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역시 사랑
- 허광철 신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되뇌어 봅니다. “진리가(하느님이/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시고, 이어서 너무나 유명한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머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유다인의 임금이냐고 묻는 말에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고 하십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지요. 우리도 때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제가 얼마 전 미사를 드리는 중에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라는 성가의 가사가 귀에 들어와 잠시 거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사형도구인 십자가가 무한 영광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알아듣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일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역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음에 부치십니다.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진리 중에 가장 큰 진리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때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없이 참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 우리 삶에 웃음뿐 아니라 눈물이 있고, 그 눈물을 통해 우리 삶이 정화된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 진리이리라는 묵상에 깊이 머뭅니다.
솔직히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김찬선신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혹자는 내가 자유로우면 되지
누가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인가 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면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동을 하되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스스로 할 때 행동에 자유롭습니다.
내가 존재하되 누구로 말미암아 존재치 않고
스스로 존재할 때 존재가 자유롭습니다.
그러니 누구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있는 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신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솔직히 인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님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자유로움을 하느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 한도 안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이 완전한 자유지만 하느님만 그러하시고
우리 인간은 제한이 있는 자유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운동장 안에서는 마음껏 공을 차지만
운동장 밖에서는 공을 차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제한된 자유 안에서 자유를 사는 것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울타리 너머를 생각하며 부자유하든지,
울타리 개의介意치 않고 안에서 마음껏 공을 차든지.
그런데 개의치 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의식意識이 개입介入되지 않는 겁니다.
울타리에 대한 의식이 없어서
어떤 행위에 있어서 울타리를 전혀 의식치 않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때 부자유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울타리도 마찬가집니다.
울타리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부자유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울타리를 의식하면 울타리는 나를 가두는 것이 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울타리는 나를 보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의 울타리입니다.
진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고
우리는 생명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진리를 거스를 때
우리는 진리를 의식하게 되고
진리를 의식할 때 진리는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며,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 밖으로 뛰쳐나가면 죽게 됩니다.
경칩이 되기 전에 개구리가 밖으로 나오면 죽고,
입춘이 되기 전에 싹이 고개를 내밀면 죽겠지요?
마찬가지로 진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고 생명을 누리지만
진리를 거스르면 죄의 노예가 되고 죽게 된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도 다소 긴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31절과 32절 두 말씀에 초점을 맞춰 깊게 묵상하면 족하다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곧잘 믿음이 최고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토로하는 것과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도대체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은 또 어떤 경지를 일컫는 것인지 바르게 알아들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있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강한 저항을 표시합니다. 자기들은 종노릇한 적이 없노라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적손들이라고. 이 말씀들을 깊이 알아듣는 것은 우리 영적 여정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자유로움이 어떤 경지인지 알아듣는 것만큼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겠습니까. 이 알아들음의 정도에 따라 우리 삶의 질과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말입니다.
우리 삶은 정녕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배운 게 없어서, 돈이 없어서, 높은 지위나 권력이 없어서, 건강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진리를 깊게 알아듣고자 하는 열정에 목이 타고,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이 온몸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린 오늘 이 복음을 붙들고 깊게 자맥질해 들어가고자 하는 바람과 용기가 움터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모 방송사에서 ‘부자 되는 법’에 관한 특강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자 되는 법이 도대체 무엇인지 잠시 보았지요. 강사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부자 부모 밑에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잣집 사위나 부잣집 며느리가 되는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일까요? 방청석에서는 ‘로또, 복권’ 등을 외칩니다. 이에 대해 강사는 “로또에 당첨될 확률도 극히 낮지만 설사 당첨이 된다 한들 선례로 보면 그 돈을 다 탕진하고 거의 모두가 예전보다 더 못한 상태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힘들게 벌지 않은 돈은 물거품과 같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진지하게 강사의 말을 듣습니다. 강사는 세 번째 방법이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세 번째 방법은 가장 확률이 높은 것으로, 바로 스스로 노력하여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방법. 어떻습니까? 간단하지요? 간단하지만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부자 부모나 부잣집으로 장가 시집가는 것보다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확률 높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열심히 노력하면 될까요? 물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되는 것은 부자 되기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구원의 키를 쥐고 계시는 주님의 자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죄’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죄로 인하여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종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 자신은 죄에 대해서 얼마나 자유롭게 살고 있을까요?
사실 죄를 지으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는 있지만, 실제 마음에서는 불안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굴레에 걸려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 대축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며,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통회와 고백을 통해서 보다 더 깨끗한 내가 될 때, 진정한 자유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작은 흙무더기이다.(한비자)
신앙의 두 모습
-오민환-
어제 복음까지 예수님은 유다인들로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요한 복음을 며칠 읽다가 루카 복음을 읽지만 연결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선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를 방문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묵상하다 보면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천사가
떠오릅니다(창세 18,1-16 참조). 유다인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지요. 나이든
사라가 임신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에
대해 유다인과 예수님의 논쟁이 있었지요.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의 다윗 집안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임마누엘’ 예언이 현실이 되었습니다(이사 7,14
참조).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젊은 여인’ 마리아는 이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을 듣는 이의
자세를 알려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닥칠 엄청난 사건도
“주님의 종”이 됨으로써 평화를 얻게 됩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논쟁을 벌이던
유다인들과는 전혀 다른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성지 주일을 앞두고 이렇게
우리는 신앙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
-김찬선신부-
자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상태”
법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하다 보니 법을 어깁니다.
진리를 일부러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다보니 진리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다 보니 계명을 거스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하고
자유야말로 인간의 존귀함과 행복의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먹고 싶지 않은데도 먹어야 한다면
그것이 산해진미라 해도 먹는 것이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유의 기준이 자기 마음대로 함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 마음대로 함이 진리를 거스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반대 차로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가 주어지긴 했지만
반대 차로로 가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거스르면 자기도 남도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참 자유는 자연스럽고 진리 안에서 편안해야 하고
죄의 자유가 아니라 순종의 자유이어야 합니다.
물살을 거스르는 것도 자유지만 흐르는 물을 따르는 것도 자윱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진리와 하느님 뜻에 자기를 맡기는
능동적 수동태야말로 참 자유일 것입니다.
깨달음과 자유
-전삼용신부-
여느 아이들처럼 저도 어렸을 때 오락실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헌금하라고 동전을 주시면 성당에 안 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하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아채시고 저를 매우 혼내셨습니다. 다음번엔 주보를 가져오라기에 성당에 일찍 가서 주보를 가지고 나와서 오락실로 향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웬만한 오락들은 기록을 깰 정도로 잘 했습니다. 그래서 동전 한두 개만 있으면 미사 시간과 얼추 맞게 끝나곤 하였습니다. 그것도 돈이 모자라자 부모 지갑에서 돈을 훔친 아이와 오락실에 함께 가서 그 돈으로 함께 오락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나쁜 짓인 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여라 가지 나쁜 방법들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집에 컴퓨터가 있어 하루 종일 그런 불안감 없이 편안하게 오락을 하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컴퓨터만 한 대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컴퓨터를 갖게 되었지만 컴퓨터로 오락을 해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컴퓨터로 오락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락을 해 보니 오락에 집중하는 시간에 신체의 에너지가 그 무엇보다도 많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만 허비시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오락을 절대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끊지 못하던 것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좋지 않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그저 사실을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깨달음’이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미워하니 나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나를 위해서라도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려하면 그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미움도 사라지고 그 이후로는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단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단순히 아는 것으로는 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브레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 ‘세븐’을 알 것입니다. 세븐은 한 살인자가 세상의 죄악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7죄종, 즉 탐식, 탐욕, 나태, 정욕, 교만, 시기, 분노의 순서대로 살인이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시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한 그 범인을 죽이려고 하는 브레드 피트와 멀리서 그러면 지는 것이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모건 프리먼의 장면은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아직 머리에 생생합니다.
경찰이 자수한 범인을 죽여서는 안 되지만 브레드 피트는 갈등 끝에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범인을 죽이고 맙니다.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경찰도 나머지 6명의 죄의 노예들 틈에 끼게 된 것입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통제가 되지 않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7죄종에 나오는 것처럼, 먹는 것, 갖는 것, 나태해 지는 것, 성적인 욕망, 명예욕, 시기질투, 화나는 때처럼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이란 자유가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떤 죄든 그것에 집착하면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권력이나, 쾌락, 돈 등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죄의 종살이’라고 표현하시고 ‘진리의 참다운 깨달음’이 없다면 그런 사람에겐 결코 ‘자유’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씀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이 진리를 통해 우리의 본질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원숭이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고, 이 변화가 죽음과 부활, 즉 세례를 사는 삶이고 또 회개라고도 합니다.
영화에서 어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제발 누가 나 좀 말려줘.”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도 자신이 컨트롤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가 말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어쩔 수 없는 내 사랑>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자유"라든지 "홀가분함"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가출(家出)을 시도하고, 또 어른들도 출가(出家)를 염원하는 것 같습니다.
틈만 나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왠지 모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삶의 부담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왠지 모를 이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마음뿐이지요. 몸은 언제나 바닥을 헤맵니다. 뭔가가 뒤꿈치를 늘 붙잡고 있는 듯 합니다. 늘 무엇인가에 억눌려 부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왠지 뭔가 부담스럽고, 뭔가 어색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인생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의 목표, 삶의 본질적인 의미, 존재의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항상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존재 이유랄까 삶의 의미는 항상 하느님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분의 손바닥 위에 살아갈 때, 그분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비로소 의미를 발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듯 합니다. 그분 안에 쉬기 까지는, 그분께 닷을 내리기까지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것이 우리네 삶인듯 합니다.
때로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때로 중압감을 주는 듯하지만 그분 말씀과 계명의 핵심을 깨닫기만 한다면 결국 감사만이 남게 됩니다. 기쁨과 찬양만이 남게 됩니다. 행복함만이 남게 됩니다.
성서 모든 말씀의 종합은 사랑입니다. 성서 말씀의 최종적인 결론이자 핵심은 우리 인간을 향한 그분의 측은지심이자 자비입니다. 모든 계명을 다 요약하면 결국 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질책도, 그분께서 보내시는 십자가도, 견디기 힘든 시련도, 끔찍스런 경고 말씀도 다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성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눈으로만 읽지 마십시오. 글자 그대로만 해석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성서 말씀을 이루고 있는 모든 단어 하나 하나 그 이면에 숨어있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찾아보도록 힘쓰십시오.
결국 그분은 어쩔 수 없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받아들여주시고, 어쩔 수 없이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연민과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이십니다.
제가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퍼스널 컴퓨터란 것이 들어왔을 때인 1984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25년을 컴퓨터 가까이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고치고, 또한 프로그램도 어느 정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뭐 인기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달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부님들이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제가 전화를 해서 문의를 할 정도니까요.
이 정도쯤 되니까 제 앞에서 컴퓨터에 대해서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참견하고 싶어집니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도 그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요. 어떤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그리고 제 컴퓨터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 스스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어보는 것이 괜히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아서지요.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아는 체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괜히 나만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며칠 전에 컴퓨터 내에서 프로그램 충돌이 자주 일어나서 하드디스크를 깨끗이 포맷을 했습니다(처음 구매했을 때의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쓰던 프로그램을 다 설치했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에는 잘 쓰던 프로그램이 작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틀 동안 끙끙 맸습니다. 제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되어서, 결국 그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에 문의를 했지요.
딱 1분만에 해결했습니다. 전화만 하면 1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저는 자그마치 이틀 동안 끙끙댔던 것이지요. 해결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나를 드러내려는 것, 그래서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내 모습에서 벗어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율법을 잘 알고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명인 사랑을 들고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면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지요.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과 말씀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기준과 판단에 어긋난다면 무조건 믿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 역시 그럴 수 있음을 앞서 말씀드린 저의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나의 틀에서 벗어나 이제 주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말씀처럼 죄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반대로 친구가 없는 곳에서도 그를 칭찬하도록 하라(토머스 풀러).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하수구 주님>
사순시기의 막바지인 요즘 저희 사제들 ‘대목’입니다. 답답하고 좁디좁은 고백소 안에서 몇 시간 씩 앉아계셔야만 하는 신부님들, 참으로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판공성사를 도와드리러 가보면 사죄경을 셀 수도 없이 반복해도 고백성사는 계속됩니다. 두 시간 가까이 지났길래, 화장실도 갈 겸, 줄이 얼마나 되나 확인할 겸, 잠깐 고백소 밖으로 나왔는데, 아직도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오늘 대박이로구나!’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몸은 비록 힘들지만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간 이고 지고 왔던 무거운 영혼의 짐들 다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신자들을 바라보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 주님은 마치 하수구 같습니다. 쓰레기통 같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무겁게 끌고 다니던 잡동사니들, 불순물들, 지저분한 것들, 죄들, 어두운 과거,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따지지 않고 다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말끔히 정화시키십니다. 온전히 원상복귀 시키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입을 수도 없고, 기울수도 없는 우리의 낡아빠진 옷을 도로 받으시고, 백옥같이 하얀 새 옷을 무상으로 나눠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는 곧 하느님이십니다. 진리는 하느님 사랑의 최종적인 결론인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우리가 지난 세월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보일지라도, 그래서 우리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도무지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철저한 부족함 때문에 우리에게 오시고,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오시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가 아닐까요?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때로 비참하기 그지 없는 우리들입니다. 마치 죄라는 새장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의 한없는 사랑, 바다 같은 그분의 자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에게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습니다.
크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섬을 통해서, 이웃들의 부족함을 기꺼이 참아냄을 통해서, 왠지 밑지는 것 같아도 그러려니 마음먹음으로써, 이웃들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줌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세상 앞에 보여주어야겠습니다.
참된 예수님 상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당신이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
나는 위에서 왔다.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내가 나”(요한 8,24)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그들 안에 고정된 하느님 상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을 살리는 행동 모두를 그들은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이들의 깊은 ‘거부의 병’은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잠시 우리 신앙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너도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님 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과거의
내 습관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과 내면의 객관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병든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기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길을 걸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셨습니다.
罪의 不在
-진병섭 신부-
한국 사회의 심각한 윤리 적 문제 중 하나는 ‘죄의 부재’라고 합니다. 죄가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습관으로 천국 가고 습관으로 지옥 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저에게 이런 버릇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껌을 씹지 않지만, 껌을 씹고는 길을 가다가도 아무 데나 뱉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식했겠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의 부재도 이런 식으로 오는 것입니다. 무심코 한 행동이, 아니면 의식했던 행동이 어느 순간 무너지면서 그것은 그럴 수 있는 행동이 되고, 어느 순간에는 아무런 일도 아닌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죄의 종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죄를 짓고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때 저는 하느님 안에서 자유라는 말을 모토로 삼고 살았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해야 하며,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가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 저도 오락실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헌금하라고 동전을 주시면 성당에 안 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하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아채시고 저를 매우 혼내셨습니다. 다음번엔 주보를 가져오라기에 성당에 일찍 가서 주보를 가지고 나와서 오락실로 향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웬만한 오락들은 기록을 깰 정도로 잘 했습니다. 그래서 동전 한두 개만 있으면 미사 시간과 얼추 맞게 끝나곤 하였습니다. 그것도 돈이 모자라자 부모 지갑에서 돈을 훔친 아이와 오락실에 함께 가서 그 돈으로 함께 오락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나쁜 짓인 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자 10원짜리 동전을 갈아서 작게 만든다든지, 테니스 줄을 사용한다든지, 돈에 구멍을 내서 실로 묶어서 넣었다 다시 뺀다든지, 또는 떠도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종합하여 오락을 돈 없이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컴퓨터가 있어 하루 종일 그런 불안감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오락을 하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컴퓨터만 한 대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컴퓨터를 갖게 되었지만 컴퓨터로 오락을 해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컴퓨터로 오락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락을 해 보니 오락에 집중하는 시간에 신체의 에너지가 그 무엇보다도 많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락 한 시간 안하면 그것을 공부에 몇 시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만 소비시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오락을 절대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끊지 못하던 것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좋지 않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그저 사실을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깨달음이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브레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 ‘세븐’을 알 것입니다. 세븐은 한 살인자가 세상의 죄악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7죄종, 즉 탐식, 탐욕, 나태, 정욕, 교만, 시기, 분노의 순서대로 살인이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시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한 그 범인을 죽이려고 하는 브레드 피트와 멀리서 그러면 지는 것이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모건 프리먼의 장면은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아직 머리에 생생합니다.
경찰이 자수한 범인을 죽여서는 안 되는데도 브레드 피트는 갈등 끝에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범인을 죽이고 맙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통제가 되지 않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7죄종에 나오는 것처럼, 먹는 것, 갖는 것, 나태해 지는 것, 성적인 욕망, 명예욕, 시기질투, 화나는 때처럼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브레드 피트는 결국 죽은 아내도 살려내지 못하면서 한 순간을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평생을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모건 프리먼이 도착할 때까지 몇 초만 더 참았더라면 자신의 인생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게임에 빠진 아이가 그것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죄도 그 죄가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우치지 못한다면 또 짓고 또 후회하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죄의 종살이’라고 표현하시고 진리의 참다운 깨달음이 없다면 그런 사람에겐 결코 자유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너희가 내 말씀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새벽을 열며
- 빠다킹신부-
지금 저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저의 어렸을 때의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 본당 관할 구역 내에서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봉성체나 가정방문을 하다보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납니다.
‘예전에 여기서 개구리 잡았는데……. 여기가 내 친구네 집이었는데……. 우표 사려고 새벽부터 나와 줄 서 있었던 우체국은 아직도 있구나. 이곳은 깡패를 만나서 매 맞고 돈 빼앗긴 곳이었는데……. 식구가 많아서 늘 북적북적했던 우리 집이 여긴데…….’
아무튼 옛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흐뭇한 미소가 생깁니다. 옛날의 일들은 모두 재미있었고 행복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닐 텐데, 나쁜 일 역시도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면서 이러한 말을 조용히 되뇌게 되네요.
‘그때가 좋았는데…….’
옛날이 지금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도 않습니다. 먹을 것도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고, 놀 것도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생활에 대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데 말이지요.
휴대전화를 통해서 걸어 다니면서도 전화를 할 수 있고, 때로는 화상전화도 할 수 있는 놀라운 세상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온갖 자료를 내 방의 컴퓨터에서 다 찾을 수 있으며, 필요한 물건도 다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훨씬 더 편리한 교통 시스템 속에 살고 있으며,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가수처럼 마이크 잡고 노래도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로움이 결코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줍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풍요로움을 쫓아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바로 주님 안에 머물 때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를 통해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행복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주님 안보다는 자기 안에 머무르지요.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단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지요.
바로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은 진리이신 주님을 얼마나 믿고 있었는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시는 주님 곁을 떠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을 통한 진리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함으로 인해서 행복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로움보다는 주님 안에서 행복을 느껴보세요.
말씀과 진리
-김종기신부-
오늘날 우리는 말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에서 벗어난 자기중심적인 논리로
자신만이 옳음을 내세우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서로 분열과 아픔을 남깁니다.
또한 오해와 혼란을 거듭하게 하여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리게 합니다.
믿음으로 생활하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런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뢰받지 못하는 말이나 태도를 계속 고수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태도와 행동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 뿌리내리게 될 때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삶의 태도가 변화되어 내가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의 현존을 새롭게, 그리고
더욱 깊이 체험하며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힘을 주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고통 안에
숨겨진 진리인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모든 것이 떠나간 뒤>
최근 30-40년간 우리나라의 여러 지표들을 비교 측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낸 것은 너무나도 당연히 ‘경제’였습니다.
사실 30-40년 전, 지금 이맘때면 ‘춘궁기’를 보내느라 많은 사람들이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당시 상당수의 국민들이 농업에 종사했었는데, 초봄이 오면 가을에 저장해둔 양식들이 어김없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딸린 자식들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어떤 수를 써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던 부모님들은 산으로 들로 나갔습니다. 삼시새끼 굶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참으로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지수 못지않게 성장을 거듭한 것이 ‘민주화’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든 하고 싶은 말 자유롭게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과 20년 전만 해도 암울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코다쳤습니다. 다들 숨죽이며, 억울해도 하고 싶은 말 꾹꾹 눌러 참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고의 틀’이란 것, ‘이념’이라는 것, ‘이데올로기’란 것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일정한 사고의 틀에 갇히게 될 때 사람이 얼마나 우습게 되는지를 우리를 지난 역사를 통해서 잘 체험해왔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상반된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오랜 세월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끝도 없이 반복된 세뇌작업 끝에 웬만한 사람은 기계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냉전체제 하에서 지속되어온 공산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끝도 없는 대립, 그 산물이 획일화였습니다. 조금 색다른 것, 조금 다른 목소리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개발이 최우선적 화두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 사회 안에는 자연스럽게 물질만능주의, 물신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적인 것, 정신적인 것, 철학적인 것은 끼어들 틈이 없게 되었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지상주의, 율법만능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재산, 사실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청춘까지 바치고, 삶을 송두리째 바쳤던 이념이나 사상들도 유행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고 못하는 사람들도 언젠가 다 떠나갑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결국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영원한 불변의 진리이신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참 진리이신 예수님만 우리 앞에 서 계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낸 우리 앞에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대 자유이신 예수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결국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결국 예수님만이 영원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결국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영원합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진리 안의 자유
-김찬선신부-
진리 안에서 자유라야 자유다.
진리 밖에서의 자유는 방종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워야지 참으로 자유롭지
하느님 밖에서는 방종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세 청년은 자유로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불도 그들을 어쩌지 못했고
임금도 그들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우려 하지 않았고
불로부터 자유로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임금의 처분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불화로로부터 도망치지 않았고
불화로에 갇히는 자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느님 처분에 맡김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하느님 안에 있음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상선신부-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묵상>
언젠가 TV 광고에 <나는 자유인이다!>하고 외치는 무슨 음료 광고가 있었다. 그것이 술 깨는 약이었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그 외침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그래서 몇년 전 가까운 벗들과 함께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바다를 배경으로 바위에 올라서서 나도 <나는 자유인이다!>하고 팔을 펼치며 외쳤던 적도 있다.
우리는 늘 자유롭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구속받고 있는 부분이 참으로 많다는 이야기일 게다. 가끔 여행과 휴식이 필요한 것도 이러한 구속에서 벗어나 해방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온갖 구속과 굴레에서 해방되고 싶은 만큼 벗어나기도 어려운 과제이다. 불가에서는 이 백팔번뇌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때문에 끊임없는 수행을 하는데도 좀처럼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심각한 고민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네 주신다.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자.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1) 너희가 진정 자유롭고 싶으냐? 그렇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
2) 그럼 이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내 제자가 되면 알 수 있다.
3) 그럼 그분의 제자가 어떻게 될 수 있느냐?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된다.
제자도의 길은 거창한 수행과 고행극기의 길이 아니다. 제자도의 길은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길이다. 수많은 고행과 극기 기도와 관상에 전념한다손 치더라도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지식욕만 충족하게 된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감을 부여할 뿐이다.
오늘 독서의 세 젊은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러한 의미에서 참으로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협박으로부터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기에 하느님의 사람이었고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란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능력을 발휘하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그건 하느님의 뜻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확신은 그들을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오늘 내가 참으로 자유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나를 자유인이 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그 굴레들이 무엇인지도 성찰해보자. 여기에서 해방되는 길은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믿고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것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하자.
그래서 말씀에 매력만 느끼며 좋아함을 넘어서서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도록 하자. 나도 모르게 서서히 나는 <자유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자유인이다!>하고 진정으로 외칠 수 있게 되리라.
아~ 그날이여!
<독서강론> : 믿음으로 축복받은 다니엘의 세 친구
-경규봉 신부 -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곧바로 화덕에 던지지 않고 자신 앞으로 데려와 최소한의 법적 절차를 밟게 한다. 왕은 고발한 자들의 동기(시기와 질투)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은총을 받아 지방 관리가 된 인재들을(1,19-20; 2,49) 끝까지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은 그들을 심문하면서 금신상 앞에 절하도록 명령한다. 왕은 하느님을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 가운데 하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죽음을 각오하며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생명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순교자적 자세로 임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다는 진정한 믿음을 보여준다.
이에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대단히 진노하여 화덕에 불을 최대한 지피고 그들을 묶어 화덕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그들을 지켜주셨고,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온 바빌론에 드러났다.
타국 생활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도, 먹을 것도, 말도, 풍습도, 기타 모든 것이 다른 속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이었기에 바빌론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으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왕의 총애를 받아 지방 관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눈총과 모함을 받았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신상 앞에서 절을 함으로써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는 왕명이 내렸을 때, 그들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적 이익과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가?’ 하는 갈등 속에서 신앙을 버리고 편히 살고 싶은 유혹과 욕망이 치솟아 올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유혹과 욕망을 이겨내고 현세적 이익과 목숨까지 과감히 포기하며 신앙을 지켰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고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과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목숨까지 포기하며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 - 목숨까지도 온전히 맡겼다.
삶의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삶을 주신 것이다.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사는 삶이 아니고 단순히 생명의 연장이라면 삶은 별다른 의미나 가치가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린다 할지라도 지상의 삶에 국한된다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삶이라면, 그래서 일찍 죽거나 늦게 죽거나 생명의 연장만이 문제가 된다면, 그러한 삶은 의미나 가치를 찾기 어렵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삶,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삶, 그래서 죽음 너머에서까지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만이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25-26)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7-18)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이 세상, 지나가는 이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둔 다니엘의 세 친구는 목숨까지 의탁하는 깊은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보상을 받았고, 더 큰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
삶은 곧 믿음이다. 누구나 믿는 대로 살며, 믿음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지나가는 세상 것들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나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그리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느님의 보상과 축복을 받는 천국 시민이 되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김영곤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그 첫 출발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거짓이 없는 진리로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에 관하여, 진리의 결과에 대하여, 후세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를 인생의 참다운 의미에 대하여, 그 모든 것을 진실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순간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신분'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머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머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첫째, 예수님 말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즉, 어떤 일을 당할 때, 자신의 어떤 감정과 주장보다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때까지는 어떠한 결정과 판단도 않는 생활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입니다. 즉, 그리스도 신자로서 그 일생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점점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며, 닫혀진 마음은 제자로서의 신분의 종말을 고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말씀 속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몇 번이고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배우고, 생각하고 마음에 간직하며, 생활에 옮기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학문적인 만족이나, 지적인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계신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부터 가져오신 진리는 평범한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아는 결과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나의 일생을, 나의 생애를, 어떠한 것을 위하여 쓸 것인가를 알려주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인생의 진리를 알게되면, 그 진리는 그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 사람으로서 누릴 완전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유는 우리에게 4가지 자유를 가져다 주는데,
첫째, 삶의 두려움에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며,
둘째,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주며,
셋째,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이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까? 느끼면서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죄와 그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경우, 많은 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만 죄를 짓고 마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해주시고 그 벌을 없애주시는 그분을 모시고 있기에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
-배미애 수녀 -
지인 한 분이 얼마 전에 체험한 일을 나누어주셨다. 어느날 빳빳한 현금 이십만 원이 든 가방을 전철 선반에 놓고 내렸다고 한다. 그분은 당시 짐이 많아서 자기가 가방을 놓고 내렸는지도 모르고 다른 일을 본 뒤 집으로 돌아가니 남편이 낯선 남자가 전화를 해서 분실한 가방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부인을 찾더라고 하더란다.
그런데 남편은 그 남자의 전화번호를 적어두지 않고 전화를 끊은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다시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고, 왜 며칠간 전화를 하지 않았는지 그 남자의 심경을 듣게 되었단다. 그는 돈을 발견하기 전날 꼭 그만큼의 금액만큼 친구들과 술집에 가서 외상술을 먹었기에 돈을 두고 갈등이 심했는데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나니 너무나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단다. 그날 밤 그 남자는 아마도 두 다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잠을 자지 않았을까?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복음을 체험했을 것이다.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인 욕구를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나약함, 혹은 자신도 모르는 상처나 나쁜 습관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들에 묶여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선한 우리의 본 모습에서 멀어지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곧 노예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만약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욕구와 나약함을 넘어서서 선한 것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신장호신부 -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의 목표를 생각해보라고요. 그리고 5분후에 칠판에 나와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종교교사로서 또한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이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쓸꺼라고 은근히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삶의 목표를 돈이라고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안타깝게도 아직 학생들에게는 현실적인 것이 더 중요하게 보이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외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종살이에서 해방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에 눈이 멀어 무엇이 더 근본적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잘 아실껍니다. 외부적인 구속과 속박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죄로 인한 내 마음의 공포심과 올가미보다는 더 클 수 없다는 것을요. 외부적인 구속과 속박은 나의 육체를 구속할 뿐이지만 죄로 인한 구속과 속박은 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정신까지도 구속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살이에서 구원되는 방법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깨닫는 방법은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과 순종뿐입니다.
-장용진 신부 -
우리 성모여고 학생들이 제게 하는 말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부님 맞아요? 아닌 것 같아요~!”입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말은 신부되면서 줄곧 들었고 심지어 3년간의 일본생활에서도 일본 신자분들께 들었던 말입니다.
“신부님 맞아요? 아닌 것 같아요~!” 이 말을 살펴보면 “실망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라는 부정적 의미와 “아, 너무너무 편하고 좋아요~!”라는 긍정적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바로 여기서 제 착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 맞아요? 아닌 것 같아요~!” 이 말을 편해서 좋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사셨기에 진정한 자유를 아셨고, 우리들 역시도 그 자유를 누리도록 해 주시겠다던 예수님. 그 예수님을 닮아가는 게 목표인 저로서는, 목표대로 살고 있기에 혹시 그래서 학생들이나 신자분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정말 착각일까요? ㅎㅎㅎㅎ
새신부였을때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염색을 했는데, 신자분들께 ‘머리색깔은 이제 예수님처럼 되었으니 마음과 행동도 예수님처럼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장난끼 가득했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 머리색깔과 같이 외적인 쪽으로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비는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말하는 첫마디가 ‘새 날, 새 하루 주심에 감사드리며 청하오니, 예수님 눈과 마음 지닌 새사람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이고, 미사때마다 ‘성체와 성혈 안에 계신 예수님, 제 눈과 마음이 되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인데, 이 기도의 응답이 있었기에, 물론 100%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같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나, 그래서 학생들이, 신자분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 제발 제 착각이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ㅎㅎㅎㅎ
“신부님 맞아요? 아닌 것 같아요~!” 저한테 들려오는 이 말씀의 참 의미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 맘이 변함없다면 결국 마지막에는 좋은 의미로 끝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내일을 향해 노력하는 것, 이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셨던 그 자유로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떠셨습니까? 이런 착각 한번쯤 한다고 해서 잘못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착각이라면, ㅠㅠ 뭐, 다 예수님 탓이죠. 저를 바르게 이끌지 못하셨으니깐 말입니다.
가족 노래 자랑
-서효경 수녀-
초등학교 4학년 성탄 전날 저녁, 가족 노래자랑을 했다. 평소 노래를 좋아하는 부모님이 심사를 하시고, 우리 7남매는 한 사람씩 독창을 했는데 내가 꼴등을 했다.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골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그 후부터 난 독창을 하지 않았고 독창시키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좋아해 이것저것 악기를 만졌다.
어머니 회갑을 맞아 형제들이 돌아가며 축가를 불러드렸는데 그때서야 내가 노래를 가장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족 노래자랑에서 꼴등을 한 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내 노래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러자 뭔가 묶인 것에서 풀려나는 자유로움을 체험했다. 그 후 노래를 시키면 거절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식은 오랜 기억의 상처에서 풀려나는 자유를 주고, 자유는 내 안에서 다양한 능력을 키워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잘하고 싶은 욕구가 클수록 자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전통·관습·자기식의 율법 해석에 묶여 있는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율법의 새로운 이해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의미한다. 율법 정신·복음 정신이 내면화될수록 객관적 진리에 대한 인식이 수월해질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의 관점으로 만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2)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로 하느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사로운 감정과 이해, 개인의 욕구와 집착에서 풀려날수록 객관적 진리 인식과 자유의 폭이 커질 것이다.
진리=예수 그리스도
-정복례 수녀-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그러나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우리는 아무한테도 종 노릇 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자유롭게 되리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죄를 짓는 자들은 모두 죄의 종이므로 노예라는 것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문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진정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죄를 짓게 되는가? 죄인들한테는 예수님의 말씀이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온갖 사사로운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구원과는 거리가 먼 죄로 유인하는 상태에 종종 빠져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나아가 그분과 인격적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세속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해방됨을 뜻한다. 이것은 신실한 마음으로 믿는 이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이미 종말론적 자유를 누리게 하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진리를 알고 살아가신 분들이 바로 이 땅의 순교자들이다. 순교자들은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런 자유를 누린 분들이다. 그들은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온갖 협박과 굴욕에도 그 어떤 두려움이나 비겁함에 떨지 않았다. 떳떳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영혼의 찬미가를 부르며 하느님께 나아간 분들이다. 우리도 이러한 신앙선조들의 넋을 이어받아 진리이신 주님이 주시는 선물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유
-김훈일 신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렇게 외치며 실제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지난 인류의 역사 속에 많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과도
맞바꿀 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렀던 상황에서도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찾게 하는 가장 소중한 도구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이처럼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자유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해서 삶의 궁극적 의미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현상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제각기 다릅니다. 서로 질이 다르고
서로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감옥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시간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상과 이념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근원은 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다면 죄를 이겨낼 힘을
가지겠지만 우리는 진리를 소유할 힘이 없습니다. 그 힘은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죄를 이겨내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춥고, 배고프고, 쓸쓸하고, 허전하고>
한 평생 수도자로 살아가기 위한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해야할 수도자 양성소, 원리원칙대로 가난하게, 팍팍하게 살 수밖에 없는 수련소이기에 때로 지나친 요구를 많이 합니다.
“수도자가 망하는 지름길은 등 따뜻하고 배부른 생활 계속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로서 쇠락하는 지름길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제일 한심스런 때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권력의 맛에 길드는 것입니다.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간단하게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춥고, 어느 정도 배고프면 제대로 된 수도생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정도 쓸쓸하고, 어느 정도 허전해야 수도자로서 정상입니다.
수도자가 누릴 것 안 누릴 것 다 누리고 살면 그게 어디 수도자입니까? 부디 남들이 다 가는 넓은 길, 안락한 길, ‘때깔 나는’ 길이 아니라 사서 고생하는 길, 좁고 가파른 길을 선택하십시오. 그럼 분명히 수도자로 성공할 것입니다.”
‘예수님 추종’이란 만만치 않은 일에 자신의 청춘을 건 형제들, 참으로 대견해보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란 큰 벽 앞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형제들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얼굴로 꾸준히 자신을 연마하는 형제들이 기특해 보이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더욱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시며 힘찬 격려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주님 안에 머무르게 될 때, 우리는 참 제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상급으로 진리에 대한 깨우침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며, 그 진리는 우리를 갖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오랜 세월 갈구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 자유’, 그러나 그것들은 제 삶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요원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은혜롭게도 주님께서는 제게 길을 열어주시는군요. 결국 해답은 하나이군요. 그분 안에 머무는 것, 그분 사랑의 품안에 살아 숨 쉬는 것, 대자대비하신 그분의 손바닥 안에 둥지를 트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깨우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깨우친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면벽을 하고, 가부좌를 틀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도(道)통해서 신선처럼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딴 나라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깨우친다는 것은,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더욱 치열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더욱 눈 부릅뜨고 성실히 삶의 현장을 지키는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고통이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무게가 삶을 짓누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는 환한 얼굴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깨우침의 과정을 거친 사람, 그래서 제대로 된 영성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현세적, 물질적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이, 언제나 무병장수, 만사형통, 가화만사성하는 가운데, 늘 성공만을 거듭하는 사람, 생생한 하느님 체험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늘 만족스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듭되는 불운, 끝도 없는 방황, 좌절, 실패, 상실감, 그 한가운데서도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깨우친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난감해도 어떻게 해서든 그분과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 끝까지 희망하는 사람이야말로 대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균형잡힌 긴장(야곱의 우물)-
이재욱 신부-
◆몇 년 전 미국에서 살 때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피정을 가게 되었다. 장소는 산속에 있는 아름다운 예수회 피정집이었고, 좋은 공기와 숲의 향기를 마시면서 하루 잘 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신부님이 연을 가지고 오셨길래 나도 참 오랜만에 연날리기를 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연을 날려 본 이후 처음이었고,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였다.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마음껏 신나게 뛰노는 모습이 느껴졌다. 참 신기한 것은 연날리기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어떤 삶의 지혜가 느껴지는 영적 체험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된 자유를 위해서 어떤 긴장감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처음에 연을 날리는 것은 좀 어렵지만 일단 바람 속에 연을 조금 높이 올려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연이 바람을 타고 저 혼자 힘으로 하늘로 올라간다. 손끝에 줄의 팽팽한 긴장을 느끼면서 바람을 타고 나는 연의 자유로움. 여기에서 참 중요한 깨달음 하나는 연의 자유로운 비상을 위해서는 바람의 저항과 줄의 긴장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연이 너무 팽팽해지면 재빨리 줄을 풀어주었다가, 느슨해지면 얼른 다시 감아서 줄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연날리기의 기술인 것 같다.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질 수 있고, 조금만 느슨해져도 연이 균형을 잃고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말씀의 진리와 우리의 자유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현란한 현대 세계의 가치 속에서 참된 자유란 무엇일까? 살아가면서 수없이 부닥치는 갈등과 거꾸로 나타나는 정신의 나태함 사이에서 어떻게 필요한 긴장을 균형있게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진리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으로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 건강하고 균형잡힌 긴장감으로 살아 존재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혼돈스러운 세상살이 안에서도 표류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끝없는 무질서한 애착에 매몰되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서 진리를 향한 참된 자유를 살게 될 것이다.
말씀과 자유
-강영구신부-
우리는 스승 예수님의 영원한 제자입니다.
제자의 본분은 스승의 가스침과 말씀을 전수傳受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비움이 첫째입니다.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은 스승이 되려는 사람이지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자유를 누리는 구체적인 방법 한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수도자들은 전통적으로 Lectio Divina(聖讀-거룩한 독서)라는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정좌(正坐.靜坐)한 후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서를 펼쳐서 천천히 읽습니다(讀書-Lectio).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은 것이지요.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으면 독서를 멈추고 그 말씀을 묵상(默想-Meditatio)합니다. 말씀을 씹어삼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이 과정을 되새김(反芻-Ruminatio)이라 합니다. 소가 한번 삼킨 여물을 되새김질해서 소화시키듯이 말씀의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이 과정까지 잘 되면 이제 말씀은 기도(祈禱-Oratio)가 됩니다. 하루 온 종일 화두話頭를 들듯이 그 말씀으로 기도하며 일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있는 말씀이 기도합니다. 드디어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되는 관상(觀想-Cdntemplatio)의 경지에서 삼매(三昧-Samadhi)에 들게 됩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합니다.(2고린2,15)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당신도 오늘 하루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으로 살기 바랍니다. 부디 예수 되십시오.(一明)
너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제?
-부산교구 생활묵상-
집은 볼품없는 낡은 농가였지만, 출입문 위에는 <흰 차돌>이라는 조그만 팻말이 붙어있었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면 몇 줄의 알림이 맞은편에 붙어있습니다.
첫째, 이 집에서는 죄 이외에는 무엇이든 허용됩니다.
둘째, 집주인은 이층 복도 끝 방에 계신데, 인사 여쭙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셋째, 잠자리는 서넛 있는데, 누가 들어 있지 않은 곳을 마음대로 택해서 사용하십시오. 다 차 있으면 벽장의 침구를 내다가 아무 곳에서 주무셔도 좋습니다.
넷째, 시장하시면 부엌에 있는 음식을 마음대로 드십시오.
다섯째, 집을 떠날 때는 다음 오실 분을 위해 정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섯째, 또 이집에는 한 늙은이가 사는데 만나셔도 좋고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편히 지내다 가십시오. 집주인은 소 성당에 모신 감실이었고, 늙은이는 선생님이시었습니다. 이 집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소리 없이 앞을 다투어 빨래, 음식, 청소 등을 보살피기에 늘 여유작작하였습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게으름의 찬양. 러끌레르끄)
진리의 사랑은 거룩한 흔적을 찾고 사랑의 부름은 마땅한 일을 맡는다 - 성 아우구스띠노 -
실 천
오늘은 오로지 걷습니다. 급하게 말고 천천히.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면...
-정호신부-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의 참 많이 있습니다.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보다 예수님이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그분의 마음이 담긴 독백과 같은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복음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묵상하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묵상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한 공간과 시간 안에 하느님과 공존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랐다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또 그것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니 나를 따라오라로 끝나는 긍정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이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이유, 곧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죄에 대한 가르침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예수님과 사람들이 결코 함께 살 수 없다는 슬픈 현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는데도 반대당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류의 희망, 아브라함의 후손인데도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지도 듣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예수님과 이스라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 아들과 그 아버지가 선택하신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서 계신 상황은 그 옛날 하느님 아버지와 아브라함처럼 사랑의 관계는 아닙니다. 한 쪽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고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사람들에게 와서 그 모든 것을 전하려 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만을 이어내려 오고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만큼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 옛날의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짜 하느님은 그들을 오히려 속박하는 신이 되어 그들의 이기심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복음의 현실이요 예수님의 처지였던 것입니다.
불쌍하신 하느님만 당신 진실을 지키셨고, 사람은 죄에 물든 아담과 하와의 잘못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진리로 삼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에 아브라함의 이름은 위로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핏줄에 후손일지 몰라도 아브라함 믿음의 후손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리하십니다. 그것은 ‘만일 하느님께서 너희의 아버지시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라는 말씀 속에 들어있는 대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자녀이기를 포기, 혹은 탈랐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죄를 피해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과 같이 예수와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을 들려준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논쟁을 통하여 예수의 신적(神的) 자기계시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의 고정관념을 근거로 한 고집과 아집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의 절벽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둘 사이의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는 점점 멀어만 간다. 논쟁의 결과는 결국 서로의 고립으로 치닫는다.
어제 복음은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30절) 그런데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는 우리보다 예수께서 먼저 가지신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31절)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예수께서 믿음을 가졌다는 유다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려는 듯이 보이나 실상은 논쟁의 연속이다.
논쟁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오늘 복음은,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산다면 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럴 때 진리를 알게 되며, 이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31-32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노예가 된다(34절)는 것이다.
오늘의 두 가지 가르침은 다 '자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참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새기고 산다'는 것은 참다운 제자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예수를 향한 단순하고 순간적인 이끌림이나 매료됨이 아니라 충실함과 인내함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제자는 그 보상으로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32절) 여기서 진리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께서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죄의 노예가 된다.(34절) 노예는 자유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 신분일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를 지니지 못한 신분이다. 이는 죄 자체가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자는 자유가 없는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죄를 지은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36절)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진리가 곧 사람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다운 자유는 다시금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비록 자유를 주장하더라도 그 자유는 종종 아무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종(放縱)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진리, 이는 예수님 옆에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가 바로 진리 자체이신 것이다. 진리란 예수님이 어떤 철학자로서 배워 익혀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어떤 불변의 지성적 가르침도 아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 그 자체이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말씀 안에 사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주 진리(예수님)가 주는 자유(은총)의 삶과, 진리를 거부하는 죄(세상)가 주는 가책(종살이)의 삶을 두고 선택의 고민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택한 자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유광수 신부-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감옥, 죄의 감옥, 율법(모든 법)의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를 이 감옥에서부터 꺼내주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다. 즉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은 있어도 감옥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누가 우리를 이 감옥에서 꺼내 줄 수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가?
하느님만이 감옥에서 인간을 꺼 내 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해방자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 자유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다른 분한테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를 선물할 수 있는 분한테서 받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이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유를 갈망해왔는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돈을 벌고 권력을 잡으려고 하고 배우고 하는 모든 것은 알고 보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굶주려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자유는 내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선물은 오직 한 분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한테만이 이 자유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자기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이 자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명목아래 전쟁을 일으키고 폭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또 다른 도전을 받고 원수가 되고 구속받는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가?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신약에서 진리란 단어는 25번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16번을 요한 복음에서 사용하였다.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어떤 사상이 아니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란 예수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을 말한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는 것이 다 진리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말씀 안에 사는 것이 곧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이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 말씀에서 길러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사는 것이다.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말씀에서 길러내려면 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말씀을 되새긴다는 것은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생활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를 살아갈 수 없다. 진리를 생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즉 깨달은 그 말씀대로 나도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진리를 깨닫고 생활할 때 주어지는 결과이다. 진리를 깨달아야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잘못된 것을 알아야 거짓에서 진리에로 돌아올 수 있다. 거짓에서 진리로 돌아 설 때 거짓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대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아야할 진리란 무엇인가?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올바로 알아야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고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 이것이 나의 신원이다. 나의 정체이다. 따라서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한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참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의 참모습을 되찾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다른 모습이 아니라 나의 참모습인 하느님의 자녀의 자리를 되찾고 그 자리를 유지할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고 그의 모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랑을 사랑으로 윱鄂?수 있는 능력과 파트너이고 대화자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의 원리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하느님을 닮게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종이 되셨다. 나를 위해서 종이 되셨다는 것은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나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은 다른 이를 섬기는 데 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갈라5,13)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고행을 통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즉 내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진리를 개달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바로 이 진리를 깨닫게 해주러 오신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행복을 느낀다. 즉 인간은 다른 이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여질 때 행복하고 자유를 느낀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자기를 아무런 조건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그에게서 행복을 느끼고 자유를 느끼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즉 그를 위해 살기도하고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투신할 상대자를 만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 전부를 투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전부 투신해서 사랑해야할 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투신할 때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진리를 통해서 자유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