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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대표적 명필, 추사 김정희는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류 10개를 밑창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썼다. 추사체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모질고 혹독한 시련과 극기의 결과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추사체가 제주도 대정에서 보낸 9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완성되었다는 점,
다산 정약용의 주요저작물이 전남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동안 완성되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적 유산은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문사들이
문방사우와 함께 만들어낸 인고의 산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문방사우, 21세기의 새로운 벗...소설가 박상우님의 Gold & Wise 기고글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나 업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혹독함을 견디어낸
결과라고 합니다. 추사선생님의 업적인 '추사체와 세안도'가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았음은 익히 알고있던 바였지만, 대를 이어 물려준다는 벼루 10개가
구멍이 나고 붓 1,000자루가 뭉땅붓이 되었다니 말문이 막히는군요.
그러고도 추사선생님은 자신의 글씨에 말하기 부족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생 스스로에겐 아직 다듬어야 할 미흡함이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분의 나이 70이었고 이미 한경지를 초월한 인물이었음에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인가요? 기껏 작은 업적에 자만하고, 부족한 실력임에도
스스로 잘난체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향해 벼루가 날라오는 듯 합니다.
고인의 갈고 닦음이 이토록 무서웠고, 혹독함이 서리발 같았기에 후세인이
그나마 기억하고 존경하는게 아닐까요?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향기은 고통을 뚫고 나오는 법임을 추사선생님의 편지에서
다시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는 힘겨움을 고통이 아닌
즐거움으로 승화하는 과정인 듯 합니다.
2011. 3. 7.
다음은 추사선생님에 관한 글이 있어 함께 첨부합니다.
다음카페, 청원미학 역사연구소에서 퍼왔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
1. 천재소년 김정희
인간의 삶은 영욕의 교차로 점철된 긴 노정이니 영화로움과 욕됨의 높이와 깊이가
서로 다를 뿐 어느 것 하나만으로 일관된 삶은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상 유명 인물들의
삶 또한 다를 바 없었으니 때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때로는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신이 전혀 원치 않았던 삶을 살다간 경우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개인의 입장에서는 영화로왔던 삶이 역사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온당치 못하여
국가와 민족에게 커다란 빚을 남긴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던 반면, 개인으로서는 불행하고
욕되었던 삶이었으나 역사상 위대한 유산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인간의 삶은 참으로 오묘하고도 기이한 역정이라 하겠다.

추사 고택의 추사영정-
단아한 조선 선비의 모습이다.
(출처:다움카페 우촌)
조선 후기의 명문가 자손으로 태어나 뭇 백성들에 군림한 고위 관료였으며,
문(文), 사(史), 철(哲)에 박통한 대학자요 국제적인 서예가로서 그리고 해박한
금석학자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추사 김정희(1786~1856)야 말로 영욕의 굴곡이
누구보다 심했던 삶을 삶다간 인물이었다.
추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인생들이 평소 삶에 참으로 겸허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추사는 조선 후기 문예부흥의 절정기였던 정조 10년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임금의 부마 즉 사위 집안이었으니 곧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임금이 끔찍이도 아끼던 둘째 딸 화순옹주의 남편이었다. 영조 임금은
김한신에게 월성위란 작호를 내리는 동시에 충청도 예산 땅에 월성위궁을 지어주었다.
영조는 충청도 53개 군, 현으로 하여금 각각 한 칸 씩을 맡게 하여
모두 53칸의 대 저택을 지어 하사하였다.

충남 예산 추사 고택 솟을 대문
(출처-다음카페 우촌)
증조부 김한신은 사적으로는 장인인 영조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임금의 총애와 화순옹주의 사랑을 세상에 남겨둔 채 김한신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었다.
그러자 화순옹주는 영조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간이나 식음을 전폐하더니
급기야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가고야 말았다.
화순옹주가 남편과 죽음까지 같이한 열녀였을지 모르나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를 저질렀으니 영조의 상심과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영조는 생전에 열녀문을 내려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정조가 고모를 위해 열녀 정려문을 세워주었으니 조선조 창건 400년 이래
왕실에서 첫 열녀가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묘표는 영조가 친히 썼다. 비록 증조부가
요절한 후에도 추사의 집안은 왕실의 비호로 어느 가문 못지않은
명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화순옹주 열녀문-조선조 400년이래
왕실 첫 열녀 탄생이었다.
(출처: 다음카페 우촌)
추사는 큰 집에 양자를 갔는데 양부인 큰 아버지 김노영과 생부인 김노경이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을 뿐 아니라 추사 역시도 급제하여 암행어사와
예조참의 등을 거쳐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당당한 권문세가로 순조(재위 1800~1834년)대 안동 김씨의 세도가
아직 확립되기 전 안동 김씨, 풍양조씨, 달성서씨, 풍산 홍씨, 연안이씨, 반남 박씨,
동래 정씨 등과 연합정권을 이루어 조선 후기 집권 세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추사는 이와 같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사대부가의 법도와 학문을 익히며
평온한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추사의 범상치 않음은 일찍부터 두드러졌으니 그가 불과 여섯 살 때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그의 신동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즉 그 신분이 중인이었으나 정조가 아낀 규장각의 사검서관 중의 한사람으로
당대의 귀재요, 북학파의 대가였던 초정 박제가가 추사의 ‘입춘첩’을 보고서
장래 학문과 예술로 뛰어날 인물임을 알아보고 스승이 되기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박제가는 추사의 스승이 되어 학문을 가르치고 중국 청나라의 유명한
석학들에게 기꺼이 추사를 소개시켰다.
훗날 실사구시의 실학자로서 금석학의 대가가 된 것도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북학파 박제가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북학의-
북학파 실학자이자 추사의 스승이었던
박제가의 사상이 담긴 책이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뿐 만 아니라 체재공이 추사의 ‘입춘첩’을 보고 예언한 말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조정은 서인인 노론과 동인인 남인의 양대 세력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어느날 남인의 수장이었던 영의정 체제공이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이
당시 7살 짜리 추사가 쓴 글임을 알고 추사의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틀림없이 명필로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칠 것이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될 것 같으면 필시 그 운명이 기구하게 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글씨가 아닌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면 귀한 이름을 얻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추사의 전 생애를 돌이켜 보면 결과적으로 체재공의 예언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하겠으니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한 세대를 풍미한 대 정치가요,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체재공 또한 결코 범상한 안목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번암 채제공-
남인으로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명 재상이었다.
(출처:용인문화해설사협회)
추사는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었으나 불과 열 두살 때
큰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연이어 사망함에 따라 졸지에 월성위 집안의 주인이 되었다.
추사가 겪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 후에도 집안의 우환이 계속 이어졌으나
풍파가 가라앉을 쯤인 순조 즉위년이요, 추사가 15살이 되던 해인 1800년
한산 이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박제가가 추사를 제자삼아 맹자가 말한 군자의 3락 중 하나인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기쁨’을 맛보았을 시기가
이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중국석학들과 만난 청년 김정희
추사는 결혼 후에도 20세가 채 되기 전 어머니와 부인의 죽음이란 비극을 겪게 된다.
이 세상에 남은 피붙이라고는 친아버지와 두 동생 뿐이었다. 추사를 실의로부터
구원하여 일으켜 세운 것은 재혼하여 맞아들인 새 아내 (전의)예안 이씨였다.
남다른 금실로 마음의 안정을 찾아 학문에 정진하여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대부
관료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추사가 스승 박제가로부터
발달된 문물제도에 대해서 전해 듣고 그토록 가보기를 흠모했던 연경에 가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즉 추사 나이 24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요즈음의 북경)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 즉 연행사절의 자녀 혹은 형제의 자격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외교사절로 미국에 갈 때 그 아들이나 형제들이 선진국 문물을 견학할 겸
따라감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추사가 연경에 머문 것은 불과 2개월에 불과했으나 추사로서는 천재일우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청조의 수많은 학자들과 인간적, 학문적 관계를 맺었음이
무엇보다 큰 성과였는데, 특히 청조의 대학자 완원과 옹방강과 사제관계를 맺었으니
얼마나 득의에 찬 연경행이었던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재주를 한눈에 알아보고 스승되기를 자처하여 청조의 선진문물을 일깨워주고
학문의 요리를 가르쳐 준 박제가가 신유박해로 인해 유배된 뒤 죽게 된 후인지라
이들과의 만남은 추사가 추구할 학문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었던 것이니
청대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금석학과 경학에 추사가 몰두하게 된 연유라 하겠다.

금석문 탁본(출처: 다음카페 동숭서예)-
금석학은 비석과 같은 돌이나
청동제기와 같은 금속에 새겨진 문자를 해독하는 학문이다.
돌과 금속과 대화하는 학문이라고도 일컫는다.
금석학은 그야말로 문, 사, 철의 인문학과
고고학의 심오한 경지에 이른자 만이
도달할 수 있는 난해한 학문이다.
실증적인 학문을 중시한 청대의
고증학에 심취했던 추사가 일가를 이루었던 분야이다.
추사의 천재성과 학문적 자신감은 연경 도착 직후 “청나라 최고의 학자를 만나보고 싶다”
란 그의 첫 마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겨우 24세의 젊은이가 감히 대국의
석학들을 만나겠다는 것은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으로 질책 받을 수 도 있으나
그만큼 추사가 자신의 학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시 완원과 옹방강은 당대의 인물로 겨우 20대 중반이었던 혈기방장한 젊은이에
불과하였던 추사의 비범함을 대번에 알아보았고 대화(필담)를 할수록 그 학문적
깊이와 명석함에 매료되어 마침내 사제의 연을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완원은 추사가 만나러 오자 신발을 거꾸로 신고 맞았을 만큼 환영해 마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자 중 한자를 따서 ‘완당’ 이란 호를 내림으로써 사제의 연을 굳게 맺었다.
그리고 당대의 명필이자 최고의 서화, 금석 수장가였던 옹방강은 그의 아들과
의형제를 맺게 할 만큼 추사를 진심으로 아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 모든 일들이 스승 박제가 일찍이 연경에 드나들며 애제자 추사의 영특함에 대해
널리 알려 놓았음이 큰 보탬이 되었다.
귀국 시 수많은 서적과 서화첩을 비롯한 자료들을 가지고 온 추사는 청조학과 문물에
몰입되어 마침내 ‘청조학의 제 일인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고증학과 금석학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생을 추사 연구에 바치다시피 했던 자타 공인의 추사 연구
제일인자 후지스카 교수는 추사를 일러 ‘청조학의 정수룰 훤히 꿰뚫고 있었던
오백년래 미증유의 국제적 대학자’로 평가하였다. 추사는 귀국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해서 서신의 왕래 등을 통해서 청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계속하였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위의 것은 복제하여 세운 것으로
원형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나각순제공)-
31세의 김정희에 의해 진흥왕의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순수(巡狩)라 함은 제후 등이 자신의 영토를
연례적으로 돌아봄을 의미하는데,
순수비라 함은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를 의미한다.
추사의 실증적인 금석학의 성과는 그 이전 까지 ‘무학대사의 비’ 혹은 ‘고려 태조의 비’로
알고 있었던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히는 등의 학문적인 업적을 이룩하였다.
금석학은 모든 동양학에 두루 박통하여야 소기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 지극히 난해한
분야인 까닭으로 그 누구도 진흥왕 순수비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부문의 제자 양성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중인이든 양반이든
그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중인이었던 역관으로 연행의 출입이 잦았던 제자
이상적이나 오경석 등은 스승의 학문적 교류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그의 스승 박제가가 중인이었던 영향도 있었으리라. 특히 서화분야에 있어서
당대의 문예계를 주도하여 조선 후기 이후 남종 문인화가 성행케 하였다.
그 결과 풍속화나 민화 등 민족고유 예술의 자유로운 발전이란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추사에게 있어서 모든 학문과 예술적 평가 기준은
청나라의 학문과 예술적 흐름에 부합되는가였다.
마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 미국의 학계나 예술계를 접한 인사들이 말끝마다
“요즈음 미국에서는~”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추사는 조선의 학문이나 서예와 그림을 보잘것 없는 것으로 여긴 경향이 다분하였다.
그래서 추사를 지나치게 모화사상에 경도된 사대적 인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또한 학예 분야에 있어서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시시비비에 있어서는
평소의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절대로 자신의 소신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독선적이고 완고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정희-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혹은 부작란도(不作蘭圖)-
남종문인화는 형사(사실적으로 그림)가 아닌
사의적 그림(마음과 뜻을 그린
추상 혹은 반 추상적 그림)으로
선비들의 높은 학문과 인품
그리고 서예실력이 담긴 서화를 이른다.
불이선란도는 전형적인 남종 문인화로
유마경의 불이법문품의 내용을 제발(題拔)로 썼다.
'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법으로 난을 쳤으니
어찌 사람들이 알아나 보겠으며, 좋아할 수 있겠는가'
라고 쓴글과 '이런 그림은 한번이나 그릴일이지
두번 그려서는 안된다'고 하여
자신만의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 탄생에 대해
대단히 흡족함을 표현하고 있다. '오소산이 보고서
후딱 빼았으니 가소롭다' 란 글이 재미있다.
그런데 20대 초반 까지의 불행을 딛고 입신양명의 평탄한 길을 걷고 있던 추사에게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였으니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누르며
수렴청정을 하던 순조의 총명한 아들 효명세자가 등극하기 전 죽자 경주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 안동 김씨에게 정치판에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
순조말기(재위 1800~1834년)때 부터였다.
사람의 한 평생이 오르막길 만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영민했던 왕 정조가 승하하자 조선왕조는 서서히 말폐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니 각처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중앙정치권력장악을 위한 격렬한 정쟁의 발생이 그 대표적 조짐이었다.
그간 각 가문을 중심으로 연합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던 중앙 정치판도가 안동 김문과
여타 가문간의 힘겨루기로 나타났고, 끈질긴 투쟁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된 외
척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대원군이 부상하기까지 지속되었다

홍경래의 난(1811)-
서북민의 정치적,
사회적 차별에 항거하여 평안도에서 일어났다
.
조선의 말폐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난리로
조선은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위의 그림은 홍경래군과 관군의 전투를 그린
'순무영진도'이다.
반군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정주성이 무너짐으로써
그들의 100일 천하는 막을 내렸다. 홍경래는 전사하고
그외 무려 2000여명의 반란군들이 일시에 처형되는
비극적 사건이었다.(그림 출처:MK뉴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경주 김씨로 안동 김문과 대립각을 세웠던 추사가문도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어려움이 집안의 우환 때문이었다면
장년의 김정희에게 닥친 어려움은 다분히 정치적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먼저 그 시련은 생부 김노경에게 다가왔다. 평안 감사와 육조의 판서를 비롯한
핵심 관직을 두루 거친 김노경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던 것이다. 김노경이
그간 관권을 남용하였으며, 심지어 이조원의 옥사를 공정히 처리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등 직무유기를 일삼았다함이 주된 이유였다.
그리하여 순조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육조와 삼사의 끈질긴 상소로 인하여
마침내 강진현의 고금도(현재의 완도군)에 위리안치되는 유배형을 받았다.
이른바 안동 김문 천하를 만들기 위한 정지작업의 하나였다.

김조순(1765~1832)-
김창집의 4대손으로 약관의 나이에
급제하는 등 재주와 인품이 뛰어났던 인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품이 바르고 진중하였으며
당파싸움을 결연히 반대하여
시파와 벽파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여러 주요 관직을 사양하였으며
국가에 이로운 시책들을 건의 하였다.
그의 딸이 순조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그가 비록 의도치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안동 김문의 척족들이
세도정치를 하게 된 단초를 제공하였다.
추사는 유배된 아버지의 억울함을 왕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사대부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이나 격쟁(擊錚 꽹과리나 징을 두드리며 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격쟁 1 년 뒤인 1833년, 김노경이 유배해서 풀릴 때 까지
추사는 공직에 나아가지 않고 청나라 학자들과 교신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황초령비와 북한산비를 고증하여 판독한 ‘금석과안록’을 저술한 것도 이 시기였다.
김노경이 유배에 풀려난 후 서서히 추사의 삶에 서광이 비취기 시작하는 듯 했다.
즉 아버지가 판의금부사에 제수되고 추사는 대사성과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30년 전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으로 갔었던
연경행에의 부푼 꿈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이 인생이라더니
이미 10년 전에 있었던 윤상도 사건에 추사 부자가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추사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참으로 정권다툼의 집요함과 한치의 자비심도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 하겠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우의정 조인영의 구명상소로
가까스로 사형 대신에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는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추사유배지-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출처: 네이버 카페 추사랑)-
53칸의 월성위 궁에 살다
탱자나무를 둘러친 초라한 초가에
귀양온 추사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래도 사진의 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말끔히 단장되어 있기라도 하지만....
참고로 청미역 회원이신
유란님의 고향이 바로 서귀포시 입니다.
위리안치란 절해고도 안치와 더불어 유배형 중 가장 혹독한 형으로 죄인을 가시나무로
둘러친 집안에 가두고 외부와 일체 격리시킴을 이른다. 소위 신체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악형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시투성이인 탱자나무 등이 많이 자라는
서남해안에 위리안치를 많이 시켰다. 55세의 추사의 행로가 하루아침에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로서의 연경행이 아니라 중죄인이 되어 한양서 수 천리 떨어진 제주도의 가시울타리
둘러쳐친 초라한 초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신분상이나 학문상의 자존심을
유지하기는 커녕 세인들의 비웃음과 통쾌해 함을 외면한 채 어떻게 혹독한 귀양살이에서
연명하여 사랑하는 처자와 재회할 것인가가 천근, 만근의 무게가 되어
추사의 가슴을 짓눌러 왔을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유배 길에 해남의 대흥사에 들렀던 추사는 동국진체의 대가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의 현판 글씨를 보고 친구 초의선사에게
“글씨를 안다는 자가 저런 형편없는 글씨를 대웅전 현판이라고 걸어 놓다니·!” 라며
힐난하여 기어코 ‘대웅보전’이라고 쓴 현판을 떼어버리게 하였으니
추사의 예술적 오만함과 독선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추사는 극단적일 만큼의
모화주의자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문이나 예술을 무시하여
안중에도 없는 듯한 언행을 자주 보였다.
대흥사 대웅보전(전남 해남군 대둔산)-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이 보인다.
대흥사는 절 입구의 단풍이 곱기로 유명하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일지암에 있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하늘지기)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평탄했던 삶이 나락의 경지에 떨어지고 나면 우선은 살아갈
방도를 찾기에 급급하게 되지만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일단 숨을 돌리게 되면 주위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고맙고 감사했던 일들 보다 억울하고 분하고
서운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되고, 현재의 자신의 처지에 비통해하며 자괴감에
몸부림치게 된다. 또한 원수나 경쟁자들이 자신에게 한 악행이나 위선적인 행동보다
친지들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음으로 양으로 덕을 봤던 사람들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
더욱 서운해하고 배신감을 느끼게 됨이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유배되기 전 부마 집안으로 왕실의 후광아래 고관대작들이 즐비한 명문이었고, 자신은
요즈음으로 치면 차관급의 현직 고관이었으며, 절륜한 문예실력으로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스승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덕을 봤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머리를 조아렸겠는가!
4. 세한도에 담긴 사제간의 情
그 모든 통한을 품은 채 완당이 유배된 것은 55세가 되던 1840년 9월(음력)이었다.
정조 사후 긴 암투 끝에 안동 김문이 조정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때와 같이하여
10여 년 전에 일단락 되었던 윤상도 사건(1930년 윤상도가 호조판서 윤종호, 자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로 탄핵하였으나 군신 간을 이간질시키는 불충이라 격노한
순조 임금이 추자도에 윤상도를 위리안치한 사건)의 불씨를 다시 지펴 아버지 김노경은
사약을 받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던 윤상도 부자는 서울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가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가 넘실대는 제주해협의 배 위에서 추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평소, 이처럼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처참한 유뱃길에 올라 한창
경륜을 펼 자신의 오르막 인생에 길고도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질 줄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추사고택의 백송
25세의 추사가 자제 군관으로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연경에 갔다가 백송의 씨앗을 얻어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다.
그로 부터 정확히 30년 후
자신이 험난한 유뱃길에 오르리라고
상상인들 하였겠는가! 인생의 무상함이여 !!
백송은 우리나라에는 몇 그루가 없는데
몇 년전 고양에서 본 적이 있다.
서울의 종로와 여주쪽에도 있다고 들었다.
등걸이 썩어 죽어가는 백송을 보니
200년의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 1848년 12월이었으니 정확히 8년 3개월간의 제주도
대정현에서의 유배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졸지에 당한 유배형으로 금실좋기로
소문났던 정숙하고도 지혜로운 부인 예안 이씨와의 생이별의 아픔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터이고, 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추사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무엇보다 인간관계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을 것이다.
즉 일기예보도 없었을 뿐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범선에 몸을 의탁해야 했던 당시의 제주도
뱃길은 목숨을 건 여정이었음으로 인한 단절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대역죄인과의
교류로 인해 신상에 미칠 해를 우려하여 그간의 인간관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자신을 외면함으로 인한 배신감과 상실감이 무엇보다 추사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가 인덕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구해 준
친구가 있었고, 지인 중 세 사람이나 추사와의 인연을 귀히 여겨 신변의 안위를
개의치 않고 추사를 찾았으니 동갑내기 친구 초의선사 장의순과,
제자 소치 허련(후에 허유로 개명)그리고 역관인 우선 이상적이었다.

소치 허련(1809~1892)-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를 흠모하여 허유로 개명하였다.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와 사제의 연을 맺고 끝까지 제자의 도리를 다한
추사가 가장 아꼈던 제자이다. 추사는 압록이동에서는
소치를 따를자가 없다고 했을 만큼 그의 재능을 아꼈다.
그의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그리고 일족인
의제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예향 호남의 거목이다.
27세 때 해남의 녹우당에 건너간 진도 출신인 소치 허련은 초의선사 장의순의 소개로
추사에게 서화를 배웠는데, 모두 세 차례 스승을 찾아서 1년 6개월여를 제주도에서 함께
기거하며 스승을 모셨다. 시문에도 능하였던 제자 이상적은 전후 6차례나 추사를 찾았다.
역관이었던 그는 청나라 연경에의 왕래를 통해 알게 된 조선과 청나라 정세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청나라의 희귀 서적과 각종 필요 물자들을
조달해 주었다. 그러니 제자 이상적에 대한 추사의 고마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고마움이 크면 무언가로 그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
‘국보 제 180호’ 세한도는 그렇게 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세한도를 통해서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과 추사의 인간적 외로움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을 조선 선비의 깐깐하고도 간결한 필체와 그림으로
때로는 하소연 하듯, 때로는 꾸짖듯 그려내고 있다.
추사가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건넨 것은 추사가 59세가 되던 해로, 유배된 지 5년 째인
1844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면 우측 상단을 보면, “우선(이상적의 호) 보시게나”
라며 사제간의 정과 의리를 지켜준 사랑하는 제자를 다정히 부르며 자신의 그림과
글에 표현된 바를 감상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리고 노송 1그루와 잣나무 3그루
그리고 창이 뻥 뚫린 한 채의 집을 그려 놓았다.
일체의 혼잡한 필선을 삼가고 마치 담백함과 고아함을 귀히 여기는 조선 선비의
자존심 처럼 최소한의 먹으로 갈필을 사용하여 최대한 간결하고도 깐깐하게 그렸다.
문인화를 화원들이 그린 그림과 구별하여 사의화(寫意畵) 즉 선비의 마음과 뜻을 그린
그림이라 한다. 비록 화원들처럼 전문적인 그림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선비들의 고
결한 뜻을 표현한 글을 곁들인 그림으로 그 품격 면에서는 오히려 우위에 있다고 여겼다.

소치 허련-
추사 김정희 상 추사가 유배지였던
대정현의 앞 바닷가를 거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총기가 서린 갸름한 눈매에
귀티가 나는 장년 김정희의 모습이다.
추사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바닷가에 나가 바람을 쐬인다고 썼다.
위리안치였다고 하나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었던 모양이다.
다 사람사는 세상 아닌가!
문인화를 이처럼 이해할 때 세한도야 말로 전형적인 문인화로 그토록 간결한 필선으로
냉기가 감도는 유배지의 을씨년스러운 황량함과 뼛속 깊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너무도 절절히 표현한 걸작이라 하겠다. 그래서 세한도를 역대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하여 국보로 지정하였다.
세한이라 함은 음력설을 전후한 일년 중 가장 추운 절기를 의미하는데, 굳이 세한도란
제목을 붙이지 않았어도 엄동설한의 차가움이 화면에 배어있다. 집 주위의 휘어진
노송과 잣나무 사이로 차가운 냉기를 품은 스산한 겨울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혹한에도 기세등등한 네 그루의 송백에 둘러싸인 덩그런 한 채의 집은 인간의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빈집으로 보이는데 세상의 영화로움이 모두 사라진
추사의 텅 빈 가슴속을 표현한 것일까? 초가집의 둥근 봉창은 조선의 것이 아닌
중국풍이어서 추사의 경도된 모화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감상자로 하여금 인생과 사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케하고 느끼게하는
그림을 좋은 그림이라고 할 때 세한도야 말로 인생의 아픔과 인간적 의리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걸작 중의 하나라 하겠다.

김정희-세한도 국보 제180호,
세한의 냉기가 느껴지는가?
이 그림처럼 마음이 허허로와 져 본적이 있는가?
그것도 극도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배신감에 뒤범벅이 되어서....
오른쪽 아래의 유인(遊印)은 장무상망(長毋相忘)
즉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마시기를
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외롭고 고독한 자가 쓴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이다.
그런데 이 세한도가 국보로 까지 지정된 데는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추사체로
길게 쓴 발문의 존재를 빠트릴 수 없다. 그야말로 서와 화의 환상적 만남으로
추사가 그토록 강조한 문기(文氣) 즉 서권기(학문의 연마를 통해 느껴지는 학식과 인품)와
문자향(글씨에서 엿보이는 조형미)이 마음껏 발휘된 그림이라 하겠다.
5. 추워진 연후에야 송백의 프르름을 알고.
동양 학문의 특징 중 하나는 노소가 같은 내용의 교과서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공,맹의 가르침인 유학이 오랜기간 통치원리였던 동양에서는 유학사상이 집약된
경전인 사서오경을 기본이자 궁극의 교과서로 생각하여 노소가 모두
그 문구를 읽고 외워 인간의 도리와 우주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깨닫고자 하였다.
같은 내용을 접하였다고 하나 깨달음의 깊이나 이해의 정도는 천차만별이었음은
물론이었으나 그 만큼 유교경전은 심오한 철학적 이치를 담고 있어 평생의 학문으로 삼
을 수 있었다는 의미도 되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같은 내용을 공부한 결과
그 가치관의 획일화란 현상도 피할 수 없었다.

공자(기원전 551~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주나라(동주시대) 시대의 노나라 사람이다.
그의 가르침은 어떤 종교나 사상 보다 동아시아 사람들의
의식이나 행동양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억불숭유정책이 국시였던 조선조의 경우 공자의 사상은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의 정당성의 잣대요 근거였다.
역대 조선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더불어 공자를 위한
문묘가 있었음이 너무도 당연시 되었다.(출처-한겨레 신문)
조선시대야 말로 신유학이라 불리운 성리학의 나라였고 국가의 관리로 과거에 합격하여
입신양명하기 위해서는 유교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문, 사, 철에 박통한 대학자로 유교를 비롯한 불교와 도교사상에 까지 조예가 깊었다.
문인화란 것은 이러한 선비들이 자신의 마음에 서린 뜻이나 회포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선비들은 문인화를 그림에 있어서 동양고전의 내용 중
자신이 처한 바와 가장 잘 부합되는 바를 인용하여 화제로 쓰곤 하였다.
세한도가 국보로서 지정되어 소중한 문화재가 된 것은 추사체로 유교의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 가운데 하나인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과
동양 제일의 사서인 사기(史記)의 저자 태사공(사마천)의 말을 인용하여 쓴 글이
그림과 하나 되어 세상의 인심과 작자가 처한 처지를
너무도 적확(的確)하게 표현하였음에 있다.

김정희-불기심란도
추사의 난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TV 진품명품에서 10억원의 감정가를 기록하였다.
불기심란이라 함은 난을 칠 때에는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데서(不欺心) 부터
시작하여야 된다는 의미이다.
고고한 선비로서의 추사의 예술적 소신을 표현한 것으로
서자인 아들 상우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완당 최고의 걸작인 동시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인 세한도의 발문을
의역하여 보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지난해 ‘만학,대운’이란 두 글을 부쳐오고, 금년에 또 다시 ‘우경문편’이란
글을 부쳐왔으니, 이 글들은 모두 이 세상(조선)에 있는 글이 아니고, 천 만리 먼 곳에서
사서 가져 온 곳으로 해를 거듭해서 구한 것이지 한 번에 구입한 것이 아니로다.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쫓는데 모든 힘과 마음을 쓰고 있는데,
자네는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쫓지 않고 바다 밖의 초췌히 마른 늙은이를 따름이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를 추구하는 것과 같이 하는구려.
(자신들의 이익 쫓기에 급급하여 돌변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사의 서운한 마음과 이상적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순로향
예서체로 쓴 글로 진나라의 장한이란 관리가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를 그리워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글이다.
세상의 명리보다 모든 것을 훌훌털고 향리로 돌아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연과 벗하며 노년을 보냄을
동경하였던 추사의 마음이 잘 드러난 글이다.
태사공(사기의 저자 사마천 司馬遷-흉노에게 패한 이릉 장군의 억울함을 극구 변호하다
한 무제에게 거세형을 당하는 치욕을 당하였으나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남아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편찬하였다)이 말하기를 ‘권리로 인해 합한 자들은 권리가 다 해버리면
그 교류가 소원해져 버린다고 했는데, 자네 역시 그러한 세상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있는 한 사람임에도 초연히 자신을 그러한 권리 밖으로 뽑아 내 버리다니 나를 대해옴이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바라고서 한 것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태사공이 한 말이
틀렸단 말인가? (강조법으로 반문하고 있다.)
공자님 께서 이르시기를 ‘ 날씨가 차가와진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늦게
시듬을 안다’ 고 하셨으니,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일관되게 푸르러
시들지 않는 것으로, 춥기 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이요, 추워진 이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이지만, 성인(공자)께서는 특히 추워진 이후의 송백을 이름일세.
자네가 나를 대함이 이전(유배 전)부터 더 보태어진 것도 없고,
이후(유배 이후)로도 덜 해 진 것도 없네 그려”

김정희-고사소요도
추사는 난을 주로 쳤는데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으로는 유일한 그림이다.
추사가 일찌감치 그림 속의 선비처럼
초탈한 삶을 살았더라면
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떠밀려 8년이란 험난한
유배생활의 비극을 겪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사가 쓴 발문 중 핵심은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즉
“날씨가 차가와진 연후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늦게 시듬을 알 수 있도다”
라는 대목이다. 추사와 같이 인생과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자부했던 인물도 세상 인심의 비정함과 간사함을 톡톡히 맛 본 이후에야 비로소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음을 잘 알려 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어찌 범인들이 인생을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할 수 있겠는가! 추사처럼
자존심이 강했던 선비가 스스로 이렇게 섭섭한 마음을 제자에게 토로하자면 얼마나
수많은 인물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떠올리며 때로는 증오심과 배신감에,
때로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날 밤을 지새웠겠는가!
이상적은 추사로부터 세한도를 받고 감격하여 감사의 편지를 올린 후 동지사를
수행하는 길에 연경으로 가져가 청나라의 학자들에게 보여 빼어난 문인화란 칭송과
함께 16명의 석학들로부터 찬문을 받았으니 그 전체길이가 장장 13.88m나 되었다.
세한도야 말로 국제적 석학들이 간여한 합작도라 할 귀한 문화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 귀한 문화재가 몇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일제 강점기 때 경성제대 교수이자
최고의 추사 연구가였던 일본의 후지스카 교수가 입수하게 되었다.
<옮긴글>
