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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5 그 일 후에
이 장은 가장 기억에 남게 될 해설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기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신임과 순종에 대하여 놀라운 증거를 제공하였지만 그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더 탁월한 증거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단련시키셨던 다른 시험들은 그의 욕정을 억제시키려고 의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죽음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비통한 상처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 거룩한 사람의 가슴을 찔렀던 부성애적인 슬픔과 고뇌보다 훨씬 더 막대하고 더 차원 높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외아들을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슬픈 일은 이 아들이 흉측한 죽음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비통한 것은 자기의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도록 임명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그가 견디어 냈으며 의식하고 있는 영적인 갈등과 비교한다면 이 일들은 단지 장난이나 갈등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큰 원인은 자기가 아들을 잃는다는 것이나 자기의 유일한 상속자며 장차 길이길이 기억되며 명성을 갖게 될 소망이며 그의 가족의 영광이며 기둥이 될 그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다만 이 아들의 인격 안에 있는 세상의 전체 구원이 소멸되며 말살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투쟁도 육신적인 격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나님에게 헌신하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바로 그의 경건성과 신앙심이 그로 하여금 산만한 생각들로 가득 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개인적인 대항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이전에 그분 자신이 그 아이의 인격에다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부속시키셨는데 이제는 그 아비의 죽음을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자의 명령은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앞에 전개될 이야기를 약간 미리 몇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그리고 끈질기게 묵상하는 데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1. 본문 1절은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입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에서 “그 일 후에” 라는 표현은 얼마 전에 되어진 그의 이상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오히려 그 한마디 말로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항의하려고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가 말년에 들어서 뒤늦게나마 얻게 된 보다 안정된 생활을 함의하기도 합니다. 그는 나이 80세에 이르기까지 줄곧 유배되어 불안정한 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멸시와 피해로 인하여 괴롬을 당해왔던 그는 계속적인 전율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처참하고 걱정스런 생활을 견디어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찬조를 받아서 그가 들어간 땅에서 흉년을 당하여 그 기근으로 인하여 다시 애굽으로 쫒겨가지를 않았는가 하면 그의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경험과 자기 조카와 헤어지는 것과 그리고 자기의 생명에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을 하여 조카를 구출해 냈던 일 등,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식이 없이 살아온 그에게는 모든 소망이 자손을 갖는 데에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그 아들마저 상속권을 박탈시키고 집에서 멀리 쫒아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삭 혼자만이 남아서 아브라함에게는 특별하고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집에서 그 아들과 함께 평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하고 계시니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에게 죽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마치 마지막 행동인 것처럼 보이는 이 시험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지금까지 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혹심하게 시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시험하시려고”에서 야곱은 누구든지 하나님에 의하여 시험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면서(약1:13) 죄의 허물을 모면하려고 그 죄들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자들의 모독적인 중상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우리들의 세속적인 욕망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죄들은 절대로 하나님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된다고 진실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단이 독소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며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욕망의 불길을 부채질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외부적인 위력에 눌려서 죄를 짓지 않으면 안되게 강요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유혹하여 그 꾀임들에 기꺼이 넘어가며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방법대로 시험하신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와 똑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종의 믿음을 완전히 시험해 보시려고 극심한 시험을 받게 하셨던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3)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는 이 말씀에서 그 거룩한 사람은 전혀 사단의 궤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은 성급하게 하나님을 순종한 나머지 결국에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회의에 찬 이상이 몰고 가는 방향으로 무작정 떠내려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일단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은 대답으로 하나님께 신속하게 순종하고 싶은 간절함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그 표현은 마치 그가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하나님이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이것과 저것을 하라고 부과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아주 천진하게 그리고 예외 없이 모든 일에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언제라도 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복종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며 자랑하는 것을 보게 되지만 막상 시련이 그들에게 닥치게 되면 하나님의 멍에를 회피하고 빠져나가게 됩니다.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은 그 직후에 얼마나 진실하게 그리고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가 증언했는가를 직접 행동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조금도 지체하거나 항거하지 않고 그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복종시킨 사실입니다.
2. 본문 2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입니다.
1) 본문 2절 초두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시험의 종류를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그 거룩한 사람이 지금까지 그분의 말씀에 두고 왔던 신앙을 그 말씀 자체의 역습으로 동요시키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름을 들어가면서 말씀하심으로 그 명령의 발령자에 관하여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소리라고 확신을 갖지 않았다면 그가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의지하고 있는 그였으므로 그 제안을 사단의 조작된 말이라고 일축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시험은 전혀 문제없이 그로 말미암아 배척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의심의 상황들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들었던 그 명령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조금도 논란할 여지가 없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그분의 말씀으로 직접 제시하신 의견의 불일치와 혐오심을 나타내심으로 그 거룩한 사람의 가슴을 괴롭히며 상처를 입히려는 분으로 가장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모든 의식들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시켜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모순성이 너무도 막대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신앙에 상처를 주었으며 괴로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사대’라는 말에 막대한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그분 자신의 말씀과 겨루는 경쟁으로 이끌어 들이심으로 그의 신앙을 시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험들이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우리가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승리는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 공격을 물리칠 수가 없다는 사실도 명심하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성령의 검을 빼앗기고 정복을 당해 있다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장시키고자 하신 바로 그 무기로 우리를 공격하실 때는 우리의 상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 시험과 싸웠던 방법은 다음에 적당한 곳에서 생각하겠습니다.
2) “네 아들”이라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만 말씀하셨다고 해도 그 말씀만으로도 그의 마음에 가장 비통한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바랄 수 있었던 모든 호의가 오직 ‘이삭이 네 자식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신 이 간단한 약속에 포함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삭이 안전하게 남아있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구원 뿐 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이 파멸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 말씀으로 하나님이 중재자가 없이는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라고(고후1:20) 한 바울의 선언이 아직 기록되지 않았을 때지만 그 말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삭을 떠나서 과연 어디에서 이 소망을 가질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 문제는 다음의 결과에 이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다름이 아니라 단지 그를 놀리시려고 그렇게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보면 단지 그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만 그에게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손으로 그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의 구원의 헌장을 던져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 속에 던져버리고 그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오직 죽음과 지옥만 남겨두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이 신앙으로 인도를 받고 있으면서 그 제안이 자기가 절대로 믿어야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반대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믿음으로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데려갈 수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 대두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지인 사도가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은 전혀 동요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된 그 혜택을 자기 아들의 타버린 재를 가지고 충분히 솟아나게 하실 수가 있으신 분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11:19).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그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킬 때는 그도 역시 몹시 좌절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반드시 관계를 가져야 될 분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의 대적이 되실 수가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가 과연 제거되어야 할 상충된 점이 무엇인지를 즉시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그 명령을 약속과 화해시켰으니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확신하고 그는 자기가 모르는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에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마치 눈이 감겨진 사람처럼 그 자신이 인도를 받은 대로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정도의 존귀를 받아야 되는 것이니 비단 그 진리가 모든 인간의 수단들을 초월한다거나 전혀 수단이 없이도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진리는 모든 장애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으로 존귀하게 여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지적하고 있는 시험의 성질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아버지였다는 사실과 남편이었다는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또한 모든 인간적인 애착심을 털어 버리는 것은 그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자기의 아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 세상 사람 앞에서 그 치욕적인 잔인성을 견뎌내야 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며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는 자기가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말씀에 상충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 훨씬 더 혹독하고 소름끼치는 일이었으며 이삭이 자기의 품안에서 떠나가서 찢어지게 된다면 약속된 복을 지금가지 바라왔던 그 소망이 자기에게서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것을 생각할 때 비할 데 없이 혹독한 일이며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은혜로 주신 유일한 담보마저 빼앗아 가신다면 그 이상 하나님과 가질 수 있는 관계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전에 자기의 거의 죽은 몸에서 자기의 아들을 기대하여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을 믿고 일어나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그의 아들의 죽음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권능이 자기의 죽은 아들의 재에서도 그에게 복을 약속해 주실 것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시험의 미로에서 분명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존망(存亡)이 걸려있는 그 약속을 끈기 있게 붙들어야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실패하면 그 신앙 역시 파멸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약속이 넘쳐 흐르고 있었으니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일단 그에게 주신 사랑을 계속 지탱하고 있으며 그의 마음에 혼동을 일으키려고 야기시키는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이해로 오직 하나님의 불가해(不可解)한 능력에만 좌우되어 있는 그 약속을 이루는 방법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적용해야 될 과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므로 그처럼 우리의 신앙을 혹독하고 날카롭게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모든 믿는 자의 조상 안에서는 하나의 본보기를 제안하시려고 그렇게 의도하고 계시니 오직 그것은 신앙의 일반적인 시험으로 우리를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금이나 은보다 훨씬 귀중한 신앙은 시련이 없이 태만하게 누워있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교훈하기를 각자의 신앙의 분량대로 하나님은 시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육신의 모든 애착심을 복종시키실 때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감정들을 무가치하게 하실 때에도 그분의 종들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3)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라는 말씀에서는 마치 한 마디 말로는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살을 에이는 듯한 충격으로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계십니다.
그의 독자라고 그에게 지적하여 가리키므로 이전에 그의 아들을 떠나 보내면서 받았던 그 상처를 다시 한번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먼 장래를 내다보고 있으니 이제는 자식을 갖게 될 소망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첫아들의 죽음이 일반적으로 비통한 슬픔을 가져다 준다면 과연 아브라함의 슬픔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모든 말들이 그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확대시키는 데에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그를 번제로 드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 솟아나는 사랑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성대로 그의 아들을 사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통 자녀들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부모들과 같이 그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삭은 영생의 거울이며 모든 선한 일들의 담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몹시 공격하여 그분의 자비심 밑에 넣고 짓밟아 버릴 정도로는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와 똑같은 강조점이 ‘이삭’ 이란 이름에서도 있으니 그 사실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그밖에 어느 곳에도 그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확실히 기쁨의 계기로 주어진 자가 다시 데려감을 당할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영원한 고통에 시달리도록 정죄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우리는 이삭이 일반적인 질서에 속한 아들이 아니라 그의 인격 안에서 중보자가 약속된 특별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4)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슬픔의 비통함은 이 상황으로 인하여 적지 않게 증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곧 죽이라고 요구하시지 않고 삼일동안 가는 기간에 그의 미음 속에서 이 아들을 죽이는 일이 계속 생각나게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준비를 하면서 그의 모든 감성들이 아직도 더욱 괴롬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제사를 드릴 곳의 지명을 말하지도 않고 단지 ‘내가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 땅을 떠나라고 명령하실 때와 같이 그의 마음을 불안한 상태에 들떠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에서 마치 지금까지 고문대 위에 묶여 있었던 것같이 지내온 이 거룩한 사람을 그토록 가장 잔인하게 괴롭혔던 시간적인 지연은 아직까지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미정상태로 지나게 하신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수를 넘어서 지혜로와지려는 것 외에 전혀 다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순히 순종하게 되기 위하여 우리 자신들의 지혜를 완전히 박탈당해야 되는 것과 아무 것도 우리 자신들에게 남겨두지 말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되도록 맡기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꾸준히 견디어 내게 하여 갑작스런 충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하려고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가 여행을 하면서 돌이키지 않고 내적인 갈등에 휘말리지도 않은 것과 같이 그 사실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 상황의 변화가 닥쳐온다 해도 절대로 영향을 받지 않은 그의 초지 일관성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제롬은 ‘모리아 땅’이라는 말을 마치 그 말이 (라아-)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처럼 ‘이상의 땅’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 실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이 의견을 그릇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말을 하나님의 ‘몰약(沒藥)’으로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별로 만족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의견일치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말이 ‘가르치다’ 라는 뜻인 (야라-)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는 것과 혹은 ‘두려워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야래)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오늘날에 와서는 해석자들 가운데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여기서 특별히 터득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의견들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있는 타당한 의견을 따르도록 합시다. 이를테면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한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땅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니 즉 아브라함이 다른 곳을 택하는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제물을 드리는 곳으로 그곳을 지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면 또는 성전을 위한 곳이 이미 그것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 번째의 설명을 택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그분의 종 아브라함으로부터 거기서 예배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계시니 그 이유는 이미 그분의 은밀하신 계획 가운데 그곳에서 그분을 일반적으로 예배할 수 있게 결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물들은 당연히 ‘두려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에서 유래된 이름을 받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그 제물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곳이 후에 가서 성전이 지어진 곳이란 사실은 절대로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본문 3절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입니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신속성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치밀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으로 마음을 튼튼하게 방어하지 않았다면 그 생각들이 각각 그의 영을 압도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캄캄한 밤중에는 사단이 그에게 엄청난 걱정들을 하게 했을 것이라는 점은 전혀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염려와 걱정들과 투쟁들로서 점진적으로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이 영웅적인 용기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극복하고 이겨낸 후에는 즉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을 경계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하기 위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괄목할 만한 노력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말씀으로 의기소침한 다른 자들은 마치 생명마저 빼앗긴 사람처럼 넋을 잃고 실신상태에 있으며 무감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먼동이 트자마자 급히 서둘러서 길을 출발하였던 것입니다.그러므로 몇 마디 말로 모세는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미궁(迷宮)에 얽힌 그 시험을 믿음이 이겨냈다고 선언함으로 그의 신앙을 높이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본문 4-5절은
“④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입니다.
그는 이제 정말로 전에 이상 가운데서 그에게 보여졌던 곳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았다고 기록되었을 때 모세는 틀림없이 삼일간의 여행기간 동안 매우 걱정스러워 했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들에게는 뒤에 남아 있으라고 명령한 것은 그들이 자기를 마치 미친 사람이나 정신나간 늙은이로 취급하고 자기에게 손을 댈까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그의 아량이 넓은 것이 나타나고 있으니 그는 침착하고 조용하게 잘 정리된 생각을 지니고 있으므로 절대로 동요된 방법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다시 오겠다고 말할 때 그는 마치 위장하는 것이나 거짓말을 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자들은 그가 이 말을 예언적인 면에서 선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서 자손이 일어나는 것에 관하여 약속되었던 것을 조금이라도 잊어본 적이 없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있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는 그 아들이 죽음 자체에서도 살아있는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눈을 가리운 사람처럼 자기 아들을 죽일 자에게까지 그가 간 것을 감안해 본다면 그토록 애매한 일에 혼동스럽게 말했다고 추측하는 데에는 혹시 가능성이 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