액 중 사용자 측의 寄與(기여)분이 폐지되고 , 근로자 급여의 10%만을 원천 징수하여 근로자가 정한 年金관리회사에 每月 납부한다. 2003년 현재 칠레에는 7개의 年金관리회사가 있다. 이 年金관리회사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年金기금을 증권, 채권 등에 투자하는데, 투자에 대한 결정은 年金관리회사가 직접한다. 정부의 규정은 단지 각 투자분야와 포트폴리오 總합계의 最高 한도 규모만을 결정한다.
넷째, 각 年金가입자는 각 年金관리회사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年金계정에 적립된 금액과, 은퇴하고자 하는 연도에 근거하여 장래에 수령할 年金급여의 금액을 미리 計算할 수 있다. 또한 근로자는 은퇴 희망 연도, 수령 희망 年金급여 등을 入力, 每月 납입해야 할 年金보험료를 再조정하는 「맞춤식 設計」를 할 수 있다.
다섯째, 퇴직時 근로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중 한 가지 年金급여 지급방식을 택할수 있다. 그의 年金저축계좌에 적립된 基金(기금)을 활용해 생명보험사와 終身 年金계약을 체결해 每月 일정 금액을 죽을 때까지 받거나, 또는 그 기금을 年金관리회사 계좌에 남겨둔 채 계획적인 급여인출을 해 나가다가, 은퇴자가 사망할 때 그 年金계좌의 잔여 기금은 상속재산의 일부로 歸屬(귀속)되는 방법이다.
여섯째, 만일 기금의 운영 실적이 最低額(최저액)의 年金 수준에 未達하는 경우에는 정부가 差額(차액)을 보상해 주도록 한다. 즉, 국가는 年金관리회사 간의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통해 최대한의 年金 운영 수익률이 발생할 수 있도록 돕고, 年金급여 수준이 저조할 경우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보완하는 사회 安全網(안전망) 역할을 수행한다는 원리이다. 호세 피네라는 年金개혁을 통해 국민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했다. 舊 公的연금제도에서 新 年金제도로 변경할 자유, 자기가 원하는 年金관리회사를 선택할 자유, 필요에 따라 年金관리회사를 변경할 자유, 年金관리회사가 자체적으로 基金운영 및 투자를 결정할 자유, 자영업자들도 자율적으로 年金에 가입할 자유, 年金보험료, 年金급여, 은퇴기간 등을 조절할 자유, 年金급여 수령방법에 대한 선택의 자유 등 국민들에게 최대한의 選擇權(선택권)을 부여하는 한편, 국가의 본분인 사회안전망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드디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아무리 군사정권 체제라 해도 이러한 개혁이 그렇게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피네라는 당시 年金개혁 반대세력을 총 일곱 그룹으로 구분하였다. 反개혁 세력은
▲첫째, 舊제도 내에서 특혜를 누리던 자들
▲둘째, 사회보장문제 전문가로 자처하던 교수들
▲셋째, 年金관리공단의 경영자들
▲넷째, 勞組지도부
▲다섯째, 野黨 정치인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여섯, 일곱째는 군사정권에 협조하던 정통 右翼정치인 집단과 정부 내부의 軍人들이었다』
피네라가 年金제도 개혁案을 피노체트 대통령 앞에 보고할 때, 대통령 諮問委(자문위)의 한 장군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개혁안이 국가권력의 손발을 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느냐』면서 『당신의 자유주의 경제원칙이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라고 비판했다. 한 대령은 『당신이 칠레에 도입하고자 하는 그런 年金제도 비슷한 것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고 따졌다.
이에 대해 피네라는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가 고안한 年金제도가 세상 어디에 존재하느냐고요? 사실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이양 시기를 정하는 군사정부 또한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유시장경제 혁명을 이루기 위해 젊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을 등용하는 피노체트 장군과 같은 분은 또 어디에 존재합니까? 나는 이와 같은 것들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개혁案의 경우에도 과연 그 아이디어가 「原則的」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따라서는 안 될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원칙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세상에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부는 피네라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군사평의회의 한 장군은 『우리가 내일 받게될 年金을 우리 자손들이 지불해야 하다니 不當하질 않소!』라며 피네라의 제안에 동의했다. 군사평의회의 최종 동의를 얻은 뒤, 피네라는 곧바로 노동복지부로 달려가 개혁 실무자들과 얼싸안으며 감격에 젖었다. 그때 그중 누군가 한 사람이 열정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칠레 만세!』 1981년 5월1일 노동절에 개혁연금법이 발효되었다.
이후 한 달 만에 총 근로자의 25%에 해당하는 약 50만 명의 근로자가 새로운 제도로 전향하였다. 이는 첫 달 약 2만 명 정도의 전향을 생각하던 정부 측의 豫測(예측)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그리고 1981년 末까지 총 근로자의 80%인 160만 명이 新연금제도에 가입하였다. 반대파들은 과거의 연금제도가 워낙 형편 없었으므로 新연금제도가 反射利益(반사이익)을 보았다고 깎아내리기도 하였지만, 그 누구도 예측 못 한 대단한 호응이었다. 호세 피네라는 이에 대해 『국민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할 때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자유는 하늘이 준 가장 고귀한 복 중의 하나」
칠레式 年金제도는 페루,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멕시코, 엘살바도르 등 中南美 여러 국가에서 이미 도입하여 시행 중이다. 최근에는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등 舊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를 채택하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칠레式 연금제도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중국, 일본 등에서도 자신들의 公的연금문제의 해결책을 피네라 모델에서 찾고자 苦心 중이다. 1998년 11월 감사원 발표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軍人연금기금은 이미 1973년에 枯渴(고갈)되어 매년 5000억원 이상의 정부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다. 공무원 年金기금은 2001년, 私學年金기금은 2017년, 國民年金기금은 2032년에 각각 고갈될 것이라고 한다.
호세 피네라의 「예언」대로 한국의 公的연금제도 역시 언젠가는 「빙하에 부딪히는 타이타닉號」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금부터 약 25년 전 「국민에게 선택의 자유를!」이라고 외치며 외로운 改革의 깃발을 들었던 호세 피네라의 충고에 이젠 우리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격언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제는 한국도 다음 世代에 다가올 年金문제의 시한폭탄을 해체해야 할 때이다.
그 해결책은 바로 칠레처럼 우리 국민 개개인에게도 자신의 老後생활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닐까? 호세 피네라는 1981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 「年金개혁연구소」를 설립, 운영하는 한편, 미국의 보수系 싱크탱크인 카토연구소의 年金개혁프로젝트의 공동의장을 맡아, 25년 전 칠레의 公的연금개혁에서 얻은 그의 경험과 지혜를 온 세계인들과 나누고 있다. 자유는 하늘이 준 가장 고귀한 축복 중의 하나이다. 이 자유는 세상의 모든 보물과 비교할 수 없다. 자유와 명예를 위해 우리의 삶은 충분히 모험할 가치가 있다』(호세 피네라가 즐겨 인용하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말).
호세 피네라의 年金제도 개혁에 대한 평가
『칠레의 年金제도는 아마 지금까지 南半球(남반구)에서 유래한 사회정책 중 가장 의미 있는 정책일 것이다』 (조 클라인, 미국 뉴스위크誌, 1994년 12월12일자)『칠레의 年金제도를 미국에 도입할 경우 칠레에서와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그것은 높은 수익률,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제도,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경쟁의 長點을 말한다』(게리 베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미국 인베스터스 비즈니스 데일리, 1994년 5월13일자)
『칠레 年金기금은 칠레에 있어 엄청난 저축財源으로 탈바꿈하였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이다』(리처드 로젠버그, 뱅크 오브 아메리카 회장, 칠레 엘 메르쿠리오 신문, 1994년 6월16일자)『세계은행은 향후 수년 동안 적어도 30여 개국이 국민연금 개혁에 착수할 것으로 예측한다. 그리고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간에 공무원들이 칠레의 제도를 배우기 위해 그 나라를 방문하는 일은 이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메트 모페트, 월 스트리트 저널, 1994년 8월22일자)『세계에는 세 가지의 의무저축型 年金모델이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정부가 운용하는 年金기금에 年金보험료를 납부하여야 한다.
호주에서는 근로자들이 해당 소속 기업이나 소속 산업에서 관리하는 年金에 의무적으로 가입하여야 한다. 칠레에서는 여러 年金관리회사 중 하나를 선택하여 개인 年金계좌를 가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칠레 개인 年金계좌 제도가 가장 우수해 보인다』(이코노미스트誌, 1994년 8월13일자)『그 체제가 左翼이든, 中道이든, 右翼이든 관계없이 이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퍼뜨리고 수출하는 이 라틴아메리카인은 누구인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도 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 이작은 거인은 누구인가? 칠레 年金개혁의 아버지인 호세 피네라에게 비록 노벨경제학상이 주어지지 않을지는 모르나, 피네라의 진정한 노벨상은 세계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불안한 老後 걱정을 그 덕분에 덜게 된 데 대한 感謝 그 자체일 것이다』(안드레스 아우하레, 콜럼비아大 경제학 박사, 아순토스 데 에코노미아, 1998년 2월24일자)『그리고 끝으로 우리의 연금관리 문제에 있어서 많은 국회의원들이 칠레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는 근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레는 이 부분에 있어서 훌륭한 사례를 보여 주었으므로 우리는 귀하로부터 이에 대한 助言을 듣기를 기대합니다』(조지 W. 부시, 칠레 라고스(Lagos)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관련 백악관 보도자료, 2001년 4월16일자)『미국-칠레 간 체결하는 자유무역협정의 장점 중의 하나는 미국이 칠레로부터 꼭 배워야 할 年金제도에 대한 좀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로버트 졸릭,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2003년 6월6일, 미국-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時 발언)
*호세 피네라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자유주의 이승만의 제1공화국 이후로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명의 군사정권 시절을 보냈다. 이들 각 정권의 공과를 차치하고 진정 국민경제와 복지를 생각해야 하는 우리 지식인들의 노고와 성공, 실정들은 무엇이었을까?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지금 세 후보들의 공약들을 보면 장미빛 구호만 난무하고 빛좋은 개살구 헛공약들만 난무하는 것 같다. 각 진영의 복지공약들 중 문제점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리나라 노조들의 문제는 무엇일까?
저성장 장기불황 경제로 진입한 지금 기업들의 현실태와 상황을 감안해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있어 각 후보 진영 공약들의 비구체성은 무엇일까? , 대형 귀족노조들의 문제들은 무엇일까?
*호세 피네라의 연금 복지정책 접근 방식은 좌파사상이 아니라 철저히 자유주의적 사고와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것의 빛나는 장점들은 무엇일까?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이 국민연금에 대해 가장 많이 불만을 나타내는 부분은 강제가입규정이다. 국민연금 제도는 가입연령 및 가입대상 등을 법률로 규정하고 있어 일반 민간보험사와는 달리 자유로운 가입 및 탈퇴가 불가능하다.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보니 개선방안이 마땅히 없을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두번째 많은 불만은 생각보다 연금 수령액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구미 선진국에 비해서 절대 낮은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 65세 이상 어르신 대부분에게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현행 보험료율을 대폭 올리지 않는 이상 급여율의 조정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호세 피네라의 자유주의식 사고에 비추어 볼때 우리나라 국민연금 제도의 개선 방안들은 무엇일까?
2012년 10월 22일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국민연금공단 국정감사에서 소속 여야 의원들은 국민연금의 기금 고갈 문제에 대해 집중 질의하며, 재정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구조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기 위해 기금운용본부를 독립기구로 분리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또 다시 제기됐다. 2008년 국민연금추계위원회는 장기재정 추계를 통해 기금고갈 시점을 2060년으로 예측한 바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인구 추계 등의 오류를 바로잡으면 기금고갈 시점은 2060년보다 11년 빠른 2049년, 또는 7년 빠른 2053년이 될 것이라고 주장, 논란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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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é Piñera is the architect of Chile's private pension system based on personal retirement accounts. Piñera has been called "the world's foremost advocate of privatizing public pension systems"[1] as well as "the Pension Reform Pied Piper" (by the Wall Street Journal).[2] He was Secretary of Labor and Social Security, and Secretary of Mining, in the military government of General Augusto Pinochet. He is now Distinguished Senior Fellow at the Cato Institute, a libertarian think tank based in Washington,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Center for Pension Reform based in Santiago, Senior Fellow at the Italian libertarian think tank Istituto Bruno Leoni, and member of the Advisory Board of the Vienna-based Educational Initiative for Central and Eastern Europe. He has a Masters and a Ph.D. in Economics from Harvard University.
Early life
José Piñera Echenique is the son of José Piñera Carvallo, Chile's Ambassador to the United Nations during the government of President Eduardo Frei Montalva (1964–1970). His uncle Archbishop Bernardino Piñera was twice elected President of Chile's Council of Bishops. He has three younger brothers: Sebastián Piñera, a businessman-politician and the current President of Chile; Pablo Piñera, managing director of Banco del Estado and former member of the Board of the Central Bank; and Miguel Piñera, a musician. He also has two sisters, Guadalupe and Magdalena. His maternal lineage is of Basque descent and his paternal lineage is of Asturian descent.
Piñera graduated in 1970 as an economist from the Universidad Católica de Chile, at that tim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Department of Economics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In this same year, 1970, he began graduate studies at Harvard University. In 1972 he received his M.A. and in 1974 his Ph.D. in economics. He was a Teaching Fellow at Harvard and an Assistant Professor at Boston University. Piñera returned to Chile in 1975 as a professor of the Catholic University of Chile. He has written eight books and numerous essays and articles. He was awarded an honorary degree at Universidad Francisco Marroquin.
After promoting a plan of free market reforms that he considered could double Chile's annual rate of growth to 7%, he became, first, Secretary of Labor and Social Security (1978–1980), and then, Secretary of Mining (1980–1981), in the cabinet of General Augusto Pinochet. As such, he was responsible for four structural reforms: the creation of a retirement system based on private personal accounts (the AFP system), the opening of the private health insurance system (the ISAPRE system), the redesign of the labor code changing the terms of trade union elections, and the constitutional law on mining. José Piñera entered the cabinet in December 1978 when Chile faced two serious external threats: a possible war with Argentina over the disputed Beagle Islands and a trade boycott by the American AFL-CIO labor confederation. Piñera quickly announced that Chile would soon promulgate a new trade union law reestablishing labor democracy in Chile (suspended since the coup d'état, September 11, 1973) and a new collective bargaining law. At the same time, the Vatican offered mediation over the Beagle Islands.
Piñera followed up on June 29, 1979, announcing a package of four related laws that transformed trade union legislation in Chile:
On November 4, 1980, Chile's legislature passed Piñera's Social Security Reform (D.L 3.500 and D.L 3.501) proposal, that allowed workers to opt out of the government-run pension system and instead put the former payroll tax (10% of wages) in a privately managed Personal Retirement Account (PRA). New workers were automatically enrolled in the new system. These measures resulted in a privatization of Chile's social security system. This same Reform introduced two important changes to the health system: a) it fully privatized the disability insurance system, which became an integral part of the so-called "AFP system" (the AFPs are the private companies that manage the PRAs on workers' behalf); and, b) it allowed workers to opt out from the government health insurance system with all their mandatory contribution (another 7% of wages), as long as they were willing and able to buy with that money a minimum health insurance plan in what became the "ISAPRE system" (ISAPREs are private companies that offer diverse health insurance plans).
The above mentioned reform had a major impact on Chile's economy and society. By February 2011, 8.8 million individuals had a PRA. Because of movements in and out of the labor force, this number cannot be directly related to the current labor force of 7 million, out of a working-age population of 12.6 million. As regards ISAPREs, they counted for 1.2 million contributors in December 2010, who with their dependants provided health coverage to 2.7 million persons, representing about one-sixth of the total Chilean population of 16.5 million at that time. The proportion of persons covered by ISAPREs has been reducing since the mid-1990s, when it peaked at just over 25% of the population.
The PRAs annual average rate of return since inception in May 1981 has been 9.27% a year, above inflation, according to the official statistics (for Fondo C) compiled by the Superintendency of Pensions (www.safp.cl). The resources accumulated in the workers accounts amount to $150 billion, or approximately 72% of Chile's GNP. According to William Lewis, total government expenditures in Chile as a percentage of GDP declined from 34.3% in 1984 to 21.9% in 1990, and of that 12.4 points decline, social security and welfare changes accounted for half.
Economist Paul Craig Roberts, who is known as the "Father of Reaganomics", has noted, that "Chile was the first country in the world to privatize Social Security. José Piñera played the key role. privatizing the pension system would have been enough to earn José Piñera his place in history, but he also oversaw the privatization of health care". Some analysts and journalists have criticized the Chilean Pension system, pointing out, for example, that it did not require the self-employed to contribute or arguing that it imposed excessive administrative costs. From a different angle, a paper published by the 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showed that the Chilean model had indeed some shortcomings. But surprisingly to some, it argued that these were a result of overregulation.
A report submitted in 2006 by a bipartisan, government-appointed, Commission[6] concluded that the system was working better than expected for the employed workers, that it was now technically possible and socially advisable to make the capitalisation system also compulsory for the self-employed, and that the fiscal savings arising from the transition process allowed for a strengthening and extension of the already existing safety net (consisting of a "pension asistencial" and a "pension minima", that will be combined into a "pensíon basica").
On December 1, 1981, José Piñera obtained approval for the Constitutional Mining Law. The law was ratified by a 7–0 vote in the Constitutional Court. The law created the legal framework supportive of the subsequent privatisation of large state-owned companies, notably in the energy and telecommunications sectors. In the 1990s, the concession system introduced by the Mining Law was extended into the infrastructure sector – highways, ports and airports – which had traditionally been part of the so-called public works carried out by the State.
In December 1979, José Piñera, while Secretary of Labor and Social Security, gave an important interview to the magazine Que Pasa promoting his vision of a free and democratic Chile [2]. In August 1980, Piñera signed the 1980 Constitution that established the transition path toward free elections in Chile. In April 1981, José Piñera, while Secretary of Mining, confronted General Pinochet in a cabinet meeting to prevent the leading trade union leader, Manuel Bustos, from being exiled. As a result, the order was rescinded.[7] A year after Piñera resigned his Ministry position in December 1981, Manuel Bustos was exiled to Rio de Janeiro.
On December 2, 1981, the day after approval of the Mining Law, Piñera resigned in order to restart his opinion magazine Economia y Sociedad, which was dedicated to fight for the transition to a democratic system and the consolidation of the free-market economy.[8] In those years, still under the military regime, Piñera wrote seventy articles [3] in the press in defense of human rights and democracy.[9]
In March 1990, after Chile's transition to democracy, he founded the "Proyecto Chile 2010". He described the goal as making Chile a developed country at its bicentenary. In 1992, in order to prove that the poor could understand free market solutions to their problems, he ran and was elected city councilman with the highest vote for one of Santiago's poorest neighborhoods, Conchalí.[10] In 1993, in order to defend and explain to the population at large his free market reforms, he ran a testimonial presidential campaign as an independent. As a result, his legacy has been kept intact by the four Concertacion governments in the period 1990–2010.
In December 2009, José Piñera shared a panel with the Polish trade union leader Lech Walesa in an International Conference in Zagreb dedicated to the theme of the prospects of democracy in Europe 20 years after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he conference was organized by Damian von Stauffenberg, member of the famed aristocratic family that opposed Hitler, and president of the Educational Initiative for Central and Eastern Europe (EICEE). Diario Financiero of Chile published this note [4] and Ian Vasquez, Director of Cato's Institute for Global Liberty, wrote [5] that both José Piñera and Lech Walesa "have done so much to increase human freedom: Walesa for leading a workers’ movement that played a key role in the collapse of Soviet communism; and José Piñera for leading a revolution in private pensions that is turning workers into capitalists around the world."
In 1994, Piñera founded "The International Center for Pension Reform" in order to promote the Chilean model throughout the world. In 1995, he became also the co-chair of the United States Cato Institute's Project on Social Security Choice.[11] Since then he is said to have visited around 80 countries, 28 of which have implemented personal retirement accounts following the "Piñera model". Unable to finance the transition toward a fully funded system, most of them combined it with their former state-run defined-benefit pension scheme.
The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Pension Fund Managers" has commented: "Towards the end of the year 2006, 28 countries (11 in Latin America, 12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and five in other parts of the world) had already introduced mandated pension programs based on individual capitalization in their respective social security systems. A total of 100 million workers now have pension savings accounts in this type of program and have built up funds of over US$ 255 billions. Ukraine and Romania have already enacted reforms – to be implemented between 2008 and 2009 which include the introduction of mandated capitalization programs in their respective social security systems."
In June 2007, the South African press published an article titled "Applying passion to break poverty" reporting on Piñera's conferences in Cape Town, Johannesburg and Durban.[12]
In May 2008, Richard Rahn, Chairman of the Institute for Global Economic Growth, wrote in The Washington Times: "If you were asked to name one person who has enabled more people to gain wealth and security than any other person on the globe, who would you name? In 1881, here in Berlin, Otto von Bismarck started the world's first modern pay-as-you-go social security system which served as the model for the U.S. Social Security system and that of many other countries, including setting the retirement age at 65. No, Bismarck is not the answer to the opening question. The answer is Jose Pinera."
* 푸른 항생제 :자유주의 사상감상시(思想感想詩) 7. 호세 피네라 편의 배경과 참고 :
자유주의 사상가 열전 7. 호세 피네라 편 : (구)자유기업원 ((현)자유경제원)
* 제8편 예고 : 미국 新보수주의의 代父 어빙 크리스톨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